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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김종삼 <북치는 소년>
*이 글은 필자이신 황현산 선생님의 허락을 현대시다락방에서 옮겨둡니다. 귀한 원고를 주신 황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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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제7화
김종삼과 죽은 아이들
이 연재가 여섯 회를 거듭했고 이제 일곱 번째다. 대학에 안식년은 있어도 연재에 안식회 같은 것은 아직 없다. "한 주일이 대관절 언제 끝나련가"라는 질문은 아폴리네르의 시 「마리」의 한 구절이다. 엿새를 근무하면 물론 한 주가 끝나고 일요일이 오는 것이겠지만, 아폴리네르의 이 질문은 "강물은 네 슬픔과 같아 흘러도 마르지 않으니"라는 시구 다음에 오는 것이어서 섯부르게 대답할 일이 못된다. 일요일이라는 말보다도 이제는 좀처럼 쓰지 않는 공일이라는 말이 더 좋지 않을까. 공일에는 뿌리 깊은 고통도 샘이 깊은 슬픔도 잠시 잠시 그 내용을 비울 것 같다. "내용없는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찾아 김종삼의 시집을 들추니, 「북치는 소년」이 마침 여섯 줄이다.
내용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북치는 소년이 그렇게 북을 친다는 말이겠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김종삼에게 붙은 미학주의자라는 꼬리표가 싫다. 내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내 친구는 대학에 다닐 때 어느 고아원에서 자원봉사를 했는데, 미국의 자선가들이 고아들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카드의 몇 줄 사연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대개는 판에 박은 내용이지만, 한 카드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더라는 것이다 : <선물을 보내고 싶지만 그게 네 손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아 대신 비싼 카드를 사서 보낸다>. 그는 울기만 하고 이 말을 번역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자칫 하다가는 그 카드마저 아이 손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중으로 내용없는 카드를 받았을 그 불행한 아이에게 이 내용없는 것보다 더 현실인 것이 어디에 있었을까. 미학주의라는 말도 다른 말로 번역되면 그 내용없음조차 없어질까.
김종삼의 시에는 아이가 자주 나온다. 그중에 여럿은 죽은 아이이다. 「音樂」에는 <마라의 「죽은 아이를 追慕하는 노래」에 부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가깝고도 머언
검푸른
산 줄기도 사철도 우리로다
만물이 소생하는 철도 우리로다
아 하루를 보내는 아비의 술잔도 늬 엄마가 다루는 그릇 소리도 우리로다
우리란 물론 아비와 엄마와 죽은 아이이다. 그런데 김종삼은 이 시를 취해서 썼을 것이다. "로다"는 아마도 이 서구적인 시인이 이 시에서만 예외적으로 쓴 어미일 것이다. 그리고 "늬"는 말에 염결한 이 시인이 이 시에서만 예외적으로 허용한 사투리일 것이다. 이 시는 그의 시치고 예외적으로 길다.
「民間人」은 광릉에 있는 그의 시비에 새겨진 시이다.
1947年 봄
深夜
黃海道 海州의 바다
以南과 以北의 境界線 용당浦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시의 내용은 크게 어려울 것이 없지만, <민간인>이라는 제목은 조금 의아스럽다. 그것은 이 처절한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인가, 아니면 포괄적인 관계에 그치는 것인가. 여기서도 민간인을 군인이나 관리와 대비되는 신분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시는 비극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를 정확하게 전한다. 시인의 생애에 일어났던 한 사건에 토대를 두고 있는 시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독자들처럼 그가 황해도 은율 태생이라는 것과 말년의 기이했다는 그 행적밖에는 그의 이력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사공이 조심조심 노를 젓던 배에는 누구누구가 타고 있었는지, 시인과 죽은 아이는 관계는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아이는 어떻게 바다 속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의문은 많다. 시는 자세하게 말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것이 차마 자세하게 말하지 못할 정황을 생략하는 방법일 것으로 짐작된다. 아니 거기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정황의 생략 때문에 더욱 상세하게 부각되는 시간과 장소로 <민간인>이라는 제목이 설명되는 것은 아닐까 :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에, 곧 <국민과 인민의 사이>에 그 아이의 바다가 있다고.
그런데 이 설명이 옳을까. 마지막 시구를 읽는 일이 남아 있다. 20여년의 세월과 水深을 재는 일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질문을 소박하다고 만은 할 수 없는데, 그에 관해서라면 이런 대답이 가능하리라 :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가도 부모의 愁心은 여전히 깊다고. 그래서 20여년이 지나도, 그 바다는 얼마나 깊을까, 그 바다는 얼마나 깊을까, 매양 이렇게 묻게 된다고.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사람은 <민간>에 살면서도 민간에 살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시에도 자주 죽은 아이가 있다. 다음은 「背音」의 全文이다.
몇 그루의 소나무가
앝이한 언덕엔
배가 다니지 않는 바다,
구름 바다가 언제나 내다 보였다
나비가 걸어오고 있었다
줄여야만 하는 생각들이 다가오는 대낮이 되었다.
어제의 나를 만나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
골짜구니의 大學建物은
귀가 먼 늙은 石殿은
언제 보아도 말이 없었다.
어느 位置엔
누가 그린지 모를
風景의 背音이 있으므로,
나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樂器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다.
