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9/7(금) 19:09
큰 물결에 휩쓸린 작은 물방울의 노래  

<산행시행/금강산>

큰 물결에 휩쓸린 작은 물방울의 노래



                                              이향 지                                                                              

 강원도 산들이 잇달아 화마에 휩쓸리자, 행정당국은 등산로를 폐쇄하여 산꾼들의 발부터 묶었다. 금년 족쇄는 더욱 강성이라, 많은 비가 내리고 신록이 무성해 질 때까지 풀리지 않을 것 같다. 신고하고 허락 받고 동행 구하고 날짜 맞추는 구차함을 피해서 혼자 금강산 간다. 동네북 노릇을 피해서 유람선을 타고 보니, 효도관광 온 노인들과 기업체 사원들…. 삼삼오오 즐거운 관광객들 틈에서, 긴 바지 내려 입어 등산화 목을 감추고 배 안을 어슬렁거려본다.
"한국인들에게 금강산 유람은 여행자로서의 확고부동한 명성을 제공해준다. 그래서 많은 서울 사람들은 이 풍류 어린 명예를 거머쥐려고 젊을 때부터 벼르고 또 벼른다." 106년 전, 영국 여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63세에 조랑말을 타고 다녀가서 이런 글(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남겼다. 그녀의 말은 과장이 심하다 싶지만, 그녀의 여장과 행로는 나를 사로잡는다. 무엇보다 산 안에 머물며 금강산과 낮과 밤을 오래 함께 한 점이 가장 부럽다.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금강산엔 그런 자유가 없다.

    '이제 다 왔다고 말하지 말자 / 천리 만리였건만 / 그동안 걸어온 길보다 / 더 멀리 / 가야할 길이 있다 / 행여 날 저물어 / 하룻밤 잠든 짐승으로 새우고 나면 / 더 멀리 가야할 길이 있다 / 그동안의 친구였던 외로움일지라도 / 어찌 그것이 외로움뿐이었으랴 / 그것이야말로 세상이었고 / 아직 가지 않은 길 / 그것이야말로 / 어느 누구도 모르는 세상이리라 / 바람이 분다'
           ―고은(1933∼), 「아직 가지 않은 길」

일년 반만에 다시 보는 금강산. 연둣빛 신록으로 갈아입었다. 접안 시설이 완공되어 산이 한층 가깝다. 둘레의 산들도 성큼 자란 모습이다. 지지난해 초겨울에 본 앙상한 산빛. 오래 마음에 걸렸는데, 연둣빛이 풍성함을 되살려 놓았다. 바다에 떠서 바라보던 마을은 조금 더 멀어진 채, 저쪽 뒤편 바닷가에 그대로 있다. 집선연봉은 바깥 바다 쪽을 향하고 섰다. 머리 모아 수그린 채 명상에 잠긴 모습이다. 비 온 뒷날, 아침 안개 속이라 희미하고 멀다. 채하봉과 비로봉은 어깻죽지의 곡선을 드러낸 채, 넓은 가슴을 열었다. 세존봉은 그 그늘에 큰 불꽃처럼 앉았다. 저 능선 걸어 저 봉우리 오르고 싶다. 그림 속의 산이다. 저 산 안의 골짜기 둘. 그것이라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 두근거려 보는 것. 그 골짜기 가고 오는 도중에 만나는 풍경들. 오랜 분단으로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 먼발치에서나마 보고 느끼는 것. 미래를 위해 껴안는 것. 끝내 하나가 되는 것. 그 희망 그 소명을 바탕에 깔고 있지 않다면, 이 바닷길의 멀미, 이 단조로운 산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난초는 일만 이천 뿌리를 허공으로 들어올린 채

    줄기와 잎새는  
    해면(海面)까지 낮추어
    창공을 드높인다

    비 갠 뒷날
    뭉게구름 뜬 하늘은
    이 난초의 뿌리들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꽃

