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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비평정신과 여성시  

*이 글은 1999년 가을호 [문예중앙]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김정란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옮겨둡니다. 좋은 원고를 주신 김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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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정신과 여성시
-90년대 여성시 운동의 성과와 가능성

                                        김 정 란 (시인·문학평론가)


1.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문학한다는 것


90년대 들어서 한국의 여성시인들은 7-80년대 선배들의 문학적 성과를 수용하면서 자신만의 뚜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독립적 자아정체성의 획득은 물론, 의미있는 자생담론의 생산까지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한국 여성시는 90년대 들어 성공 가능성을 보여준 거의 유일한 지식인 문학 장르이다. 이제는 그간 여성시인 개인들을 중심으로 파편적인 방식으로 논의되어 왔던 여성시가 독특한 연대의 성격을 지닌 어떤 <운동>의 성격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21세기의 강력한 대안 담론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같다. 수년 내 계속 여성시는 한국 문학의 중요한 문학적 아젠다 중의 하나였으며, 그 동안 주변부에서 몰이해를 겪던 단계를 서서히 극복해 가고 있다. {실천문학}1)과 {시와 시학}, {시21} 99년 여름호가 일제히 여성시 특집을 다루고 있으며, {문학사상} 99년 6월호도 20세기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5대 주제 중의 하나로 여성시를 꼽고 있다. 그 동안 상대적인 몰이해를 겪던 상황에 비해 보면 괄목할만한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여성>의 이름으로 문학을 하는 태도에 대해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보수적 분위기는 완강하게 남아있다. 이러한 경향은 남성작가와 비평가뿐 아니라 여성작가와 비평가들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너무나 흥미로운 것은,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인들조차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완강한, 거의 본능적인 거부감이나 공포심을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순간, 한국문학 안에서는 타자의 자리에 설 각오를 해야 한다. 내용상 페미니즘 담론을 생산하는 비평가들도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페미니즘 담론은 80년대의 민중문학이 그랬듯이, 언제나 당파성을 드러낼 것을 요청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여성 비평가들은 어떻게든 당파성을 드러냄으로써 위험 부담을 떠안기 싫어서, 남성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허락된 영역 안에서 움직이고 싶어한다. 이러한 경향은 비교적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성 비평가들보다는 <중심>에 의해 징발되어 일정한 쿼타를 배분받은 여성비평가들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페미니즘에 관해 긍정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하면서도 심리적으로 엄청난 억압을 느끼고 있는 여성비평가의 글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잘 써나가다도 결론에 이르면 앞서 자신의 주장을 서둘러 부정하거나, 거의 반드시 양보적인 표현을 달아 결론을 내린다. 그런 글을 읽을 때, 나는 필자의 심리적 억압과 혼란이 고스란히 내 육체 안으로 이입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럴 때 나는 유감스럽다기보다는 고통스럽다. 이토록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는 것이 힘들다는 말인가.

이러한 현상은 80년대보다 오히려 90년대 들어 더욱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 현상 자체가 한국사회의 독특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탁월한 사회학자 조혜정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2),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는 90년대 들어 더욱더 보수화하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거품이라는 것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90년대 초에 한바탕 불어닥쳤던 포스트모더니즘 바람은 적어도 지식사회 안에서만은 이제 더 이상 드러내놓고 반페미니즘적 발언을 할 수 없는 분위기를 정착시키는 데 도움을 준 것 같기는 하다. 아주 반동적인 경우가 아니면, 문화적 遲滯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페미니즘을 표방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과 태도가 표리부동한 텍스트를 발견하기란 너무나 쉽다. 텍스트는 이중으로 억압당해 있는(대세로 보아 페미니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억압,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또는 인정하고 싶다 하더리도 권력자들에게 밉보일까 봐 표나게 지지할 수 없는 억압) 비평 주체의 혼란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파라텍스트들을 무수히 생산해 낸다. 이 파라텍스트들을 분석해 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날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한국 지식인 사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분위기이다. 문단을 제외한 한국 지식인 사회 어디에도 이런 분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반페미니즘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지식인은 견뎌내지 못할 정도의 진보성은 한국 지식인 사회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문단의 권력집단은 여전히 완강하다. 아마도 이러한 경향은 김진석이 야유쪼로 <동족상찬의 비극>이라고 불렀던 특수한 행태 안에서 설명이 가능할 터인데, 주로 남성 비평가들을 중심으로 거대 언론 권력과 유착하면서 권력을 생산해 내는 과정에서 굳어진 시대착오적 분위기인 것같다. 권력에 맛을 들이면서, 권력 지향적 비평가들은 <타자>를 무반성적으로 밀어냈고,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은 채 끼리끼리 밀어주는 <동네 문학>을 해왔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표적인 타자의 담론 중 하나인 페미니즘은 철저한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는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진보성을 판단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 실험 방법에 의하면, 한국 문단은 한국의 어느 지식인 사회보다도 더 전근대적이다.

