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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진흥원' 2003년 문예연감 '시평'
'문화예술진흥원' 2003년 문예연감 [시평]
http://artsonline.arko.or.kr/yearbook/2004/munhak/1-03.html
시 : 문명적 조건과 싸우는 다양한 내면 풍경들
나희덕
1. 완성도와 개성 두루 갖춘 시집들 많아
2003년 한국시의 성과와 한계를 선명하게 갈무리하기는 어렵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뚜렷한 쟁점이나 전망없이 개인성의 탐구가 각개전투처럼 이어지고 있다는 데 크게 이견이 없을 듯하다. 이러한 현상은 몇 개의 담론으로 포괄할 수 없는 다양한 시적 스펙트럼을 낳았다. 그러나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대응이 갈수록 약화되어 간다는 지적이나, 개인성의 탐구에 있어서 방법적인 변주나 확장 이상의 본질적인 새로움을 발견하기는 어렵다는 목소리 또한 적지 않게 들려온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지난 한 해의 성과를 정리하면서 우선 완성도와 개성을 두루 갖춘 시집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가 원로부터 신인에 이르기까지 세대별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처해 있는 문명적 조건과 그로 인한 고통스러운 실존을 성찰의 언어나 몸의 언어로 표현하는 시들이 있는가 하면, 지나간 역사를 새로운 방식으로 내면화하는 시들이 있다. 또, 시적인 자의식과 언어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미학적 모험을 감행하는 시들도 있다. 물론 실험적인 경향보다는 내향적 사유나 서정으로의 회귀가 우세한 편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을 바라보고 형상화하는 방식이 그만큼 우회적이고 다각화되어 가는 징후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 시의 위기 운운해 온 것이 실제적인 작품 생산의 위기보다는 시와 연관된 비평담론의 약화나 공백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는 대중 소비사회에서 시가 차지하는 왜소한 자리에 대한 불안이나 소외감을 지레 과장한 풍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위축과 소외를 말하기에는 엄청난 양적 팽창이 의아스러울 정도다. 수십 종에 달하는 시잡지들이 신인과 작품을 양산해 내는 이러한 물량주의는 자기복제나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지만, 어항이 크면 대어(大魚)도 많은 법이듯 양적인 풍요가 질적인 풍요의 기본 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전체적인 지형도를 제한된 지면에 일일이 그려 보일 수는 없지만, 몇 가지 경향을 통해 그 흐름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시간과 죽음에 대한 성찰
흔히 시를 젊음의 장르라고 말하지만, 우리 시단의 원로나 중진 시인들의 왕성한 활동은 이 말을 무색케 한다. 황동규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정현종의 「견딜 수 없네」, 김광규의 「처음 만나던 때」, 임영조의 「시인의 모자」, 최승호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정일근의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등은 문명적 삶에 대한 원숙한 사유를 보여 준다. 특히 이 시집들을 관류하는 주제인 ‘시간’과 ‘죽음’의 문제는 현대의 속도전 속에서 시의 존재 방식을 묻는 이들에게 불가피한 성찰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황동규에게 있어서 ‘죽음’은 오랫동안 천착해 온 주제로서, 이번 시집은 그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시인은 죽음을 죽음 자체로 긍정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지우고자 한다. 죽음에 대한 부정도 긍정도 없는 상태, 비우겠다는 의지마저 비운 상태, 바로 이 역설이 ‘비움’의 상투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점이다. 예를 들어,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벗어나 / 가볍게 떠돌리. / 느린, 늘인 걸음으로.”(<해마(海馬)>)라는 구절을 보자. 이러한 자유로움은 안과 밖, 선과 악, 미와 추, 삶과 죽음,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지우고 사물을 그 자체로 바라볼 때 생겨나는 무심(無心)의 경지다. 그 마음의 허공을 황동규는 ‘홀로움’(<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이라는 조어(造語)로 부르고 있다.
정현종의 「견딜 수 없네」는 ‘시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다방면으로 개진하고 있다. 시간은 어느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심연을 알 수 없는 시간은 욕망과 더불어 자가 증식한다는 점에서 슬픔의 근원이 된다. 그래서 시인은 “견딜 수 없네. / 흘러가는 것들을 / 견딜 수 없네. / 사람의 일들 / 변화와 아픔들을 / 견딜 수 없네”라고 탄식한다. 그러나 시간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으니 “시간의 바깥”(<끝날 때는>)에 이르기 전까지 모든 존재는 “시간의 안쪽”에 머물러야 한다. 한편,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는 것도 시간을 통해서이다. 시인이 “네 눈의 깊이는 네가 바라보는 것들의 깊이”(<네 눈의 깊이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시간의 깊이’이기도 하다.
