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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김수영 시의 계보  

김수영 시의 계보


권 혁 웅(시인,문학평론가,한양여대교수)

1
김수영의 등장은 우리 현대시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꾼 중요한 사건이다. 김수영은 재래의 시적 주체와 세계 해석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고, 시적 주체와 정념의 관계를 뒤집어 보였다. 그는 "전통적인, 불변하는, 동조적(同調的)인, 정태적인" 등의 이름으로 수식될 주체가 파토스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파토스가 생겨나는 자리에서 또 다른 주체가 솟아난다는 것을 우리 시에서, 거의 처음으로 발견했다. 전통적인 주체는 자신의 바이오리듬에 맞추어 외부의 모습을 재편한다. 불변하는 주체의 형상에 따라 세계의 굴곡이 그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주체는 자신의 입지를 바꾸는 적이 없으며, 세계를 내면화한다는 점에서 세계와 동조적이다. 김수영은 이런 현실이 세계를 왜곡하는 일이며, 나아가 시적 주체마저 왜곡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라고 말했는데, 이때의 현실은 당대의 참여론자들이 그렇게 했듯, 사회 역사적 상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현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시의 양심과 직업은 이 뒤떨어진 현실에 대한 자각이 모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리켜준다.([모더니티의 문제], {김수영 전집 2}, 민음사, 1981, 350면)

시대에 뒤떨어진 현실, 나아가 그 현실에서 뒤떨어진 시인에 대한 이중의 비판은, 결국 세계를 정태적으로 파악하는 기존의 시적 주체에 대한 비판이다. 전봉건과의 논쟁에서, 김수영은 자신이 말한 현실이 시적 관습과도 관련된 것임을 밝혔다. "鳳健군은 필자가 <시인>의 <현실>이라고 한 이 <현실>의 뜻을 外的 현실만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중략) 이 <현실>의 뜻도 誤讀하고 있다. 그는 뒤떨어진 사회의 실업자수가 많은 것만 알았지 뒤떨어진 사회에 서식하고 있는 시인들의 머릿속의 판타지나 이미지나 잠재의식이 뒤떨어지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다. (중략) 그처럼 시인은 자기의 현실(즉 이미지)에 충실하고 그것을 정직하게 작품 위에 살릴 줄 알 때, 시인의 양심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文脈을 모르는 詩人들], 앞의 책, 224면) 당대 현실과 시적 현실(이미지나 잠재의식) 모두가 시인이 인식하고 자각해야 할 현실이며, 우리 시의 밀도는 바로 "이 자각의 밀도"여야 한다.
김수영이 제시한 주체를 "새로운, 전변하는, 이질적인, 역동적인" 등의 수식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주체는 세계의 변화하는 모습에 동조한다는 점에서 전변하는 주체이며, 자기 내부의 서로 다른 욕동(慾動)과 지향을 끌어안는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주체이며, 당대 현실에 자신의 시적 현실을 부절(符節)처럼 일치시킨다는 점에서 역동적인 주체이다. 우리의 현대시는 김수영 이후로 이러한 주체의 발언을 포괄하였다. 모노가 아닌 스테레오의 목소리를 듣게 된 셈이다.
김수영이 도입한 시작(詩作)의 방식이 낯선 것은 아니었다. 김수영은 자주 통일적인 어조를 가진 주체가 이질적인 시적 대상들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시를 썼는데, 이는 산문적인 호흡을 운문화하는 유력한 방법론이었다. 우리 시에서 이런 계보의 들머리에 놓인 시인이 백석이다. 백석의 절창인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은 32행이나 되는데도, 문장은 다섯 개밖에 되지 않는다(더구나 "∼하는 것이었다"로 끝나는 뒤 세 문장은 통일되어 있어서, 긴 호흡을 안정시키고 있다). 백석 시의 통일성은 문장 내부의 문형(文型)들에서도 관찰된다. "∼하고" "∼해서" "∼하며" "∼할 적이며" "∼하는 것인데" 등으로 유형화된 하위 문형들은, "어느 목수네 집"에 기숙하게 된 시인의 내력과 이런저런 상념을 솜씨 있게 정돈한다. 백석은 이런 호흡으로 민족 공동체의 세부를 유연하게 형상화할 수 있었다. 이 호흡을 물려받은 시인들은 길고 짧은 서정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 단문을 잇대어 일상의 깨달음을 부드럽게 풀어내는 정진규가 그렇고, 사람살이의 정한(情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안도현이 그렇고, 조사와 보조용언이 가진 뉘앙스를 정교하게 활용한 장석남이 그렇다. 백석의 호흡이 서정의 유로(流路)를 지시하는 데 반해, 김수영의 호흡은 서정의 매듭을 지시한다. 백석이 부드럽고 여리다면 김수영은 거칠고 강하다. 김수영 시의 문맥은 현실을 지시하는 자리에서 끊어지고 다른 현실의 문맥으로 접속된다. 그의 시는 자주 당대 현실 그리고 시적 현실의 몽타쥬를 보여주었는데, 그럼에도 여전한 것은 여러 개의 현실을 포괄하는 강인한 시적 주체이다. 이 주체는 때로는 현실의 제유적 경험자이며 때로는 현실의 비판적 기록자이다.
김수영이 보여준 곤혹스런 자아 역시 낯선 것은 아니었다. 김수영은 순연하고 고분고분한 서정적 자아에 반대하고 그 자신 속물적이고 일상적인 자아를 시에 등장시키곤 했다. 이런 자아의 계보는 물론 이상을 시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자아가 내면의 고통을 객관화하는 데 충실했다면, 김수영의 자아는 외부의 고통을 내면화해서 보여주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상은 폐쇄적이고([오감도] 연작은 폐쇄적인 호흡으로 닫힌 세계를,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김수영은 개방적이다([꽃잎] 연작은 처음부터 타자를 향해, 경쾌하게, 열려 있다). 이상의 혁명이 "통일된 자아"라는 허상을 깨는 데 있었다면, 김수영의 혁명은 당대 현실과 시적 현실을 동시에 깨고 새로 새우는 데 있었다.

