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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한용운,『님의 沈默』
*이 글은 필자이신 황현산 선생님의 허락을 현대시다락방에서 옮겨둡니다. 귀한 원고를 주신 황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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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제6화
『님의 沈默』의 두 시편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한용운은 훌륭한 시인이다. 그의 시대에 누구보다도 현대적이었던 시인을 나는 이 승려 시인에서 만나며, 현대의 한국어에서 어느 언어보다도 순수하고 보편적인 언어를 이 독립운동가의 시에서 만난다. 나는 여러번 그의 시를 주석하고 싶었지만, 『님의 沈默』은 그 텍스트에 의심스러운 점이 많아 그때마다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萬海가 단정하고 성실하고 시를 썼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토착어인 충청도 방언과 자신의 전문언어인 불교용어를 자주 썼고, 그때까지 우리말의 철자법이 확정되지 않았으며, 한국의 현대어가 급격한 변화를 겪었으며, 그의 시집이 발간되는 과정에 인쇄상의 오식이 많았다는 점 때문에 그의 시들을 그의 의도에 맞게 복원하는 일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따른다. 송욱의 『님의 沈默 - 全篇解說』1)은 만해의 시에 대해 깊이 있는 해석의 하나를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 텍스트의 교열에도 결정적인 진전을 이루었지만, 이 저서의 발간 직후 김현도 지적하였던 것처럼2) 여러가지 미심쩍은 점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텍스트의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천착은 내 천박한 지식과 게으름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다만 비슷한 형식을 지닌 두 편의 시를 읽어, 한 편에서는 그 해석의 어려움을, 다른 한편에서는 그 교열의 어려움을 다시 확인하는 것으로, 해야 하나 하지 못할 일을 미봉하겠다.
『님의 沈默』의 두 번째 시 「이별은 美의 創造」는 길지 않다. 현대 철자로 적는다.
이별은 美의 創造입니다
이별의 美는 아침의 바탕(質)없는 黃金과 밤의 올(絲)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永遠의 生命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美는 이별의 創造입니다3)
이 시는 수미상응 또는 수미대비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외양만을 볼 때, 첫 시구와 마지막 시구는 같은 낱말들을 같은 형식의 문장으로 순서만 바꾸어 반복하고 있다. 같은 어구를 시퀀스에서마다 반복하는 방식은 한용운이 자주 쓰는 수사법이며, 「알 수 없어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이 시에서처럼 거의 동일한 문장을 그 형식은 그대로 유지한 채 어구를 환치하여 반복하는 방식도 한용운의 독자들에게는 결코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 시의 두 시구에서 낱말들이 같다고 해서 그 의미도 동일하며, 문장의 형식이 같다고 해서 그 통사법도 동일한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별은 美의 創造입니다"는 <이별하는 일은 미를 창조하는 행위입니다>로 읽어야 할까, <이별은 미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로 읽어야 할까. 마찬가지로 "美는 이별의 創造입니다"의 의미도 <미는 이별이 만든 것>, <미는 이별을 만드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일까.
송욱은 이 문제에 관해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어떤 암시 같은 것은 그의 글에서 얻을 수 있다. 첫 시구에 관해 송욱은 "<이별은 미의 創造>이므로 현재에도 활동하고 있으며, 未來를 지향한다"고 썼다. 이 말을 우리의 문제에 적용하면 <이별하는 일은 미를 창조하는 행위입니다>라는 뜻이 된다. 마지막 시구에 관해서는 이렇게 썼다 : "美는 禪定이 創造한다는 뜻이다".4) 이 역시 우리의 문제에 적용하면 <미는 이별에 의해 창조되는 것입니다>의 뜻이 된다. 송욱은 두 시구의 통사법이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첫 시구는 두 번째 시구와 연결하여 맥을 짚어 읽으면 <이별하는 일은 미를 창조하는 행위>라는 뜻임을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시구가 열쇠인데 송욱은 이렇게 풀이한다 : "아침이 <바탕 없는 黃金>이며, 밤이 <올 없는 검은 비단>이란 [...] 우선 시간을 초월했다는 뜻이다. [...] 이제 영원의 생명은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으로 변하는데 결국 이별의 美는 永遠의 生命에도 없다고 한다. 이별의 美, 즉 절대적인 空에서 永遠의 生命이 나온다는 뜻이다".5) 송욱의 이 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 이 시구를 우리 식으로 단순하게 읽으면 이런 뜻이 될 것 같다 : 실질이 없으면서도 황금처럼 보이는 아침 햇살도(만해의 과학 지식은 따지지 말자), 올이 없으면서도 검은 비단처럼 보이는 밤의 어둠도, 생명의 영원한 순환인 자연도, 무한히 이어질 하늘의 푸른 빛도, 그것들 자체로서는 중립적인 것이어서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미추의 개념을 지니고 있지 않다. 빛과 어둠의 광막함도, 자연 조화의 숭고함과 천지의 무한함도 인간 의식의 산물이며, 이별과 같은 결여의 상태에서 그 성스러움과 위대함에의 감정은 더욱 절실해진다. 따라서 <이별은 美를 창조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 시구는 이 이별에 대한 예찬이면서 동시에 한탄이다. 이별은 위대함을 창조하는 일이며 동시에 위대함의 결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시구는? 앞의 문맥을 일단 존중한다면 역시 첫 시구와는 다른 통사법으로, 즉 <美는 이별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로 읽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정확한 논리>로 읽는 것이다. 그러나 다르게도 읽을 수 있다 : <美는 이별을 창조하는 것입니다>로, 아름답고 숭고한 것에 대한 동경이 이별을 이별되게 하고 결여를 결여로 느끼게 한다고, 내가 나의 이별에 바치는 슬픔에는 저 무한하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이상이 깃들어 있다고. 이렇게 읽는 것은 시에 다른 깊이를 주며 읽는 것이다. 우리의 선택이 어느 쪽이기를 만해가 바라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여름밤이 길어요」도 수미상응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문제가 거기서 발생한다. 초간본의 철자법을 존중하여 적는다.
