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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끝에서 돌아서면 시작이란다  

이 글은 본래 필자의 기행문에 해당되는 본문과, 사진, 유뮬, 유적, 명소, 명물, 지도 등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시리즈입니다만, 원고 분량이 워낙 많고 구성도 책처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난에는 본문만 올려드립니다. 자세한 자료가 필요하신 분은 (02)-724-6215~7 출판국 판매부에 문의, 구입해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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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편

끝에서 돌아서면 시작이란다


 글·사진 이 향 지 시인  www.poemgate.com


    해남 간다. 해남에는 산도 있고 바다도 있다. 두륜산 아래는 대둔사가 있고, 달마산 아래는 미황사가 있다. 도솔봉 오르면 다도해 경치 보는 재미. 땅끝 가면 돌아서서 다시 시작하는 재미. 재미 따러 해남 간다. 해남에도 매화가 만개했다 한다. 볕 좋은 비탈엔 진달래도 피었다 한다. 꽃 보러 가는 나비처럼 해남 찾아간다.
   이번 길은 뽕도 따고 님도 보는 길. TV에 다 나오는데 힘들게 찾아다닐 것 없다던 남편이 나와 함께 간다. 그는 운전을 하고 나는 무릎 위에 지도책을 펼쳐놓고 좌회전! 우회전! 직진! 하며 간다. 날씨는 화창하고 길은 시원하게 뚫려있다.

   목포 귀퉁이를 살짝 건드리고 영산강 하구둑을 건너간다. 영암 방조제 건너서니 왼쪽에 넓은 광장이 있다. 높직한 둑 위엔 '영암·금호 방조제 준공 기념탑'이 우뚝 솟아있다. 둑 위로 올라서니 바닷바람이 달려와서 머리카락을 흔든다. 바다였다가 호수가 되어버린 영암호를 본다. 바다였다가 호수가 되어버린 금호호를 본다. 벽해가 상전 된 현장을 본다. 짠물이 민물 되도록 흘러온 시간을 느낀다.

    화원반도로 들어서니 황토밭이 반긴다. 황토 언덕 여기저기에 누렇게 시들어버린 배추밭이 있다. 아니다. 시든 게 아니다. 누런 외투 몇 장만 벗겨내면 하얀 줄기와 초록잎이 드러난다. 지난 해 늦여름에 싹을 틔워서 겨울이 되기 전에 다 자란 배추를 겨우내 밭이랑에 그대로 세워두었다 봄 온 뒤에 캔다. 아하, 농사란 저렇게 하는 것이다. 저렇게 틈새를 파고  들어야 성공을 하는 법이다. 김장 김치가 시어지고 물러서 맛이 없어질 무렵, 싱싱한 포기배추를 내다 파는 것이다.
   아주머니들은 쪼그리고 앉아 배추꼬리를 따고 시든 껍질을 벗기고 망사 자루에 세 포기씩 나누어 담고, 아저씨들은 트럭에다 옮겨싣는다. 강원도 산간지방에서 삼복 중에 고랭지배추를 출하하는 것처럼, 전라도 남쪽 해안 지방에선 초록빛이 그리워지는 봄철에 월동배추를 판다. 수요기를 미리 알고 때맞춰 공급하는 지혜. 눈이 와도 금방 녹을 만큼 따뜻한 날씨가 해남 땅을 부자로 일구고 있는 것이다.

