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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김광균 <은수저>
*이 글은 필자이신 황현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현대시다락방에서 옮겨둡니다. 귀한 원고를 주신 황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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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제9화
김광균의 학교와 정거장
연제 제7회에서였던가, 김종삼의 시 몇 편을 읽던 끝에 그리스의 시인 야니스 리초스의 「목마」에 관해 언급했었다. 끝내 나타나지 않은 그의 시선집을 친절한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복사하여 보내주었다. 기억이란 믿을 것이 못된다. 그 시는 「목마」가 아니라 『부재의 형태』라는 연작시의 제30번 시였다. 다행하게도 시집은 이 연작시를 고스란히 수록하고 있다. 문제의 30번 시를 불어에서 번역하여 적는다.
어린이 놀이터에, 작은 요람 하나 비어 있다.
루나 파크에, 목마 하나 기수 없이 서 있다.
나무 아래, 꿈에 잠겨, 그림자 하나 앉아 있다.
빛 속에, 실현되지 않는, 먼 침묵 하나.
그리고 언제나, 목소리들 웃음소리들 한가운데, 간격 하나.
연못 위에서, 오리들이 잠시 멈춘다,
아이들의 어깨 위를, 나무들 저너머를 바라본다.
한 아이가 말없이 지나간다, 보이지 않는다.
아이의 슬픈 발자욱소리만 들린다. 아이는 오지 않는다.
말 하나가 메리고라운드에서 달아나,
눈을 비비고 줄지어 선 나무들 뒤로 사라진다.
아마도 숨어 있는 소녀 곁에 동무하려 가는가,
고적한 저녁 어둠 속에, 달의 세 번쩨
네거리에,
가로등도 꺼진 저 은빛 막다른 골목에.1)
그 시를 서투르게, 그것도 중역으로 이렇게 옮겨 놓고나니 또 하나 생각나는 한국시가 있다. 김광균의 「은수저」이다.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디려다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2)
두 시는 모두 아이를 떠나보낸 아버지의 심정을 말하고 있다.3) 한국 시인에도 그리스 시인에게도 이 세상에는 매우기 어려운 빈 자리가 있다. 아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이가 없는 것이다. 두 아이는 모두 그 자리를 채우는 대신 다른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부재의 자리를 바라보는 두 아버지의 시선이 끝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리초스에게서 빈 자리는 언제까지나 빈 자리이며, 빈 자리가 그 비어있음을 지킴으로써 <부재의 형태>가 된다. 아이가 앉았던 요람이 비어 있고 그가 탔거나 타야 할 목마에 기수가 없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 속에는 그 아이의 것이 빠져 나간 빈 간격이 있다. 그림자이며 침묵인 그 아이는 말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는 그 부재로 이 세상과 관계한다. 떠난 아이는 요람과 목마 위에, 빛과 웃음소리들 속에, 이 모든 존재들 사이에 부재의 형태를, 또는 형식을 만들었다. 아이는 보이지 않으나 슬픈 발자욱소리는 들린다. 그것은 아이의 짧은 생명이 이 세상에 남긴 작은 파장이다. 연못의 오리들은 이 파장이 자기들을 스쳐갈 때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들어 나무들 뒤를 바라본다. 살아 있는 것들 속에도 이렇게 부재가 동작의 한 형식으로 끼어든 것이다. 말은 사라진 소녀를 찾아 "달의 세 번쩨 네거리에" "은빛 막다른 골목"으로 가는데, 이 말은 물론 말이 아니라 목마이며, 말의 형식이다. 소녀는 부재의 세계에 존재의 형식을 얻음으로서 이 존재의 세계에 부재의 형식으로 남는다.