2
먼저 김수영의 유명한 작품, [사랑의 變奏曲]을 보자.

    Aa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Ba 사랑을 발견하겠다 都市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Bb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Bc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Bd 암흑이 있고 三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Be(Da)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Db)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Bf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Ca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Dc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Dd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De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節度는
    열렬하다
    Cb 間斷도 사랑
    Ea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Eb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 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四·一九에서 배운 기술
    Fa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Ab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暴風의 간악한
    Ac 信念이여
    Df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信念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Fb 아들아 너에게 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Ga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人類의 종언의 날에
    Gb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Gc 美大陸에서 石油가 고갈되는 날에
    Ha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都市의 疲勞에서
    배울 거다
    Hb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Hc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Hd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He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瞑想은 아닐 거다
    ---김수영, [사랑의 變奏曲] 전문(시 앞의 영문부호는 인용자의 것임)

이 장려한 사랑의 노래는 작은 "욕망"에서 발원하여 우리 "삶"의 터전을 두루 흐르고 "혁명"에서 고인 후에 새로운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마무리된다. 제목처럼 여러 개의 구문이 변주되면서 시가 전개되는데, 각 문장을 모으고 나누면 여덟 개의 문형이 얻어진다.

    A/ 욕망이여…(a); …단단함이여(c); 신념이여…(b)
    B/ …들리고(a); …흐르고(b); …이 있고(c); …준비하고(d); …자라나고(e); …무시한다(f)
    C/ …사랑이다(a); …도 사랑(b)
    D/ 사랑의 봉오리…(a); 사랑의 기차…(b); 사랑의 숲…(c); 사랑의 음식…(d); 사랑의 節度(e); 사랑의 도시…(f)
    E/ …밤을 안다(a); …기술을 안다(b)
    F/ …외치지 않는다(a); …것이 아니다(b)
    G/ …종언의 날에(a); …마시고 난 날에(b); …고갈되는 날에(c);
    H/ …배울 거다(a); …의심할 거다(b); …날이 올 거다(c); …명상이 아닐 거다(d)

