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9/7(금) 19:05
구룡폭아 너도 나를 기다리느라 백발이 성성해졌느냐  

<금강산>

구룡폭아 너도 나를 기다리느라 백발이 성성해졌느냐




                                                                이  향  지  시인

 동해의 석양! 저 뜨거운 배웅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안다. 강릉-주문진-양양-속초-고성의 밤을 밝히고 있는 저 불빛들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안다. 갈수록 파도가 높아지는 밤바다! 파도 위를 낮게 날며 한사코 뱃전을 따르는, 저 하얀 갈매기들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안다.
 반세기의 단절 끝에 열리는 금강산! 내 개인적인 소망은 백두대간을 타고 걸어서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아직 단단히 닫혀있다. 가까운 육로들은 모두 그렇게 닫혀있다. 겨울의 문턱에서 금강산행 관광선을 띄우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이 배를 전송하는 저 뜨거운 배웅들도, 궁극적인 염원은 '통일'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1998년 11월 18일 오후 5시 45분. 동해항을 떠난 '현대금강호'는 11시간 가까운 항해 끝에 장전항에 닿았다. 해가 떠오를 무렵에는 장전항 내항으로 들어와 있었다. 바다에 떠서 잠을 자고, 바다에 떠서 아침을 먹고, 바다에 떠서 일출을 보게되었다. 수평선을 열고 솟아오르는 일출이 아니라, 장전항의 수문장 같은 천불산(654m)을 통해서 거울처럼 보는 일출이다. 영진반도 너머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천불산 머리를 붉으레 물들일 때, 나는 천불산 봉우리가 한 송이 연꽃 봉오리 같은 것을 보았다. 정상에 뾰족한 바위가 하나 박혀있고, 모가 닳은 바위들이 정상을 에워싸고 모여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천불산 뿐만 아니다. 수정봉도, 대자봉도, 닭알바위산도 보는 방향에 따라 조금 씩 다르기는 하지만, 동글동글한 바위들이 서로 기대거나 포개져 있어서 연꽃으로 보면 연꽃으로 보인다. 아, 저래서 옛 사람들이 금강산을 연꽃에 비유했구나!

 천불산에서 대자봉(362m)으로 흐르는 낮은 능선 너머에 우뚝한 채하봉(1588m)이 보인다. 채하봉 머리에는 흰눈이 덮여있다. 채하봉 능선 동쪽 끄트머리에는 집선봉이 있는데, 현대 금강호 갑판 위에서 보면 마치 야구 글러브를 세워놓은 것 같다. 한꺼번에 600명을 실을 수 있다는 팬더보트를 타고 육지 쪽으로 건너오면서 보니까, 비로봉은 좀더 날카롭고 얇고 더 하얀 눈에 덮여있고, 더 오른쪽에 있다. 현대금강호 갑판 위에서 볼 때는 채하봉이 가장 높아서, 채하봉을 비로봉으로 생각했었는데, 비로봉은 좀 더 깊은 곳에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상상 속의 금강산이 내 눈앞에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할 무렵부터 창가를 떠날 수가 없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금강산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고, 비록 제한된 구역이긴 하나, 내 발로 직접 답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지도 위에서 걷는다'를 통해 금강산 주능선을 걸어 보았지만, 배를 타고 장전항으로 들어와서 금강산 능선을 바라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바다 위의 특급호텔로 불리는 현대 금강호. 높직한 갑판 위에서 바라보는 탓일까? 실제로 보는 금강산은 상상 속의 금강산보다 좀더 울퉁불퉁하고 넓게 퍼져 있다. 이제 저 산을 걸으러 가자!

저 산 속으로 들어가 보려면 몇 가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우선 식사를 마치고, 같은 코스로 가는 사람들끼리 넓은 장소에 모인다. 그리곤 그날마다 관광조장으로부터 주의 사항을 듣는다. 주로 "-마라"와 "-하라"로 일관된 내용들이다. 그 첫 번째 대상은 언제나 카메라다. 북한이 개방한 것은 금강산의 일부지, 군사시설이나 마을의 모습이나 주민들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마라"는 현지인들을 만나더라도 가족의 안부를 묻거나 편지 같은 것을 전하지 마라. 세 번째는 오랜 단절로 인해 생긴 언어의 차이를 이해하라.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듯, 용어의 차이로 인해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하라. 예를 들면 '아가씨'는 '선생'으로, '화장실'은 '위생실'로 부르고, '일 없어요'는 '괜찮습니다'로 알아들어라. 특히 이쪽 주민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마라. 손가락질을 하지 마라, 북쪽 사람을 만나도 체제를 비판하는 말을 하지 마라. 등등이다.

