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1/1(목) 00:40 (MSIE6.0) 220.78.28.200 1024x768
2004 신춘문예 당선 시 모음  

동아일보

    반지하동굴 유적지


    김성규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기,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具)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부장품과 함께
    바닥의 얼룩과 물을 끌어다 쓴 흔적을 설명하려
    삽을 든 인부들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방을 널빤지로 막은 동굴에서
    앞니 빠진 그릇처럼
    햇볕을 받으며 웃고 있는 가족들
    기자들이 인화해놓은 사진 속에서
    들소와 나무와 강이 새겨진 동굴 속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사내는 짐승을 쫓아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으리라
    굶주린 새끼를 남겨놓고
    온몸의 상처가 사내를 삼킬 때까지
    지쳐 동굴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축 늘어진 젖가슴을 만져보고 빨아보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아기
    퍼렇게 변색된 아기의 입술은
    사냥용 독화살을 잘못 다루었으리라

    입에서 기어 나오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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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폐(廢)타이어


                     김종현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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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눈물길


      김춘남


    기가 막혔다. 눈물길이 막혔으니….


    길은 어디에나 있다고 하더라만,
    미처 몰랐다.
    눈물에게도 길이 필요한 줄은 정말 몰랐다.
    무심코 사는 것도 바빠서
    세례만 받고 교회에 안 나가는 신자처럼
    눈물의 존재를 잊고 산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곰팡내 나는 일기장을 들추어보니,
    '눈물은 나의 신앙'이라는 얼룩진 표현도 눈에 띈다.
    가뭄에 메말라버린 골짜기의 저수지처럼
    가슴 속 밑바닥의 뻘이 드러나면, 그 속은
    흉물스러운 쓰레기들이 방치되어 있을 테지.
    이마며 가슴에 환경보호 띠를 두르고
    환경 지킴이로 동분서주
    개발이냐,환경이냐를 역설하였는데….
    건조주의보의 나이에 들면서
    먼 곳의 우포늪은 잘 보여도 정말 가까운
    눈물샘은 돌보지 않았다.
    고도근시와 난시를 동반한 마른 가슴은
    어이없게도 눈물길을 막아버렸다.
    물론 수술만 하면 간단히 끝날 일이지만,
    마음이 담수되지 않고서는
    길이 있어도
    눈물은 결코 가지 않으리라.
    눈물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수몰된 고향과 같은 것.
    인생의 이정표에 없는 눈물샘으로 가는 길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좁은 길
    잡초에 묻혀 있던 고향 가는 길에 눈물길은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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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가스통이 사는 동네


        안성호


빈집의 풍경을 텔레비전이 우주로 송출한다. 텔레비전 위로 유리컵이 있고 그 속에서 감자가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나무가 되었다. 유리컵 속에서 감자는 죽고 감자만한 유리컵이 나무에 열렸다. 그 유리컵마다 바다가 출렁인다. 푸른 바다를 가르며 달력 속으로 노란 수상스키 한 대가 사라진다. 손을 흔들어대는 벌거벗은 남녀의 벗어 놓은 옷이 달력 곁, 행거에 걸려 있다. 여자의 빨간 치마를 남자의 양복 上衣가 껴안고 있다. 벗어 놓은 양말이 화장실로 걸어가고 화장실에 놓인 세탁기에선 양복 下衣가 길거리에서 묻혀온 노래를 쿨렁거린다 똑똑, 세일즈맨이 빈집에 노크를 하고 돌아선다. 똑똑, 물탱크에 물소리가 들린다. 수압은 낮고 지붕은 점점 무거워진다.


노란 물탱크와 가스통이
퇴락한 집 모퉁이를 돌아오는 빛을 베고 지붕에 누워 하늘을 본다.
오백 마리의 양


구백 마리의 흰 오리가
줄을 지어
하늘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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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시월의 잠수함


       김지훈


    구름이 입술 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 어디쯤일까. 지닌 것 없이

    숲만 가득 담아둔 나무 그늘에 앉아

    기어이 가져온 새 책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작은 물줄기 속에서도 잘 돌아가는 스크루

    사방 가득한 수억 燭의 소리가 큰 닻이 되어

    산봉우리들이 신들의 전함으로 불리었던 그 바다 위에 박혀 있다

    밤낮이 한꺼번에 몰아오는 내연기관의 큰 울림

    그 안에는 칼 대신 나뭇잎 들고 싸우던 날도 있다

    힘줄 선명한 잎 하나가 공기를 잘게 저미며 내려온다

    신들은 어디에서 배를 만드는 중일까

    베어낸 나무 밑동에 그려진 선명한 음파탐지기 자국

    나는 녹슨 쇠를 털며 가라앉고 있는 배들의 그림자를 본다

    나뭇잎을 칼처럼 쥐고 싸우던 시절

    앙상해진 주물기계들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바람이 떠미는 결이 물 속인 줄 알고

    낙엽이 벗었다가 도로 신는 잠수화를 본다

    아직도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신들의 칼을 나는 나뭇잎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다

    이 배를 붙들며 한 자리에서 먼바다를 돌아오는 사계절

    내 고함으로 한 방의 어뢰를 뭉쳐

    사령관의 함교가 있는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갑판이 낙엽을 털 듯 몸을 털며 다시금 방향을 잡고 나아갈 때