구문을 중심으로 시를 읽어보자. 처음에 시인은 욕망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고 선언한다(Aa). 대상에 대한 주체의 바램이라는 점에서 욕망은 사랑과 다른 것이 아니다. 욕망이 주체에게 귀속된 것이라면, 사랑은 대상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욕망이 가진 이기적 속성은 시가 진행되면서, 사랑이 가진 이타적 속성으로 바뀐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Ab)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씨앗들의 단단함은 사랑하는 대상의 변개(變改)되지 않는 속성을 은유한 것이다. 사랑의 대상은 여전히 제 속성을 유지한 채 사랑하는 자의 앞에 놓여 있다. 그 앞에서 사랑하는 자는 "고요함"과 "폭풍"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 결국 사랑은 훼손되지 않는 복사씨, 살구씨, 곶감씨처럼 단단한 것이며, 그 단단함은 일종의 "신념"(Ac)과도 같은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사랑하는 자에 의해 망가지지 않으니 신념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자는 언젠가 그것들이 사랑으로 개화(開花)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으니 신념이다. 전체로 보아, 호격으로 묶인 세 개의 문장(Aa, Ab, Ac)는 "복사씨, 살구씨, 곶감씨"라는 사랑의 은유를 통해 병렬되어 있다. 두 번째로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은 발아(發芽)하지 못한 사랑의 세상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씨앗들이 싹트고 자라 무성한 열매를 맺을 날은 요원하지만, 그래서 지금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만이 맹위를 떨치는 세상이지만, 언젠가 씨앗들이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것이다. 씨앗들이 가진 단단함은 그때까지 제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어떤 전략의 소산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과 신념은 대척의 자리에 놓인 두 세상의 속성을 이르는 말이다.
이어진 문장들로 이루어진 시행들(B)에서 김수영은 몇 가지 풍경들을 늘어놓은 후에, 중간중간에 사랑이라는 어사를 삽입하였다. 도시의 변두리에 사는 자의 귀에 라디오 방송에서 사랑 얘기가 들리고(Ba), 그 소리를 지우는 강물 소리가 흐르고(Bb), 그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다(Bc). 이 강물은 아마도 라디오 주파수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을 은유한 것인 듯 하다. 강물 소리는 사랑 얘기를 잡아먹는 소음이어서, 사랑의 방해물이다. 그 건너에는 아직 명백히 드러나지 않아서 "암흑"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 있다. 우리가 "불란서 혁명"과 "四·一九"에서 배운 기술을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고 했고,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 곧 화려하게 사랑이 피어나는 날이 있으리라고 했으니, 이 암흑이 사랑이 현실화되지 않은 세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겠다. "마른나무들"이 틔울 준비를 하는 "봉오리"는 갓 피어날 사랑이며(Bd), 우리들의 "슬픔"처럼 크고 넓은 "쪽빛 산"은(Be)은 "도야지우리의 밥찌끼같은 서울의 등불"(Bf)과 대척의 자리에 있다. 이로써 세상이 사랑과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어우러진 곳임을 알겠다.
시인은 이 모든 부정의 대상까지 사랑으로 껴안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가시밭", "가시가지"들마저 사랑이므로(Ca) 사랑은 모든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며, "間斷"도 사랑이므로(Cb) 사랑은 모든 단절과 소외까지 끌어안는 것이다. 조사 "의"를 이용한 은유들로 묶인 네 번째 구문(D)은, 사람살이를 지탱하는 힘이 사랑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나뭇가지의 "봉오리"(Da)는 화려한 사랑의 세상을 준비하는 것이며, "기차"(Db)는 우리의 사랑과 슬픔을 싣고 지나간다. "가시밭, 가시 가지"까지 사랑이므로 모든 "숲"(Dc)은 사랑의 숲이다(모든 시련까지 사랑이 거쳐가야 할 몫이라는 뜻이리라). 우리가 먹는 음식마저 "사랑의 음식"(Dd)이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바로 사랑이었다. "주전자의 물"이 비등점에서 멈추거나, 이 방에서 저 방까지 밤이 이어진 것처럼 어떤 "節度"(De)나 인내도 사랑이다. 봄베이도, 뉴욕도, "도야지우리의 밥찌끼같은" 서울도 우리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Df)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의 희망과 생활 수단, 우리를 둘러싼 자연과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사는 방법과 장소가 모두 사랑이다.
"안다"고 말하는 두 문장(E)과 아니라고 말하는 두 문장(F)에서, 사랑이 더욱 확장된다. 이 방에서 저 방까지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듯, 나는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 밤은 "죽음 같은/ 암흑"으로 상징되는 밤인데, 그런 어둠 속에서도 "고양이의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은 반짝인다(Ea). 사랑은 황폐한 현실 속에서도 저버릴 수 없는 우리의 희망이다. 나는 또한 사랑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안다(Eb). "불란서 혁명"과 "四·一九"에서 배운 기술이 그것이다. 사랑을 억압하는 권력 구조를 혁파하고 진정한 사랑의 체제를 세우는 기술이 바로 혁명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Fa). 진정한 사랑의 정신을 소리높이 외치던 때는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사랑의 기술을 쓸 날이, 그래서 사랑이 활짝 피어난 세상이 올 것이다. 이런 믿음은 "狂信"이 아니다(Fb).
이제 이 장려한 사랑의 노래를 매듭지을 때가 왔다. 미래 시제로 제시된 두 개의 문형(G, H)이 시인의 믿음과 희망을 보여준다. 세상이 끝나기 전에 사랑의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인류의 종언의 날"(Ga)이 오기 전에, 개인이 누릴 향락(Gb)이 다 끝나기 전에, 강대국이 망하기 이전에라도(Gc), 그것은 온다. 지금 "너는 도시의 피로"를 느낄 뿐이지만, 그 피로에서 사랑을 배우게 될 것이다(Ha). 사랑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노동하는 자리에서 싹트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사씨와 살구씨는 지금 "단단한 고요함"으로 냉혹한 세상에서 겨우 제 사랑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언젠가는 그것들이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것이다(Hd). 그때에 너는 그 단단함이 사랑이었음을 알게 될 것(Hc)이고, 그래서 지금 나의 상념이 "그릇된" 것이 아님이 증명될 것이다(He).
[사랑의 變奏曲]에서 시인은 사랑으로 이 넓은 세상을 설명하였다. 아프고 힘든 세상이 사랑의 힘으로 떠올랐고, 지탱되고 있으며, 마침내 변화될 것이다. 이성복이 이 믿음에 제일 먼저 동참했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그곳에 조금씩 다가갔다 폭력이 없는 나라, 머리카락에
    머리카락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 곳, 아들아 네 마음 속이었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遲鈍의 감침맛을 알게 되었다
    지겹고 지겨운 일이다 가슴이 콩콩 뛰어도 쥐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는다 지겹고 지겹고 무덥다 그러나 늦게 오는 사람이
    안 온다는 보장은 없다 늦게 오는 사람이 드디어 오면
    나는 그와 함께 네 마음속에 入場할 것이다 발가락마다
    싹이 돋을 것이다 손가락마다 이파리 돋을 것이다 다알리아 球根 같은
    내 아들아 네가 내 말을 믿으면 다알리아 꽃이 될 것이다
    틀림없이 된다 믿음으로 세운 天國을 믿음으로 부술 수도 있다
    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을 만끽하였다
    詩로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
    사랑은 응시하는 것이다 빈말이라도 따뜻이 말해주는 것이다 아들아
    빈말이 따뜻한 時代가 왔으니 만끽하여라 한 時代의 어리석음과
    또 한 時代의 송구스러움을 마셔라 마음껏 마시고 나서 토하지 마라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故鄕을 버렸다 꿈엔들 네 故鄕을 묻지 마라
    생각지도 마라 지금은 故鄕 대신 물이 흐르고 故鄕 대신 재가 뿌려진다
    우리는 누구나 性器 끝에서 왔고 칼끝을 향해 간다
    性器로 칼을 찌를 수는 없다 찌르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찔려라
    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마라 아들아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고요한 詩, 고요한 사랑을 받아라 네게 준다 받아라
    ―이성복, [아들에게] 전문