   해남 사람들을 '해남 물감재'라 한다. 그만큼 무르고 순박하다는 뜻이다. '감재'란 '고구마'다. 그러니까 물감재는 물고구마다. 고구마를 한자로는 '감저(甘藷)'라고 쓰는데, "감저!"하고 소리를 끌어당겨서 반듯하게 발음할 때보다 "감재!"하고 살짝 일그러뜨려서 발음할 때가 표정이 한결 다정해진다. 그편이 "고구마!"하고 입안이 다 들여다보이게 열어서 발음하는 것보다 듣기에도 보기에도 좋고 부드러워진다. 해남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말의 맛을 알았던가 보다.
   해남에선 물고구마를 많이 심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남 땅에서도 '물감재'는 찾기 어렵다. 단단한 고구마들만 생산하고 있다. 물고구마는 맛은 있지만 살이 물러서 장기간 보관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는 화산면 일대에서 많이 심는 황토고구마가 해남 특산물로 등록되어 '물감재'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내 고향 통영에서도 물고구마를 많이 심었었다. 겨울밤 출출할 때 껍질을 벗기면 단물이 주르르 흐르던 그 물렁한 맛. 어린 날을 생각하며, 이번에 해남 가면 물감재 얻어먹고 와야지 했다. 어디엔가 분명 남아있을 테지만, 일 삼아 길 따라 가는 길이다. 이번에는 그 희망은 접어야겠지.

   울둘목으로 내려간다. 바다를 만지러 간다.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바다. 어린 내가 절하며 동상 앞을 청소하는 것으로 하루를 열며 우러러 모시던 장군. 이순신 장군. 그분의 흔적을 찾아서 내려간다. 진도대교를 건너가며 보고, 건너오면서도 보았다. 녹진 쪽에서도 보고, 우수영 쪽으로 건너와서도 보았다. 좁다란 해협. '명량대첩(鳴梁大捷)'의 현장.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물살. 물에서 바람이 인다. 물 옆으로 다가서니 몸이 흔들린다. 물이 운다. 물이 운다. 앞물이 뒷물을 밀고 뒷물이 앞물을 밀고 아랫물이 치오르며 윗물을 뒤집고 윗물이 아랫물을 누르며 운다. 어느 물도 제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한다. 순식간에 자리가 바뀐다. 엎치락 뒤치락 거품이 인다. 물방울들의 이전투구. 싸우면서, 싸우면서, 들고나는 물살. 장군은 저 물살에서 승리의 비결을 발견하셨다. 낡은 배 열 척으로 왜군의 함대 300여u척을 물리치셨다. 나라를 구하셨다. 내가 쓰는 말, 내가 쓰는 글, 내가 사는 땅을 지켜주셨다.

   땅이다. 바다보다는 땅이다. 갯벌보다는 논이다. 바지락 게 낙지보다는 쌀이다. 쌀이 백 번 낫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소금보다는 공장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한자리에 남아있는 드넓은 갯벌은 나의 그런 마음을 위로해준다. 증의도 사람들이 키우는 김밭은 나의 그런 마음을 위로해준다. 고천암호에 남아있는 갈대밭은 나의 그런 마음을 위로해준다. 봄이 오도록 날아가지 않는 철새 몇 마리. 그 낙오병들이 오히려 나를 위로해준다. 갯벌이었다가 논이 된 땅. 새로 생긴 평야. 그 많은 새떼가 날아와서 겨울을 나고 가도 먹을 것이 남았는가. 논바닥에서 포르륵 날아오르며 지저귀는 작고 작은 새들이 오히려 나를 위로해준다. 논과 논 사이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비포장도로가 오히려 나를 위로해준다. 살아왔으며 살고 있으며 살아갈 그것들이.

   얼마나 헤매었을까? 만개한 매화꽃을 찾아서. 해는 지려는데, 기울대로 기울어서 산머리에 걸렸는데, 우리가 찾는 꽃밭은 멀리멀리 숨기만 한다. 농부에게도 묻고 술꾼에게도 묻고 표지판과 신호등 지도에게도 물어, 반시간 만에야 찾아드는 길. 좁아라. 마주 오는 택시가 무작정 앞으로 밀고 오며 끝없이 뒷걸음치게 한다. 그러나 길옆의 밭. 파종을 위해 갈아엎어 놓은 붉은 황토밭. 물감을 푼 듯 붉은 속살에 얹힌 저녁 해. 그 황토빛이 나를 커다랗게 위로해준다. 가슴을 활짝 열어 새로운 씨앗과 뿌리를 길러낼 새 색시처럼.