    수리공들이 큰배를 향해 떼지어 몰려가는 항로를 따라

    푸른 위장을 한 잠수함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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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매일

    조용한 가족



                        이동호

    무상 임대 아파트 8층 복도,
    한 덩이 어둠을 치우고 걸어 들어간다.
    복도가 골목 같다.
    이 골목은 일체의 벗어남을 허용하지 않는다.
    복도가 직장이기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도를 벗어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이곳에서 사표를 낸다는 것은
    極貧의 뜻이고,
    담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일층으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저승은 주로 일층에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고층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시 죽음과 내통하는 셈이다.
    작년, 두 사람이 일층으로 순간 이동했다.
    올해는 벌써 두 명분의 숟가락이
    고층에서 주인을 퍼다버렸다.
    몇 사람 더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으니
    한 두 집 더 빈 공간이 늘어날 것이다.
    밤하늘은 눈치가 빠르다.
    미리 弔燈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아파트 속에 조의금처럼 들어 앉아있다.
    일부는 여전히 복도를 서성이다가
    아무런 말없이 일층을 내려다보곤 한다.
    이곳에서는 침묵도 하나의 宗派가 된다.
    사람들은 침묵을 광신도들처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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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풍경(風磬)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문 신


    때가 되면 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허공에 헛된 꿈이나 솔솔 풀어놓고
    나 하루종일 게을러도 좋을 거야
    더벅머리 바람이 살살 옆구리를 간지럽혀도
    숫처녀마냥 시침 뚝 떼고 돌아앉는 거야
    젊은 스님의 염불 소리를 자장가 삼아
    한낮에는 부처님 무릎에서 은근슬쩍 코를 골고
    저녁 어스름을 틈타 마을로 내려가서는
    식은 밥 한 덩이 물 말아 훌러덩 먹고 와야지
    오다가 저문 모퉁이 어디쯤
    차를 받쳐놓고 시시덕거리는 연인들의 턱 밑에서
    가만히 창문도 톡톡 두들겨보고
    화들짝 놀라는 그들을 향해
    마른 풀잎처럼 낄낄 웃어보아도 좋을 거야
    가끔은 비를 맞기도 하고, 비가 그치면
    우물쭈물 기어 나온 두꺼비 몇 마리 앉혀놓고
    귀동냥으로 얻은 부처님 말씀이나 전해 볼거야
    어느 날은 번개도 치고 바람이 모질게도 불어오겠지
    그런 날은 핑계 삼아 한 사나흘 오롯이 앓아 누워도 좋을 거야
    맥없이 앓다가 별이 뜨면
    별들 사이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칠 거야
    그런 날이면 밤하늘도 소란스러워지겠지
    그렇게 삶의 변두리를 배회하다가 내 몸에 꽃이 피면
    푸른 동꽃[銅花]이 검버섯처럼 피어오르면
    나 가까운 고물상으로나 팔려가도 좋을 거야
    주인의 눈을 피해
    낡은 창고에 처박혀 적당한 놋그릇 하나 골라
    정부(情婦) 삼아 늙어가는 거지
    세월이야 오기도 하고 또 가기도 하겠지
    늘그막에 팔려간 여염집 처마 끝에 매달려
    허튼 소리나 끌끌 풀어놓다가
    가물가물 정신을 놓기도 하겠지
    그런 연후에 모든 부질없는 것들을
    내 안에 파문처럼 켜켜이 쌓아놓고
    어느 하루 날을 잡아 바람의 꽁무니에 몸을 묻어도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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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작은손



    문  신


    1
    정말로 한번 만져보고 싶게 작은 손이었다

    2
    싸락눈이 내리는 저녁
    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즐거웠다
    누군가의 농담에 모두들 과장된 표정으로 웃어주었고
    그것만이 우리의 저녁을 아름답게 장식한다고 생각했다
    문득,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축축한 것들이
    우리들의 배경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어떤 이는 전화를 하러 눈치껏 자리를 뜨고
    그 옆자리의 친구는 화장실에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빈자리의 쓸쓸함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처럼
    문이 열릴 때마다 눈길을 돌리곤 했다
    그때마다 낯선 얼굴을 만나고는 서둘러
    쓰디쓴 눈물빛 술잔을 비웠다
    갑자기 세상이 시큰둥하게 보이는 저녁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쌓아놓은 빈 병들을 보며
    가끔씩 던지곤 하던 농담도 시들해져갈 무렵
    창 밖으로 함박눈이 내렸다
    우리들은 다시 활기를 띠며 눈에 얽힌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것이 사랑이든, 낭만이든,
    아니면 진부한 자유이든,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즐거웠으며
    즐거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조바심 나는 저녁이었으므로

    또 한 친구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우리들은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더욱 단단하게 여미며
    썩 괜찮은 농담을 찾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침몰하기 직전의 선장처럼 우리는
    어떤 결정이라도 단호하게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창 밖의 함박눈은 우리들을 비껴서 내렸다
    서너 걸음 앞에 놓인 영정 사진 한 장으로
    우리들은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었으므로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빈 병들은 쓰러졌고 아직은
    채워지지 않은 잔들이 우리들 앞에 남아 있었고
    감당하기 벅찬 날들은
    더 이상 우리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날이었다

    3
    남자의 손을 보았다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은 작았다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처럼, 세상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제것으로 움켜쥘 수 없을 만큼 작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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