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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할까-정지용/누뤼와 연미복의 신사
*이 글은 황현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현대시 다락방>에서 옮겼습니다. 좋은 글을 주신 황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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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제13화
정지용의 <누뤼>와 <연미복의 신사>
황 현 산 (문학평론가)
최근에 장경렬은 「이미지즘의 원리와 <詩畵一如>의 시론」1)이라는 제목의 매우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그 부제가 말하고 있듯이, 한시적 교양을 지니고 영문학을 수학한 정지용에게서 '이미지즘'이 어떤 양상으로 이해되고 실천될 수 있었던가를 다시 검토해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서 서구 미학의 수용과정을 정리하는 연구들이 자주 빠지기 쉬운 '현대에서 전통으로'라는 도식을 적절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이 문제의 틀을 구성하기 위해 그 첫머리에 제시하고 있는, 정지용의 시 「겨을」에 대한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겨을」은 두 개의 시구가 그 전체인 짧은 시이다.
비ㅅ방울 나리다 누뤼알로 구을러
한 밤중 잉크빛 바다를 건늬다.2)
장경렬은 <비ㅅ방울>이 <누뤼알>로, 한밤중의 <바다>가 <잉크빛 바다>로 감각화되어 있고, "<누뤼알>과 같은 <비ㅅ방울>과 <한 밤중>의 <잉크빛 바다>라는 두 이미지"가 병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시가 정지용의 시적 특성과 그 기교의 지향점을 확인케 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
「겨을」의 경우 두 이미지는 <비ㅅ방울>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나리다> <구을러> <건늬다>라는 동사에 의해 적극적인 긴장관계를 이룬다. 특히 <건늬다>라는 동사로 인해 <비ㅅ방울>의 이미지와 <바다>의 이미지는 각각 주어와 목적어의 위치에 놓이며, 이로써 각각의 이미지는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이 되고 있다. 결국 정적 이미지의 <바다>는 일종의 시적 공간을 형성하는 기제가 되고 그 공간을 동적 이미지인 <비ㅅ방울>이 지배한다. 한편 <유리알>이 암시하는 투명한 이미지와 <잉크빛>이 암시하는 불투명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기도 하는데 [...]3)
장경렬은 「겨을」의 <누뤼알>을 <유리알>로 읽고 있으며, 정지용이 빗방울의 한 특성을 <유리알>이라는 투명한 시상으로 감각화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의 분석이 크게 의지한다. 그런데 <누뤼>는 <유리>일까. <누뤼>가 나오는 또 하나의 시 「琉璃窓 2」에서 한 대목을 뽑아 적는다.
나는 목이 마르다.
또, 가까이 가
유리를 입으로 쫏다.
아아, 항안에 든 금붕어처럼 갑갑하다.
별도 없다, 물도 없다, 쉬파람 부는 밤.
小蒸氣船처엄 흔들리는 窓.
透明한 보라ㅅ빛 누뤼알아,
이 알몸을 끄집어내라, 때려라, 부릇내라.4)
이 시에서 시인은 <항안에> 든 물고기처럼 방에 갇혀 있는 신세를 자탄하며, <보라ㅅ빛 누뤼알>에게 방의 창문을 깨뜨려 부셔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이 시에서 <유리>와 <누뤼알>이 함께 쓰이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누뤼>는 <유리>가 아니다.
『우리말 큰사전』(한글한학회편)은 <누뤼>를 표제어로 올리지 않았지만, <누리>에 관해서는 <큰 빗방울이 공중에 갑자기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떨어지는 물건>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누리>는 <우박>이며, <누뤼>는 그 방언이다. 이점을 짚고나면 위의 「琉璃窓 2」의 정황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실제로 우박이 유리창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창문을 흔들며 <쉬파람 부는> 밤바람의 파괴적인 힘이 더욱 강화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그것을 <누뤼알> 곧 우박으로 보고 있다. <透明한 보라ㅅ빛>이라는 표현이 그래서 가능하다.