작은 언덕 위로 보이는 바다는 헛것이다. 시인은 쉼표를 찍고 다시 "구름 바다"로 고쳐서 본다. "나비"는 나비이며, 고양이의 이름이다. 이 同音과 異議 사이에서도 헛것이 어른거릴 수 있다. 대낮에 보는 이 환영들, 이 "줄여야 할 생각들"은 그의 기억의 일관성을 자주 끊어 놓는다. 대학의 석조건물이 변함없이 굳건한 것을 보면 그가 꿈을 꾸고 있거나 다른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의 풍경 뒤에 다른 풍경이 있을 뿐인데, 연극의 음향전문가이기도 했던 이 시인은 그 풍경을 무대의 장면 뒤에 깔린 배경음으로 <듣는다>.
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배음처럼 떠오르는 그 풍경 속에 살며 "세상에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가 가진 악기로 이 풍경-배음을 만들고 있다. 물론 죽은 아이이다. 시인은 아이의 손을 잡고 그 풍경 속으로, 그 배경음악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거기서는 오히려 그의 기억의 일관성이 끊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걸어들어가는 자리가 미학주의의 <내용>이기도 할 것이다.
죽은 아이가 나오지 않는 시에는 있어야 할 다른 것이 없다. 「몇 해 전에」도 전문을 적는다.
자전거포가 있는 길가에서
자전거를 멈추었다.
바람나간 튜브를 봐 달라고 일렀다.
등성이 낡은 木造建物들의
골목을 따라 올라 간다.
새벽같은 초저녁이다.
아무도 없다.
맨위 한 집은 조금만 다쳐도
무너지게 생겼다.
빗 방울들이 번지어졌다.
가져 갔던 角木과 나무조각들 속에 연장을 찾다가
잠을 깨었다.
이 적막감과 위기감과 근본적인 결여감, ― 김종삼은 이것으로 더 큰 것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꿈 속에서 판자집 하나를 고치려다 그만 두었다. 김종삼은 <몇 해 전에> 이 꿈을 꾸었던 것일까. <몇 해 전에> 그런 꿈 같은 계획을 세웠다가 그만 두었다는 말일까. 그때 그 집을 고쳤어야 했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회한은 늘 그의 것이지만 후회는 그의 일이 아닐 것 같다. 그 집을 고쳤더라도 그것이 그가 원하는 집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여감만이 그의 낯익은 집이다. 이 상처입은 당디는 민간인의 집을 짓지 않았으며, 죽은 아이의 자리에서만 삶을 바라다보았다. 풍경은 항상 꿈 속의 풍경이며, <몇 해 전에>의 풍경이다.
「무슨 曜日일까」도 제목으로 많이 말하는 시이다.
醫人이 없는 病院뜰이 넓다.
사람들의 영혼과 같이 介在된 푸름이 한가하다.
비인 乳母車 한 臺가 놓여졌다.
말을 잘 할 줄 모르는 하느님의 것일까.
버리고 간 것일까.
어디메도 없는 戀人이 그립다.
窓間이 열리어진 파아란 커튼들이
바람 한 점 없다.
오늘은 무슨 曜日일까.
병원뜰의 한가한 녹음과 어울려 있는 "사람들의 영혼"은 물론 그 병원에서 죽은 사람들의 혼이다. 빈 유모차는 "말을 잘 할 줄 모르는 하느님"이 "버리고 간 것", 즉 순결한 영혼으로 죽은 아이의 것이다. 이 빈 요람의 자리는 무덤의 자리보다 더 적막하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으며, 연인은 "어디메도" 없다. "窓間이 열리어진 파아란 커튼들"은 창문과 창문에, 그 사이의 벽을 비워두고 비춰 있는 하늘이다.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 한 점 없다. 움직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이 풍경은 "서양 나라에서 온" 카드의 그것에 몽환의 푸른 빛이 덧씌워져 있다. 여기서는 풍경과 배음의 풍경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세상 전체가 저 배음의 풍경 하나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오늘은 무슨 曜日일까", ― 시인은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더 정확하게는 현실에서 깨어나 꿈 속에 들어온 사람처럼 묻는다. 그렇게도 막막한 빈 요람의 자리는 아마도 늘 공일일 것이다. 시인이 아폴리네르처럼 "한 주일이 대관절 언제 끝나련가"라고 묻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아폴리네르에게는 과거를 잘라버리고 갈 미래가 있다. 김종삼에게는 과거라고도 할 수 없는, 모든 시간에서 고립된 한 요일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이와 비슷한 시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아마도 그리스의 시인 야니스 리초스(Yannis Ritsos)가 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쓴 시 「목마」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집을 찾을 길이 없다. 세게르스社에서 나온 그 시집의 감색 표지가 눈에 선한데, 집과 학교를 두 번이나 왔다갔다 하며 연구실과 서재를 발칵 뒤집어도 그게 어디 박혔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나는 대로 거칠게나마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은 <달밤의 회전목마장에 목마 하나가 외따로 떨어진 채 비어 있는데, 어린 숙녀가 그것을 달빛 속에 버리고 가버렸기 때문>이라는 정도이다. 그러나 리초스는 <오늘이 무슨 요일일까>라고 묻지 않았으며, 딸을 한 풍경 속에 붙잡아두지 않았다. 그에게는 미래일 수도 있는 저쪽 세계가 있다. 그의 딸은 울음을 터뜨리다 민족분단의 바다 속에 삼켜진 영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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