이성복은 [사랑의 변주곡]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호격("아들아")을 가져와 시를 지었다. [사랑의 변주곡]이 그렇듯, 이 시 역시 몇 가지 구문의 변주로 진행된다. 각각의 구문은 과거, 현재, 미래로 거쳐오면서 사랑의 연대기를 이루어낸다. 시인이 배운 "사랑"은 "폭력이 없는 나라"에 대한 꿈이다. "머리카락에/ 머리카락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 곳", 그곳이 후대에 물려주고픈 나라의 모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래 기다려야 한다. 지루하고 둔하며 "지겹고 무더"운 기다림의 재미, 사랑은 그렇게 오래 참고 기다릴 줄 안다. "늦게 오는 사람이 드디어 오면/ 나는 그와 함께 네 마음속에 입장할 것이다". 그때 온몸으로 나는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피워올린 이 식물성 꿈의 아름다움, 손가락마다 발가락마다 싹이 돋고 이파리가 돋는 이 격렬한 환희의 순간을 위해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릴 줄 안다. 아직 사랑은 오지 않았으나 "늦게 오는 사람이/ 안 온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그가 온다는 보장도 없다(이게 어법에 맞는다). 그러나 사랑은 올 것이다. "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이게 사랑의 속성에 맞는다). 여기에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는 김수영의 명령문을 삽입해도 이은 자리가 드러나지는 않으리라. 아직 사랑의 때는 오지 않았으나 반드시 올 거라는 믿음, 김수영 식으로 말해서 그게 "狂信"은 아닐 것이다. "한 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때가 되면 "한 시대의 어리석음과/ 또 한 시대의 송구스러움"이 사랑 안에서 다 아들의 것이 될 것이다. 아들의 시대에 비하면 우리 시대는 어리석고 또한 송구스러울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다만 고요할 것인데, 이 고요한 기다림이 아들에게 전해줄, "고요한 시, 고요한 사랑"의 내용이다.
이성복 초기시의 화자는 편력자이다. 시인은 세속 도시를 횡단하며 겪은 사건과 마주친 이들을 기록했다. 그의 시편들은 이 시대의 거대한 풍속화라 할 만한데, 이것의 선행 기록이 김수영의 [그 방을 생각하며], [敵], [長詩] 연작, [우리들의 웃음], [巨大한 뿌리], [현대식 교량], [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 등의 수많은 시편들에 흩어져 있다. 이성복은 김수영이 시에서 말한 바 "아들"과 "누이"를 확장하여, 가족사에 관련된 시들을 썼다.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와 {남해 금산}을 아우르는 가족 시편들은 시인의 실제 가족 얘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계층과 계급을 대표하거나 거기에 녹아든 가족 얘기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사랑이며, 서로가 서로의 적이다.