다시 우리가 읽던 시 「겨을」로 돌아오면, 이 짧은 시는 <추운 겨울 빗방울이 하늘에서 내리던 중 갑자기 얼어 우박이 됨으로써 한 밤중의 어두운 잉크빛 바다를 건너간다>는 말로 이해된다. 빗방울이 빗방울 그대로 바다에 떨어지면 그 순간 바닷물이 되어 그 바다와 함께 어두워져 버리고 말지만, 우박이 되면 그 순백색을 유지한 체 바다와 어둠을 건널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억지소리가 아닌가. 우박도 바다에 떨어지면 바닷물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에 관해서라면, <누뤼>가 나오는 또 하나의 시 「毘盧峯 1」의 한 대목이 정지용을 변호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
東海는 푸른 揷畵처럼 옴직 않고
누뤼 알이 참벌처럼 옴겨 간다.5)
동해는 멀리 원경을 구성한다. 근경의 우박이 그림처럼 부동한 푸른 바다를 가로질러 떨어진다. <누뤼알>은 자신의 먼 배경이 되어 자신의 흰빛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바다를 이렇게 건너간다.
「겨을」에서도 <누뤼알>이 진실로 바다를 건너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누뤼알>은 빗방울과 다르다. 그 자체로는 빛도 형체도 없어 밤의 어둠과 구별되지 않았을 빗방울이 적어도 우박의 형식을 얻었을 때는 저 잉크빛 바다를 배경으로 그 단단한 물질성과 하얀 본색을 줄기차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냉혹한 계절을 만났을 때 그 냉혹함으로 오히려 자신의 의지를 다진다는 것은 어두운 시대를 사는 사람의 지혜이다. 그러나 오직 냉혹할 뿐인 의지는 그 냉혹한 시대에 주저 앉는다. 이 냉혹함은 <잉크빛 바다를 가로지르는 하얀 누뤼알>의 그림과 같은 미적 감수성과 하나가 될 때 한 시대를 건너 다른 시대에 자기를 열어 놓을 수 있다. 정지용에게서 전통을 강조하건 현대를 강조하건 그의 미학이 지닌 이 윤리적 성격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난해에 이숭원이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를 발간했다. 시에서 "말 하나, 글자 하나 밉게 놓이는 것도 용서할 수 없"었던 정지용의 시를 그 정신에 따라 진실하게 읽으려는 근면한 의지의 소산인6) 이 책은 정지용 연구의 높이에 한 계단을 쌓고 그에 대한 정직한 토론들을 불러 모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서도 몇몇 시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이를 테면 「流線哀傷」에 대한 해석이 그렇다. 이 시는 짧지 않다.
생김생김이 피아노보담 낫다.
얼마나 뛰어난 燕尾服맵시냐.
산뜻한 이 紳士를 아스팔트 우로 꼰돌라인 듯
몰고들 다니길래 하도 딱하길레 하로 청해 왔다.
손에 맞는 품이 길이 아조 들었다.
열고보니 허술히도 半音 키-가 하나 남았더라.
줄창 연습을 시켜도 이건 철로판에서 벤 소리로구나.
舞臺로 내보낼 생각을 아예 아니했다.
애초 달랑거리는 버릇 때문에 궂인 날 막잡어부렸다.
함초롬 젖여 새초롬하기는새레 회회 떨어 다듬어 나선다.
대체 슬퍼하는 때는 언제길레
아장아장 팩팩거리기가 위주냐.
허리가 모조리 가느래지도록 슬픈 行列에 끼어
아조 천연스레 굴든 게 옆으로 솔쳐나자 -
春川 三百里 벼룻길을 냅다 뽑는데
그런 喪章을 두른 표정은 그만 하겠다고 꽥- 꽥-
몇 킬로 휘달리고 나서 거북처럼 興奮한다.
징징거리는 神經 방석 우에 소스듬 이대로 견딜 밖에.
쌍쌍이 날러오는 風景들을 뺨으로 헤치며
내처 살폿 꿈을 깨어 진저리를 쳤다.