   해남읍은 예전보다 많이 좁아졌다. 도로는 그대론데 자동차는 늘고 건물은 높아지고 상점들은 빽빽하고 사람들은 도시로만 모여들기 때문일 것이다. 해는 지고 밥은 먹었지만 잠은 잘 수 없다. 호텔은 집 떠난 사람들이 잠을 자는 곳인데, 그것이 제일 큰 목적이요 의무일텐데, 꼭대기 층에다 나이트클럽을 개장해놓고 새벽까지 꿍꽝거린다. 건물을 어떻게 지었길레 10층 소리가 5층까지 한 방안 소리처럼 울리며 내려오나. 수수한 여관에서 잠을 자리라던 예정을 뒤엎고, 권하는 대로 따라온 결정을 후회한다. 미국 라스베가스의 호텔들은 숙박비를 싸게 받는 대신 어떻게든 소리를 내어 손님들을 도박장으로 유도한다. 우리 향토에도 어느새 그런 물결이 밀려들었단 말인가.  

   날이 밝기 무섭게 다시 길로 나섰다. 이 길을 내처 가면 완도에 닿는다. 백야 삼거리를 지나서 조금 더 가니 길 오른 쪽에 〔김남주 생가〕팻말이 있다. 큰 시인을 낳은 봉학리가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 보리밭 사이로 길이 간다. 보리밭 앞에서 멈춘다. 아파라. 시멘트 담을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이여. 잎 떨어지고 말라버린 담쟁이 넝쿨이여. 녹이 슬어 날개가 처진 함석 지붕이여. 닫아 본 적도 없는 것처럼 휑한 대문이여. 힘들여 넘을 것도 없는 문지방이여. 야윈 매화 한 그루가 힘껏 꽃을 피우고 선 뜰 안. 빈속을 달래고 있는 장 항아리 몇 개여. 고치다 돈 없어 쉬고 있는 공부방이여. 해남을 드높이는 것이 관광지 곳곳에 세워진 대형탑과 기념물들은 아닐 것인데, 큰 시인을 낳은 집은 이토록 잊혀져서 버려져 있구나.
   고정희 시인 생가로 들어가는 길을 놓쳤다. 주유소에 물어도 모른다. 주유소 못 미쳐서 농로처럼 빛나지 않는 길이 한 가닥 송정리 쪽으로 뻗어있었는데, 거기서 좌회전을 했어야했는데, 놓친 길에는 미련과 후회가 더 많이 깔리는 법이다.

  연정리 고인돌 오래된 떼 무덤을 만나 오래 전 사람이 되어 본다. 나뭇잎을 두르고 날 것을 먹고살다 돌 아래 잠든 사람들. 이곳은 어떤 힘센 집안의 공동 묘지였을까? 고목나무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좁은 길을 따라 돌과 돌 사이를 걸어본다. 나는 고인돌을 볼 때마다 무덤이 아니라, 삶터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바위에 기대면 움막을 치기도 좋고, 비를 피하기도 좋다. 햇볕이 데워주는 바위는 온돌처럼 따뜻하다. 중국 만주 지역을 여행하면서 본 발해 24개 돌. 그것도 일종의 주춧돌이었다. 이동식 가옥을 세우기 위한 주춧돌이었다. 죽은 이를 이처럼 크고 무거운 돌 아래 묻으려면 얼마나 많은 인원과 힘이 들었을까. 이 돌들을 아무리 일으켜도 뼈 한 점 없을 사람들. 우리도 그들의 길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다. 먹는 것 걸치는 것이 조금 달라졌을 뿐. 무덤 옆의 보리밭. 봄볕을 만난 보리이삭만 파릇파릇하다.