따라서 어떤 외래 담론으로도 한국 문단 안에서 여성적 주체성을 추구하는 문학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어떤 고투의 과정을 거쳐야 했으며, 거치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거치게 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문학적 자의식을 확보하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심층 근대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탈근대 상황 안으로 떠밀려들어온 한국이라는 특수한 전근대적/탈근대적 현장에서 생산되는 맥락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이 글은 한국 사회의 이러한 특수한 맥락을 고려에 넣고, 90년대의 신보수주의적 경향을 거스르며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 여성시가 어떻게 자기 담론 생산 가능성을 향하여 힘겹게 그러나 힘차게 발걸음을 떼어놓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2. 민중시와 여성시


90년대 한국 여성시의 문학적 특성은 시 자체의 특성을 논하기에 앞서, 여성시를 쓰고 있는 시인들이 비평을 겸하고 있다는 특별한 입장으로 먼저 드러난다. 90년대에 들어와 활발하게 시를 쓰고 있는 많은 여성 시인들은 비평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남성 시인들 중에도 비평을 겸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90년대 여성 시인들처럼 본격적으로 자신의 문학적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비평담론 생산에 주력하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얼추 꼽아 보아도, 한영옥, 최문자, 김혜순, 허혜정, 정끝별, 노혜경, 김혜영, 문선영 등, 90년대 들어 주목받고 있는 여성 시인들 대다수가 본격적으로 비평활동을 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본격적으로 비평활동을 하지 않는 경우에도, 많은 여성시인들이 빼어난 산문을 써내고 있다. 이경림이나 이향지 등은 본격 비평가 못지 않은 분석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 사실은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90년대 한국 여성시가 근대적 미학적 자의식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90년대 들어와서 <근대의 불안>에 움츠러든 제도권 문학이 빠르게 보수적인 색채로 돌아서 버린 현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이 신보수주의는 7-80년대를 거치면서 상당 수준까지 성공했던(강은교, 문정희, 고정희, 최승자, 김승희, 김혜순, 이연주 등의 작업) 여성적 주체성 정립의 성과를 거의 지워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9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 여성시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여성의 신비>와 <鄕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해내는 90년대 한국 여성 문학의 보수적 분위기 안에서 서서히 날카로운 비평의식을 갖추어가기 시작한다. 도저히 제도의 인지를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 없다는 절박감이 그녀들로 하여금 스스로 텍스트를 발굴하고 담론을 생산해 내는 비평가의 역할을 겸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만든 것이다. <여성시>가 담론 생산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하자 여성시는 곧 인상적인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그 저항을 무릅쓰며 여성시인들은 끈질기게 자기 목소리를 내왔고, 이제 그 목소리는 무시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시21}에 실린 세 명의 여성시인-비평가들의 견해를 들어보자.

김혜영: 우선 노혜경 선생님과 문선영 그리고 제가 시와 비평작업을 힘들게 병행하는 공통점이 이 대담의 의미를 깊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시를 창작하는 관점에서의 여성시와 시 비평을 하는 관점에서 여성시를 다양한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 시단과 문학사에서 여성에 대한 평가를 고려해 볼 때 상당히 폄하되거나 편견에 의해서 주변부에 위치지어진 경우가 많았다고 봅니다. 여성시를 여성시인이 쓴 시라고 편리하게 사고하는 경우처럼, 여성시에 대한 접근 자체가 분명한 시각이 정립되지 않았었고, 남성시인이나 비평가들의 취향이나 기호에 따라 분류되거나 심지어 상품화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21세기를 앞두고 여성시에 대한 검토를 통해 새로운 시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성 위주의 문학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 혹은 새로운 언어의 탐색 등은 한국시에 아주 풍요롭고 다채로움을 더해줄 수 있기 때문이죠.

문선영: 일단 시+비평이라는 작업은 모두의 공통점이라는 점에서 이의가 없고, 다만 한 가지 짚자면, 비평은 담론을 생산해 내는 작업이고,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삶에서 해야 되는 이야기들,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들과 앞으로 해야 하는 이야기들을 함께 모으는 소중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일이 쉽지는 않고, 다 잘하기는 더 어렵지만, 그래도 커다란 이점이 있다면 담론의 맥이 어떻게 흐르고 또 흘러가야 하는가에 대한 직관을 지닐 수 있는 점이라고나 할까. (...)

노혜경: (...) 지금까지 우리 비평 풍토는 시 한편, 그러니까 신비평적으로 말해서 "잘 빚어진 항아리"라고 할 수 있는 시 한 편을 대상으로, 단품 단위로 시를 읽는 것이 위주로 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풍토는 여성시가 등장하면서 한 시인 단위, 통합된 자아를 지니고 있는 인격으로서의 시인이라는 단위에 관심이 미치게 되었지요. 또 그 시인의 개념도 옛날에는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실제의 인간과 잘 구분을 안했잖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텍스트 안에 존재하는, 문학적인 차원에서의 시인으로 관심이 이동되게 되었습니다.(...), 여성시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자기 자신이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시라고 하는 점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텍스트 생산과 담론 작업을 병행하는 시인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봐요. 한 가지 짚자면 이때의 담론이라는 것은 논문이나 평론을 쓴다는 것과는 유가 다른, 자기 詩觀을 형성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자기가 무슨 시를 쓰는지에 대한 명백한 자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 이것이 90년대 여성시의 특징적인 국면 가운데 하나라고 보여집니다. 어쨌든 시와 담론을 병행한다는 점에서 우리 세 여자가 여성시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과 의무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각자 개인 문선영, 개인 김혜영, 개인 노혜경이면서 한편으로는 대표단수로서의 여성시인. (...)
-{시21}, 99년 여름호, 동남기획, 부산, 1999, pp. 9-11

이 대담은 즐겁고 명랑한 형식 속에 90년대 한국 여성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진지한 주제들을 망라해 다루고 있다. 인용한 대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세 명의 여성시인들은 한결같이 시와 비평을 병행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뚜렷한 자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녀들의 관점을 종합해 보면, 여성시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고 여성의 시각에 의한 새로운 문학사를 쓰기 위하여 태동한 문학 운동이다, 따라서 "여성 자신의 정체성 추구"는 여성시의 필연적 요건이다, 그러므로 여성시는 단품으로 세계의 이모저모를 표현하지 않으며, 통합된 자아를 통한 일관성있는 세계 해석을 시도한다. 따라서, 여성시인의 자아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자아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구축된 자아"이다. 따라서 "여성시는 명확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쓰여진다", 그러므로 여성시인은 비평정신을 갖추고 있을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여성시인들은 스스로 이 일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매들을 위해 떠맡는다는 연대의식마저 지니고 있다.