김광규와 임영조는 좀더 일상적 화법으로 시간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산문학상 수상작인 김광규의 「처음 만나던 때」는 간결하고 담박한 문장으로 문명에 대한 유쾌한 통찰을 들려준다. 의도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출생과 아기의 옹알이로 시작해서 죽음에 관한 시편들로 끝을 맺는 시집의 구성도 흥미롭다. 인간의 생애 또는 문명의 역사를 압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을 반추하면서 시인은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경어로 말을 걸었던 때로 / 처음 만나던 때로 우리는 / 가끔씩 되돌아가야 합니다”(<처음 만나던 때>)라며 훼손된 자아와 언어를 돌아보는 반성적 계기를 권유하는 것이다.
임영조는 간명한 언어로 일상을 묘사하는 동시에 죽음을 향해 한층 다가선 세계를 보여 준다. 그는 죽음을 말할 때조차 특유의 능청과 해학으로 관념의 더께를 가볍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을 ‘방법적 비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그의 때이른 죽음으로 이 시집은 결국 유고시집이 되고 말았다.
정일근의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에 두드러진 태도 역시 ‘비움’이다. “나는 이제 막 글을 배운 초등학교 1학년처럼 / 연필 끝에 침을 발라 열심히 받아쓰고 있다 /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에 남기는 신의 말씀을”(<자연(自然) 받아쓰기>)이라는 구절처럼, 시인은 도시를 떠나 은거하면서 자연을 향해 겸허하게 귀를 기울인다. 그런 점에서 정일근은 자연이라는 신전에서 비의적 언어를 받아적는 상징주의자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신=자연, 인간=도시’라는 도식이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는 그의 시가 낭만적 합일에 그치지 않으려면 “시퍼렇게 날 선 작둣날 위에 앉아”(<죽비(竹비)>)있는 것 같은 긴장이 필요할 것이다.
최승호의 문명에 대한 태도는 한결 복잡해 보인다. 도시적 일상의 어두운 그림자를 노래하던 그의 초기시를 ‘부패의 상상력’이라고 부를 때, 이번 시집에는 ‘발효’에 대한 기대가 들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발효를 가능케 하는 것은 성민엽의 표현처럼 ‘반죽의 상상력’이다. 최승호에게 있어서 세계는 “물렁물렁한 회반죽덩어리”(<비 분류법>)이며, 거기에는 이미 자연과 반자연, 생명과 죽음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점착의 물질성을 통해 문명과 자연에 대한 이분법적 도식을 넘어서고자 한다.
3. 고통을 말하는 몸의 언어
성찰의 언어가 ‘초월’을 향해 있다면, 몸의 언어는 ‘견딤’ 속에 머물러 있다. 그들의 세계는 여전히 비명과 신음이 들려오는 곳이다. 이성복의 「아, 입이 없는 것들」은 제목이 말해 주듯이 자신의 고통을 말하거나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존재들에게 바쳐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특유의 아우라를 지켜 온 시인이 10년 만에 낸 시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뜨거운 관심과 화제를 모았던 이 시집은 125편이 일련번호로 연결되어 있다. 각 시편들은 독립적이면서도 시인이 걸어온 시와 삶의 여정을 하나의 플롯으로 엮어서 보여 준다. 그 플롯의 질서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치욕과 사랑 사이를 오가며 그려 내는 자장(磁場)이 아프게 만져진다.
그에게 고통은 욕망을 지닌 존재로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내면의 상흔과도 같은 것이다. 꽃이든 새든 사람이든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 가득한 것들”(<아, 입이 없는 것들>) 아닌가. “오, 육체가 없었으면 춥지 않았을 것을”(<저 안이 저렇게 어두워>)이라는 시인의 탄식처럼, 육체를 지닌 한 상처는 끝없이 덧날 수밖에 없다. 시인은 그 덧나는 상처를 따뜻한 혀로 핥아 주며 그들의 입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성복은 외국시의 구절을 인용하고 그 텍스트를 통해 다양한 말의 풍경을 찾아가는 또다른 시집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을 출간하기도 했다.
