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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옛 땅에 일렁이는 새 물결을 보았네  

0206 향토기행/충청남도 부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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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땅에 일렁이는 새 물결을 보았네


왕도의 후예답게 넉넉하고 멋을 아는 사람들

글·사진 이 향 지 시인 www.poemgate.com


슬픔이 있는 곳에 더 많은 마음이 간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상이 아닌가 한다. 나는 부여를 잘 모른다. 백제의 마지막 왕도였다는 것밖에. 금남정맥 답사를 하느라 한 번 다녀간 것밖에. 그러나, 그날의 햇살을 기억한다. 백제대교를 건너며 바라보던 모래톱을. 그 흰빛을, 기억한다. 굽이치던 물빛을. 유달리 많던 소나무들을, 숲 속의 정자들을, 그것들을 에워싸고 떠도는 설화들을. 다시 만나러 간다.
이틀동안 흡족한 비가 내렸다. 긴 가뭄에서 해갈된 나무들과 논밭은 연둣빛으로 풍성하다. 길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고,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가볍다.

부여 읍내로 들어서자마자 구드래 나루터로 달려왔다. 낙화암은 부소산 서쪽 모서리에 있어서 오후에 보아야 더 잘 볼 수 있다. 왕복표를 끊어 들고 고란사행 유람선을 탄다. 이틀동안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 뱃놀이하기엔 좋은데, 물빛은 흐리다. 흐린 강물 가르며 유람선은 간다. 불쑥 내민 모퉁이를 돌아서자 낙화암이 보인다. 연둣빛 잎사귀들이 가리고 있지만, 바위 빛은 검고, 모서리는 날카롭다. 저 높고 거친 바위 위에서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가 떨어져 죽었다한다. 아무 무기도 지니지 못한 여자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만든 왕. 승자들의 기록은 패자에게 불리한 쪽으로 과장을 하게 마련이지만,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왕은 스스로 패망의 빌미를 만들고 있었던 게 아닌가.
 유람선 선장의 이해와 도움으로 건너편 모래톱에 혼자 내렸다. 모래톱에 앉아서 건너다보는 낙화암. 낙화암 위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는 사람들. 그들보다 위쪽엔 백화정이 있다. 백화정에도 사람이 가득하다. 능선의 나무들은 몽실몽실 살이 올랐다. 고란사 나루터로 드나드는 배. 고란사 경내에 걸린 연등들. 사연 있는 곳마다 구름처럼 사람이 모였다 흩어졌다 한다. 강 건너에서 그 모두를 바라보는 사람 하나. 주연은 많고 구경꾼은 혼자다. 그 슬픈 전설만 없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며 시간인가.
구드래로 돌아와서 조각공원을 둘러본다. 복작거리는 도시에서 발 딛을 자리를 다투던 마음에 커다란 허방이 들어찬다. 이렇게 넓은 곳에 이렇게 밝은 곳에 이렇게 경치 좋고 사연 깊은 곳에 전시장을 얻은, 이 지역 조각가들은 행복하구나.
 이 둑길을 따라가면 어디가 나올까? 조각공원을 등지고 올라서 보았다. 폭은 좁지만, 포장이 되어있다. 군데군데 마주 오는 차를 피할 공간도 있다. 천천히 달려본다. 차창을 활짝 열어 젖히고 오늘의 강, 오늘의 햇살, 오늘의 바람을 마셔본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다. 오늘의 풍경과 사람들이다. 고수부지 초원과 둑방 왼쪽의 논과 마을과 강 건너 부산을 바라보며 천천히, 천천히 2∼3km 달리니 백제대교 옆이다. 우회전하여 다리를 건너갔다, 구드래로 되돌아왔다. 조금 낡았으나 조용할 것 같은 여관에 짐을 풀었다.

