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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정선군], 아리랑, 아리랑, 가락에 네 바퀴를 싣고  

0205 향토기행 / 강원도 정선군

아리랑, 아리랑, 가락에 네 바퀴를 싣고


강물도 굽이굽이 산고개도 굽이굽이 아리랑가락도 굽이굽이
글·사진 이향지 시인 www.poemgate.com


오지가 각광받는 시대가 왔다. 도시와 문명은 편리하기는 하지만 근원으로 향하는 향수를 달래주지는 못한다. 콘크리트 밀림은 숨쉬는 공기를 답답하게 한다. 나는 떠난다. 초록빛이 있는 곳으로. 참았던 숨을 쉬려고.  
 정선은 내가 고향보다 자주 오는 곳이다.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오대천을 따라 내려간다. 가리왕산 입구엔 못 보던 장승이 섰고, 물레방아도 돌아간다. 숙암리 도로변엔 밥집과 찻집, 민박집이 늘었다. 간판은 늘었는데 성수기가 아니어서 한적하다. 나전 삼거리로 나와서 조양강을 거슬러 오른다. 가뭄 탓인가. 강이 무척 야위었다. 강변 소나무밭도 목마른 빛이다. 그들 곁을 지나가는 나도 목이 마르다.  
 터널에서 나오는 기차를 담으려고 반시간 가까이 기다렸다. 조양강 상류 곡선구간 철교 옆이다. 포크레인으로 강바닥을 긁어내는 소리. 바람 같은 자동차들. 소음은 싫지만 원하는 것은 얻었다.
 아우라지를 잠깐 들여다보고 구절리로 들어왔다. 강릉시 왕산면 경계까지 올라갔다 차를 돌린다. 오장폭포에는 이미 그늘이 졌고, 송천 모서리에도 산 그림자가 짙다. 아침 먹고 집을 떠나 이 강변까지 나를 태우고 달려온 차창에도 저녁 해가 들어찬다.

 효진이는 고등학교 2학년이다. 보충수업을 마치면 밤 10시가 된다. 저녁 먹고 조금 자고 효진이를 데리러 간다. 효진이 아빠 트럭이 고장이 나서 강릉에 갖다 맡겼는데, 내가 데리러 가지 않으면 자전거를 타고 1시간 가까이 밤길을 저어 와야한다. 효진이네 집은 구절리 갓거리에서도 한참 들어온 자개골 언덕에 있다. 유천리 자개골에서 효진이 학교가 있는 여량까지는 자동차로 20분쯤 걸린다. 예정보다 10분쯤 늦었더니 아이가 없다. 차를 돌려나오니 캄캄한 보도 위에 자전거를 세우고 섰다. 녀석! 어느새 저렇게 컸구나! 나는 저 아이가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알고 지냈다.
 내가 좋아하며 몇 번이나 오르내린 상원산. 자개골은 상원산 그늘에 있다. 내가 효진이네를 알게 된 것도 상원산 덕분이다. 자개골의 밤은 아늑하다. 주먹만한 별들이 초롱초롱 머리 위를 비춘다. 나 살던 서울 하늘이 잃어버린 별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인사하는 것 같다. 저 맑은 별빛에 근심걱정 씻으며 아이들은 쑥쑥 자랐다. 효순이는 올 봄에 강원대학엘 들어갔고, 효경이는 중2, 동진이는 중1이 되었다. 자갈밭 일구어 배추농사를 열심히 짓더니 너와집이 파란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돌 두 개에 발 하나씩 얹고 쪼그리고 앉아서 뒤를 보고 나면 재를 한 삽 끼얹어 거름더미로 던지던 뒷간은 수세식 화장실로 바뀌어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부뚜막 하나에 가마솥 둘을 걸고 사람 밥도 끓이고 소죽도 끓이던 부엌은 동선이 편리한 입식으로 바뀌었다. 스위치만 돌리면 화력 좋은 가스 불이 두부도 지져주고 찌개도 끓여준다. 그러나, 아이들 학교 오가는 길은 시간이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저 아이들도 독립할 만큼 자라면 구절리 골짜기를 차례로 떠날 것이다.