    아침에 도착하여 저녁에 돌아가는 숱한 뱃사람들
    잎맥 속 비경 만날 꿈에 부풀어 있다

    내 빈 잔에 그림 속의 산을 가득 채워주는 난초

    ―졸시, 「금강산 / ―장전만에서」

배에서 내려 구룡폭포와 상팔담을 보러 간다. 똑 같은 배낭 똑 같은 모자 똑 같은 도시락 똑 같은 버스들…. 줄지어 산 안으로 간다. 바다를 등지고 철조망 사이로 가는 길. 철조망 너머엔 녹슨 철길. 철길 너머엔 7번 국도. 끊긴지 오래지만, 길 안의 사람들 모두 잘 있다. 길은 끊어졌으나 계절은 어김없이 다녀간다. 논밭과 길 안의 사람들은 바뀌어도, 산과 강과 바다는 그대로 있다. 매바위산 바위 끝에 날개 접고 앉은 매. 닭알바위산의 닭알도 비탈에 그대로 있다. 날아오르지 않는 매나 부화하지 않는 닭알과는 달리, 길옆의 밭이랑들 호미자국 풋풋하다. 밭이랑 푸성귀들 아기 손바닥만한 잎사귀 펼친 채, 줄맞춰 나풀나풀 자라고 있다. 아이들은 학교 가고, 어른들은 논밭에 가고, 철길과 국도 사이의 좁은 땅에도 계단식 논을 만들어 써레질하고 모내기하고, 길 무너지면 들것 챙겨 나와 힘 모아 흙과 돌을 나르고…. 손잡고 말 건넬 수 없어도 모두 잘 있다. 온정천은 가뭄 탓인가. 둥글둥글한 냇돌들만 햇빛 속에 있다.

    시냇가에 돌 없으면
    냇물은 멋이 없고
    돌 있는데 물 없으면
    돌 또한 무색하리

    이 고장엔 내 흐르고
    돌마저 곁들였네
    하늘은 조화 부리고
    나는 시를 읊으리니

    ― 김병연(1807∼1863), 「금강산경(金剛山景)」에서

술기넘이고개 넘어, 창터 솔밭 지나간다. 이 수렛길로 화살을 나르던 승병들은 어느 허공에 부도를 남겼을까? 신계사 부도밭 옆을 지나며 부질없는 생각. 절간도 부처도 없는 마당에 혼자 남아 절터 지키는 삼층석탑. 그 둘레의 소나무숲. 배꽃 만발한 과수원 앞 스쳐 지나간다. 몸통 미끈한 금강송과 햇잎 돋은 활엽수들이 그늘 만들어주는 곳에서, 버스들은 서고 사람들은 걷는다. 비로소 흙을 밟고 물소리 들으며 걷는다. 낮은 둑 넘어 신계천, 오선암 옆에서 허리 굽은 노송에게 인사 건네고, 나도 목란교 건너간다. 연둣빛으로 살오른 숲. 오르락내리락 이어지는 길. 앙지대에서는 바위에 새긴 글자 짚으며 쉬고, 금수다리 위에서는 비로봉 쳐다보며 쉰다. 이 골짜기는 입구는 좁아도 속은 들어갈수록 넓다. 미인송 같은 지킴이들 곳곳에 서있다.