    집에 적이 들어올 것 같았다
    (집은 地下室, 집은 개구멍)
    흰피톨 같은 아이들이 소리 없이 모였다
    귀를 쫑긋 세우고 아버지는 문틈을 내다보았다.

    밥이 타고 있었다.
    敵은 집이었다
    ―이성복, [금촌 가는 길] 부분

적은 외부에도 있고 내부에도 있다. 비판의 대상이 제 가족일 때, 비판은 연민과 뒤섞여 아이러니가 된다. 공격하는 자도 공격받는 자도 모두가 아프고 고통스럽다. 그들은 시대의 병을 함께 앓는 이들이다. 김수영이 [하… 그림자가 없다]에서 말한 적들이 꼭 그와 같다.

우리들의 敵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惡漢이 아니다/ 그들은 善良하기조차 하다/ 그들은 民主主義者를 假裝하고/ 자기들이 良民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選良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會社員이라고도 하고/ 電車를 타고 自動車를 타고/ 요리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雜談하고/ 同情하고 眞摯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原稿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海邊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散步도 하고/ 映畵館에도 가고/ 愛嬌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하…… 그림자가 없다] 1연

적의 실상을 나열하는 긴 목록을 읽으면, 결국 적은 "우리들"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모습이 적의 모습이었으며, 우리가 있는 곳이 적이 있는 곳이었고, 우리의 일상잡사가 적이 하는 일이었다. 형식을 맞추어가던 문장들이 연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헝클어진 것은 이 목록이 무한히 이어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어떤 기술(記述)이든 적들, 나아가 우리들 자신에 대한 기술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의 진술이 1연 전체를 요약한다: "그들은 우리 곁에 있다". 이 말은 교묘하다. 적은 내 곁에 있으면서, 실은 우리 안에 숨어 있다. 내가 아니라 해도 나를 모은 우리 안에는 적이 있다. 적은 나라는 단수와 우리라는 복수 사이 어느 곳, 우리가 우리 각자를 의심해야 하는 불특정다수 속에 숨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적이다. 2연도 동일한 형식을 갖는다. "우리들의 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진술들은 연의 끝에 이르러 "보이지는 않는다"로 완결된다. 싸울 곳이 보이지 않으니, 우리는 어디서든 싸워야 한다. 3연은 싸움의 시기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데,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로 끝난다. 2-3연의 진술을 합하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싸운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싸움이며, 우리가 있는 모든 장소가 전장(戰場)이다. 이성복의 구절로 설명하자면, "적은 집이었다". 제목을 이루는 4연 마지막 문장, "하…… 그림자가 없다"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적이 우리의 반영(그림자)이 아니라 우리 자신(실체)이므로 그림자가 없고, 적이 우리 내부에 숨어 있으니 그림자가 없다.
김수영에서 시작된 이성복 시의 줄기는 80년대 이후 우리 시에서 가장 유력한 흐름 가운데 하나를 형성했다. 기형도는 이성복의 가족 시편들을 나누어, 메마른 객관 서술(이 서술은 비판으로 시종했다)과 따스한 주관 서술(이 서술은 연민에 물들어 있다)로 적어간 두 유형의 시편들을 선보였으며, 강연호는 내면의 쓸쓸함을 도시적인 풍경에 기대어 말했고, 김중식은 동시대의 아픔을 직접 화법으로 시화했고, 송찬호는 화려한 수사 뒤에 건조한 아픔을 숨겨 두었다.

3
이성복이 김수영의 화법에 내재한 정념을 보존했다면, 황지우는 김수영이 보여준 형식 실험에서 발생하는 정념을 계승했다. 황지우는 시작 메모에서, "나는, 시를 언어에서 출발하지 말고 '시적인 것'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시적인 것'은 뭐라고 딱 말할 수는 없고, 딱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쩌면 '禪的인 것'과는 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토로했다(황지우, [시작메모],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민음사, 1985, 52면). 모더니티에 대한 명료한 자의식을 내비친 셈인데, 이런 자의식은 김수영이 시작(詩作)의 후반부에 이르러 몰두했던 시작 태도에 내재해 있던 것이다. 우리 시에서 모더니즘적인 자의식을 표명한 이는 물론 많이 있다. 김수영 이전에 이상과 김광균이 그랬고, 김수영과 동시대의 박인환과 조향이 그랬으며, 김수영 이후에 수많은 시인들이 그랬다. 그러나 이상이 개인적인 상징 체계에서 파생된 기호를 조합했고 김광균이 회화적 이미지라는 코스튬에 경사된 것과 다르게, 김수영은 사회적 관습의 체계에서 발생하는 기호를 가져왔고 개별 이미지를 부수적인 것으로만 간주했다. 또 박인환이 모더니즘의 외피 안에서 감상적 자기 토로를, 조향이 관념의 조작을 즐겼던 것과 다르게, 김수영은 극적인 화법과 그 화법을 통해 드러나는 반어적 전언을 구별할 줄 알았다.