장옥관의 「하늘연못」에는 극단적인 두 세계가 가로놓여 있다. <살구꽃 필 때>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다>처럼 생명의 환희와 우주적 관능을 아름다운 이미지로 빚어낸 시들이 있는가 하면, 고통과 폐허의 시편들도 적지 않다. 반생명적 현실과의 대면을 고통스럽게 치러 내면서 얻어졌을 <비명>, <파리떼> 등은 그의 시에서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어두운 이미지들이다. 시인은 두 세계를 한 편의 시 속에 화해 또는 결합시키려는 노력을 보여 주기도 한다.
한 세대 아래인 조은과 이윤학이 보여 주는 고통의 표정은 어떤 것인가. 조은의 「따뜻한 흙」은 낮지만 견고한 목소리로 삶의 비애를 노래한다. “상처 많은 남의 개를 집에 들여다 함께 겨울을”(<겨울 한 철>) 나면서 시인은 고통스런 존재와의 동거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시인의 몸은 수많은 존재들의 고통을 받아서 감싸안는 ‘따뜻한 흙’에 가깝다. 그런데 그 따뜻함 속에는 삶에 대한 도저한 비극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고요함 속에는 격렬한 몸짓이 숨겨져 있다. 마치 열어놓은 창으로 우연히 들어와 “불덩이처럼 방안을 날아다”(<한 번쯤은 죽음을>)니는 새처럼. 그러나 시인은 “저 지옥의 순간에서 단번에 삶으로 솟구칠 / 비상의 순간을 보”려는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 바로 그 순간만이 시가 어두운 현실을 비추는 구원의 빛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자화상을 수사적 장식 없이 견고한 이미지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이윤학의 「꽃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도 비슷하다.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이 시집은 변화와 치유의 조짐이 보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일상적 풍경을 섬뜩한 내면과 결합시켜 온 시인은 그 극단의 지점에서 천천히 선회하고 있다. 그는 “무논에 꽂힌 한 자루 삽”을 바라보면서 “흙에 꽂힌 삽날의 깊이만큼 / 삽의 모습을 알아채지 못한다”(<삽>)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시선이 흙 속에 자신의 모습을 새겨넣는 데만 열중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내 마음 속 歡呼는 / 너무 오래 갇혀 지냈다”(<첫눈>)는 고백을 들으며, 그 새로운 소리들의 출감을 기대해 본다.
4. 역사를 내면화하는 몇 가지 방식
역사적 전망이 부재한 시대에 민족문학 진영에 속해 있던 시인들은 어떤 모색을 하고 있을까. 1990년대를 통과하면서 다소 침체를 겪은 게 사실이지만, 이 시기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변화된 현실을 제대로 수용하고 새로운 미학적 기반을 만드는 모색기였음을 다음의 시집들은 증거하고 있다. 이시영의 「은빛 호각」, 최두석의 「꽃에게 길을 묻는다」, 최영철의 「그림자 호수」, 김정환의 「하노이 서울 시편」, 백무산의 「初心」, 하종오의 「무언가 찾아올 적엔」 등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중견시인들의 모색의 방향은 각기 다르다. 서정성이 압축된 단시를 즐겨 써 온 이시영이 ‘이야기’ 형식으로 역사 뒤편의 장면들을 끌어낸다면, 이야기시에 대한 선구적 탐구를 보여 준 최두석은 ‘노래’ 쪽으로 기울면서 생태적 상상력을 펼친다. 최영철이 ‘일상적’ 소재를 통해 시대의 풍속을 육화하는 데 주력한다면, 김정환은 ‘여행자적’ 시선으로 역사의 풍경을 포착해 낸다. 백무산과 하종오는 ‘명상적’ 태도로 지나간 역사와 현실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고 신생(新生)의 자리를 찾고자 한다. 이 모두가 각기 역사를 내면화하는 의미 있는 시도라고 할 만하다.
이시영의 「은빛 호각」은 ‘호각소리’가 아련하게 불러 낸 기억을 질료로 역사의 따뜻한 음각화를 그려 내고 있다. 그가 생생하게 복원한 풍경 속에는 역사와 일상, 공동체와 개인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개인적인 회고담도 재미있지만, <역사의 눈>, <남산 약수>, <노 혁명가의 죽음> 등은 거대역사에 가려져 온 ‘또하나의 역사’를 들려주고 있다. 이는 초기 시에서 단시와 산문시의 호흡이 공존했던 것이 「무늬」, 「사이」 등 단시의 시기를 거쳐 다시 이야기체의 산문시 형식이 강화된 점과도 연관된다. 그래서인지 산문시 양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음률적인 배려나 간결한 이미지가 돋보인다.
