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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정지용 <향수>
*이 글은 필자이신 황현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현대시다락방에서 옮겨둡니다. 귀한 원고를 주신 황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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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제8화
정지용의 「鄕愁」에 붙이는 사족
황 현 산 (문학평론가)
「鄕愁」는 「故鄕」과 더불어 정지용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이며, 어쩌면 가장 좋은 시일 수도 있다. 두 시에 곡을 붙인 노래는 상당히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자기를 표현해 줄만 한 <뜻 있는 노래>로 예우를 받으며 불린다. 고향은 그들에게 그리운 곳일 뿐만 아니라 언제나 성스러운 곳이다. 자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궁핍한 산야가 거기 있고, 그래서 흙과 돌과 물과 바람 같은 원초적이고 신화적인 물질세계에 몸비비고 살던 기억이 거기 있다. 가난한 골짜기의 흙과 물은 어머니이지만 그러나 변덕스럽고 포악한 계모이다. 자잘한 인정과 땅이 인색하게 약속해주는 양식들 뒤에는 더 큰 외로움과 허기와 갈증이 솟아 올라, 꿈이 되고 성스러운 현기증이 된다. 게다가 우리의 근현대사는 고향상실의 역사이기도 하다. 민족에게 불행이 닥칠 때마다 가장 먼저 고향의 한 모퉁이가 허물어져 내리곤 했었다. 『朝鮮之光』 1927년 3월호에 처음 발표되었지만 그 제작연월이 1923년 3월로 알려져 있는1) 「鄕愁」는 우리에게 그 상실이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서서히 의식되기 시작하던 시기의 첫머리에 자리 잡는다. 이후 고향은 타관객지를 외로이 떠도는 나그네에게 뿐만 아니라 거기 아직 몸 담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그리운 것이 되었다.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좋은 시절이 이 상실과 상처 이전에 거기 거룩하게 있었던 것만 같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우름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은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한 번 읽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바이고 자주 지적되어 온 바이지만, 이 시는 전체가 다섯 연으로 되어 있고, 각 연마다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후렴구가 붙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연들이 모두 <곳>과 쉼표로, 즉 불완전한 문장으로 끝나고, 후렴구가 그 <곳>을 <그곳>으로 받아 그때마다 하나의 문장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 형식적 특성은 매우 중요한데,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우선 자주 논란이 되었던 몇 개의 낱말들을 재검하는 해보는 것이 옳은 순서일 것 같다.
제1연에서는 여러 낱말들이 논란을 불러왔다.
<지줄대다>는 <지절거리다>, 즉 나직한 소리로 그침없이 속살거린다는 뜻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회돌아 나가고>도 역시 <감아돌아 나가고>일 수밖에 없는데, 해방직후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지용詩選』에서는 이를 <휘돌아 나가고>로 고쳐 놓고 있다. 김학동은 이를 부당하다고 판단한다. <휘>를 쓰면 <마구 돌다>가 되어 <강하고 큰 느낌인 데 반하여>, <회>의 경우는 <굽어돈다>는 뜻이 되어 <보다 약하고 작은 느낌이 든다>고 보기 때문이다.2) 그러나 詩選의 편자들은 <회돌다>가 좁고 급하게 돈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 <휘돌다>에는 느리고 넓게 돈다는 느낌이 있다고 여겼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지용이 <회>라고 쓴 이상 <휘>는 부당하다.
<얼룩백이 황소>에 관해서는 엉뚱한 시비가 있었다. 얼룩소는 서양 목장에나 있으며, 따라서 이 시는 진정으로 고향을 생각하며 쓴 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라는 동요까지 문제 삼았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누런 소나 검은 소를 막론하고 한국 소 가운데는 흰 점이 박힌 얼룩소가 있었다. 그리고 이 얼룩소들은 다른 소들보다 몸체가 크고 힘이 셌다. 백년도 채우지 못한 세월이 그렇게 무상하고 고향이 그렇게 무상하다.
<해설피>에 관한 논란은 아직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여러 논자들이 이를 <해가 설핏할 때>, 즉 날이 저물 무렵이라는 말로 읽고 있지만, 이를 <헤프게>로, 또는 <헤프게 슬프게>의 복합어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직 수그러들지 않았기 때문이다.3) <헤프게> 설이나 <헤프게 슬프게> 설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데, 무엇보다도 헤픈 울음이나 슬픈 울음이 <게으른 울음>으로 될 수 있는 경우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동란 이전에 발간된 시집들을 살펴보면, 이 <해설피>가 <날저물 무렵>의 뜻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용례가 하나 있다. 다음은 오장환이 번역 출간한 에세닌의 시집 가운데 「어머님께 사뢰는 편지」의 한 절이다.