 10년 전 만해도 황량하기 그지없던 폐광촌. 바람이 불면 석탄 가루가 하늘을 덮어 낮도 밤처럼 어두워지던 곳. 도처에 널려있던 폐광의 잔재들. 합리화를 요구하며 펄럭이던 현수막들. 빈집들. 광부들이 떠나버린 광산 사택들. 검은 벽. 곰팡이 피고 찢어진 도배지. 경첩이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이며 깨진 유리창. 부서져서 나뒹구는 가재도구들. 그 휑한 집들을 내려다보던 검은 산비탈. 그 을씨년스럽던 풍경들. 이제는 많이 회복되어 곳곳에 꽃도 보이고 새로운 간판들도 늘어간다. 그러나, 갈수록 젊은이들은 줄어든다. 드문드문 찾아드는 여행객들만 젊다. 정선선 단천철도의 종착역인 구절역에는 상근 직원도 없다. 표 팔던 창문도 합판을 질러 폐쇄해 버렸다. 청량리∼구절리 간을 왕래하던 밤 기차도, 증산역에서 기관차를 바꾸어 달고 정선역까지만 온다. 증산∼구절리 간을 연결하는 기차도 하루에 세 번, 기관차 한 량에 객차 한 량을 달고 오가는 꼬마열차로 줄었다. 저 아이들마저 자라서 떠나고 나면 구절리엔 누가 남을까.  
 내가 처음 구절리로 왔던 날. 청량리역에서 밤 기차를 타고 새벽에 내려 상원산 등산을 가던 날. 산에는 눈이 깊고 길은 얼어있었다. 나는 늦게 내려와서 기차를 놓쳤다. 혼자 남게된 구절리. 낯선 곳. 밥집 건너방에서 뜬눈으로 새우며 구절리의 절망 그 캄캄한 바람소리를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내 두 번째 시집 제목을 '구절리 바람소리'로 삼게 된 배경에는 이런 원인이 깔려있다. 나는 구절리에 오면 마음이 편하다. 무덤덤한 사람들. 그들 안엔 식지 않는 정이 흐르고 있다.

 따뜻한 온돌에서 깊은 잠을 자고, 감자밥과 쑥국, 달래무침과 씀바귀나물로 아침을 먹었다. 아이들을 태우고 자개골을 나선다. 다락산 머리에 둥근 빛이 얹혔다 스르르 미끄러지면서 송천 물결에 새하얀 깃털을 달아주고 있다. 부풀며 깨어나는 저 물결에 몸을 싣고 구절양장 굽이치며 흐르다보면 저 물결처럼 푸르러져서 아우라지에 닿을 것이다. 급한 비탈을 만나고 돌멩이에 부딪치고 풀잎에 베일 때마다 애간장 끊어지는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다시 모이기를 되풀이하는 물방울들. 나는 송천 물결에서 삶을 보고 죽음을 보고 무수한 부활을 보아왔다. 오늘 아침도 새처럼 지저귀며 길옆을 바짝 따른다.

 유천리 길목 밭에 감자 파종이 한창이다. 한 사람은 우산처럼 생긴 기구로 밭이랑을 푹푹 찌르고, 한 사람은 씨감자를 한 톨씩 넣어준다. 빠르다. 무척 빠르다. 밭이랑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걸음을 치면서 호미로 심던 옛날에 비하면 얼마나 빨라졌는가. 저렇게 심으면 밭 한 뙈기 파종에 두 시간도 안 걸릴 것 같다. 이제는 농사도 머리로 한다. 김 매고 물주는 수고를 덜려고 밭이랑엔 줄줄이 검은 비닐이 덮였다. 저렇게 해도 농사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어서 젊은 사람들은 멀리 달아나기만 한다. 사흘 뒤 나는 이 길을 다시 들어오다가 칠순 넘은 할머니가 혼자서 밭이랑에 비닐을 덮는 것을 보았다. 다른 밭에서는 소가 끌고 가는 비닐 뭉치를 할머니는 혼자서 끌고 덮고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같은 일을 해오셨는지 빠르고도 능숙했다. 농사도 경험으로 하는 것인데, 저런 노인들 다 돌아가시고 나면 누가 철 맞춰 이랑 만들고 감자를 심을까 싶었다. 농사철에 논밭 옆을 자동차 몰고 지나기란 정말 미안한 일이다.