이 특성은 여성시인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심층근대성의 지표라고 할 수 있는 주체의식과 언어의식을 갖추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근대적 단독자의 퇴폐적 고독을 딛고 탈근대적 공동체 의식을 선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여성시인들이었을까? 그리고 왜 하필 근대가 끝났다는 소문이 무성한 이 시점에서인가? 이 점에 관해서 문선영의 견해는 참조할만하다.

문선영 : 이론화하기 위해 이 점을 약간 짚어보자면, 바로 여성이 처한 소외와 주변화의 상황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 대개의 비평적 논의가 실제로 보면 서구적인 담론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할 때가 대부분인데 그렇게 보면 우리의 담론이라는 것이 일단 서구적 담론으로 봐서는 소외와 주변화라는 얘기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소외되고 주변화된 것이 여성이고, 이 소외와 주변화라는 한국적인 상황을 가장 진솔하고 솔직하게 표현해 줄 수 있는 시가 바로 여성시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여성시가 주변부 담론인 한국문학비평에서도 소외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변 바깥의 주변이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어쨌든 여성시와 민중시를 계급적 측면에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거지요.

여성시와 민중시의 상관관계를 맨처음 언급했던 비평가는 노혜경이다([얼굴이 지워진 여자들ㅡ90년대 여성시의 화자에 대하여], {현대시} 1997년 7월호). 문선영은 노혜경의 뒤를 이어서 여성시가 여성의 존재가 주변의 주변이며, 계급 내부에서 소외되어 있는 제3 계급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실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따라서 80년대 상황에서 민중시가 분명한 계급의식을 통해 역사적 주체로서의 근대적 주체의식을 갖추었듯이, 여성시인들도 자신의 소외 상황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비평적/성찰적 근대성의 길로 들어섰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80년대의 <민중시>와 90년대의 <여성시>가 발생론적으로 같은 맥락 위에서 근대성의 소명에 눈뜨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 소명은 무엇보다도 <과거로부터의 단절>해야 할 소명이며, 과거가 지워진 자리에서 당대를 이해하고 미래를 발생시켜야 할 자로서 자신의 주체성을 확보해야 할 소명이다. 따라서 우리는 80년대의 민중이 계급의식을 통해 과거 상황으로부터의 단절을 요청하면서 근대적 시민으로 각성했듯이, 여성시인들도 계급의식을 통해 같은 의식화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민중시>가 근대성 구현의 한 정점으로서 민중의 의미가 특권화되었던 시대의 산물이었다면, 여성시는 탈근대를 표방하는 90년대에도 여전히 타자로 남아있는 여성의 위치를 극복하려는 열망의 산물이다. 따라서, 여성시는 출발부터 정치의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성시는 80년대의 민중시로부터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을 전수받는다. 자신이 사회적 타자라는 것을 자각하고 그 상황을 타개해 나가려고 하는 공통된 목적이 민중시와 여성시를 발생론적으로 같은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80년대의 민중시가 상황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분명한 전망의 창조를 위하여 이론적으로 무장했듯이, 여성시인들이 스스로 지적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처럼 비평행위가 권력행위로 오인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특성은 주지하다시피 물질적 근대성의 맞은편에 서서 초기 모더니스트들이 독립적 실존을 구축하기 위해 선택했던 미학적 전략과 상응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신과 공동체가 사라진 텅빈 자리에 내던져진 지워진 石板table rase, 그러나 부르조아들을 따라 물질적 개발의 근대성을 인준할 수도 없었던 고독한 주체들은 자기 발생의 열망을 가지고 예술행위를 함과 동시에 그 행위의 합리성을 증명하기 위한 미학적 자의식을 갖추었던 것이다. 20세기 말에 출현한 한국의 여성시인들은 서구의 초기 모더니스트들이 간직하고 있었던 날카로운 자의식과 독립적 주체성 구축에 대한 열망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그녀들은 시인이며 동시에 비평가일 수밖에 없다. 아무도 우리를 위해 말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해야 한다.

<근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를 허공에 내팽개치는 경험을 강요한다. 기댈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남성문인들은 기득권에 집착하여 존재의 안쪽으로 웅크려듦으로써 존재의 허공으로 나설 것을 요구하는 근대의 요구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의 비평의식은 기존의 권력을 추종하는 데에만 쓰인다. <근대>를 문학적으로 표방하는 비평가들의 텍스트 선별 방식이나 문학적 행태는 오히려 너무나 전근대적이다. 주체적 <나>로 말하는 대신, 집단주의의 힘 뒤에 몸을 숨기고, 집단을 위해 철저하게 봉사한다. 반란은 없었고, 권력 구성 비용도 지불되지 않았다. 반면에 여성시인들은 스스로 비평의식으로 무장하고 존재의 허공으로 나섰다. 고통을 지불하더라도 명민한 자의식을 통하여 존재를 창출하는 근대적 소명에 대답하기로 한 것이다. 서구 전통에서도 시와 비평을 겸하는 페미니스트 시인들을 발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꼽히는 애드리언 리치는 빼어난 비평가로도 유명하다. 앞으로 한국의 여성시인들은 그 동안 겪었던 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힘찬 시들과 비평 담론들을 생산해 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여성시인-비평가들의 비평 작업이 남성비평가들처럼 비평담론을 앞세워서 시를 재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녀들의 비평 작업은 철저하게 텍스트를 뒤따라가는 특성을 보인다.