김광균에게도 빈 자리가 있다. 저녁밥상에 애기가 없으며, 은수저는 있으나 은수저의 주인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어 있지 않다. 밥상 앞의 방석에는 아이 대신 "한쌍의 은수저"가 놓여 있다. 부모의 마음 속에서는 가버린 아이가 그 놓아둔 은수저를 들고 상상의 식사를 한다. 은수저 끝에는 눈물이 고이는데, 그것은 아이가 그 자리에 왔다는 표시이다. 이 아이가 모습을 오래 감추지는 않는다. 애기는 한밤중에 바람을 몰고와 웃고, "방 속을 디려다" 보고, 들창을 여닫는다. 이 애기도 리초스의 아이처럼 먼 길을 가는데, 맨발로 울면서 간다. 애기는 처량하지만 구체적이고 생생한 존재를 지녔다. 리초스는 제 아이를 나무 그늘과 구별되지 않는 그림자로 보고, 김광균도 그림자의 視像으로 시를 끝맺는다. 그러나 두 그림자는 다르다. 리초스에게서 그것은 한 몽상의 그림자이지만, 김광균에게서는 그림자는 한 육체가 거기 가고 있음을 증거한다. 그에게서 부재의 자리는 연이어서 다른 존재로 채워진다. 리초스가 부재에 형식을 부여하였다면, 김광균은 거기에 내용을, 그러나 빈 내용을 부여한다.
어느 쪽이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더 절절하게 나타내는지에 관해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우며, 그것을 여기서 따질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비어 있는 내용이 철저한 방법적 사고를 회피하게 하고 형이상학적 사고를 어렵게 한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말해두자.
이 빈 내용은 김광균이 쓴 거의 모든 시를 특징짓는다. 『瓦斯燈』만큼 삶의 공간이 철저하게 배제된 시집을 다른 데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거기 나오는 건물들은 바닷가의 노대이거나 시계탑이며, 교회당이거나 성당이며, 종루이거나 분수이다. 그것들은 모두 <외인촌>이며 <신촌>이다. 그의 꽃은 아네모네와 카네이션과 해바라기이다. 자연 풍경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호수와 해변과 하이얗거나 어두운 갈대밭과 와 "어느 먼― 도시의 上弦"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궁핍한 현실의 부재감 속에 기향한 것들이며, 그 내용은 물론 비어 있다. 그 풍경들을 위해 삶의 풍경이 배제된 것과 똑같이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김광균이 자신의 시에서 삶의 구질구질함을 철저하게 몰아내려고 했을 때, 그는 호사스러운 빛과 질서가 지배하는 어떤 <정갈한 예술>의 개념을 실천하려 했을 것이 분명하며, 그 시도에서 상당한 정도로 성공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성공은 공간의 차원에서도 시간의 차원에서도 원근감이 없는 평면의 그림 위에서만 가능했다. 말하자면 그는 현실의 어떤 소박한 삶보다도 난이도가 더 낮은 작업에서 성공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시법의 하나로 이른바 <공감각적 표현>의 모범적인 예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개별 감각들의 경계를 허물고 그것들을 입체적으로 혼효 확장하는 공감각은 초감각적인 인식능력의 한 입구가 된다. 그러나 「外人村」에서 듣는, 다시 말해서 저녁빛이 "하이얗고" 바람은 가볍게 불고 "밤새도록 가느다란 별빛이 나리"는 식으로 자연마저 특혜를 베푸는 것 같은 이 공간에서 듣는, 저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보다 더 납작한 것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감각의 장벽을 부셔 어떤 다른 세계에 대한 예감에 이르러는 노력이 아니라, 거꾸로 주어진 문화적 코드에 자신의 육체적 감각능력 전체를 복종시킨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김광균을 탓할 수만은 없다. 보들레르 같은 사람이 공감각을 말하면서 깨뜨리거나 떠나고 싶어 했던 자리가 김광균 시대의 우리에게는 그나마 쌓아올려야 할 자리가 아니었겠는가. 김광균은 삶이 곤궁할 뿐만 아니라 모욕받는 시대에 살았다.
김광균의 그 <정갈한 예술>은 『寄港地』에 가면 벌써 타격을 입고 위기를 겪는다. 이 시집에는 세 개의 죽음이 있다. 예의 아이의 죽음의 있고, 한 문우와 열 여덟 살 누이의 죽음이 그것이다. 살아야 할 날들을 남기고 간 아이의 죽음과는 달리, 살았던 날들을 안고 가버린 다른 두 죽음에 임해서는 부재의 자리를 빈 내용으로 채우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감수성은 무디어지고 언어는 산뜻함을 잃고 산문화한다. 그가 남긴 시들 가운데 유일한 산문시는 누이에게 바치는 弔歌의 하나인 「水鐵里」이며, 그의 가장 짧은 시는 문우의 무덤에 부치는 「忘憂里」이다. 그가 이렇게 <시>를 포기했을 때 이 땅의 지명이 적극적인 가치를 지니고 등장한다. 그러나 이 역시 사람이 사는 자리는 아니다.