   달마산을 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나는 그때 저 봉우리를 넘었지. 저 능선을 다 넘어서 땅끝으로 갔었지. 저쯤일거야. 저기 저 봉우리. 저 봉우리 넘을 때 다리께나 아팠지. 숨이 턱에 찼었지. 걸음 빠른 사람들은 두 봉우리 세 봉우리 앞서 가서 부르고 손짓하는데, 난 그날도 꼴찌였지. 바위가 깔끄러워서 장갑을 끼지 않은 손바닥이 까칠해 졌었지. 축축한 바위에선 미끄러지기도 했었지. 오를 때보다 바라보는 산이 언제나 더 아름답구나. 아침해가 달마산 머리를 넘어오는 걸 보고 미황사로 들어간다. 미황사는 달마산을 병풍처럼 둘렀다.  
   나는 미황사를 좋아한다. 단청을 입히지 않은 대웅전을 좋아한다. 연꽃 한 송이 새겨 두르지 못한 자연석들이 제 힘껏 기둥을 떠받들고 있는 대웅전 뒤쪽을 더 좋아한다. 대웅전 처마 끝, 양철 물고기를 매달지 않은 풍경(風磬)을 더 좋아한다. 대웅전과 응진전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다도해를 좋아한다. 절 뒤편 숲 속에 모여있는 부도밭을 좋아한다. 요란하게 번쩍이지 않는 미덕이 미황사에는 있다. 지금도 그것들은 그대로 있다. 그러나 이제 그 빛나지 않는 것들은 크고 빛나는 것들에게 가려지고 있다. 그것들을 둘러싼 땅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대웅전 전면에 대웅전보다 더 큰 전각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요사채와 전각에 가로막혀서 법당 문이 열려도 미황사 부처는 바다 구경을 못하시게 생겼다.

  미황사에서 나와 산정리로 들어왔다. 아침도 먹고, 도솔봉으로 오르는 길을 묻기 위해서다. 때마침 장날이라 좁은 거리엔 활기가 넘친다. 쑥, 냉이, 실파, 대파, 콩, 메주…. 바다나 들에서 캐거나 텃밭에서 가꾼 것들을 들고 나온 할머니 아주머니들. 내려서 흥정하며 이야기를 나눌만한 시간은 없지만, 시골 장날이야말로 향토의 향기를 가장 잘 맡을 수 있는 장소다.
   송정면 번화가를 관통하여 산정 삼거리로 나왔다. 그제야 밥집 간판들이 눈에 뜨인다. 놀부회관으로 들어갔다. 주인 아저씨가 청소도 하고 손님도 받는다. 아침이라 갈비탕밖에 되지 않는단다. 마침 우리가 꼭 먹고 싶은 메뉴다. 뼈가 굵지 않은 갈비를 기름 없이 손질해서 알맞게 물렀다. 국물 맛도 깔끔하다. 다 먹고 나자 오토바이를 타고 앞장을 선다. 장날이라 바쁘다면서도 마지막 갈림길까지 안내해주고 갔다. 해남엔 아직도 이런 인정이 남아있다.

   도솔봉에 오르며 비로소 눈이 열린다. 성(聖)도 속(俗)도 저 아래 낮은 땅에 남았다. 햇볕과 비와 바람 속에 전신을 드러내놓고 바위들은 혼자 늙었다. 돌 꽃이 하나 둘 바위 몸을 감는다. 바위는 모른다. 바위는 바보다. 저 멀리서 올려다보던 바위가 바로 앞으로 왔지만, 눈 아래 무엇이 도착했는지 내려다보려고도 않는다. 발아래 오리나무들이 벌레 같은 수꽃을 피워들고 봄바람을 훌렁훌렁 흔들고 있어도 바위는 모른다 제가 바위인 것도. 저 뻣뻣함이 저 도도함이 저 무심이 저 초월이, 이 땅의 땅끝을 무사히 지켜내었구나. 제 몸이 늙어 희끄므레한 돌꽃이 전신을 휘감은 줄도 모르고 한번 솟은 자리에서 꿈쩍 않고 서 있는 힘으로!
   도솔봉 오르며 내려다보는 산정리 해안. 모래와 소나무 방풍림과 붉은 황토밭. 멀리서 짐작하며 둘러보는 땅빛과 바다빛. 이 아침 나는 정말 아름다운 곳에 섰구나. 능선을 돌아 넘어가서 내려다보는 흑일도 백일도 노화도 완도…. 일일이 이름을 들먹일 수 없는 수많은 섬들이 지척에서 해남 반도를 둘러싸고 있다. 해남은 외롭지 않다. 해남은 끝이 아니다. 저 많은 섬들을 넘어 제주도 마라도까지 내 시선은 달려간다. 출렁이며, 출렁이며, 파도를 넘어간다. 아름다워라. 이 아침 이 경치를 내 앞에 열어주신 이여.