문선영 : 여성문학 전반에 걸친 페미니즘, 또는 반페미니즘적 논의와, 상업주의적 목적에서 거론되는 여성작가들에 대한 담론들과 여성시 논의의 가장 큰 차별점은 이것이 실제로 생산되는 텍스트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여성시의 향방은 모든 진정한 문학행위들의 향방과 마찬가지로 이론이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텍스트들이 이론을 산출해 낸다는 점에서, 대단히 미래지향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여성시인들이 시행위를 존재창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

즉, 여성시인-비평가들은 기왕에 존재하는, 대체로 서구에서 수입된 이론의 틀(여성시의 경우에는 특히 페미니즘)을 동원해서 텍스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뒤따라가면서 이론을 산출해 내는 방식을 택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여성시를 쓰는 시인들이 그만큼 글쓰기 현장에서의 맥락을 중요시하고 있으며, 스스로의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역사적 의미에 대해 민감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여성시가 <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현재 한국에서 생산되고 있는 모든 여성시 담론들은 완결되어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고 움직이며 열려 있으며, 존재가 아니라 생성에 바쳐진 담론이다. 여성시 비평은 다른 사회의 맥락에서 이미 완결된 이론적 틀을 가져다 텍스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먼저 발생시킨 뒤, 그것으로 하여금 현장에서 발생하고 발전하는 살아있는 담론을 구성하게 한다. 따라서, 여성시비평은 한 편 한 편 발표될 때마다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것은 일단 텍스트라는 자연을 충실하고 꼼꼼하게 답사한다. 지형도는 충실한 답사 이후에야 그려지는 것이다. 여성시비평은 절대로 프로메테우스인 체하지 않는다. 여성시비평은 철학과 지성의 본래의 몫, 창조적 지성을 뒤따라가는, 나중에 말하는 자, 에피메테우스의 몫에 성실하게 남아있다.

이러한 특징은 왜 여성시가 세계적 맥락에서 이미 끝났다는 소문이 무성한 근대성의 소명에 에 성실하려고 하는가 하는 이유도 설명해 준다. 여성시인들은 바깥에서 소문처럼 떠돌아다니는 담론의 유령들에 관심이 없다. 그녀들은 그녀들의 육체가 알고 있는 한국 사회의 맥락이 요청하는 예술행위와 미의식에 충실하게 부응하려고 한다. 그러한 입장에서 파악한 한국 사회는 표면적으로 탈근대 지수들을 발생시키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근대적일 것을 명령한다는 것이 그녀들이 내린 결론이다.

김혜영 : 여성시가 미적 근대성을 획득하려는 강한 열망을 지녔다는 점에 대해서 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그런데 서구에서의 근대성 담론과 한국에서의 그것을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서구 담론에서의 근대성이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성찰의 결과로 구성되어진 반면에 한국에서의 근대성은 그것과 다릅니다. 물질적인 근대성은 이루어졌지만 과연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 작업이 치밀하게 이루어졌는가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근대성은 미완성의 기획이니까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이러한 결론은 여성시인들 특유의 직관을 통해 70년대부터 이미 시텍스트 안에서 반영되었던 바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지식사회는 이 점에 관해서 일단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김영민의 <심층 근대성> 논의는 특히 이러한 입장을 선명하게 만드는 데 공헌했다. 철학 전공자인 그는 정작 문학비평가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여성시 텍스트들을 성실하게 뜯어읽음으로써, 한국 여성시가 어떻게 심층 근대성의 모범적 텍스트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근대성 논의에 관해서, 여성들은 어떤 근대성인가를 묻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리타 펠스키가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근대는 성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성의 성별(gender of modernity)은 무엇인가? 어떻게 역사적 시기와 같은 추상적인 것이 성(sex)을 가질 수 있는가? 근래에 '텍스트성의 역사성과 역사의 텍스트성'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어, 그러한 생각을 처음 대할 때 느낄법한 낯설음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어차피 서사(narravive)의 설명적 논리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토대로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성별 상징성의 존재와 그 힘을 드러낼 것이다. 이처럼 남성성과 여성성의 메타포가 문화 텍스트에 스며드는 현상은 근대의 경우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3)

리타 펠스키는 "경쟁적인 남성성이라는 이상에 기반한 논쟁과 투쟁의 메타포"를 끌어들인 마셜 버먼으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논자들이 "타자를 종속시키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는 한편 여성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의존성을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지배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비판한다. 과연 모든 근대적 영웅들은(파우스트, 보들레르, 마르크스 등) 남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근대성의 신화에 반기를 들고 펠스키는 <근대적 여성성>4)의 복권을 시도한다.