 푹 쉬고, 아침을 먹고, 부소산 올라간다. 하루 지나니 부여 읍내 지리를 조금 알 것 같다. 부소산성 입구에 차를 두고 사비문으로 들어간다. 백제의 뒤뜰로 들어간다. 납작납작한 돌을 깔아둔 길이 마음에 든다. 후원으로 산책 나온 왕이나 왕비처럼 느릿느릿 걸어본다. 성충과 흥수, 계백 장군, 세 충신을 모신 삼충사 앞에서 왕과 왕비의 걸음을 버린다. 삼충사 옆 연못에서 황소개구리가 운다. 울어라 너희라도 울어야 사당 안의 충신들이 위로를 받으리.
 삼충사 앞에서 영일루까지는 그늘 좋은 산책로다. 영일루가 가까울수록 길옆으로 도도록한 언덕이 이어진다. 소나무들이 삐뚤빼뚤 뿌리를 내렸다. 부소산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이라는데, 이게 바로 그 성곽이구나. 이 얕은 언덕에 몸을 숨기고 활 쏘고 창을 날려 침입자를 막았다. 한심하고 우습기도 하지만, 대규모 살상무기들이 판을 치는 요즘보다 그때의 전쟁들이 오히려 인간적이었던 것 같다.
 영일루 옆에는 매점들이 있다. 음료수를 한 병 마시고 조금 쉬고 군창터를 둘러본다. 군창터는 곡식을 저장하던 창고 자리다. 부소산 정상부에 있다. 이 높은 곳에다 곡식을 저장한 이유는 수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금강하류에 위치한 부여는 홍수가 잦았을 것이다. 궁성도 이 산기슭에 기대 있었을 것이다. 부소산 높이는 106m밖에 되지 않지만, 왕성에서 가장 가까운 산이다. 그러니 곡식을 이 산 가장 높은 곳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도 모두 불탔다. 쌀이며 보리며 콩이며 좁쌀이며가 모두 불타 재가 되었다.
반월루에 올라서니 부여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제대교와 수북정까지 보인다. 저 멀리 강물처럼 반짝이는 것은 군수리 일대의 하우스단지다. 금강은 그 빛남에 밀려 덜 반짝인다. 부여읍내에서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어디서나 비닐하우스 물결을 만나게 된다. 쌀 농사를 짓던 사람들도 수익이 높은 하우스재배로 돌아섰다 한다. 이 자리에 정자를 짓고 강을 내려다보며 시문을 읊조리던 양반들은 저런 강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다. 세상은 참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사자루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사비루가 아니라 사자루라 쓰인 현판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 부여편에 '泗 ' 일명 '泗 '라 한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먹물로 글을 쓰던 시대 점하나 잘못 찍어 그렇게 된 건 아닐까?
 부소산성에서 오래된 정자들은 다 보았다. 영일루는 동쪽을 향해 해맞이하고, 반월루는 남쪽을 향해 달구경하고, 사자루는 서쪽을 향해 석양을 즐긴다. 풍류, 풍류, 이보다 더한 여유와 호사가 어디 있었을까 싶다.
 낙화암 위에는 백화정이 있다. 아담하고 예쁘지만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차지를 해버려서 올라가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쉽다. 저 바위를 자연 그대로 두었더라면 더 실감나는 현장이 되었을 것을. 사연 깊은 곳마다 기념물을 세우고 싶어하는 사람들.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재고해 볼 일이 아닌가 싶다.