어늬 花園으로 꾀어내어 바눌로 찔렀더니만
그만 胡蝶 같이 죽드라.7)
이숭원은 이 시에 대해, "결론부터 얘기하면, 오리를 소재로 삼은 것"이라고 말하며, 시의 소재가 되는 것의 모양이나 소리, 행동거지에 대한 묘사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8연의 '꽥- 꽥-'이라는 의성어에서 오리라는 심증을 굳힐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에 의하면 <유선애상>에서 <유선>은 오리의 곡선형 몸체를 암시한 것이고, 따라서 제목의 뜻은 <오리에 대한 슬픈 생각> 정도로 요약되며, 시의 전체 내용은 오리를 한 마리 사서 기르다가 잡아먹게 된 이야기이다.8)
그러나 이 시의 소재나 주제는 오리가 아니다. "아장아장"이나 "꽥꽥"은 오리의 행태를 연상하게 하지만, 시에 대한 해석의 오류는 대개 비유하는 말과 비유되는 것을 혼동할 때 일어난다. 이 의성어와 의태어도 역시 비유일 뿐이다.
우리도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이 시는 <자동차를 하루 빌려타고 춘천에 갔던 이야기>를 서술한 것이다. 토막지식에 불과하지만 자동차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에 바에 의하면, 1930년데에 서울에는 100여대의 택시가 있어 하루나 한나절을 빌리는 전세제와 오늘날처럼 미터기에 의해 요금을 산정하는 택시제 등 두가지 방식으로 영업을 했다. 그 자동차들은 대개 <流線形>, 즉 공기의 마찰을 덜 받도록 공기역학적으로 차체를 설계한 세단형이었다. 이 차형은 과학과 미학을 결합시킨 기능주의 미학의 초기 걸작에 해당한다. 정지용은 이 기능주의 미학에 대면한 자신의 처지를 희화해서 말하고 있다.
시인은 이 유선형 자동차가 똑같이 연미복 차림을 한 피아노보다 더 우아하다고 여기는데(제1연), 피아노가 무대에 놓여 대접을 받는 반면 자동차는 아스팔트 위에 "꼰돌라처럼" 끌려다니는 것이 안타까워 하루는 그 차를 빌려왔다(제2연). 피아노 덥개를 열 듯 차문을 여니 역시 기능적으로 설계된 것이라 맞춤하니 잘 열린다. 그러나 건반은 없고 반음 키만 하나, 즉 크랙숀만 있다(제3연). 그런데 꽥꽥거릴 줄밖에 모르는 그 경적음이 귀에 거슬린다. 역시 자동차는 무대에 모실 것이 아니라 길거리로 끌고 다니는 것이 제격이다(제4연). 일단 이렇게 결정을 하고나니, 시인 자신이 "애초 달랑거리는 버릇"이 있는지라,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차를 몰고 나갔다. 차는 연미복이 젖으면서도 운행을 거절하지 않는다(제5연). 뿐만 아니라, 그 상복 같은 검은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아장아장 팩팩"거리며 약간 방정을 떨기까지 한다(제6연).
이 차는 서울 거리에서 장례행렬 같은 검은 차의 대열에 끼여 느리게 달리다가, 옆길로 "솔쳐나" 춘천으로 향했다(제7연). 1930년대에 서울의 택시들은 업무용으로보다는 유람용으로 더 많이 이용되었다. 당시에 손님이 운전기사에게 "전선 누버로 가자"고 하면 한강철교를 넘어 남쪽으로 가자는 뜻이었고 "오줌 고개로 가자"고 하면 지금의 정릉 아리랑 고개를 넘어 청량리 길을 지나 춘천쪽으로 달리자는 뜻이었다는 한량들의 추억담을 60년대까지만 해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이 유람길에는 여자를 대동하기 일수였다. 시의 첫머리에서 연미복 차림의 신사로 지칭되던 자동차가 제5연 이후 여자처럼 묘사되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차는 "春川 三百里 벼룻길"을, 곧 경춘간의 벼랑길을 높은 속도로 달려가며, 상복 같은 검은 옷차림으로 태를 부릴 때와는 달리 굽이굽이마다 꽥꽥 경적음을 울려댄다(제8연). 서울과 춘천을 연결하는 도로는 아직도 마음 놓을 수 없는 길이지만, 1930년대에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위험한 길이었다. 시인은 자동차의 속도에 익숙하지 못하다. 기능주의 미학의 이 산물은 그의 눈에 매혹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섬세한 감각을 지닌 그의 귀에 경적음이 거슬리듯 거기에 정감을 가질 수는 없으며, 생리적으로 그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동차는 그 위험한 길을 몇 킬로 달리고나자 아예 거북이처럼 막무가내로 흥분하여 더욱 높은 속도로 치닫는다. 시인은 징징거리며, 곧 울상을 하며, "神經방석우에", 곧 바늘방석 위에 앉은 듯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차를 멈출 재간이 없으니 그대로 견딜 수밖에 없다(제9연). 그래도 풍경은 아름답다. 두 뺨에 스치는 바람처럼 달려오는 그 풍경들을 감상하다가 살풋 잠이 들었는데, 다시 깨어보니 차가 여전히 벼랑길을 달리고 있어 진저리를 치도록 놀란다(제10연).