여보세요. 앨비의 아메리칸 드림예요. 절망예요./ 八월 달에 살려주세요. 절망에서 나왔어요./ 모레면 다 돼요. 二백매예요. 特種이죠./ 머릿속에 特種이란 자가 보여요. 여편네하고/ 싸우고 나왔지요. 순수하죠. 앨비 말얘요./ 살롱 드라마지요. 半島 호텔이나 朝鮮 호텔에서/ 공연을 하게 돼요. 절망의 여운이에요.
―[電話이야기] 부분

VOGUE야 넌 잡지가 아냐/ 섹스도 아냐 唯物論도 아냐 羨望조차도/ 아냐―羨望이란 어지간히 따라갈 가망성이 있는/ 상대자에 대한 시기심이 아니냐, 그러니가 너는 羨望도 아냐// 마룻바닥에 깐 비니루 장판에 구공탄을 떨어뜨려/ 탄 자국, 내 구두에 묻은 흙, 변두리의 진흙,/ 그런 가슴의 죽음의 표식만을 지켜온,/ 밑바닥만을 보아온, 빈곤의 마비된 눈에/ 하늘을 가리켜주는 잡지/ VOGUE야
―[VOGUE야] 부분

김수영은 앞 시에서는 전화하는 목소리를, 뒤 시에서는 대화하는 목소리를 주음(主音)으로 삼아 시를 적어 나갔다. 앞 시의 주된 발화 방식은 반어이며([전화이야기]에서 "앨비의 아메리칸 드림"과 "절망"이, "앨비"의 "호텔 공연"과 "절망의 여운"이 만난다. 마지막 연에서도 대화의 의도가 드러난다, "이런 전화를, 번역하는 친구를 옆에 놓고,/ 생색을 내려고, 하고 나서,…" 운운), 뒤 시의 주된 발화 방식은 대조이다(1연의 "VOGUE"는 아메리칸 드림의 제유적 상징이다. "빈곤의 마비된 눈에/ 하늘을 가리켜주는 잡지", 그게 "VOGUE"였다). 이 목소리는 이전의 우리 시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이며, 김수영 이후 황지우 세대에 와서는 잘 알려지게 된 것들이다.

벗이여, 나의 近況은 위독하다. 위문와 다오. 붉고 흰 국화꽃 들고. 장의사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섬찟섬찟하다. 구긴 종이가 휴지통에 정확하게 들어가 주지 않은 그날은 내내 불길하고, 왜 나는 자꾸자꾸 豫示받으려 하는지. 왜 자꾸 목숨이 한숨인지, 나는 모르겠다. 벗이여, 지난여름, 그대는 氾濫하는 江가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느냐. 우리들 목숨의 치수 바로 밑에 출렁이는 流量을 보았느냐. 상 황 통 제 불 능 상황통제불능. 응답은 없었다. 영원히. 1984년, 무사안일한 위험 수위 위로 대홍수의 날들은 가고, 1988년, 大望도 빨리 지나가라. 우리들 패인 분지에 헐벗은 이재민으로 남아 울리라. 황폐한 축제여. 노예들의 환희여. 아, 大韓民國, 大韓民國 憲法은 女性名詞며 大韓民國 現代史는 變態性慾者의 病歷이다. 누가 이 여인을 범하랴.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누가 이 여인을. 그대 몸에 깊은 구멍 있도다. 상처인가 통로인가. 깊고 굶주린 구멍. 물 질척거리는 그대 영혼의 잔잔한 오물이여. 폭등하는 첨탑이여. 교회는 자본주의와 性交한다. 아 마침내 땅끝까지 왔구나. 우글우글하게 까놓았네! 그들의 먹이는 불안한 신흥 중산층이다. 그대 목마른 영혼을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한 값을 내라. 가까이 오라. 양변기에 앉아 똥누는 자들이여. 밀리고 밀린 똥냄새가 맡고 싶구나.
―황지우, [近況] 앞부분