분명히 입장의 차이는 있지만, 펠스키의 견해는 한국의 여성시인들에게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특히 흔히 여성혐오증을 드러내는 초기 모더니스트들(보들레르, 오스카 와일드 등)의 미적 근대성이 결과적으로는 물질적 근대성에 투항하는 자가당착에 빠져들었을 뿐이라는 관점은 탁월하다. 맥락을 충실히 고려하지 않으면, 심진경이 애정어린 태도로 충고하고 있듯이, 남성적 근대가 생산해냈던 모순을 "좀더 높은 차원에서 재생산하는"5)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심화될 논의 과정에서 차근차근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의 여성시인-비평가들은 위험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이미 출발 단계에서부터 여성시인들은 남성적 근대(또는 그 동안의 근대 논의가 서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서구적 근대)의 독소를 빼내는 방식을 선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이것은 70년대에 쓰여진 강은교의 텍스트에서부터 이미 뚜렷하다). 한국 여성시인들이 추구하는 근대성은 형성 초기 단계에서부터 탈근대성을 선취하고 있으며, 서구 모델을 어디까지 어떻게 참조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 텍스트들은 충분하게 확보되어 있다. 남아 있는 일은 그 텍스트들이 당대의 문학적 맥락 안에서 충분히 숨쉴 수 있도록 적절한 문학사적 자리에 배치시키고(오, 그러나 그 일이 어쩌면 이다지도 힘든가), 일관성있는 논리로 정리하는 일이다.

한국과 같은 매우 특이한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여성시인들이 이러한 야심적인 기획에 몸을 던질 수 있었다는 것은 거의 기적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나는 아직은, 본격적인 담론이 생산되는 것을 기다리면서,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 라고. 따라서 짐멜이 이야기 한 바, "여성에세는 결핍이 결여되어 있다"6)는 명제는 틀렸다고. 한국 여자들에게는 결핍이 너무나 풍부하다고. 따라서 문명의 발달을 승화의 원칙으로 설명하는 프로이트의 성결정론도 완전히 틀렸다고. 대통령의 아들이 아버지의 권력에 무임승차해서 나라를 망가뜨리는 한국에서는, 아버지에게 이의를 제기할 줄 모르는 수동적인 전근대적 아들들 대신에 능동적인 근대적 딸들이 몸을 일으켰다고. 적어도 이 나라의 문학에 있어서만은 그런 것 같다고. 이 나라의 문학적 외디푸스들은 오히려 여자들인 것 같다고.


3. 여성시의 요건 - 독립적 주체와 심화된 언어의식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시는 문학적 장르 개념이라기보다는 90년대적 맥락에서 태동한 매우 문학적인 <운동> 개념이다. 따라서, 문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운동>들이 그렇듯이, 여성시는 정확한 개념 규정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운동>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목표와 지향점을 분명히 해야 하며, 어떤 것을 배제하고 어떤 것을 포용할 것인가를 명확히 규명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성시 논자들이 무엇을 여성시의 요건으로 여기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서 여성시가 발생학적으로 민중시와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여성시의 계급의식, 또는 타자의식은 사회학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문학적(또는 언어적ㅡ언어학적이라고 말하지 않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한국의 여성시인들이 사회학적 소외를 통해서 언어와 존재 사이의 상관성이라는 근대적 명제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체화했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소외가 무엇보다 언어의 소외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시인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 점에 관해서 노혜경은 흥미로운 견해를 들려준다.

이광수, 최남선으로부터 시작되는 한국근대문학사 기술이 지닌 취약점은, 이미 200년 가까이 근대화(산업화)가 진행된 서구의 문학담론이 지닌 반성적 특징을 농경사회적 전통이 뿌리깊게 박힌 우리 사회와 조화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물질적 근대화의 내용이 문학의 근대성 추구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는 착종을 낳았다. 민족언어의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문학적 요구가 자체의 담론 생산을 기다려 단계적으로 성장,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다음이 어찌 될지를 미리 알고 제공되는 담론들이 문학의 요구를 대신해 왔다는 점은 사가와 비평가들의 비극이다. 따라서 춘원으로 대표되는 우리 지식인들의 핵심적 문제는, 그들이 계몽하는 문인이었던 것이 아니라 (맹목적 서구화 추종 논리에) 계몽당한 문인이라는 데 있다고 나는 본다. 이러한 갭은 카프문학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나중에 포스트모던 담론의 수입에서 드러나는 문제들로 이어져 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문학이 계몽적 사명에 몸바쳤다는 언급은 우리 문학이 농경사회로부터 근대적 사회로 시급히 이행하는 일을 자체의 사명으로 삼고 있었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문학이 언제나 사회와 집단의 문제에 몸바쳐 왔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님은, 80년대의 문학이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는 데 기여한 몫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화는 개인의 성숙과 더불어야 완성되는 것임을 생각할 때, 이제는 문학이 문자 그대로의 문학적 근대성의 획득에 투신해야 할 때다. -노혜경, [서술적 자아와 여성시의 정체성 연구-강은교의 {허무집}을 중심으로, [한국 서술시의 시학], 태학사, 1998, 서울, p. 380

노혜경의 견해를 요약하면, 1) 한국문학의 근대성은 이식 근대성이다 2) 따라서 그것은 존재의 내면으로부터 발생하는 근대성의 내적 맥락을 짚지 못하고, 외적 지수들만을 따라다녔다. 3) 그 결과, 현장의 맥락을 무시하고, 서구에서 이미 지나가 버린 실패한 근대의 기획을 뒤늦게 그대로 추종했다 4) 이 표층 근대성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지수들만을 참조함으로써 사회와 집단의 문제에만 매달렸다(특히 80년대 상황이 그랬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문학의 기여는 분명하다 6) 이제 문학은 심층 근대성의 구축을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들을 생산해 내야 한다.