 고란사로 내려가니 장터처럼 붐빈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과 관광 온 어른들이 섞여서, 앞쪽도 뒤쪽도 만원이다. 부여를 찾는 관광객은 작년 한해만도 156만 명이었다 한다. 3∼5월, 9∼11월에 집중되며, 수학여행단이 주류를 이룬다. 내가 온 때가 마침 그 봄 대목이다. 거목들이 짙은 그늘을 만들고 있어서 저녁처럼 어두운 뜰. 밝은 쪽을 찾아서 돌아가는데, 피리소리가 붙든다. 조그만 종루 옆에서 한 스님이 대금을 불고 앉았다. 고란사 주지 무공(無空)스님이시다. 내 발길 붙든 곡은 상영산(上靈山) 한 대목이다. 절 마당이 북새통이니 선방인들 고요하리. 대나무 대롱에 긴 숨이라도 불어넣어 고란사 찾은 중생들 나머지 여로가 무사하기를 빌어주는 것이리.
 고란사 나루터 옆에 조룡대가 있다. 유람선 스피커에서 쉴새없이 선전을 한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을 잡았다는 바위가 저렇게 작을 수가 있나. 그렇다면 그러려니 넘어가 주면 좋으련만, 모두가 그럴 수야 없지. 내 눈은 자꾸만 고란사 쪽을 돌아본다.
유람선을 타고 구드래로 돌아오니, 불러놓은 택시가 대기하고 있다. 산성입구로 돌아와서 차를 찾아 백마강 둑방으로 간다. 부여에 와서 가장 마음에 드는 길이 이 둑길이다. 백제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규암과 읍내를 연결하던 나룻배가 왕래하던 나루터가 있었으나, 이제는 인적 끊긴 풀밭이 되고 말았다. 고수부지 공사가 한창이어서 포크레인 소리가 요란하다. 강변으로 내려가서 부산과 대재각을 당겨본다. 백마강은 마음처럼 잡히지 않는다. 하늘에 올라 내려다보면 한 눈에 잡힐까. 아쉬움을 접으며 다시 둑으로 올라섰다.

둑 안쪽은 논이다. 구교리 마을과 둑방 사이에 있어서 넓지는 않지만 모처럼 농촌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모내기를 위해 물을 가둬둔 논들이 있고 개구리 소리가 우렁차다. 써레질이 말끔히 되어있는 논이 하나 있고, 논 옆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일을 하시나 다가가 보니 볍씨를 뿌리는 중이시다. 한 사람은 커다란 체에다 흙을 치고, 한 사람은 체에 내린 고운 흙을 네모난 판에 옮기고, 한 사람은 판 안에 담긴 흙을 판판하게 펴고, 한 사람은 그 흙 위에 조르르 볍씨를 뿌리고, 한 사람은 차곡차곡 포개 놓는다. 요즘은 볍씨도 저렇게 뿌리는구나. 나 어릴 때는 무논에다 이랑을 만들어 손으로 훌훌 뿌렸는데, 그래서 한곳에 몰리거나 싹 트지 않는 씨앗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크기가 일정한 판에다 고운 흙을 깔고 저울에 단 듯 자로 잰 듯 골고루 파종을 한 뒤 논으로 옮긴다. 옮겨 심을 만큼 자란 뒤에는 판 채로 이앙기에 올려 퐁퐁퐁 기계로 심을 것이다. 모찌고, 단을 묶고, 지게로 져다 나르고, 양쪽에서 못줄을 잡고 여러 사람이 거머리에 뜯기며 줄 맞춰 모를 심던 과정들을 대부분 기계에 맡기게 되었다. 쌀미'米'자는 사람 손이 여든 여덟 번이나 간다해서 지어진 글자라는데, 이제부터는 무슨 글자를 만들어 써야 할라나. 점심때가 되었지만 함지박에 밥 담아 이고 오는 가족도 없다. 휴대폰으로 짜장면을 시켜먹는다. "짜장면 다섯 그릇!" 하려다말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손을 저었다. 바빠서 다른 데로 가야하니 아저씨 아주머니들이나 맛나게 드세요! 아직도 이런 인심이 남아있는 논두렁. 다음 날 보니 벙어리 비닐하우스 몇 동이 줄맞춰 논바닥을 덮고 있었다.

 정암사지 오층석탑은 소문처럼 아름답다. 소문이 조금도 과하지 않은 것 같다.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보고 왼쪽으로 돌면서도 보고 오른쪽 돌면서도 보고 멈춰 서서도 보고 앉아서도 보고 뒷짐을 지고도 보고 앞으로 손을 모으고도 본다. 안정감이 있다. 함부로 손댈 수 없게 하는 위엄이 있다. 저 탑이 무수한 전란을 겪으면서도 옛터에 그대로 서있는 이유. 그것은 아마 저 탑이 지니고있는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기품과 무게 때문이 아닌가 싶다.