마지막 연은 해석이 쉽지 않다.9)
어늬 花園으로 꾀어내어 바눌로 찔렀더니만
그만 胡蝶 같이 죽드라.
몇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단순히 어느 경치 좋은 곳에 도착하여 운행을 정지했다는 뜻일 수 있다. 이 이미지스트에게서라면 자동차에 핸드브레이크(그때도 핸드브레이크가 있었을까)을 곧추세워둔 모습은 나비를 채집하여 바늘로 고정시킨 모습으로 비유될 수 있다. 어쩌면 이 "화원"과 "바늘"은 자동차에 대한 여성적 비유와 관련된 성적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진실은 더 은밀한 데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자동차에 관해 말하면서 그 운전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사색이 된 승객을 아량곳하지 않고 차가 벼랑길을 그렇게 난폭하게 달렸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운전수가 <기술자 곤조>를 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화원으로", 즉 여자들이 있는 음식점으로 데려가, "바늘로 찔렸더니만", 즉 돈을 몇푼 찔러주었더니만, 다소곳해지더라고 아야기하는 것이리라.
그렇더라도 "죽드라"가 과도한 표현인 것은 사실이다. 시인은 <괴물의 출현과 난동> 뒤에, <은밀한 장소로의 유인> <비의적 병기의 사용> 그리고 <괴물의 죽음>이라는 이야기 요소들을 차례로 늘어놓아 이 마지막 연을 설화적 형식으로 끝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시인이 염두에 두었을 설화는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 어떤 괴력의 수단을 이용하여 권력과 부을 얻었으나 그 수단을 끝내 제어하지 못하여 멸망한다는, ― 이를테면 마술 방석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는데 그 비행을 멈추게 할 방법을 찾지 못해 지상으로 영영 되돌아올 수 없었다는 설화. 시인은 물론 이 설화를 해피앤딩으로 끝냈지만 그 설화의 주인공이 될 뻔했던 자신을 여전히 웃음거리로 제시한다. 그가 하루 유람을 위해 빌렸던 검은 상복의 자동차는 그의 장의차가 될 수도 있었다. 시의 끝에는 다른 죽음이 있고 그래서 <애상>이라는 제목이 역설적으로 어울린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슬픔은 자기희화의 슬픔이다. 그래도 정지용은 그 속도의 괴물을 아무튼 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 끝없는 벼랑길을 더 높은 속도로 달리며, 누군가 이 속도를 책임질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1) 『작가세계』, 1999년 겨울호.
2) 『鄭芝溶 全集 1 詩』(민음사, 1988)는 이 시가 『朝鮮之光』 1930년 1월호에 처음 발표되었다고 적고 있다.
3) 위의 글, p. 325.
4) 위 전집, p. 85.
5) 위 전집, p. 137.
6) 이숭원,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태학사, 1999, p. 7.
7) 위 전집, pp. 122-123.
8) 위의 책, pp. 139-142.
9) 이에 관해 이숭원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 "이렇게 도망 다니던 오리는 결국 11연에서 바늘에 찔려 죽고 만다. 과연 오리의 어떤 부위를 바늘로 찌르면 쉽게 죽는지 알 수 없지만 야단스럽게 도망 다니던 오리는 '호접 같이' 맥을 못추고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위의 책, p. 142. 마지막 연만을 염두에 둔다면 이 해석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이 연미복의 신사를 오리라고 여길 때, 무엇보다도 제9연과 제10연을 온당하게 이해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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