   도솔봉에서 내려와 갈두로 가는 길. 산불 감시를 위해 나와있던 아저씨가 알러주신 길. 산  아래 첫 동네 파란 지붕을 인 집 앞에서 왼쪽으로 틀어 작은 등성이를 넘어가는 길. 가늘가늘한 전봇대들이 어깨동무하고 가는 길. 작은 등성이를 넘자마자 나타나는 저수지. 저수지 생긴 대로 둘러쳐진 울타리 따라 꼬불꼬불 내려가는 길. 아무도 없는 길. 깨끗하고 밝은 길. 한참 가다 마을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길. 마을을 빠져나가 아스팔트 도로와 합류하는 길. 아스팔트도로 저편에 바다가 있다. 우리는 차를 돌려 바다쪽으로 내려갔다. 송호린가 하였더니 송종리란다. 송지면 송호리, 송지면 송종리…. 모두들 소나무 '송(松)자를 쓰고 있지만, 강원도 평창 소황병산에서 발원해서 정선 여량 아우라지로 흐르는 '송천(松川)'의 유래처럼 '좁다', '솔다', '조붓하다'는 말에서 유래된 이름들이다. 그렇다 땅끝이니 좁긴 좁은 곳이다. 송곳처럼 좁은 곳. 그러나, 실제로 와보면 얼마나 넓은 곳인가. 마을을 지나 바다 앞에 서면 더욱 그렇게 느낀다.

   바다는 또 하나의 밭이다. 다도해 물목에 무수히 꽂혀있는 막대기들은 모두 김을 기르기 위한 도구들이다. 해초들도 사람처럼 어디에 기대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물 속에 막대기를 꽂아주거나, 넓은 그물을 펼쳐 줌으로써, 더 많은 김을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 채취하는 시대에서 기르는 시대로 변모해 온 것이다. 한꺼번에 채취한 김은 수조 속에 살려둔다. 그냥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휘휘 저어서 파도를 만들며 살린다. 필요할 때마다 세척을 해서 기계 속에 넣으면 기계 혼자 펴고 말려서 뚝, 뚝, 떨구어 준다. 열 장씩 모여서 떨어지는 김을 열 번 포개놓으면 김 한 톳이 된다. 백 장 김을 뜨고 말리고 포장하는 일이 잠깐 동안에 이루어진다. 사람의 지혜는 여기까지 이르렀다. 얼마나 더 발전할 지는 모른다. 옛날 김들은 지푸라기가 묻어 있었다. 짚을 잘라 김발을 만들어서 한 장씩 손으로 떠서 햇볕에 건조 시켰다. 그야말로 수동. 자연 그대로였다. 그때의 김 맛보다 지금의 김 맛이 더 윤기 있고 더 달콤해진 이유는 어디 있을까?

   송호리 해수욕장을 잠깐 들여다보고, 사람 발자국 찍히지 않은 모래밭을 들여다보고, 언덕길을 넘어서니 진짜 땅끝이다.〔땅끝〕표석이 선 삼거리에서 사자봉을 올려다본다. 소나무 숲을 뚫고 일어선 조망대는 땅끝 사람들의 기상을 대변하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전망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본다. 유리벽이 막아선다. 유리를 통하여 내다보는 바다는 갑갑하다. 나는 이미 도솔봉에서 자유를 맛보았다.