[近況]의 화자는 전화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말은 독백에 해당한다. 일방적인 이 말은 김수영의 경우가 그렇듯, 대화 상대방을 향한 진술이 아니라 자기 진술이다. 구어(口語)로 적어나간 자유 연상의 방법 역시 김수영의 방법과 다르지 않다(이성복 역시 자유 연상을 자주 활용했다). 인용한 부분만 살펴보자. 내가 위독하니 위문 와 달라고 말하고는, 조문 오는 이야기를 한 것은 내 증상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예측 가능한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시인은 휴지통에 던진 "구긴 종이"로 하루의 운세를 점칠 뿐이다. 사정은 우리 사는 사회 역시 다르지 않다. "상 황 통 제 불 능", 응답이 없는 시절을 막막한 기계음만이 대신하고, 시절은 말세("대홍수의 날들")이며, 미래는 정치 구호("대망"의 "1988년") 속에서만 장미빛이다. 말세를 사는 우리 곧 대홍수에 살아남은 우리는 "이재민"이다. 우리 나라는 수동적인 피해국("대한민국은 여성명사")이며, 우리의 역사는 힘있는 자들의 장난에 얼룩졌다("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변태성욕자의 병력이다"). 대중 가요의 일 절("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이 이산과 분단의 아픔을 집약하고 그렇게 집약된 여성이 대한민국이니, 우리네 삶이 상처로 패어 있음을 알겠다. 구멍난 육신에 대한 연상은 구멍낸 자들로 옮겨가고, 자본화된 "교회"에 대한 비판이 뒤를 잇는다……. 시는 "나의 近況은 위독하다. 위문와 다오"로 시작해서, "나는 나 이외의 삶을 범해 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모르겠다. 나는 혼수상태다. 벗이여. 위문와 다오. 우리 결별하자"로 끝난다. 내가 혼수상태인 것은 내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이 엄혹하고 혼란한 시대에 타협할(타락할) 것만 같아서다. 그러니 실은 정신이 "위독"한 것이다. 어떤 말도 위로가 못 된다. 우리는 겨우 코미디언의 바보짓에 웃을 뿐이며, "兄弟殺害의 시대"를 살아갈 뿐이다. 김수영 이후로 20여 년이 지났으나, 박정희 시대에서 전두환 시대로 바뀌었을 뿐, 세상은 좋아지지 않았고 절망은 더욱 뿌리를 키웠다.
황지우가 계승한 김수영의 형식 실험은 동시대의 담론 속에 내재한 절망과 희망을 가감 없이 살려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고정되고 정제된 담론이 고정되고 정제된 정념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기에(이 자리에 서정주의 담론이 있다) 김수영은 이 담론에 균열을 냈으며, 자의식적 기호로만 구성된 담론 체계가 현실에 대한 지시성을 삭제했기에(이 자리에 김춘수의 담론이 있다) 김수영은 지시적 담론에 기댔다. 황지우가 시가 아니라 "시적인 것"에서 시작하겠다고 표명한 것은, 오염된 담론이 오염된 현실을 보여주는 데 오히려 적실할 것이라는 통찰이었다. 이러한 지시적 언어가 가장 자주 기대는 방식은 물론 인유(引喩)이다.

    길중은 밤늦게 돌아온 숙자에게
    핀잔을 주는데, 숙자는 하루종일
    고생한 수고도 몰라주는 남편이
    야속해 화가 났다. 혜옥은 조카
    창연이 은미를 따르는 것을 보고
    명섭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
    누게 된다. 이모는 명섭과 은미의
    초라한 생활이 안스러워…….

    어느 날 나는 친구집엘 놀러 갔
    는데 친구는 없고 친구 누나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친구 누나의
    벌어진 가랭이를 보자 나는 자지
    가 꼴렸다. 그래서 나는…….
    ―황지우,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KBS2 TV 산유화(하오 9시 45분)]

TV 프로그램을 안내하는 이는 제한된 분량에 맞추어 남은 얘기를 잘라버리고, 화장실에서 음담을 늘어놓는 이는 배설이 끝나면 남은 얘기를 다 적지 않는다. 두 시의 네모반듯한 형식 역시 두 기록이 적힌 모습을 보여주는 상형(象形)이다. 이 시의 화자는 단순한 기록자의 자리를 자처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는 두 이야기에서 유사성을 보는 사람이며, TV 프로그램이 현실에 대한 배설을 보여주는 것임을 이 유사성을 통해 보여주는 사람이다.
황지우 시의 줄기 역시 여러 시인들에게 계승되었다. 유하는 패러디 자체를 자기 시의 파토스로 삼았으며, 함성호는 수많은 주석을 달아 시를 현실화했고, 박정대는 영화, 소설, 음악, 그림 등에서 수많은 텍스트를 끌어 모아 서정적 화자의 발언에 녹아들게 했다.