최두석의 「꽃에게 길을 묻는다」에는 자연의 조화와 섭리를 통해 인간사를 돌아보는 시들이 많다. “지도에 없는 / 희미한 산길 더듬는 이 있어 / 노루귀에게 길을 묻는다” (<노루귀>)는 구절처럼, 지도에도 없는 길을 찾아 암중모색하면서 시인이 귀기울이는 대상은 노루귀와 같은 작은 생명체다. 역사적 상상력에서 생태적 상상력으로의 이러한 전환은 과거의 역사주의가 지닌 인간중심적 시각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룡능선 마가목>, <마라도 바다국화> 등에서 자연을 관념적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 개체로 호명하면서 그 존재들과의 내밀한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변화의 일면이다.
최근 우리 시단이 가장 절박하고 핵심적인 화두로 생태 문제에 주목하고 있는 현상은 최영철의 「그림자 호수」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에는 생태 문제뿐 아니라 일상에 흩어져 있는 사회적 이슈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구제역 문제를 다룬 <돼지들>이나 공공근로자의 삶을 그린 <잡초>를 비롯해 거지, 노숙자, 장애인 등에 대한 관심이 그에 포함된다. 그런데 그 방식은 전혀 80년대적이지 않다. 그는 대상에 대한 손쉬운 동화(同化)나 미화(美化)를 거부하고 풍자적 시선과 어조로 현실의 그로테스크한 일면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어조는 발랄해졌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현실 인식은 더 비관적으로 느껴진다.
김정환의 「하노이 서울 시편」은 23편의 연작시를 통해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를 돌아보고 있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는 한국사의 상처를 되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모종과 이중의 세월’을 환기시키는 기호다. 시인은 베트남의 풍경과 역사를 ‘여행자적’ 시선으로 포착하지만, 다시 서울이라는 공간 속으로 그 풍경을 소환한다. 그리하여 “모종의 세계관이 파경에 이르렀”을 때, “파경 속으로 사라지는 방법으로 파경 넘어를 가시화”(<파경과, 광경, 광경의 풍경과 풍경의 광경>)하고자 한다.
백무산의 「初心」과 하종오의 「무언가 찾아올 적엔」에는 지나간 연대에 대한 회한과 피로, 자신이 꿈꾸었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공존하고 있다. 1980년대 중요한 민중시인이었던 그들이 현재 처한 내면의 주소를 정직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회복기의 노래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백무산이 이전 시집인 「길은 광야의 것이다」에서 불교적 사유를 짙게 깔고 있었고, 하종오 역시 이전의 「님 시편」에서 정신주의적인 탐색을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그런 극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두 시인은 역사와 일상 사이의 균형을 잡으며 자기치유의 방식을 터득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종오의 시가 자연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발견한다면, 백무산의 시는 몸의 기억을 되짚어 가며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발견과 질문이 현실 쪽으로 좀더 가까워졌으니, 앞으로 그 장엄한 통합을 기대해도 좋으리라.
5. 여성시의 다양한 지층
1990년대 이후 여성시는 지평의 확장뿐 아니라 지층의 심화를 꾸준히 이루어왔다. 2003년에도 여성시인들의 활동은 왕성한 편이어서, 일정한 성취를 보여 주는 시집들을 꼽아 보아도 그 풍요로운 지층을 실감하게 된다. 최문자의 「나무고아원」, 이향지의 「내 눈앞의 전선」, 황인숙의 「자명한 산책」, 안정옥의 「나는 걸어다니는 그림자인가」, 이선영의 「일찍 늙으매 꽃꿈」, 김상미의 「잡히지 않는 나비」, 최춘희의 「소리 깊은 집」, 성미정의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김길나의 「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 김선우의 「도화 아래 잠들다」, 김행숙의 「사춘기」, 진은영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정영주의 「아버지의 도시」, 조하혜의 「도넛, 비어 있음으로 존재한다」, 강미정의 「상처가 스민다는 것」 등이 그 예들이다.