이 견해는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담론의 외적 지수만 가지고 작품을 읽어왔던 비평가들은 첨단 언어의식을 담지하고 있는 90년대 한국시를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있거나, 않고 있다. 이론은 <근대성> 의 이론을 사용하면서, 문학 언어 해독 능력은 별로 근대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러한 특징은 한국비평이 외래 거대담론에 매달려 문학을 소재주의적인 방식으로 바깥에서 읽어 왔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으로서, 현장에서 발생한 첨단 언어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비평적 무능력으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노혜경은 우리 문학 안에서 존재와 언어의 상관성에 주목하는 진정한 미적 근대성은 아직 충분한 맥락을 형성하고 있지 못하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될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성시인-비평가는 80년대 문학의 성과를 일정 부분 인정하고 있다. 다음의 대담에서 이 문제는 좀더 상세하게 언급된다.

노혜경 : 김춘수와 김수영이 한 사람은 내면에서, 한 사람은 사회라는 방향에서 자의식을 발생시켰거든요. 근대적 자아인식의 단초라 할까, 그 토대 위에서 70년대 들어 우리 문학은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됩니다만, 80년대의 역사적 현실이 이를 가로막은 셈이지요.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나 지식인들이 80년대 민중시를 통해서 비록 사회적 정체성의 관점에서지만 '나는 이러한 존재다'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게 된 것은 굉장히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다만 이 계급 주체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었냐하면, 이것이 언어적으로 형성된 주체가 아니고 사회학적 담론에 의해 형성된 주체이기 때문에 동구권이 몰락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외부적인 정세가 변화함에 따라서 이 문학 자체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말이죠. 자, 이랬을 때, 운동에 깊이 개입하고, 사회 변혁에 깊이 몸담았던 남성 작가들이 전반적으로 뒷전으로 물러 앉고, 무력감을 느꼈을 때, 말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 늘 안에 처박혀 가지고 외면당하고 억압당해 있었던 여성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성시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여성성의 문제가 아니고, 민중이라는 계급 주체, 다시 말해서 집단적으로 존재하는 나라는 개념을 무의식을 포함한 자기라는 정체성을 지닌 개인으로서의 나로 발전시켜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왜 하필이면 여성들이 이러한 자아발생의 문제를 전경화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인데, 저는 그것이 여성시를 민중시 운동과 동궤로 놓일 수 있게 만드는 한 요소라고 봐요. 그러니까 소위 섹스라든가 젠더와 관련시킨 보편적 여성, 또는 여성성의 문제하고, 한국에서 여성시가 근본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문학적 실천, 언어적 실천으로서의 여성 문제하고는 겹치기도 하지만 조금 갭도 있는 것처럼 생각이 돼요.

노혜경의 진단에 따르면, 80년대 민중시는 <계급주체>로서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담론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심화된 자아의식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따라서 정치적 상황이 변하자 문학적으로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그 문학적 소강상태를 메우며 등장한 것이 여성시 운동이다, 왜냐하면 여성시인들은 그 동안 거대담론에 억압당한 채, 각자 골방에서 계급의식에 의해 발생한 주체성 확립에 대한 열망을 심화된 개인적 자아의식으로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 심화된 자아의식은 첨예한 언어의식에 의해 달성된다, 따라서 이제는 실천적 문학이 아니라, 문학적 실천의 국면이다.

90년대 여성시가 지니고 있는 계급의식은 80년대의 민중시로부터 전수된 것이지만, 전자가 문학외적인 거대담론들과 길항하면서 스스로를 다듬어왔다면, 여성시는 문학적/문화적 거대담론들과 길항한다는 점에서 다른 전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여성시는 80년대의 정치주의적인 문학론을 문학적인 방식으로 특화시키고 심화시킴으로써 사회적인 계급적 주체를 존재론적으로 심화된 개인적 주체로 변환시킨다는 전망을 제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성시는 스스로를 미래의 대안 담론으로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시를 규정하는 두 가지 요건을 동시에 간파하게 된다 : 독립적 주체성과 심화된 언어의식. 이 점에 대해서는 여성시에 관해 비교적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여성시인들도 이론의 여지없이 동의하고 있다.

김혜영 : 저는 여성시를 규정하는 데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요소는 여성적 자의식, 말하자면 자신의 타자라고 하는 것에 대한 타자의식과 여성적 상상력을 소유한 시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성이 스스로를 타자라고 느낄 때, 그녀는 특히 자신이 언어의 타자이며, 담론의 타자라고 느낀다. 다시 김혜영의 말을 들어보자.

김혜영 : (...) 제 스스로 생각해 볼 때, 시에 대한 관점이 확고하게 정해진 것은 아닌데, 저 자신도 모르게 여성적 자의식이 제 시에 반영된다는 것을 암암리에 느낍니다. 제가 사용하는 시적 언어의 기저에는 기존의 남성적인 언어에 본의 아니게 길들여져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서 드러나는 어떤 반발감정이 있습니다. 아직 그것들이 명확하게 시로써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새로운 시적 형식이나 다른 언어적 실험을 통해 구체화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언어적 자의식은 스스로 독립적인 주체로 몸을 일으키는 모든 여성이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이다. 나는 남자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내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내가 되고 싶다. 나는 내 말을 가지고 싶다.