 궁남지 들머리에서 또 한번 헛돌았다. 직진해야하는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했던 것이다. 부여관내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겪는 가장 큰 애로사항은, 목표물 직전 갈림길에 선명한 이정표가 없다는데 있다. 안내인 없이 찾아온 운전자들은 나처럼 들머리를 지나치기 일쑤일 것이다.
궁남지 주변은 습지여서 땅이 무르다. 입구에는 창포를 심은 무논이 있고, 작은 연못도 있다. 작은 연못엔 창포꽃이 피었다. 창포! 단오날 삶아서 머리를 감았다는 풀. 그 꽃들이 궁남지 옆에서 살고 있었다. 노란 꽃이 환하다. 매년 오월에 오면 누구나 저 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궁남지 둘레를 한바퀴 돌며 수양버들 그림자를 즐기는 사이 하늘이 흐려진다. 저녁이 이처럼 빨리 오다니.
들어갈 수 있을까? 염려하며 달려온 박물관. 아슬아슬하게 입장을 했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는 물건은 '백제금동대향로'. 1993년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되었다하며 높이는 62.5cm, 몸통지름은 19cm. 구리합금으로 주조한 뒤에 금도금을 하였다. 맨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꽁지를 들어올리고 앉았다. 타오르는 불꽃 하나하나 마다 악기를 든 신이나, 코끼리 탄 사람, 말 탄 사람, 새, 학, 원숭이 등을 조각해서 앉혔다. 향로의 발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용 모양이다. 향로 자체가 하나의 불꽃이기도 하다. 향로의 몸통은 짧은 꼬리를 내려 용의 입에 물려놓았다. 불을 담는 그릇이 불꽃을 상징하고 있다. 아름다워라! 이 향로 하나 만난 것만으로도 내 수고는 커다란 보상을 받은 셈이다.
읍내에서 뺑뺑이를 돌다보니 외곽이 보고싶다. 수북정 앞을 지나 지방도로를 갈아타며 남면과 임천면을 둘러보았다. 나직한 산들을 두르고 있는 땅. 곳곳마다 농토다. 평화롭고 넉넉해 보인다. 부여의 기반이 농사에 있다는 걸 실감한다. 날이 어두워서 성흥산성엔 오르지 못하고 구드래로 돌아왔다.
 저녁도 먹을 겸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간다. 혼자 갔다 못 찾고 돌아온 신동엽 시인의 생가를 찾기 위해서다. 너무나 가까이 있는 집을 못 찾고 헤매었구나. 날이 저물어 사진은 찍을 수 없지만, 위치는 점찍어 두었다. 이제는 밥을 먹자. 배가 고프다. 한정식으로 유명한 개성식당에서 정식을 먹는다. 7,000원 짜리 밥상이 푸짐하다. 30년 전통을 지녔다는 명성답게 모든 재료를 맛나게 다룰 줄 아는 댁이다. 중앙시장은 늦은 시간인데도 불 밝힌 가게가 많다. 떡집 기름집 과일가게 옷가게 닭집…. 닭을 납작하게 펼쳐서 몇 마리씩 포개 놓은 것이 눈길을 끈다. 여러 곳을 다녀도 저렇게 진열해놓은 닭은 처음 보았다. 물레처럼 휘휘 돌아가는 끈 두 가닥이 쉬파리를 쫓고있다. 참기름을 한 병 사들고 구드래로 돌아간다.