 아이들을 학교 앞에 내려주고 구미정으로 간다. 지프를 몰고 왔더라면 골지천 물길로 내려가서 반론산 발치 자갈밭을 질러 오르련만, 오늘은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봉정리∼반천리를 지나간다. 4∼5년 못 와본 사이에 구미정 입구에는 매표소가 생겼고, 구미정 바로 뒤편에도 민박집이 생겼다. 그 사이 정자는 좀더 쇠락해진 모습으로, 아침볕을 받고 섰다. 울퉁불퉁한 암반 틈에 진달래가 피어 화사하다. 철다리를 건너가서 앵글을 맞춰보지만 물 속까지 들어찬 산 그림자는 일어설 줄 모른다. 정자 앞을 서성거리며 물소리를 듣는다. 맑다. 만지고 싶다. 손씻고 발 담그고 싶다. 나도 얼치기 도시생활을 접고, 이 정자를 지었다는 이자선생처럼 물과 별을 벗삼아 살아볼거나. 뜬금 없는 욕망이 암반 틈 진달래꽃처럼 피었다 진다. 내 마음자락 와락 끌어당기다 날아가는 새여! 새하얀 물결에 날개 씻고 화들짝 날아오른 새여!

 정선의 마을과 마을 사이엔 언제나 크거나 작달막한 고개들이 있어 오를 때는 숨차고 내려갈 땐 후둘거린다. 작은 너근령 넘어서 임계 시가지로 들어왔다. 시외버스 정류장 옆에 가면 고기도 맛나고 밥도 맛난 집이 있는데, 오늘은 거기까지 둘러갈 시간이 없다. 사거리 모퉁이에서 효진이 아빠를 내려주었다. 임계에서 버스를 타고 강릉으로 가서 트럭을 찾아 돌아올 것이다. 효진이 아빠는 내가 혼자 가는 것이 못내 걱정이다. 동면으로 가는 갈림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일러주고는 차 문을 닫고 내린 뒤에도 떠날 줄을 모른다. 걱정 마라 손을 흔들어주고 35번 국도로 들어섰다.

 임계사거리에서 조금 내려오니 미락숲이 있다. 임계천이 골지천에 합수하는 지점에 생긴 충적지에 있다. 자연 숲이 아니라 방풍림으로 가꾼 인공숲이다. 상록수가 아니라 활엽수들이다. 잎 피기 전이어서 첫 인상이 허전하다. 자세히 보면 나무 끝마다 발그레 윤기가 있다. 작은 바람에도 푸들거리는 빈 가지들 끝에 한꺼번에 잎사귀가 돋으면 연둣빛 물결이 머리를 덮으리라.
 미락숲 입구를 지나친 길은 골지천을 거슬러 오른다. 계속 가면 피재를 넘어 태백시에 닿고, 광동호 부근에서 좌회전하여 댓재를 넘으면 삼척 땅이다. 오늘 내가 임계로 나와 이 도로를 타게 된 이유는 화암팔경이 있는 동면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골지리·토산리·덕암리 세 마을이 귀를 모으는 삼거리에서 421번 지방도로 우회전하는 길. 덕암리 언덕길은 지나는 차가 적어서 한적하다. 쇠락한 집이 몇 채 차창을 훑고 지나간다. 옥수수 대를 삼각뿔처럼 모아서 세워놓은 비탈밭도 있다. 선 채로 비 맞히고 눈도 맞혀 가며 필요할 때마다 들어다 잘라서 소먹이로 쓴다. 옥수수대를 먹고사는 우리 소들은 행복한 편이다. 동족의 뼈와 살이 섞인 사료를 먹고 광우병에 걸린 서양 소들에 비하면.