이 시집들의 경향을 거칠게나마 몇 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첫째, 여성의 몸에 대한 탐구와 감각의 갱신을 통해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경우(황인숙, 이선영, 김길나, 김선우), 둘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시적인 자의식을 결합시키면서 언술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경우(김상미, 성미정, 김행숙, 진은영, 조하혜), 셋째,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실존적 고통과 상처를 인생론적 지혜로 갈무리해 보여 주는 경우(최문자, 이향지, 안정옥, 최춘희, 정영주, 강미정)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몸’에 대한 발견은 이성적 사유에 맞서 여성시인들이 개척해 온 고유의 영역으로, 단순한 소재의 차원을 넘어 시적인 언술 방식의 혁명을 가져오기도 했다. 황인숙, 이선영, 김길나, 김선우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언술 방식의 변화보다는 감각의 갱신을 통해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 내는 데 기여하고 있다.
황인숙과 이선영에게 몸은 ‘주름’이나 ‘사막’처럼 젊음이 빠져나간 자리로 인식된다. 그러나 시간의 풍화 작용에 의해 물기를 잃어 가는 몸은 개인적인 상실감을 넘어서 세계의 부정성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매개체가 된다. “균열이 포개진 주름”(황인숙, <주름과 균열>)이나 “나라는 사막을 견디려고 / 모든 꽃들은 / 타고난 잎을 버린다”(이선영, <선인장>)는 표현처럼, 상실과 균열의 체험은 더 농밀한 여러 겹의 감각을 낳기 때문이다.
김선우와 김길나의 경우는 일상이 주는 억압이나 상실감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우주적 몸’을 꿈꾼다. 김길나가 이지적이라면 김선우는 에로틱하게 몸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데, 이러한 여성성은 문명적 질서에 맞서는 대안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특히 김선우는 관능과 사유가 풍요롭게 결합된 시로 여성성의 지평을 새롭게 확장했다는 평가와 함께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민둥산>, <물로 빚어진 사람>, <완경(完經)> 등은 여성의 몸에 깃들여 있는 생태적 질서를 감각적으로 복원해 낸 수작이다.
여성적 글쓰기의 자의식과 문체적 특성을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경우로는 김상미, 성미정, 김행숙의 시가 주목할 만하다. 김상미의 정직한 독설과 성미정의 우화적 상상력, 김행숙의 다중적인 화자 등은 현실과 환상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특유의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이 발랄하고 대담한 언술 방식 외에도 그들의 시가 세계에 대한 비판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나’라는 서정적 자아 또는 단일한 화자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불온하고 혼란스러운 존재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한 실험이나 요설이라고 부르기에는 경쾌하면서도 진지한 이 자기 풍자가 여성시의 또하나의 길을 개척해 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도 속에 갇혀 있는 여성성과 실존적 고통을 절실하게 노래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최문자의 시는 버림받고 상처입은 존재들에게 그늘을 드리워 주고 따뜻한 울타리를 쳐 주는 일종의 ‘고아원’이다. 이전 시집이 생채기의 파열을 보여 주었다면, 이번 시집은 자신의 생채기를 응시하면서 수많은 타자들을 모성적 사랑으로 끌어안는다. 최춘희의 시도 “어미의 육신 제 양식 삼아 자라는 살모사”(<소리 깊은 집 5>)처럼 질병이 주는 고통 속에서도 생명에 대한 환희와 외경심을 길어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맥을 함께한다.
그에 비하면 이향지와 정영주는 활달하고 건강하다. 이향지는 빠른 템포로 몸의 기억 속으로 내려가 그 안에 살고 있는 타자들을 호명해 낸다. 그래서 그의 시는 노파의 곰삭은 말인 동시에 한 노파 속에 들끓고 있는 수많은 처녀와 아이, 온갖 사물들의 말랑말랑한 말이다. 정영주는 고향 묵호의 기억을 떠올리며 짠내 나는 유년의 상처들을 들려주는데, 거기에는 바다처럼 강인한 생명력과 질긴 모성성이 깃들여 있다. 이처럼 여성시인들은 견딤의 자세로든 돌파의 의지로든 고통을 고통으로만 두지 않고 그 상처의 길을 오히려 세계와의 통로로써 열어 가고 있다.
6. 젊은 사유와 감각의 가능성
젊은 시인들의 개성적이고 완성도 높은 시집이 많이 산출된 해라는 점에서도 2003년의 성과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한 김행숙, 진은영, 조하혜, 강미정을 포함해서 손택수의 「호랑이 발자국」, 이영광의 「직선 위에서 떨다」, 이병률의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김록의 「광기의 다이아몬드」, 이덕규의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박종국의 「집으로 가는 길」등은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첫 시집들이다.