 밤에는 주룩주룩 소나기가 오더니 아침이 되자 실비로 바뀐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수북정으로 왔다. 수북정은 전망 좋은 자리에 있다. 백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나무들이 웃자라서 경치를 많이 가렸고, 백제대교를 지나다니는 자동차 소리 때문에 소음이 심하다. 소문 듣고 찾아온 나그네나 기웃거리다 간다. 정자 안의 편액들이나 기웃거리다 간다. 정자 앞 암반은 자온대라 하는데, 튼튼한 난간을 둘러놓아 내려갈 수는 없다. 규암 나루터로 내려가서 모래톱을 걸어서 바위 앞까지 왔지만 강물에 막혀 오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다.
신동엽 생가로 다시 와서 사진을 찍고, 시비를 찾아간다. 부여 체류 사흘만에 백제대교를 열 번 이상 건너다녔는데, 여러 사람에게 신동엽 시비 있는 곳을 물었었는데, "백제대교 건너자마자 유턴해서 읍내 쪽으로 다시 돌아오다가 다리 끝나는 지점에서 우회전하여 70∼80m 들어가면 솔밭 속에 있다"고 똑 떨어지게 설명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도 경찰서 앞에서 왼쪽 길로 들어갔다 좁은 농로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서 솔밭으로 건너와서야 만난 것이다. 백제 유적지를 전전하던 눈에 선생의 시 '산에 언덕에'가 환하게 들어찬다. 맑아라, 향토와 사람을 껴안고 살다간 이여.  
시비 앞쪽 들판엔 하우스단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꼭 찾아보고 가리라 마음먹고 있던 백마강수박단지다. 금강물결에 실려온 흙과 모래들이 드넓은 충적지를 만들었고, 그 기름진 땅에 부여사람들은 수박을 심었다. 수박농사를 만평 정도 짓는다는 농부 김영선(43)씨를 만나 백마강 수박 이야기를 듣는다. 하우스 한 동은 200평. 한 동에 450포기를 심는다. 한 포기에서 한 개의 수박만 길러서 딴다. 나머지 꽃들은 따버린다. 2월말과 3월초 모종을 하는데, 100일 정도 지나면 수확을 한다. 무게는 6∼8kg. 당도가 높고 크다. 수박을 수확한 뒤에는 하우스를 철거하고 단무지 무를 심는다. 값이 좋을 때는 쌀 농사보다 낫고, 그렇지 않을 때는 힘들다며 웃는다. 하우스 문을 열자 더운 김이 훅하니 달려들었다. 중간쯤 자란 수박은 규중심처의 아가씨처럼 잎사귀 속으로 숨으려했다.

능산리 고분군은 참 좋은 자리에 있다. 양지바르고 아늑하다. 나는 풍수 같은 건 모르지만, 이런 곳이 바로 명당이리 싶다. 입구 쪽에 모형분을 만들어 놓았다. 지안에서 본 고구려고분 같은 것도 있고, 경주에서 본 천마총 비슷한 것도 있다. 진짜고분군은 한참 들어간 안쪽에 있는데, 의자왕과 태자융의 설단을 거쳐가야 한다. 의자왕 설단은 2000년 9월에 중국에서 옮겨와서 만든 것이라 한다. 1,342년 전에 부여를 떠났으니, 유골인들 남았을까. 포로로 잡혀가서 흙이 되어 돌아왔으니, 이제는 그 영혼 편안해졌을까? 잃어버렸던 옛터를 다시 대하매 오히려 회한과 죄책감에 가슴을 뜯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부여 사람들은 그를 버리지 않고, 고향으로 데려왔다. 부여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백제에 있음을 알겠다. 백제를 구심점 삼아 뭉치는 마음을 알겠다. 잿불에 묻어두었던 불씨처럼 가슴에 간직해온 뜨거움을, 그 자랑을, 하나하나 꺼내어 펼쳐놓고 있음을 알겠다.
이제 읍내는 다 보았다. 무량사로 가자. 읍내를 벗어나서 외곽으로 가자. 산이 있는 곳으로 가자. 백제대교 건너서 4번 국도를 따라간다. 이 길로 내처 가면 서천에 닿는다. 규암면 사무소 앞 사거리를 지나서 7.5km 정도 가니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쪽 차선으로 타고 조금 더 가니 또 삼거리다. 무량사 표지판보고 계속 달린다. 공주에서부터 타고 온 40번 국도다. 부여읍내에서 4번 국도와 겹쳐서 오다가 구룡면 삼거리에서 독립하여 보령 쪽으로 간다. 그 길을 타고 간다.  