어스무레한 해설피면
어느때나 꼭 같은 예감에
떨지나 않으시는지,
선술집 싸홈자리서
무듸인 식칼에 젓가슴깊이
찔려 넘어지는 이 자식의 모습.4)
이 譯詩集은 「鄕愁」나 『鄭芝溶 詩集』보다 뒤에 발표된 것이지만, 지용과 상당 기간 문단활동을 같이 했으며, 같은 충북 출신인 오장환이 <해설피>를 <해가 설핏할 무렵>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제4연의 <사철 발벗은 안해>에 관해서는 특별한 논의가 없었지만, 설명을 붙여둘 필요가 있겠다. 사철 발벗었다는 것은 신을 신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리 가난한 농촌이라지만 호롱불을 켤 수 있을 정도의 어염집 여자가 짚신도 신지 못할 경우는 없었다. 가능한 한 살을 감추는 것이 예의였던 옛사람들은 버선이나 양말을 신지 않았을 때도 발을 벗었다고 표현했다. 시인의 아내가 버선을 벗고 있는 것은 가난해서라기보다는 진자리 마른자리를 가리지 않고 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이라는 구절에서 여성비하 의식을 발견하는 것도 우리 시대의 주관성을 너무 앞세운 글읽기이다. 지용은 무던하고 든든한 아내라는 말에 겸양을 섞어 넣고 있을 뿐이다.
결코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문제는 제5연의 <석근 별>에 있다. 지용은 『조광지광』과 『정지용 시집』에서 모두 <석근>으로 썼으나 『지용시선』의 편자들은 이를 <성근>으로 고쳐 썼다. 김학동은 <정지용이 이화여대에 재직할 당시, 학생들 앞에서 이 작품을 낭송할 때는 <성근>으로 했다>는 일설을 전하지만 그것을 입증자료로 삼지는 않는다. <듬성듬성하다>는 뜻의 <성근>과 가지가지 별들이 <뒤섞여 있다>는 뜻의 <석근> 가운데서, 그는 <차고 맑은 하늘 속에 듬성듬성 박혀진 별들이 오히려> 나을 것 같다는 느낌을 덧붙이면서도, <이 양자가 그 문맥으로 보아 어느 것을 쓴다고 해도 시적으로 큰 문제는 없다>고 말하여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5)
홍정선의 의견은 주목할 만하다. 이 낱말을 일단 <성근>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는 밤 하늘에 드문드문 보이는 별들과 초라한 지붕 위로 날아가는 <서리 까마귀>를 말하는 일련의 시구들이 <조조의 短歌行에 나오는 '달이 밝으니 별빛이 흐리고 까마귀 까치는 남쪽으로 날아가는데(月明星稀 烏鵲南飛 繞樹三 何枝可依)'라는 구절을 절묘하게 변용시키고 있는 것>6)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인에게 자기 고향의 깊은 정취가 인상 깊었던 시구의 이미지로 파악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홍정선의 지적은 시구의 한 전거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시구의 깊이를 짚어내는 일에도 일정하게 관여한다. 그의 생각이 옳다면, 短歌行의 조조는 달이 어떻게 밝고 별들이 어떻게 움직이건, 까막까치들이 어디로 날아가 어느 가지에 앉건,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고 믿고 있는데, 지용은 별들의 알 수 없는 정처를 따라, 저 스스로 우짖는 서리 까마귀가 되어, 살던 곳을 떠나야 한다는 점에 「향수」의 비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저 별들이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긴다>는 표현을 바로 지나치기 어렵다. 저마다 확고한 운행궤도를 지니고 있는 별들이 모래성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 구절은 필경 이렇게 읽어야 할 것이다 : <별들은 어딘가를 향해 움직여 가는데, 시인은 그 알 수 없는 자리에, 그의 운명이 짜여지고 있을 것 같은 그 자리에, 어쩌면 허황할지도 모를 미래의 꿈을 쌓아 올리고 있다>. 아마도 이 모래성이 시인을 고향에서 떠나게 했을 터이다.
마지막으로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는 물론 <불빛 아래 둘러 앉아>의 뜻이겠지만, 빈들에 말을 달리는 차거운 밤바람과 난폭한 세상에 <등을 돌리고 자기들끼리 앉아> 있다는 뜻도 어느 정도 포함할 것이다. 따뜻한 고향은 또한 벌써 그렇게 주눅든 고향이다.