 비슬이재 넘어서서 화표동으로 내려오는 길은 굴곡이 심하다. 아리리 가락이 절로 나는 꼬부랑길이다. 거대한 덩치로 떠밀듯 설치는 화물차를 앞세웠다. 길이 편편해진다 싶더니 험상궂은 암봉이 하나 길 건너에 나타났다. 화표동 화표주. 소금강의 수문장 격이다. 길옆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다시 떠나기를 되풀이한다. 정선군 관내 유명 관광지들은 주차장도 넓고 표지판도 잘 되어 있지만, 반대편에서 진입할 경우에 대비해주는 배려는 부족하다. 화표주 삼거리를 예로 들어도 그렇다. 화표동 쪽에서 내려오다 잘 보이게 표지판 하나만 더 서 있었어도, 화표주가 화표주인 것을 처음부터 알아보았을 것이고, 그 삼거리가 소금강·몰운대·광대곡 갈림길임도 쉽게 알아보았을 것이다.
 화암약수는 약수맛보다 들머리 경치가 좋다. 나는 '약'자가 든 것을 찾아다니며 먹는 것을 혐오한다. 차창을 활짝 열어 젖히고 깊게깊게 들이쉬는 이 공기야말로 보약 아닌가. 그러나 인사는 하고 가야지. 빨간 지붕 아래로 들어가서 표주박으로 떠서 마셔본다. 약수 받는 항아리는 땅에 묻혔고, 항아리 둘레는 녹물로 더께가 앉았지만 표주박에 담겨 올라온 물빛은 맑다. 쌉싸름하면서도 싸한 향기가 있다. 콜라나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를 처음 만든 사람은 어디선가 이런 약수를 마시고 아이디어를 얻었으리라. 인간의 스승은 자연이다. 자연으로부터 모습을 훔치고 아이디어를 얻는다.  

 묻는다. 무엇이 두려운가. 나는 지금 혼자서 천포광산 갱도를 지나가고 있다. 금 캐던 사람들이 마네킹으로 되살아나서 두런두런 이야기도하고 환호도 비명도 지른다. 우르르쾅 화약 터지는 소리도 나고, 졸졸졸 물소리도 나고, 천상에라도 오른 듯 음악소리도 나고,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나레이트가 쉴새없이 설명을 하며 따른다. 밥 먹는 곳 쉬는 곳 일하는 곳이 저마다 다른 빛을 밝히고 다른 소리를 낸다. 내가 지나는 큰 갱도 옆으로는 다른 갱도들이 가지를 치며 입을 벌리고 다가온다. 레일도 깔려있고 갱차도 기다린다. 무섭다. 숨쉬지 않는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 떠난 사람들이 남아 있는 듯 두런거리는 소리. 이곳은 그냥 동굴이 아니다. 금을 캐기 위해 굴착해 들어온 인공 동굴이다. 이 땅속까지 들어와 골드드림을 성취하려던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금 덩어리를 거머쥐었을까? 짙게 밴 땀 냄새. 내 코는 그것까지 맡는다. 사람이 건드리고 머물다간 터전은 원시림보다 무섭다. 365계단 위에서 걸음을 돌린다. 천천히 걸어 들어온 동굴을 뛰어서 벗어난다. 쿵쿵쿵 발소리가 굴을 울리며 따라온다. 간 큰 여자. 이곳이 어디라고 혼자 들어왔니?
 천포광산 갱도와 천연동굴을 연결해놓은 화암동굴 관광코스는 너무 길다. 짧은 시간에 다 볼 수가 없어서, 관리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출구 쪽으로 들어간다. 출구를 입구 삼아 5분쯤 들어간 곳에 화암팔경의 백미인 종유굴이 있다. 그리스의 기둥들이 아름답지만, 이 동굴 안 종유기둥처럼 아름답지는 않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에도 종유굴이 있지만, 이 동굴안 석주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얼마나 많은 물방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덧입히고 덧입히며 조각한 형상들인가. 그러나 저것은 아직 완성된 형상이 아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 방울씩 떨어뜨려 새로운 무늬를 조각 중이다. 다 만들어진 뒤에는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모른다. 저 석주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는 먼지보다 작고 짧은 시간을 허둥지둥 살다 가는 미미한 존재들이다. 내가 두려워하며 되돌아 나온 동굴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오신 할머니들은 위대하시다. 두 시간 가까이 굴속에 계시는 데도 서둘러 벗어날 생각을 않으신다. 나는 몸에 밴 퀴퀴함을 털어 버리려고 걸음을 빨리 한다. 나는 나간다. 빛과 바람이 있는 곳으로.