   이제는 땅끝비를 보아야겠다. 끝에서 돌아서면 시작인란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땅끝까지 내려가 다시 한번 출발하련다.
   전망대 아래 있는 '土末' 표석을 지나, 땅끝비는 바다 앞까지 내려가야 있다. 450m에 10분이 걸린다고 씌어있지만, 그것은 평지에서 직선거리를 걸을 때나 맞을법한 계산이다. 여러 사람이 같이 가는 길에서 그 수치만 믿고 서두르다가는 나도 남도 다친다. 땅끝비 찾아 내려가는 길은 한참 가파르다. 끝없는 계단의 연속이다. 내 왼쪽 발목엔 부러진 뼈를 지지하는 쇠가 아직도 들어있다. 남편은 내내 걱정을 한다. 그러나 오늘은 끝까지 내려가 볼 것이다.
   뚝 떨어지는 벼랑 끝에 한 쪽 날개만 펼치고 선 소나무. 그 소나무 옆에서 보면 끝이라는 말이 가장 실감난다. 시멘트로 벽을 감싼 참호가 하나 좁다란 평지를 만들고 있을 뿐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 나보다 먼저 내려갔다 올라오던 아주머니가 풍덩!하는 곳이라며 웃던 이유를 알겠다. 능선 마루금을 따라 내려온다면 이 지점이 분명 끝은 끝이다. 이 지점에서 사자봉 능선을 거슬러 올라가면 도솔봉∼달마산∼두륜산 주능선을 지나, 백두산까지도 이어갈 수 있다. 작은 개울 하나도 건너지 않고 산줄기 마루금만 타고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약 6년 전 월간《山》에 월출산 산행기 '누가 이 땅을 이름 없는 산맥 위에 서있게 했나'를 쓸 때 이 사실을 밝혀놓은 적이 있다. 이것이 와전되었는지 해남반도 산들의 마루금이 '백두대간'이나 '호남정맥'에 해당되는 양 알려지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능선을 거슬러 올라가면 호남정맥에도 합류하고, 백두대간에도 합류하지만, 합류는 분명 하지만, 호남정맥이나 백두대간의 일부는 분명 아니다. 산맥의 이름을 짓고 분류하는 일은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 국토는 반도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동북아 대륙과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섬은 아니다. 백두산이 두 강의 중심에 솟아 대륙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은 중국과 우리가 나누어 가지는 산이다. 주봉인 장군봉이 우리 쪽에 있어서, 백두대간의 정점이 우리 쪽에 건재해 있어서, 우리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준다.
   우리 국토는 반도다. 우리 국토의 모든 산줄기는, 물에 잠기거나 섬이 아닌 곳에 위치한 모든 산줄기는, 아무리 짧고 미미한 높이를 가진 산줄기일지라도, 어떻게든 백두산과 이어지게 되어 있다. 어느 지점에서 출발하든 작은 냇물 하나 건너지 않고도 백두산과 이어지게 되어있다. 다알리아 한 그루를 뽑아 올리면 줄기 하나에 수많은 뿌리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그 모든 산맥이 그 무수한 산줄기들이 모두 다 백두대간은 아닌 것이다. 아무리 내 고장 산이 귀하고 아름다워도 애매한 표현으로 혼동을 조장하는 일은 말아야 할 것이다.

   벼랑을 남기고 올라와서 땅끝비가 있는 곳으로 간다. 휘어진 소나무가지 틈으로 삼각뿔 모양의 비신이 나타난다. 내려다 볼 때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옆으로 내려 가보면 보통 큰 비가 아니다. 해남엔 거대한 기념비가 많은데, 내 눈엔 땅끝비가 제일 아름다운 것 같다. 그 위치며 모양이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 구석 이 끝자락에 이만한 탑을 세워 상징을 삼는다. 꼭 한 번 와 볼만한 장소가 아닌가 싶다.