 동해항을 떠날 때 받은 관광증을 목에 걸고 몇 차례 줄을 선 끝에 육지로 내려섰다. 1998년 11월 19일 오전 10시 30분. 흙을 보자 어떤 아주머니가 분첩에 분가루를 묻히듯이 흙을 묻혀서 얼굴에 문질러 본다. 배가 장전항에 정박하자마자 북쪽을 향해 "오마니!"하고 부르며 울었다는 할아버지는 뵙지 못했지만, 너무나 긴 세월, 한을 삭이며 살아온 분들이어서, 주름살이 유난히 깊어 보인다. 여기는 북한 땅. 내게도 통일 전에 북한 땅에 내려선 감회가 없을 수 없다. 우리가 북한 땅을 밟은 곳은 마을이 있는 장전항 쪽이 아니라, 그 건너편이 되는 백암 쪽이다. 원래 바위가 많은 땅이기도 하지만, 산에는 안타깝게도 나무가 없다. 여기서는 아직도 나무를 연료로 쓴다고 한다. 세관 검사대를 거쳐 나오니, 현대 측에서 마련한 금강산 관광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버스들도 1-2-3-4… 순서를 지켜 서있고, 줄을 서서 출발을 한다. 관광객들도 대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대열은 마지막 날까지 흩어지지 않았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모퉁이 하나를 돌아서니 금강산 관광객들을 위하여 새로 만들었다는 도로가 나왔다. 임시포장을 해둔 도로 좌우에는 철조망을 둘러놓았다. 길 양쪽의 철조망은 마을길이 끝 날 때까지 우리를 따라온다. 철조망과 철조망 사잇길을 따라 조금 달리니 길 오른쪽 암봉 위에 매 한 마리가 보인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날개를 접고 앉은 모습이 매의 모습이 분명하다. 저 매는 금강산 산신령의 매였다고 한다. 아주 옛날, 욕심 많은 지주로부터 소작인들이 빼앗긴 땅을 되찾아주려고, 매사냥꾼으로 변한 산신령이 이 마을로 내려 왔더란다. 그 지주는 매사냥꾼이 명령하는 대로 짐승을 잡아다 바치는 매가 탐이나서, 자신의 전답과 매를 바꾸었지만, 본래의 주인이 떠나고 나자 매는 훌쩍 날아 저 산 위로 올라가더니 날개를 접고 바위로 굳어져버렸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저 매바위는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보면 더 잘 보인다.

 저 매바위가 깃든 봉우리가 바로 대자봉(362m)이다. 그러니까 저 매바위는 오봉산∼세지봉∼문주봉∼수정봉∼바리봉∼대자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끝자락에 앉아 있는 셈이다. 그것도 지나다니는 행인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서 머리를 하늘로 향한채….
 저 매바위가 꼼짝 않고 길이 잘 보이는 능선에 앉아 하늘만 보고 있듯이, 철조망 밖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초병들이 서있다. 너무 가까워 손을 흔들어도 제복을 입고 부동자세롤 취하고 있는 초병들은 아무 반응이 없다. 우리가 금강산 관광을 오는 바람에 저 군인들이  추운 곳에서 보초를 서는가 싶어 미안하기까지 하다.