 길로 나서면 도로 번호를 외우며 다니는 게 좋다. 그편이 안전하다. 남·북으로 통하는 길에는 홀수 번호를 매기고, 동·서로 통하는 길에는 짝수 번호를 매긴다. 4번 국도도 40번 국도도 동·서로 통하는 길이다. 구룡삼거리에서 15km정도 달리니 또 삼거리다. 보령은 직진, 외산면 소재지와 무량사는 오른쪽에 있다. 우회전하여 606번 지방도로 들었다. 그런데 가까이 있을 줄 알았던 무량사가 가도가도 없다. '만수산 휴양림 표지판을 보고야 아차 한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으니 청양 경계까지 가보자 반고개를 넘어갔다 차를 돌렸다. 비는 내리고 안개가 자우룩히 덮이는 길. 그러나, 나는 이 길이 좋다. 잘못 왔기에 만나는 들판과 산자락들. 길옆 마을과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 비에 젖어 더욱 싱싱해진 초록빛. 그들 속으로 천천히 달리며 오래 달려온 피로를 회복한다.
외산면 소재지 번화가로 들어왔으나, 무량사는 찾기 어렵다. 삼거리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왔다. 비오는 저녁 때,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다. 한 차례 더 허탕을 친 뒤에야 우산도 없이 나온 청년을 만났다. 그 청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 눈 도장을 단단히 찍어두고 다시 올라가니, 우스워라, 이 앞을 세 번이나 지나갔는데, 중국집 모퉁이에 세워둔 '무량사' 표지판은 글씨가 작고 수수한 빛이고 땅에 붙어 있고, 그 위에 세워둔 중국 집 '명가루' 간판은 더 크고 선명해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무량사 오르는 길은 가로수가 좋다. 무량사 뜰에 서니 실비가 내린다. 부드럽게 감기는 빗발 속에 침묵으로 서있는 극락전. 오층석탑. 석등. 얼마나 오랫동안 한 자리에 서 있었는가. 이끼 앉은 몸. 세상은 무채색으로 어두워 가는 데, 돌아갈 생각을 않는 새 한 마리 서성거린다.