당신이기실때에는 겨울밤이쩌르더니 당신이가신뒤에는 여름밤이기러요
책녁의內容이 그릇되얏나 하얏더니 개똥불이흐르고 벌레가움니다
긴밤은 어데서오고 어데로가는줄을 분명히아럿슴니다
긴밤은 근심바다의첫물ㅅ결에서 나와서 슯은音樂이되고 아득한沙漠이되더니 필경 絶望의城넘어로가서 惡魔의우슴속으로 드러감니다
그러나 당신이오시면 나는 사랑의칼을가지고 긴밤을베혀서 一千도막을 내것슴니다
당신이기실때는 겨울밤이쩌르더니 당신이가신뒤는 여름밤이기러요6)
시인은 첫 시구와 같은 말을 마지막 시구에서 반복한다. 그러나 두 시구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첫 시구의 "당신이기실때에는"이 마지막 구에서는 "당신이기실때는"으로, 첫구의 "당신이가신뒤에는"이 마지막 구에서는 "당신이가신뒤는"으로 축약되었다. 즉 두 개의 <에>가 없어졌다. 이 <에>의 생략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납득하기 어렵다.
첫째, 이 <에>의 생략은 수미상응하는 시를 쓰려는 시인의 의도에 어긋나며, 漢詩의 대구법을 잘 알고 있는 만해의 시적 감각과도 결코 어울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만해는 다른 여러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수미상응을 기했던 시에서도 첫 구와 마지막 구를 완전히 일치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예는 이미 앞의 시 「이별은 美의 創造」에서 보았다. 이 시에서 어구의 환치는 같은 말 속의 다른 개념을 드러내는 수미의 대비로 수미상응의 효과를 높였다. 그러나 문제의 「여름밤이기러요」에서는 <에>의 생략으로 얻게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둘째, "당신이기실때는"은 그렇다 치더라도, "당신이가신뒤는"은 말이 육체의 움직임과 같은 것이 될 때까지 기디리며 언제나 천천히 말하는 이 시인의 어조가 결코 아니다.
같은 말이 될지 모르나 세 번째 이유 : 첫 시구는 님과 이별한 뒤에 시인 자신에게 일어난 특이한 사건에 관해 말한다. 그래서 뒤따른 시구에서는 이 이상한 일을 설명하려고 애쓰고, 또 그 설명을 얻어낸다. 이어 마침내 시인은 이 설명을 넘어서서 자신의 희망과 결단을 다짐한다. 그리고 마지막 시구에서 그 희망의 근원이 되는 특이한 사건을 다시 확인한다. 특이한 사건을 처음 발견하는 말보다 다짐하며 확인하는 이 마지막 말이 더 천천히 발음 될 것은 당연한데도, 두 번에 걸친 <에>의 생략은 이 시구에 오히려 급격한 어조를 준다.
이 <에>의 실종에는 매우 엉뚱한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초간본을 펴놓고 이 시를 살펴보면, 빈 칸을 포함해 34자인 첫 시구는 한 줄로 처리되지 못하고 마지막 <요> 자가 뒷줄로 넘어가 있다. 따라서 마지막 시구에서도 두 개의 <에>를 그대로 살렸을 경우 시구 끝의 <요>자가 뒤로 넘어가 한 줄이 늘어난다. 그런데 이 마지막 시구는 이 페이지의 맨 마지막 줄에 위치해 있어서, 이 <요>자 한 자가 뒷 페이지로 넘어가 그 페이지 전체를 차지하게 된다. 경제적인 이유에서건 미학적인 이유에서건 글자 하나에 한 페이지 전체를 주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긴 출판사나 인쇄소 측에서, 생락해도 문맥에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되는 <에> 자 둘을 조판과정이나 교정과정에서 삭제해버렸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7) 나는 이 두 개의 <에>를 다시 살리는 것이 韓龍雲의 시를 제대로 복원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텍스트를 정확히 교열하는 일의 여러 미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시를 여러번, 그때마다 생생하게 다시 읽을 수 있는 힘을 거기서밖에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이리라.
1) 宋稶, 『님의 沈默 -全篇解說』, 과학사, 1974.
2) 김현, 「한용운에 관한 세 편의 글」, 김현문학전집 4, 문학과지성사, 1992 (1978), pp. 74-96.
3) 韓龍雲, 『님의 沈默』, 회東書館, 1926, p. 3. 현대철자역, 필자.
4) 위의 책, pp. 27-28.
5) 위의 책, p. 27.
6) 『님의 沈默』, p. 147.
7) 『님의 沈默』의 초간본을 면밀하게 살핀 송욱은 이 초간본이 저자의 교정을 거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했다. 위의 책, p. 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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