    소문 속 비경 찾아 긴 돌길을 오르는 날

    다리 만나면 건너고
    돌문 만나면 끼어 나가고
    철사다리 만나면 쿵쿵 오르고  
    길 밖의 잎새 하나도 만지지 않으며

    거북이도 오르고 기관차도 오르는 능선에
    우리는 오를 수 없지만

    그럴 수밖에, 그럴 수밖에, 고개 끄떡이고

    길고 구불구불한 곁가지 하나 붙들고 올라
    비취빛 여덟 연못 내려다본다  

    이 골짜기가 허락한 유일한 절정

    아슬한 잎새에 매달려 듣는 물소리, 폭포소리

    해 뜨는 바다를 끌고 곧은 절벽을 오르는
    용(龍)들의 다툼, 비늘 튀는 씩씩거림
    다시 들으면, 구름 속 꽃송이들의 흐느낌인 듯

    칼로도 불로도 자를 수 없는 큰 물기둥 아래
    제 살을 깎아 바다로 보내는
    아홉 번째 연못 있고

    그 못물 넘쳐 구슬 흐르는 치마폭 있고
    구슬 흐르는 치마폭 끊임없이 접어
    더 낮은 못으로 가는
    옥류가 있고

    화석 속 봉황 되살리는 신록의 찬사가 있고
    내 홑옷에 스미는 씁쓸한
    단비가 있다

    ―졸시, 「금강산 / ―구룡대에서」

오르던 길로 내려와 온천욕을 하고, 온정각이란 휴게소에서 오래 머문다. 몽고 천막 같은 대리석 건물은 새로 지었는데, 평양교예단이 서커스공연을 하는 곳이다. 돌아가는 날 오후에 볼 것이라고…. 아이스크림 1달러 팝콘 1달러 원두커피 2달러 쵸콜레트 6달러 개성산 홍삼가루 45달러…. 뱀술 산삼 들쭉술 기념 뱃지 티셔츠 타월 조개가루 그림…. 온천욕 대중탕 12달러, 평양교예단 공연 25달러 특석은 30달러…. 온천욕하는 값과 공연 보는 값은 주체측이 부담해야 한다고 그게 예의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 자본주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아스팔트 마당. 나는 큰 물결에 휩쓸린 작은 물방울. 이따금 열외하여 오를 수 없는 능선과 봉우리 본다. 길 건너 복사꽃밭 화사하지만, 길을 건너면 안 된다고….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금강산! 내겐 그리움 없었다. 2년 전까지는 그랬다. 아름답다 명성 높아도 갈 수 없는 산. 단념하고 살았다. 노래로 속담으로 그림으로 전설로 문득문득 찾아오는 산. 이 산 안보고도 50년 이상을 잘 살고 있었다. 모르면 그리움도 모르는 법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바람이 나를 흔들고, 갈 수 없는 산맥을 가리켰다. 그 산맥의 초입에 이 산이 있었다. 지나간 분들의 문장을 횃불 삼아, 이 산의 주능선을 통과하던 달. 바로 그때, 이 산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연! 그것은 분명 우연이었지만, 이제 이 산과 나는 필연처럼 맺어져 있다.

    '사람이 몇 생(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 몇 겁(劫)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 옥류(玉流) 수렴(水簾) 진주담(眞珠潭)과 만폭동 다 고만 두고 /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 안개 풀 끝에 이슬 되어 / 연주팔담(連珠八潭) 함께 흘러 // 구룡연 천척절애(千尺絶涯)에 한번 굴러 보느냐.'        

      ― 조운(1900∼?), 「구룡폭포」

만물상과 망양대, 천선대를 보러 가는 길은, 그 길만으로도 흡족한 풍경을 제공한다. 이 길의 마루턱은 온정령이다. 자그마치 백 여섯 구비를 돌아 올라야 한다. 수정봉 줄기와 관음연봉 두 암릉 사이를 용틀임하듯 돌아 오르는 길. 두 산줄기가 양쪽에서 들쭉날쭉 가파르게 다가들기 때문에 걸어 오르지 않고는 제대로 하늘을 볼 수 없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중심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관음폭포를 보았다. 큰 대답을 들은 것 같다. 물을 담아둘 수 없는 바위산들이라,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계절폭포들인데, 무성한 잡목 사이로 몇 개의 물줄기를 더 보았다. 분명 큰 대답을 들은 셈이다.
하늘은 흐리지만 곧 개이리라 싶었는데, 삼선암 모서리 돌아들어도 구름이 짙어, 불꽃같은 만물상 능선을 볼 수 없다. 칠층암도 절부암도 아련한 그림자만 보인다. '구름 헤치며 돌길 밟는 이 마음 가벼워라!(유태좌, "만물초로중(萬物草路中)' 희망을 품어보지만, 망양대 갈림길로 들어서도 안개는 걷히지 않는다. 누군가 그런다 심안으로 보라고! 처음 온 사람들이 몹시 낙망하는 눈치다. 제3망양대까지 올랐으나, 오르긴 올랐으나, 내가 본 것 안개와 사람뿐이다. 내려오는 길에 비 뿌린다. 늘어나는 빗방울에 우박이 섞인다. 동글동글한 얼음알들이 배낭을 두드린다. 비옷을 산중턱에 맡기고 왔지. 피할 수 없이 빗물과 하나가 된다.
금강산과 같은 비에 젖는다. 주룩주룩 흐르며 한 줄기 강 안에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나를 부수어
    거기 섞이는 것.

    오늘 나는 빈 술잔처럼
    금강비를 맞는다, 우박 섞인 소나기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 줄기 물로 통하는
    만물상 돌길에서
    취한 듯 얼어서 주룩주룩 흐르며

    이 산과 나는 하나의 강물 안에 있다
    하나의 바다로 흘러가는
     
     ―졸시, 「금강산 /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산에서 내려온 뒤에야 해가 난다. 햇볕 속에 드러나는 무수한 봉우리들. 아름답다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야속하다. 난초 한 그루의 봄이 내 안에 무수한 연못을 만들었구나!
 <<월간 '山', 200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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