 화표주 삼거리에서 몰운대까지 이르는 소금강 길. 경치 좋은 곳마다 주차장을 만들어 휴식과 감상을 도운다. 이곳 바위들은 단단하지 않다. 손을 대면 푸설푸설 떨어져 내릴 것 같다. 그러나 그 각박하고 불안정한 틈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 진달래는 더 빛이 곱다. 그렇게 보인다. 내게도 저런 강인함이 저런 인내가 저런 역동성이 스며들기를 빌어본다.
 몰운대 정상은 한 두 시간 머물며 쉬고 싶은 곳이다. 벼랑 끝에 서있다 벼락맞은 노송은 예전보다 빛이 검어지고 껍질이 더 많이 벗겨졌다. 사람들은 우정 그 죽은 나무 곁으로 다가가 만져본다. 우듬지도 잎사귀도 날아가 버린 거목을 쓰다듬어 본다. 거목아래 절벽을 내려다본다. 나도 그렇게 한다. 절벽 아래 계곡에 좀더 넉넉한 물이 흐른다면, 비닐하우스가 좀더 멀리 있었더라면. 불가능한 희망을 읖조리다 내려간다.
 광대곡은 혼자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다. 나는 4∼5년 전에 후배 시인 전윤호를 따라 구경을 했다. 푸른 빛이 도는 암반에 조각한 듯 웅덩이들이 패여 있었고 폭포들도 심심찮게 있었다. 계곡이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깊었다. 전윤호는 정선읍 봉양리 출신이다. 199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도 잘 쓰지만 인간이 더 좋다. 자기 고향을 무척 사랑하여서 선배 동료 시인을 많이 정선으로 안내하였다. '정선이나 강릉을 가다가/길을 잃고/안개 낀 재 하나 잘못 넘으면/도원읍에 닿습니다/핸드폰도 터지지 않고/라디오도 잡히지 않는 곳/석회암이 앙상한 두 개의 산 사이/수달이 어름치를 잡아먹는 강이 흐르고/읍내엔 일백 오십 호 주민들이 삽니다/아이가 어른 같고/어른이 아이 같은 그곳에선/시간이 황종류석처럼 더디게 자라고/조폐공사에서 찍은 돈은 쓰이지 않습니다/주막에 가고 싶으면/산나물을 뜯어 오십시오/곤두레 딱주기 누리대를 구별할 줄 안다면/그곳에 살아도 됩니다/(전윤호 시, '도원 가는 길' 부분)' 곤드레 딱주기 누리대를 구분할 줄 아는 그는 자기 고향이 도원으로도 불리던 곳임을 알고 있었다.

 424번 지방도를 타고 호촌리∼백전리 거쳐간다. 백전리 물레방아야 너는 혼자 돌아라. 나는 정암사를 보려고 노나무재 넘어간다. 오르는 길도 가파르고 내려가는 길도 가파르다. 꼬불꼬불 가파르다. 한참 걸려 오르고 한참 걸려 내려서니 사북읍 삼거리. 좌회전하여 38번 국도를 탄다. 고한읍은 복잡하다. 휴일 전날이어서 카지노호텔로 들어가는 차가 많다. 호텔 입구를 지나서 다시 만난 삼거리. 우회전하여 만항재 더듬어 간다.
 정암사에는 아직도 해가 남았다. 수마노탑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오랫동안 머문다. 전에도 이 절엘 왔었는데, 두 번이나 왔었는데, 저 탑도 다른 탑과 같으려니 여기고 올라가 보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멀리서 속단하고 돌아섰던 오만을 후회한다. 이 절에 관련된 어떤 전설도, 전설 속의 인물들도, 이 탑보다 견고한 가치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인간들은 누구나 미완성으로 죽지만, 이 탑은 완성된 몸으로 천년 풍우를 견뎌내었다. 누가 쌓았는가? 몇 년이나 걸려서 쌓았는가? 석공의 이름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고승 대덕이 혼자 지은 절인양 전해지고 있다. 오이나 참외 같은 농산물에도 생산자의 이름을 붙이는 실명제 시대. 혼이 있다면 이 탑을 만든 석공은 이 탑을 떠나지 못하고 곁에 머물 것이다. 생애를 바쳐서 완성시킨 작품을 지킬 것이다. 내가 이 탑 앞에서 합장하고 삼배 올리는 뜻은, 부처께 건강과 부와 안녕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아름다운 것을 이 자리에 남겨 뒤에 오는 사람들을 감탄케 하고 머리 숙이게 하신 석공. 그 무명 앞에 올리는 감사의 절이다.