 매바위에서 조금 더 오니 해금강으로 가는 길이 왼쪽으로 가지를 친다. 그 길도 역시 철조망을 둘러놓았다. 내일 우리는 저 길을 따라 해금강과 삼일포를 보러갈 것이라 한다. 온정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지나 조금 더 오니 김정숙 휴양소가 있다. 조금 더 가니 길 전면에 곡선미가 아름다운 암봉 하나가 막아서는데, 그 봉우리 비탈면에는 계란을 눕혀놓은 것 같은 바위 한 덩이가 올라앉아 있다. 계란처럼 생겼다하여 닭알바위라 부른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굴러 떨어질 것 같은데, 수수천년을 저렇게 붙어 있었다니 신기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타고 온 길은 닭알바위를 왼쪽으로 돌려놓고 창터 솔밭을 지나간다. 쭉쭉 곧은 소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철조망은 사라지고, 물소리가 들린다. 금강산 대자연 속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만감이 교차하던 풍경들도 멀어져갔다. 그 옛날 창과 화살을 실은 수레가 끊이지 않고 지나다녔다는 술기넘이고개를 넘어 조금 더 지나면 신계사터. 검은 이끼가 고풍을 더하는 고승들의 부도탑 앞을 지나, 상층부가 잘려나간 삼층석탑과, 종루가 있던 자린지 누각이 있던 자린지 화강암 주춧돌 몇 개만 남아있는 곳이 신계사터라하는데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저 자리가 아닌 것 같다.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였으며 임진왜란때는 승병들의 지휘본부가 있던 곳인데, 저렇게 좁은 땅에 대 법당이 있었을리가! 귀로에 만난 법타 스님과 이야기를 해보니 역시 내 추측이 맞았다. 저것은 신계사 경내에 있던 부속절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신계사터는 버스에 앉은 채로 지나쳤다. 목적지 의외의 도중 하차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조금 더 가니 줄줄이 서서 가던 버스가 멈춘다. 둥치 큰 소나무들이 그늘을 만들고 있는 계곡 저쪽에 깔끔한 건물이 한 채 있다. 해물요리 돌불고기등이 유명하다는 음식점 목란관이다. 도시락은 차에 두고 갔다가 내려와서 저 목란관에서 도시락을 먹으란다.

 옥류동 코스는 오를 수록 비경이 나타난다. 내가 보기에 옥류동계곡은 겪을수록 속내가 깊은 사람에 비유할만하다. 깔끔하게 쓸어놓은 산길은 등산로라기보다는 성지순례를 가는 심정이 들게 한다. 여기 사람들이 얼마나 금강산을 아끼는지 알만하다. 그들은 참대와 조릿대로 빗자루를 만들어 금강산 등산로에 떨어지는 낙엽들까지 낱낱이 쓸고 있다. 수고한다고 악수를 청하면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며 "오마니! 조심해서 다녀오시라요!" 인사도 아끼지 않는다.

 평지길 비탈길 섞어 한 숨 차게 몰아 오르니, 길 오른 쪽 계곡 건너에 누리끼한 바위 산이 얼굴을 불쑥 내민다. 상등봉에서 문필봉까지 이어지는 관음연봉 중에서도 중관음봉과 하관음봉 사이에 있는 668m봉이다. 때마침 햇빛이 좋아 그 바위산 찍느라 필름께나 죽이고 길은 지체 되었는데, 오를 수록 그 봉우리가 더 멋진 자태를 보여주는게 아닌가. 참나무도 듬성듬성, 산죽들도 듬성듬성, 금강산 자락에서 살아남은 노송들은 바위틈에 두 발을 깊이 내리고 천년송이 되었거나 안 그러면 죽었다.
 앙지교를 건너서 조금 더 오르면 길 왼쪽에 앙지대가 있다. 비스듬한 너럭바위에 '仰止臺'라 새긴 초서가 있는 곳이다. 수많은 이름들이 앙지대 세 글자를 파먹어 들어가고 있지만,  명필은 금방 눈에 띄게 마련이다. 앙지대 뒤쪽에는 굵은 노송이 서서 그늘을 만들어 주고, 바위 아래는 옥류가 흐르는 계곡이 있고, 건너편에는 무너지는 중인지 자라오르는중인지 알 수없는 암벽 틈에 노송들이 꼿꼿해서 오래 앉았고 싶은 곳이다.