4
한편 김수영의 비판적 성찰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세상을 풍자하는 자신을 풍자하는 일, 이 이중의 풍자는 내 안의 속물성을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내 안에 들어온 세상마저 비판의 무대 위로 올리는 일이었다.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憐憫의 순간이다 恍惚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性] 전문

김수영은 "性"이 가진 환상적 면을 벗겨내고, 그것을 지극히 저열한 일상을 통해 드러내었다.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밤은"과 같은 거듭되는 교정(校訂)은 화자의 조바심을 드러낸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이라는 말은 창녀로 짐작되는 다른 여자에 대한 혐오를,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라는 말은 아내에 대한 혐오를 느끼게 만든다. 정서적인 동의와 동감이 사라진 성교는 화자로 하여금 상대방의 "섹스를 개관"하게 만들고, 아내는 어렴풋이 그 사실을 느낀다. 그는 이런 사정을 "연민의 순간"이라고 불렀다. 성교에서 "황홀의 순간"이 제거되고, 나와 그녀 사이에는 서로 속고 속이는, 그래서 서로를 가련하게 여기는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아내는 내가 자신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나는 속이는 일이 들킬까봐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돌아간다. 결국 화자는 제 자신에게도 거짓을 느낀다. 화자는 "그년"이나 "여편네" 모두를 타자(他者)로 만들고, 그 거리 이편에서 스스로 타자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그 겹의 소외가 가진 쓸쓸함을 보여준다. 그는 이미 상대와 자신을 속였는데, 시간을 끌다간 자기 자신이 속고 만다고 말한다. 적어도 지금은 아내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더 지체하다간 자신이 정말 아내를 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만다는 얘기다. 그런 착각은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연민을 황홀이라 믿게 만든다.

뭐요 니기미이 머 어째 애비 보고/ 니기미라꼬 니기미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야아 이// 자알 배왔다 논/ 팔아 올레서 돈 들에 시긴/ 공부가 게우 그 모양이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예끼 이 천하에// 소새끼 같은// 아버지 천하에/ 소새끼 같은 아버지/ 고정하십시요 야아 이 놈아/ 아버지
―박남철, [아버지] 부분

김수영 이전에 우리가 알아왔던 화자는 대개가 착한 화자였다. 소월이 그랬고 만해가 그랬고 상화가 그랬다. 사랑하는 님을 축복하며 보내고, 이별한 님이 반드시 올 거라 믿으며, 오지 않은 님 때문에 절망하는 화자에게 삶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님에게 있었다. 이 타율적 화자는 뒤틀린 상황마저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를 반성한다. 이 반성은 내게 우호적이지 않은 타자에게서 비롯된 것이지, 내 안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시들의 경우, 반성이 표면에 있고 잘못은 반성의 결과로 반추될 뿐이다. 김수영은 반대로 반성을 숨겨두고 잘못을 까발겨 놓는다. 이런 비판은 비판하는 자와 비판받는 자를 한 몸으로 만드는 비판이다. 박남철 시의 화자가 그렇다. 인용한 시에서 돈 좀 부쳐달라는 부탁을 거절하는 아버지에게 "니기미"라고 내뱉는 화자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은 없다. 아버지는 기가 막혀 훈계를 늘어놓는데, 화자는 대화를 뒤섞어 훈계와 불평이 구별되지 않게 만든다. "예끼 이 천하에// 소새끼 같은"이 아버지 말이고 "아버지/ 고정하십시요"가 내 말인데, 시행이 뒤섞이면서 "소새끼 같은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세상에 대한 비판에 도덕적 우월의식을 내장하지 않는 것, 자기 자신이 불편한 타자임을 인정하는 것―이것이 김수영의 치열함이며, 그를 계승한 박남철의 치열함이다.
자신의 저열함과 고통스러움을 거울로 삼아 세계의 저열함과 고통스러움을 시화한 이들을 이 계보에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승이 이 흐름에서 두드러진다. 풍요로운 사회와 궁핍한 자신을 동시에 비판하고 드러내는 김영승 시의 화자에게서도 비판과 연민은 한 몸이다. 진이정은 요설을 늘어놓는 가운데 자신의 아픔을 숨겨두었고, 박서원은 풍경 속에서 공격적이고 성적인 이미지를 읽어냈다.

5
우리 시대의 시인들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거의가 김수영의 계승자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김수영은 우리 시의 어법과 담론의 형식, 주체의 세계 대응에 관한 태도에서 기존의 방식과 다른 길이 있음을 소개했고, 이로써 우리 시의 외연이 크게 넓어졌다. 우리는 이 넓어진 지평에서 시를 읽거나 쓴다. 새로운 세계는 김수영 이후에도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소개되었으나, 적어도 김수영만큼 사회와 언어와 주체를 통괄하는 새로움을 보여준 시인은 없었다. 우리 시에서 "근대"가 누구에게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여 어느 한 사람으로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김수영이 우리 시에서 "근대"의 완성자인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 시의 진화사(進化史)에서, 김수영은 현대의 골격과 사유 능력을 가진 크로마뇽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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