김광균의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마도 『思鄕圖』4)의 몇 편 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思鄕圖』에는 <사향도>라는 중간제목으로 묶인 시 5편과 다른 시 2편이 들어 있다. <사향도>에서 2편을 뽑아 적는다.
停車場
긴― 하품을 吐하고 솠던 낮車가 겨우 떠난 뒤
텅 비인 정거장 앞마당엔
작은 꽃밭 속에 電信柱 하나가 조을고 섰고
한낮이 겨운 양지 쪽에선
잠자는 삽살개가 꼬리를 치고
지나가는 구름을 치어다보고 짖고 있었다.
校舍의 午後
時計堂 꼭대기서
下學종이 느린 기지개를 키고
白楊나무 그림자가 校庭에 고요한
맑게 개인 四月의 午後
눈부시게 빛나는 유리창 너머로
우리들이 부르는 노래가 푸른 하늘로 날아가고
어두운 敎室 검은 칠판에
날개 달린 「돼지」가 그려 있었다.
첫 시의 <정거장>은 물론 시골 역이다. 무료하리 만큼 한가한 풍경이다. 여기에 특별히 헛된 것은 없다. 그러나 의인화되어 긴 하품을 토하는 기차와 작은 꽃밭에서 졸고 있는 전신주가 한 문명의 위협적인 성격을 완전히 지운다. 삽살개와 꽃은 있지만 사람은 없다.
두 번쩨 시의 학교 풍경 역시 한가하다. 시간은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김광균의 전형적인 시간인 오후다. 이 오후는 규율에서 해방된 학생들의 시간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삶의 노역에서 벗어난 사무원들의 시간이리라. 마지막 구의 "돼지"에는 시인이 특별히 낫표를 둘러두었다. 이 시에 감동스러운 면모를 주는 것도 이 "날개 달린 돼지"이다. 돼지가 그것을 그린 학생들이라면 날개는 교육의 이상일 터이다. 돼지는 둔하다. 그 미욱한 뭄에 달린 날개는 지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을 하늘로 끌어 올릴 것이다. 여기에서는 삶의 구질구질함이 <정갈할 예술>의 드높은 이상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이다. 김광균은 그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깨끗하고 단정한 곳은 시골 국민학교와 시골 정거장이라고 말하는,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고은의 어떤 짧은 시가 있다. 학교와 정거장은 우리가 거기서 컷기 때문에만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와 기차역은 개화가 시발된 곳이며 우리의 삶에 최초로 근대적 <형식>을 소개한 곳이다. 교복을 입고 기찻길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60년대까지 시골 중고등학생들의 풍습이었고, 그것이 유행이 된 적도 있었다. 학교와 기차는 고향정서와 이국정서를 이상한 방법으로 혼합시켰다. 근대화와 식민지화의 관계를 잘 설명하면, 한국의 근대문학도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 Yanis Ritsos, Etude, choix de textes et bibliographie par Chrysa Papandréou, «Poètes d'aujourd'hui», Edition Pierre Seghers, 1968, p. 130에서 번역.
2) 『金光均 詩全集 瓦斯燈』, 槿域書齋, 1977, p. 80.
3) 김광균의 「은수저」는 1947년 정음사에서 발간한 『寄港地』에 처음 발표되었다. 시인은 발문에서 이 시가 "8.15後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야니스 리초스의 『부재의 형태』가 처음 발표된 것은 1958년이다.
4) 이 시집은 분량이 작아 단독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1957년 張萬榮의 珊瑚莊에서 간행된 『黃昏歌』에 제3부로 수록되었다가, 1977년 근역서제 발간한 시전집에서 독립시집으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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