손택수는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으로 신화와 일상, 전근대적 세계와 근대적 세계, 기억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상상력을 길어올린다. 그래서 때로는 샤먼의 목소리로 고향의 속신(俗信)을, 때로는 선사(禪師)처럼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설법을 들려주고, 공동체적 삶의 내력을 입담 좋게 들려주는 이야기꾼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살아나는 고향의 풍경들은 문명의 한복판에 찍힌 호랑이 발자국처럼 선명하다. 그 발자국처럼 손택수의 건강한 언어가 앞으로도 저벅저벅 걸어가기를 바란다.
이영광은 깨달음을 지향하지만, 그것을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끝없는 부정을 통해 관념적 모험으로 이끌어간다. 진실은 “수정할 수 없는 직선”이 아니라 그 직선 위에서 떨고 있는 정신의 미세한 진동이기 때문이다. 다소 산문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전반부의 시들은 그의 견고한 정신과 가능성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이병률은 생의 근원적인 허기와 비애를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특장을 갖고 있다. 여리고 섬세한 내면이 내는 나지막한 파동은 남성시인의 시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만물에 대한 글썽거림을 담고 있다. 그 감각의 가능성을 열어 가면서도 삶의 본질을 향해 직진하는 정신을 주문하고 싶다.
첫시집에 이어 일정한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두 번째 시집으로는 심재상의 「넌 도돌이표다」, 권대웅의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 장철문의 「산벚나무의 저녁」, 장대송의 「섬들이 놀다」, 성기완의 「유리이야기」, 김충규의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김선태의 「동백숲에 길을 묻다」 등을 들 수 있다.
심재상은 <립싱크 랩소디> 연작 등에서 보이듯이 시가 근본적으로 “호환 불가능한 헛소리들, 환원 불가능한 방언”이라고 생각한다. 존재와 언어 사이의 모순을 살아 내야 하는 시인에게 삶은 도돌이표일 뿐이며 시는 끝나지 않는 발성 연습 같은 것이다. 그런 절망과 환희가 다채로운 리듬과 이미지에 실려 전해진다.
10년 만에 시집을 출간한 권대웅은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를 맑은 슬픔의 다발로 만들어 안겨 준다. 적막한 풍경 속에 앉아 미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인의 모습에서 세월의 무게와 중년을 통과하는 내면의 쓸쓸함이 만질 듯 느껴진다.
장철문의 시집은 「바람의 서쪽」에서보다 일상에 밀착하면서 자연스러워졌다. 맑고 담담한 목소리로 가족이나 자연에 대한 성찰을 들려주는 그의 시는 생태주의나 정신주의를 표방하지 않으면서도 그 덕목들을 아우르는 품을 지니고 있다. 특히 미얀마 시편이나 어머니, 아내 등을 통한 여성성의 발견 등이 그런 모습을 잘 구현하고 있다.
장대송의 시집은 ‘섬’과 ‘빌딩’ 사이를 힘겹게 오가는 정신의 기록이다. 정작 고향을 그리는 시는 별로 없지만, 도시의 남루한 일상 뒤편에 환각처럼 존재하는 유희의 공간을 향해 시인은 가고자 한다. 그 느린 발걸음이 낳은 이미지들은 쉽게 의미를 드러내지 않지만, 근대적 시공간에 갇혀 있는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해 낸다.
성기완의 시는 말들의 유동성을 따라가면서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 제목 없이 일련번호로 매겨진 시들은 통일된 의미나 스토리를 만들지 않지만, 이미지들의 단절과 우연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의미들은 글쓰기의 주체에 대해 재고(再考)하게 만든다.
이제까지 중요한 시집들을 살펴 보면서 각 개인의 성취에 대해서는 충분한 신뢰와 경의를 표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젊은 사유와 감각이 앞으로 한국시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세대가 아직 구심점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부정하기 어렵다. 안으로는 앞세대의 문학 전통과 싸우고 밖으로는 문명의 총체적 위기와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그 대결 의지나 문제의식을 좀 더 선명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도 적지 않다. 그 요구에 얼마나 부응하느냐에 따라 한국시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 筆者 : 나희덕 시인 |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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