모든 여성들은 말하기 위해 일어설 때의 고통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마음은 때때로 단어들을 완전히 상실한 채 대지를 내달리고 언어는 미끄러진다. 한 여성이 대중 앞에서 말한다는 것, 아니, 단지 입을 연다는 것이 얼마나 대담한 행동이고 엄청난 죄인지. 하지만 이는 이중의 고통만 가져올 뿐. 그녀가 말을 하는 죄를 저지를 때조차도 그녀의 말은 거의 항상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남성들의 귀로 추락하고 만다. 남성의 귀는 남성적인 언어에만 귀를 기울인다.7)

남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지 않는 여자는 돌팔매질을 당하고, 공개적으로 처형된다. 남성 담론이라는 입 속의 혀처럼 굴 것.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지옥으로 내던져진다. <여자의 말>이라는 <입 속의 검은 잎>은 지배담론의 생산자들인 남성들을 괴롭히고 귀찮게 한다. 여성혐오증은 특히 여성언어혐오증이다. 프랑스어로 "예쁜 여자가 되어라sois belle"라는 말은 "말하지 말아라"라는 뜻이다. 이처럼 여성은 구조적으로 혀를 빼앗긴 존재이다. 여성에게 허락된 유일한 언어는 <침묵>이다. 즉, 남성 담론에 대한 전적인 동의. 이리가레이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남자가 누리는 담론과 이론의 독점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니면, 트레보 패트먼의 용어를 빌어서 "태만한 담론idle discourse" 정도는 허용된다. 단어를 지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도록 배치하는 발하기 방식. "의미가 정지해서 미리 존재하고 있는, 메타언어적으로 불모인 언어". "자신의 지위를 받아들이는 힘없는 자의 언어, 안정의 추구가 일상의 사고도 언어의 사용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른 만족은 얻을 수 없다고 깨달았기 때문이 아닌가."8) <태만한 담론>을 사용하는 자는 지배자가 설정한 정의를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서 일반적인 세계의 움직임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는 것도 단념해 버린다. 그런데, 90년대 90년대 한국문학, 특히 여성 소설은 이 <태만한 담론>으로 가득차 있다.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는 여자들. 언어와 언어 사이에 아무런 메타 공간도 없는, 띠엄띠엄 성글게 말하는듯하지만, 실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 꽉 차 있는 소설들, 여자가 쓴 남자를 위한 소설들.

그러나 의식이 깨어나는 순간, 여성은 침묵과 태만한 담론을 버리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언어적 부적응증의 시작이도 하다. 각성한 여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말을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어쩐지 권력자에 의해 이미 선택되어 있거나, 언어를 빼앗기고 있거나, 언어가 자기를 적대시하고 있다고 느낀다"9) 여자의 말은 "단지 억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말살되어 있다."10)

구조주의자들 이래로, 우리는 언어가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며, 권력자가 권력을 수행하는 가장 근본적인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라캉은 언어가 무의식까지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이리가레이는 고통스럽게 묻는다. "그것은 누구의 언어인가." 그러므로 독립적 주체성을 찾아 몸을 일으킨 한국의 여성시인들이 누구보다도 더 언어의 문제에 민감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녀들은 억압되어 있었던만큼 더욱더 강렬하게 말을 원한다. 한국 여성시인들이 심오한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처럼 강렬한 말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그녀들이 기댈 수 있는 담론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담론을 구성하는 기본단위인 언어는 이미 남성의 것이며, 그것은, 메어리 델리의 지적처럼 이미 남성주의적 입장에서 <오염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무의식 깊은 곳까지 마구 들어와 열등감을 주입해놓은 언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따라서 여성시인들은 가능한 한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오염되지 않은 언어를 찾아서, 가능한 한 깊이, 세계의 이데올로기가 참견할 수 없는 곳까지 깊이, 무의식보다도 더 깊이, 種의 기억이 발원하는 곳까지, 깊이, 더 깊이.

<시>는 이 지점에서 여성주의자들에게 아주 특별한 효용성을 가지는 장르가 된다. 왜냐하면, 깊은 내면에서 발성되는 언어는 언어목적적인 <시>의 형태로 가장 잘 포획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이데올로기는 그 심층의 언어를 훼손하지 못한다. 다행히 인간의 깊은 심층에는 옥타비오 파즈가 단 하나밖에 없다고 불렀던 <현대시>, 즉 특권적인 언어적 직관에 의하여 구성되는 매우 특별한 인식의 형태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시인들은 <시>를 끝까지 붙잡고 가기로 결정한다. 시는 근대성과 탈근대성을 한꺼번에 성취해야 할 한국 상황에 매우 적합한 문학 형식이 될 수 있다. 시는 철학도 종교도 아니지만, 근대성의 태동기에 아주 독특한 형이상학 소임을 담당했다. 그것은 반근대적 근대성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었던, 근대의 이성적 분화에 버티면서도 특별한 방식으로 분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11), 개별적이면서도 종합적이고, 이성적이며 직관적인 아주 독특한 사유의 형식이다12). 그 가능성을 여성시인들이 앞장서서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4. 전망