 가보지 않은 길은 어디일까? 지티재를 넘자마자 홍산면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날은 어둡고 비는 내리지만 아무도 없는 길. 613번 지방도로. 안개등을 켜고 천천히 달리며 차창을 열었다. 촉촉한 빗발에도 유리창에는 수 없는 물방울이 맺힌다. 맺혔다 흘러내리기를 되풀이한다. 나는 들이킨다. 그 촉촉함을. 마을은 드물고 산은 가깝고 골짜기는 좁고 계단식 논이 있는 곳. 내 마음에 깊은 또아리를 틀고 있는 향토란 바로 이런 모습이다. 나는 만끽한다. 참았던 숨을 쉬며 싸매고 있는 보따리를 한 겹씩 풀어놓는다. 이런 곳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개발에 밀려 사라지고 있다. 낙후된 곳이 더욱 각광받는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홍산면 일대에도 유적은 많지만, 서천∼부여 길목에 있는 면소재지에 모여있다. 그것들은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이 땅, 이 맑음, 그것을 전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4번 국도로 합류하여 조금 더 달리니 남면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있다. 우회전하여 다시 남면으로 간다. 남면사무소 앞을 지나 안장개를 다시 넘는다. 임천시가지를 통과하여 성흥산으로 올라간다. 대조사엘 먼저 들러 미륵보살입상을 본다. 거대한 보살상 앞에 서니, 다 어두워진 것 같던 날이 어디선가 밝은 빛을 보내고 있다. 절 아래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와 그 흰빛으로 인하여 만나게되는 밝음이다. 아니다. 보살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이다. 바위 옷은 오래되어 퇴색하였지만 가느스름한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은 살아있는 사람의 것 같다. 그 눈빛을 대하자 저절로 두 손이 모아졌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합장을 않는다면 가슴이 없는 사람이리라.
성흥산성. 드디어 왔다. 충혼사 안은 어둠이지만 정상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밝다. 능선까지 올라갔다 다시 내려온다. 성흥산 정상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다. 밝을 때 왔다면 흐르는 금강을 볼 수 있을 곳이다. 이 산에 둘레 2천7백5척(尺), 높이 13척의 석성을 쌓은 백제 동성왕은 이 성을 쌓았기에 부하에게 죽었다. 성을 지키라고 보낸 관리가 복지부동하자 나무라다 그의 칼에 시해 당한 것이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 우매한 구석이 많다. 자신의 잘못을 남을 죽여서 덮으려 한다. 하늘은 공평하지 않다. '善'보다 '惡'에게 더 큰 칼자루를 지어준다. 되풀이되고 있다.
다 어두웠는가 했지만, 보자기만한 밝음이 남아있어 가보지 않은 길로 들어서게 한다. 지토리∼상황리∼하황리∼사산리∼반조원리∼동사리로 돌며, 장암면∼세도면∼임천면 남쪽지역을 둘러본다. 세도면 일대에 펼쳐진 광활한 하우스단지에 또 한번 놀란다. 이곳에서는 방울토마토를 심는다고 한다. 세도면은 방울토마토로 부자가 되었다한다. 길에는 어둠이 깔리고있지만, 사람이 살고 가꾸는 땅은 어둡지 않다.

이제는 부여를 거의 다 보았다. 세 번째 밤을 보내고 부여읍을 등진다. 또 한번 백제대교를 건너간다. 은산면으로 들어간다. 밤새 내리던 비가 개였다. 도로변 장승 부부가 인삼딸기를 선전하고 있다. 청양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왕래하는 차량이 많다. 청양이나 홍성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일 것 같아, 만날 때마다 앞세운다. 나는 조금 늦게 돌아가도 되지만, 저들은 9시전에 도착을 해야지.
은산별신당 앞에서 산책 나온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은산 별신제는 소제와 대제를 번갈아가며 지내는데, 올해는 큰 제사 지내는 해여서 볼만했다고 한다. 장승을 세울 때가 특히 볼만했다고 다음에 구경 오라고 선전을 한다.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이어서 그런지 부여사람들은 친절하다. 한 아주머니는 별신당 앞 계단을 올라가서 합장 배례하고 한 아주머니는 제법 오래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과 헤어져 큰길로 나오니 좀 더 밝아졌다.
하홍산리 들어서니 또다시 하우스 단지다. 반달모양으로 씌운 것이 아니라, 지붕만 덮었다. 들여다보니 포도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다. 새 넝쿨이 돋고 어린잎이 돋았다. 노르스름하고 몽울몽울한 것은 꽃봉오리다. 저 꽃이 피면 벌과 나비가 몰려와 수정을 도울 것이다. 여름철 이 길을 지날 땐 포도밭 옆에 차를 세우고 맛난 포도를 먹으리라.