 이 경치 저 경치 기웃거리느라 우리 조는 벌써 올라가 버렸는데, 아이고마 저기 저 나뭇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얀 봉우리가 비로봉 아이가? 그런데 저 비로봉을 어디서 찍어야 제대로 나올꼬. 두리번거리는데 내 앞에 높직한 바위 하나가 있다. 이끼는 말라서 미끄럽지는 않은 데 첫발 올려놓고 힘을 주어 디딜만한 턱이 없다. 누구에게 부탁을 하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마침 금강산 지키는 양반이 내려온다. 선생 내 발 하나만 받쳐주시오. 발은 받쳐 뭐하시려고 그래요 오마니! 저기 저게 비로봉 아니요? 맞소 비로봉. 나 저거 꼭 찍어가지고 가야 하는 데, 이 바위에 올라가면 잘 찍힐 것 같애서 그래요. 내가 하도 간곡하니 말리지도 못하고 그럼 받쳐 드릴테니 올라가 보시라요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 나는 그의 도움으로 그 바위로 올라갔다. 열 몇 장 남았던 필름이 마지막 장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숨도 안쉬고 비로봉을 찍어가지고는 내려가려는데 내가 비로봉 찍는 사이에 바위가 더 자란 것인지 내려갈 길이 막막하다. 이번엔 같은 배를 타고 온 남쪽 사람들이 달려와서 내려 주었는데, 배낭을 짊어지며 보니 나를 바위에 올려준 친구가 저만치서 지켜보고 있었던게 아닌가. 나를 올려주고는 못 내 걱정이 되었던가. 이번 금강산 탐승 길에 가장 못 잊을 동포애를 그때 만들었다.

 몇 발짝 더 올라오니 금수다리 앞이다. 내가 그 바위에 올라가서 보던 비로봉이 거기서 봐도 그대로다. 여기서 요렇게 보일 줄 알았으면 그 바위엔 안 올라갔을 것인데, 그래도 나는 오늘의 내 헛걸음이 마냥 헛걸음만은 아니었음을 안다.

 금수다리를 지나서 조금 더 가니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산삼과 녹용이 흘러내린다는 삼록수를 마시느라 야단들이다. 나는 내려오는 길에 고드름 한 덩이를 얻어서 얼음과자처럼 깨밀어 먹으며 오다 손이 시려서 두고 왔다. 만경다리를 지나서 조금 올라가니 셔트 누르는 소리들이 요란하다. 두 개의 바위가 머리를 기대고 있는 틈새를 빠져 나가게 되어있는 금강문이다. 나도 한 두 장 찍어서 넣고, 부지런히 올라간다. 세존봉 능선의 침봉들과 옥녀봉 기슭의 소나무들에 넋을 뺏겨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금강문 안 스무 계단을 올라 세상 밖으로 다시 태어나니 길은 거짓말처럼 평탄하다.

옥류다리를 건너와서 깨닫고 보니 하늘이 이상하게 어둑하다. 시계를 보니 1시 38분인데, 눈발이 하나 둘 날리고 있다. 아이구 이러다간 정말로 찍어야할 구룡폭포를 못 찍어 가게 생겼다. 판상절리를 이룬 세존봉 기슭에 새하얀 비말을 흩날리던 비봉폭포는 가장자리가 하얗게 얼어서 빙폭으로 변했다. 비봉폭포의 물이 고이는 연못 바로 위에는 무봉폭포가 있는데, 길 위에 서서 내려다보기 때문인가. 생각했던 것 보다 작다.

구룡폭포 물소리가 골짜기를 흔드는 지점에서 구정봉을 찍고 상팔담쪽으로 갈 수 없는 마음을 달래었다. 구룡폭포 또한 가장자리와 구룡연 아래쪽 바위 비탈이 모두 얼어서 구룡각 쪽에서 건너다본다. 구룡폭 너를 보기 위하여 나는 밤새도록 배를 타고 왔다. 어질머리가 도져서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너도 나를 기다리다 백발이 성성해졌느냐. 햇볕 좋은 날 다시 와서 너를 근사하게 담아 가리라.

 1998년 11월 20일. 물위의 정박 이틀째 되는 날이다. 오늘은 해금강과 삼일포를 보러 간다. 어제와 똑 같은 코스를 따라 열번째 버스를 타고 간다. 오른쪽 철조망밖에는 철도가 있다. 저 철도는 분단 전까지 양양과 원산을 연결하던 '동해북부선'이다. 지금은 철거되고 없는 줄 알았던 철도가 녹이 슬긴 했으나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해금강으로 가는  길에 보니 후천 모래톱에는 교각들만 서 있다. 끊어진 철도, 교각만 남은 철교들이 남쪽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 남과 북, 눈부신 햇볕 아래서 녹슬어 가고 있는 철교들이여.