최근에 한국 여성시는 문학성 높은 텍스트들을 생산해냄과 동시에 담론 구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에 여성시는 더 이상 결핍의 경험에 연연하는 소극적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자신감을 가지고 세계를 향해 걸어나가고 있으며, 심화된 언어의식을 통해 충실하게 구축한 자아를 공동체적 연대의식으로 과감하게 해체하고 탈주체적 주체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여성시는 21세기의 패러다임을 누구보다 먼저 실험하고 있으며, 도그마적 결정론 안에 갇히지 않는 새로운 보편적 靈性을 추구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 있다. 이대로 잘 진행된다면, 여성시는 종말론이라는 특수한 시간의식에 의해 특화되는 근대의 경험을 유기체적 순환적 시간관 안에 통합해 넣고, 이성과 직관을 통합하는 독특한 지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근대성과 탈근대성은 동시에 포획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풍요로운 모든 문학적 추구는 제도권 바깥에서 여성시인-비평가들에 의해 외롭게 실험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운동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절박성이 여성시인들에게 힘을 주고 있으며, 점차로 이 운동에 진보적인 남성들이 관심을 보이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시가 지금 한국 문학의 최전방에 서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들이 점차로 늘어나고 있다. 어쩌면 수년 내로 그것은 <여성>이라는 표지를 떼어버리고 보다 보편적인 문학 형식 안으로 통합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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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력집단화하면서 보수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 {창작과 비평}과는 달리, {실천문학} 진영은 꾸준히 연속성의 사명에 충실한 채로 변화의 요청에 훨씬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인다. {창작과 비평}도 여성시 특집을 기획했지만, 시인들의 선택뿐만 아니라, 비평담론에 있어서도 매우 보수적이다. 그러나 {실천문학}의 접근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몇 가지 불만은 있지만(특히 담론의 진보성과 시인 선택의 보수성이 보이는 괴리), 이 특집은 {실천문학}이 변화의 물결에 몸을 싣기 시작했다는 사실로서 주목을 요한다. 이 사실은 90년대 여성시가 80년대 민중시와 같은 자리에서 출발해서 문학적으로 심화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90년대 여성시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불릴만한 내면성과 심화된 언어의식을 체화하고 있는 시인들이 민중귀족주의 진영이 되어 버린 {창작과 비평}이 아니라, {실천문학} 진영에서 배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속적으로 성공해서 민중의 자리를 떠난 동료들이 외적 진술에 머물러있는 동안, 주체구성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이들은 내면 깊이 내려갔던 것이다. 김신용, 임동확, 정윤천 등의 시들은 90년대 여성시의 큰 특성들을 뚜렷하게 공유하고 있다.

2) 조혜정, {성찰적 근대성과 페미니즘}, 또 하나의 문화, 서울, 1999

3) 리타 펠스키, {근대성과 페미니즘}, 거름, 서울, 1999, p. 21

리타 펠스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연행performance으로 구성되는 남성성 위주의 근대성 개념에 대항하는 대안적인 여성적 근대성의 개념을 찾아내기 위해서 온갖 좁은 골목길을 다 뒤져내어 <근대성>의 이름으로 복권시키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녀의 연구는 서구의 19세기말이라는 특정한 시간대에 묶어놓고 근대를 성찰함으로써, 근대성의 보편적 인류학적 訴求ㅡ특히 합리성의 맥락이 늘 주춤거리며 전근대적 비합리성에 덜미를 잡히는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근대적 소구ㅡ에는 둔감하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근대성은 어떤 특정한 시대에 등장한 특성이 아니며, 아직도 형성중인 특성이다. 우리가 이야기해야 하는 근대성은 현실의 보고로서의 근대성이 아니라 <약속으로서의 근대성>이며, 이식 근대성을 극복해야 할 <창조적 근대성>이다.

4) 이 용어 자체로 이미 한국적 상황에서 근대를 논의해야 하는 여성주의자와 서구적 상황에서 근대를 논의하는 여성주의자의 입장은 미묘하게 갈라진다. 한국적 상황에서 이 용어는 오히려 <여성적 근대성>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의 여성주의자에게는 해체해야 할, 시대적으로 이미 정착된 근대성이 없으며, 따라서 복권시켜야 할 근대적 여성성도 없기 때문이다. 펠스키는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역사를 해체해서 재구성하면 되지만, 한국의 여성주의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근대성의 버전을 찾아 이제부터 역사를 만들어가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위험한, 그러나 동시에 특권적인 입장. 리퍼런스가 없다는 의미에서 이 입장은 능동적인 영혼에게는 매혹적이지만, 수동적인 영혼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장난스럽게 말한다면, 벤처 존재론? 우우, 한국에서 독립적인 여자로 살기가 명령하는 현기증이여, 한국 여자의 존재라는 유령이여.

5) 심진경, [여성성, 육체, 여성적 글쓰기], {실천문학}, 1999년 여름호, p. 70

6) 리타 펠스키, 위의 책, p. 86

7)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8) 데보라 카메론 {페미니즘과 언어이론}, 한국문화사, 서울, p. 264

9) 위의 책, p. 18

10) 위의 책 p. 199

11) 심진경은 김정란의 미분화와 비결정성과 모성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이 근대의 이성주의 신화의 맞은편에서 또다른 신비화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위의 글, p.70). 그것은 귀기울여 들을만한 충고이다. 결국 시간을 두고 시적 모색과 담론 생산으로 증명해 가야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도 김정란의 미분화는 세계 이전(언어학적으로는 상징 질서 이전)에 머물러있지 않다는 점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상징질서의 억압을 통과한 이후의 미분화 상태이다. 즉 그녀의 미분화의 순결성은 세계에 진입하기 이전에 깨어지기 이전 단계(향수)의 제1의 순결성이 아니라, 상징질서에 의해 깨어진 다음에 의지적으로 재구성한 제2의 순결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불순한 순결성이다. 그녀의 미분화는 <존재 이전>이 아니라, <존재 이후>의 상태이다. <순환>이란 시간적 개념을 도입해 설명하더라도, 우리는 그녀의 시간관을 설명하기 위해서 원형적 순환의 메타포를 사용할 수 없다. 어쨌든 그녀의 시간은 역사에 버티며 나선형적으로 순환하기 때문이다.

12) 프랑스의 현대시인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는 시의 이러한 특성을 가리켜서 <뜨거운 이성raison ardente>이라고 부른다.


* 이 글은 [문예중앙] 1999년 가을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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