시의 제1연은 고향을 하나의 풍경화로 파악한다. 그 색깔은 노란색이다. 추수는 끝났어도 여전히 누른 빛이 사라지지 않은 황혼녁의 들판에 황소의 울음마져 노랗게 깔린다. 제2연에서는 그 풍경의 내부가 드러난다. 갑자기 푸른 회색으로 변한 적막한 색조 속에 안타까운 혈연이 있다. 제3연에서 고향은 성장의 역사 자체이다. 높이 쏘아 올렸으나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화살처럼 희망은 늘 좌절되면서 수습되고, 그에게 세상의 첫모습을 가르쳐 준 고향의 물질적 특성은 이슬이 옷을 적시듯 그의 무의식 속에 파고 들었다. 제4연에서 고향은 삶의 근거지로 묘사된다. 그 삶은 물론 가난하지만 누이의 <밤물결 같은 검은> 머리카락처럼 규명하기 어려운 깊이를 지녔다. 시인은 그 끈질기고 강력한 구심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마지막 연도 역시 고향의 밤풍경이지만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자의 내면 풍경이 거기 겹쳐 있다. 이 연을 끝맺는 현재형은 제1?2연의 그것보다 울림이 크다. 시인과 고향 간의 거리감이 이 현재형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 마을 사람들과 식구들이 <도란거리는 곳>에 현재의 그는 없다.
정지용에 관한 글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하는, 김은자의 논문 「정지용시의 現實과 悲哀」는 후렴구에 대한 설명으로 이 시의 전체적인 상을 요약하고 있다.
후렴구에 의해 이 작품이 갖는 거의 주술에 가까운 흡인력은, 언젠가는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그것이 이제 닫힌 세계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 닫히려는 문앞에서 터져나오는 복받치는 슬픔과 같은 그리움의 정서로 쓰여진 송가이자 만가라는 점에서 가능하다. 꿈엔들 잊을 수 없음을 다짐하는 이 시점이란, 그것이 사라지려 하거나 그것과의 결별이 임박한 시점을 가리킨다. 어떤 존재의 지속이 예상될 때에는 잊을 수 있다, 없다를 따지지 않는다. 고향에의 지향은 이 점에서 고향으로부터의 탈출과 양가적인 것이 된다.7)
김은자가 말하는 이 <흡인력>은 시의 통사법에 의해 다시 강화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다섯 개의 연이 모두 <곳>으로 끝난다. 다시 말해서 다섯 개의 4행절들은 모두 한 명사를 한정하는 관형절이다. 제1연과 제2연은 두 개의 관형절을, 제5연은 두 개의 관형절과 하나의 명사절을, 병열하고 있으며, 제3연과 제4연은 각기 하나의 긴 관형절로 이루어진다. 특히 시인의 뛰어난 문장 조직력이 드러나는 제4연의 관형절은 관형절 속에 관형절을 포함하는 중첩관형절이다. 이 관형절들은 고향을 추억하고 인식하고 분석하고 묘사하여 한 명사 <곳>에 수렴한다. 고향은 바로 그 <곳>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거기 폐쇄된다. 단음절의 명사로 압축되는 고향은 종이흙으로 빚은 모형도와도 같이 작고 단단한 것이다. 그러나, 마치 시간의 짧은 경과를 나타내려는 듯 줄(―)을 그은 다음, 이 <곳>을 <그곳>으로 받아 수사적 의문으로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는 후렴구에서, 이 압축된 고향은, 혹시 그것이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시인의 의혹과 두려움이 섞인 감정을 타고 확산되어, 그 실물대의 크키를 다시 회복한다. 시인에게 고향은 벌써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리게 될 시간 속에 들어가 있다. 그것을 복원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은 그 키치를 만들 뿐 그것을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 상처에 대한 자각이나 비애 같은 특별한 감정의 동원에 의해서만 기억은 삶의 시간 속에서 활성화된다. 죽은 고향의 거죽을 들어낼 때만 산 고향이 있다. 말하자면 무의식화한 기억 속에 있다. 그래서 고향에 관한 모든 좋은 노래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칸막이된 시대, 곧 현대의 노래가 된다. 정지용 역시 「카페프란스」나 「슬픈 印象畵」를 쓸 때보다 「고향」이나 「향수」를 쓸 때가 더 현대적이다.
그런데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는 정확히 무슨 뜻일까. 깨어 있는 시간에는 당연히 잊혀지지 않고, 잠을 잘 때 꿈 속에서까지 차마 잊혀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었야 한다고 누군가 주석을 붙인 적이 있다. 이치에 맞지 않다. 고향을 잊고 사는 자도 오히려 꿈 속에서는 이따금 고향을 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곳은 늘 기억 속에 있을 것이며, 고향을 잊어버리는 그런 악몽을 꾸는 일조차 없을 것이다>, ― 이렇게 읽는 것이 아마도 타당하리라. 같은 말 같지만 다른 말이다.
1) 김학동, 『정지용연구』, 민음사, 1997년 개정판, p. 22.
2) 앞의 책, p. 292.
3) <헤프게> 설을 주장하는 논자들 가운데는 <해설피>를 <헤설피>로 오인하고 있는 예도 더러 있다.
4) 오장환 역, 『에세닌 詩集』, 動向社, 1946년, p. 26.
5) 같은 책, p. 295.
6) 홍정선, 「공허한 언어와 의미 있는 언어」, 『문학과 사회』 1998년 여름호, p. 606.
7) 김은자 편, 『정지용』, 새미, 1996, p.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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