오늘 가는 해금강은 군사분계선이 지척에 있는 곳이다. 북한은 우리를 위해 철조망 안에 있는 통제 구역까지 개방한 것이다. 우리쪽 통일전망대가 보인다했지만 망원경 없이는 어려운 지점이다. 바다 속에서 파도를 겪어온 바위결은 해금강의 특색을 그대로 갖추고 있지만 해금강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남강 하구는 통일의 그날까지는 출입이 어려울 모양이다.

 지금은 갈 수 없는 해금강 입석리가 고향이라는 이창식(68) 이영식(66) 형제가 고향쪽을 향해 제사를 드릴 때는 모두 따라 울었다. 그들 형제는 차례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거제 포로수용소를 거쳐 남쪽에 남게 되었는데, 어느 날 부산에서 우연히 만났다 한다. 고향에 남은 5남매와 어머니가 어찌되었는지 몰라 애가 탄다고 했다. 이창식씨는 다음날에도 내내 눈시울이 붉어 있었다. 이창식씨와는 사촌 간이라는 홍용찬(64), 홍익찬 형제까지 해금강 입석리 출신이어서 오늘 해금강에는 네사람이 고향을 찾은 셈이다.

더 기막힌 것은 온정리를 오가면서도 가족의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장희복(69)씨다. 우리가 탄 버스가 옛 양진리 3거리에 이르렀을 때 앞차가 갑자기 서더니 한 아저씨가 비닐봉지를 들고 내렸다. 준비해온 제물이라도 길에 차려놓고 자기가 지척에 있는 옛집을 향해 절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군인 뛰어와서 말렸다. 그는 쫒기듯 버스에 올랐고, 우리는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다지도 햇볕 좋고 파도조차 눈 부시는 날. 저토록 아픈 사람들은 왜 이 땅에만 있어야 하는가?

 저 모든 아픔들에서 고개를 돌리면 아름다운 금강산이 보인다. 삼일포까지 이어지는 좁은 포장도로를 소나무 향기에 젖어서 걷고 있는데, 눈 아래 들판 건너에 금강산 주능선이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것을 보앗다. 금강산 주변에는 금강산보다 높은 산이 없어서 이렇게 멀리서도 그 진가를 바라볼 수 있다. '사랑하는 혼과 혼 사이에 뛰어 노는 바다를 둘지어다' 칼릴지브란의 시 '사랑' 한 구절이 가장 어울리는 대목이다. 나는 오늘 이 길에서 금강산 둘레의 여백이 금강산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금강산 안의 풍경도 그렇다. 금강산은 능선과 능선 사이에도 서로 바라보며 음미할 만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이것은 21일에 다녀온 만물상 탐승에서도 재삼 확인한 것이다.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도 마음만 먹으면 오를 수 있는 산이면서, 암골미와 계곡미와 수림미를 아울러 갖추고 있는 산.

해금강과 삼일포를 오가는 길은 예전부터 있던 길이어서 길옆에 초등학교도 있고 중학교도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천진하게 손을 흔들었지만, 무언가를 조금씩 알게된 아이들은 손을 흔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미안한 것은 그들이 자유롭게 다니던 길에 어느 날 갑자기 철조망이 생기고 못 보던 버스와 사람들이 드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북이여, 남이여, 바람은 이렇게 섞이고 새로운 공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21일. 금강산에서의 마지막 날. 만물상의 기암들을 차례로 만나며 천선대까지 올라갔다. 우리가 바다 위에서 잠자고 금강산을 들락거리는 사흘동안 날씨가 너무 좋았다. 스믈 세살에 돌박이 아들을 업고 혼자 내려와서 이때까지 혼자 살았다는 김효원여사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를때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따라 불렀다. 많은 사람들이 천선대까지 올라갈 수 있어서, 온정리 소나무들이 너무 굵고 아름다워서, 온정리로 오르는 백여섯 구비길이 예전 그대로여서, 오후의 햇살에 수정봉이 반짝이고 있어서 우리들의 귀로는 더욱 아름다웠다.
*1998년 12월호,  월간 <산>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