 만항재로 올라가서 함백산을 보고, 올라갈 수 없는 마음을 달래고, 백운산 기슭 카지노호텔에 들었다. 정선 안에 있는 특별한 것은 무엇이든 다 보고 가야한다는 강박감이 이 호텔에 들게 했다. 방에서 저녁을 시켜먹고 카지노 구경을 내려갔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내국인 출입이 허용되는 곳. 그러나 들어와 보니 내국인 전용 도박장 같다. 대부분 인근 지역 사람들 같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다. 만원 짜리 지폐를 두툼하게 인출해 들고 탁탁 털어 보이면서 들어가는 청년도 있었다. 돈 놓고 돈 먹기? 이 돈이 다 될 때까지 하다보면 한방 터지겠지. 이런 눈치였다. 여기서는 어떻게 하는가? 게임장을 둘러본다. 통로가 조금 좁을 뿐, 라스베가스 카지노들과 시설은 같다. 문제는 손님들이다. 테이블 쪽은 몇 겹씩 인간울타리를 둘렀고, 슬롯머신 쪽도 빈자리가 없다. 빈곳이 있어서 가보면 한 사람이 두 대를 차지하고 앉았다. 버튼 틈에 지폐나 종이를 접어서 끼워놓고 기계가 쉬지 않고 돌아가게 한다. 게임이 아니라 도박이다. 즐기러 온 게 아니라 따러 왔다. 오직 따기 위해서 뭉칫돈을 밀어 넣고 쉬지 않고 배팅하다 왕창 잃고 간다. 저렇게 오기를 부리고도 잃지 않는다면 기적이지 싶다. 나오다보니 입구 쪽에 빈자리가 있어서 5천원 넣고, 10분쯤 놀고, 5천원 땄다. 입장료를 5천원 냈으니 본전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땄다. 10분 동안의 몰두. 10분 동안의 줄다리기. 그 팽팽한 즐거움이야말로 내가 딴 것이다.  

 증산역 철로 옆에 서면 민둥산이 보인다. 억새들이 말라서 황금빛이다. 멀어서 일렁임은 보이지 않지만, 민둥산 정상은 바람이 세다. 저 등성이 내려서서 지억산으로 갔었지. 삼내약수도 마셨었지. 함께 걷던 사람들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저쪽에서 철길을 건너면 두위봉으로 오르는 소로가 있다. 증산역에서 두위봉 올랐다 자미원으로 내려가던 날. 나는 폐광이란 것을 처음 보았다. 그렇게 새까만 땅을 처음 보았다. 경이였다. 멈춰선 컨베이어밸트 앞에서는 전율을 느꼈다. 내가 사는 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그동안 나는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가. 그때의 전율은 내가 나를 치는 채찍이기도 했다. 막연히 느끼던 막장이 말문을 트며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산을 찾아왔다 마을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길을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정선의 산들을 오르며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정선은 이처럼 내게 특별한 영감과 살아있는 이미지들을 선사한 땅이다.

 정선읍으로 들어와서 점심을 먹었다. 시장을 한바퀴 돌며 통메밀도 사고 된장도 사고 더덕도 참기름도 샀다. 메밀전병 부치는 가게에선 마을 할머니들을 만나 아리랑 가락도 들었다. 손뼉치며 웃으며 같이 불렀다. 사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정선은 어디로 가나 활기가 넘치지만, 가장 활기찬 곳은 역시 시장이다. 시장에는 삶이 있다. 사람이 있다. 맛 나는 냄새가 있다. 남의 삶 내 삶이 울타리를 걷어내고 교류하는 곳. 나는 이래서 어느 곳으로 가나 시장 들리길 좋아한다. 재래시장엔 백화점에서는 맛볼 수 없는 향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향토의 향기.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 곳은 향토마다 남아있는 5일장 풍속이다. 사흘 뒤 나는 다시 정선장터로 왔다. 청량리에서 정선5일장 관광열차를 타고 와서 산나물도 사고 망태기 짜는 할아버지들도 만났다. 옛것에는 불편한 점이 많지만 정직한 노력과 땀이 배여 있어서 좋다. 감자 한 톨 심어서 다섯 톨 여섯 톨 수확하면 소출이 많다고 기뻐하는 소박함이, 한탕주의에 물드는 세상을 그나마 순화시켜주고 있다.