평야를 지난 길이 구불거리며 고도를 높인다. 가장 높은 곳에는 나발티고개가 있다. 조금 전에 나령이란 마을을 지났으니, 옛 이름은 분명 나령이었으리라. 오르는 길 가팔라도 창안으로 들어차는 빛. 사흘동안 머물며 부여를 보고, 부여사람들이 지어주는 밥을 먹으며, 그들이 짓는 농사와 그들이 믿는 신앙과 그들이 아끼는 예술과 문화재들과,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백제를 만나고 가는 길. 들어설 땐 멀고 낯설었으나, 떠날 때는 환한 빛이 눈에 가슴에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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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어떤 곳인가?
 충청남도 부여군(忠淸南道 扶餘郡)은 123년 동안 백제의 왕도(王都)였다. 백제 역사 678년(BC18∼AD660) 중, 26대 성왕 16년(서기538년)부터 31대 의자왕 20년까지. 백제 문화는 부여에서 꽃을 피웠다. 서기660년 나당연합군의 협공을 받고 백제가 없어진지 1,342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신라∼고려∼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으로 소속 국명은 바뀌었어도, 찬란하던 문화의 흔적들은 보존되어 있다.
 부여는 금강 하류 기름진 평야를 끼고 있어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다. 고대에는 마한과 초산국에 속했고, 백제 때의 이름은 소부리군(所夫里郡) 또는 사비(泗 ·일명 사자泗 )였다. 백제 성왕이 웅천(지금의 공주)으로부터 도읍을 옮긴 후에는 남부여(南扶餘)라 부르기도 했다. 백제 패망 직후에는 당나라가 세운 웅진도독부에 속했고, 신라 문무왕 12년(단기3005)에는 총관을 두었다. 신라 경덕왕 때 부여(扶餘)로 고쳐서 군(郡)이 되었다.
 기록에 남아있는 이름들은 소부리(所夫里)·남부여(南扶餘)·반월(半月)·사자(泗 ) 혹은 사비(泗 )·여주(餘州)등이다.(삼국유사·동국여지승람·한국지명연혁사전·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충청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부여군은 북쪽은 청양군, 동쪽은 공주시와 논산군, 서쪽은 보령시, 남쪽은 서천군, 금강을 경계로 전라북도 익산시와 맞닿아있다. 2002년 5월 현재의 행정구역은 1읍(邑·부여), 15면(面·외산·내산·은산·옥산·홍산·구룡·규암·남·장암·충화·양화·임천·세도·석성·초촌), 191리(里)로 구성되어 있고, 인구는 90,373명(2002년 1월 1일 현재)이다. 기후는 온대성 기후에 속한다. 여름철 최고 기온 37℃, 겨울철 최저 기온 -16.8℃. 연평균 강수량은 1,275㎜. 지난해처럼 가뭄이 심할 때는 752.6㎜에 불과하였다.
부여군의 총면적은 624.48㎢로 우리 국토(99,545.77㎢)의 0.63%, 충청남도(8,958.70㎢)면적의 6.97%로, 충남 도내에서 공주시, 서산시, 당진군, 천안시에 이어 5번째로 넓은 땅을 보유하고 있다. 이중 농지는 200.45㎢로 총면적의 32.1%, 임야는 322.85㎢로 51.7%(행정자치부 통계 참고)다.  
 부여의 기반산업은 농업이다. 부여읍 백마강변 군수리·왕포리 일대의 평야와, 규암면·세도면 일대에는 대규모 하우스단지가 조성되어, 사계절 토지를 활용한다. 여름에는 수박, 겨울과 봄철에는 방울토마토와 알타리무 등의 과일과 채소 농사를 짓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쌀 농사를 짓고, 수박을 거둔 후에는 단무지 무를 심는다. 산이 가까운 홍산면·은산면 일대에서는 포도농사를 많이 짓는다.
 부여군 곳곳에는 백제시대의 유물·유적이 보존되어 있고, 백마강 일대의 경관이 아름다워서 수학여행단과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부여군에서는 '백제역사재현단지'를 조성 중이다. 규암면 합정리 일원 백 만평 부지에 국비·지방비·민자 등 4,528억 원을 유치하여, 1994년부터 2005년까지 12년간에 걸쳐 완성 예정이다. 개국촌·왕궁촌·전통민속촌·군사통신촌·장제묘지촌·산업교역촌·풍속종교촌·기능촌 등으로 꾸며지게 되며, 필요 인력 육성을 위하여 3년 전 '한국전통문화학교'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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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산>>, 2002년 6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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