 하룻밤 더 묵어가기엔 시간이 많이 남았고, 내처 가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가수리 쪽으로 간다. 동강을 만나러 간다. 그 아름다운 강의 처음을 만나러 간다.
 강물을 따라 내려간다. 어항을 벗어난 물고기처럼, 차창을 활짝 열어 젖히고 방생의 자유를 만끽한다. 비포장 도로를 만날 때마다 흔들리는 차를 달래며, 이 길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절벽이 있고 평지가 있고 자갈밭이 있고 다리가 있고 마을이 있고 강 건너편에도 마을이 있고 밭갈이하는 소가 있고 소 모는 사람들이 있고 소나무밭이 있고, 그 모든 풍경을 다 담고 있는 넓은 강물이 있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닦고 낮아지고 낮아진들 내 곁을 바짝 따르는 강의 품, 그 넓은 마음만 하리.

 끝인가 하면 다시 이어지는 강변길 따라 고성리까지 내려왔다. 길가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신다. 창을 내리고 물었다. 어디 가시게요? 함백까지 가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시란다. 할머니가 기다리시는 버스는 귤화 부근에서 만났으니 광하까지 갔다가 돌아내려 오려면 한참 더 걸릴 것이다. 할머니 타세요. 신동까지만 모셔다드릴게요. 할머니를 태우고 큰재를 넘는다. 나이가 팔십이야 귀가 어두워 안 들려! 하시면서도, 여기가 어디예요? 이 고개는 이름이 뭐예요? 물었더니 "여기는 고성, 고개 넘으면 평구, 이 고개는 불기재" 큰 소리로 일러주신다. 불기잰지 불귀잰지는 몰라도 할머니 말씀에는 아리랑 가락이 배어있다. 물길도 굽이굽이, 산고개도 굽이굽이, 할머니 말씀도 굽이굽이, 아리랑 가락을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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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어떤 곳인가?
 강원도 정선군(江原道 旌善郡)은 강원도 동남쪽 내륙에 자리잡고 있다. 서쪽은 평창군, 북쪽은 강릉시, 동북쪽은 동해시, 동쪽과 동남쪽은 삼척시와 태백시, 남쪽은 영월군에 둘러싸인 산간 지역으로, 2002년 4월 현재, 4개 읍(邑·정선, 신동, 고한, 사북), 5개 면(面·북평, 북, 임계, 동, 남), 180개 리(里)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고구려의 영현으로, 보장왕 27년(668) 잉매(仍買·일명 잉치仍置)라 불러 현을 두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정선(旌善)현으로 고쳐서, 명주(溟洲·지금의 강릉)에 속하게 했다. 고려 태조 23년(940)에는 삼봉(三鳳)현으로 개칭하였다가, 현종3년(1012)에 정선군으로 승격시켰다. 조선(朝鮮)조에서도 정선군 그대로 불렀다. 그러므로 정선군은 990년 전 고려시대에 지어진 이름을 고수하고 있는 셈이다. 고려 때의 별호(別號)는 삼봉(三鳳)이었다. 이밖에 주진(朱陳)·도원(桃源)·심봉(沈鳳)으로도 불리웠다.(동국여지승람·한국지명연혁사전·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진산은 비봉산(飛鳳山·827.9m). 군청 소재지는 정선읍 봉양리다.
 정선군의 총면적은 1,220.64 ㎢로, 우리 국토의 1.2%, 강원도 면적의 7.2%를 점유한다. 군 면적 중 산림(1,050,05㎢) 비율은 86%나 된다. 농지 비율은 9%로 109.51㎢다. 이중 밭이 100.21㎢, 논은 9.3㎢에 불과하며, 경지면적 중 66%가 표고 400m이상 지역이다. 연중 최고 기온은 34.9℃, 최저 기온은 -16.5℃. 년 강수량은 1,233mm. 첫 서리는 10월 14일 경에 내린다. 인구는 17,513세대, 48,545명(2002년 3월말 현재)이다.
 정선은 높은 산이 많아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석탄, 철, 아연, 규석, 고령토, 석회석의 주요 생산지이다. 특산 작물로는 산간지역에서 생산되는 황기와 콩, 감자, 옥수수 등이 유명하며, 산나물도 많이 채취한다. 함백산·가리왕산·상원산·노추산·민둥산 등의 명산들과, 송천·골지천·임계천·아우라지·조양강·동강 등의 이름 난 계곡, 천혜의 자연경관 화암팔경 등을 품고 있어서, 휴양지와 관광지로도 이름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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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산, 2002년 5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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