   땅끝을 떠나 두륜산 대둔사를 찾아가는 길. 북평면 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바다 쪽 차선을 따라 달리면 아름다운 해안선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이 꼬불거리며 모퉁이가 많아서 운전하는 사람은 제대로 못 보겠지만 옆에 앉은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아, 아, 탄성을 지르며 간다. 산 위에서 보는 다도해와 바다 기슭을 달리며 보는 다도해는 맛이 다르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정물 같지만, 바다를 끼고 달리는 길에서는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물러가고 다가오고 다시 물러가기를 되풀이하는 갯벌. 거기에서 이 땅의 사람들이 오래 기대고 살아온 역사와 숨결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완도대교 갈림길에선 우회전하여 달도까지만 건너갔다 왔다. 완도대교까지 건너가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잘 하면 오늘 중으로 일이 끝날 것 같다는 말에 남편도 쉬지 않고 차를 몰아간다. 대둔사! 대둔사였다가 대흥사였다가 다시 대둔사가 된 절. 양손에 떡을 든 사람처럼  일주문도 두 개다. 절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동주 시인의 '강강술래'시비를 구경하고 시비 사진을 찍고, 걸어서 또 하나의 일주문을 통과한다.
   평일인데도 두륜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이 끊이지 않는다. 명산 아래 명찰이 있다. "두륜산 대흥사는 삼재가 들지 않는 땅이니 내 유품을 거기 갖다 두라"고 했다는 서산대사의 음덕일까? 절 안 모든 곳이 중생으로 넘친다. 대둔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곳은 응진전전 삼층석탑이 있는 뜰과 거기서 올려다보는 두륜산이다. 다른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아, 산을 오래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어느 곳에서나 건물이 가로막아서 두륜산은 그야말로 두륜만 보인다. 두륜만 보이기는 이곳도 마찬가지지만, 그 두륜만이라도 조용하게 오래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둔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대웅보전으로 통하는 심진교다. 그 작은 몸으로 무수한 중생을 부처 앞으로 건네준다. 저 다리야말로 참 부처의 현신이 아니겠는가. 비 맞고 눈 맞으며, 발아래 밟히며, 있는 듯 없는 듯 있는 저 다리야말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현신이 아니겠는가. 아무도 건너지 않을 때의 심진교를 카메라에 담기 위하여 내가 기다리는 시간은 영겁 같구나.
   표충사와 박물관까지 둘러보고 나니 또 다시 해가 기웃한다. 다른 이들은 경내까지 차를 가지고 왔는데 우리만 정직하게 주차장까지 왕복한다. 그러나 마음은 훨씬 편하다. 문닫기 전에 녹우당을 보려고 한쪽 마음은 서둘고 있지만, 드문드문 남아있는 동백꽃을 보는 맛이 있다. 오랫동안 차를 타고 온 피로도 걸으면서 푼다.

   예전에 다 보고 간 곳이지만, 그 사이 어떻게 변했는가. 녹우당은 변한 게 없다. 여전히 그 자리에 고즈넉이 있다. 겨울 지난 잔디가 금색으로 말랐을 뿐. 덕음산 기슭의 초록빛도 그대로 있다. 사시사철 초록비가 내리는 당호. 대문 안으로 들어 가보니 사랑채를 수리중이다. 기와를 드러내고 썩은 서까래를 갈아 끼우고 다시 기와를 얹으려는 중이다. 사람은 집보다 짧다. 나무보다 짧다. 그러나, 그 짧은 사람보다, 그 오랜 집보다, 더 오랜 나무보다 더 긴 것이 있다. 그것은 글이며 그림이며 지도다. 내가 녹우당에서 가장 오래 서있는 곳은 공재 선생이 그린 '일본여도'와 '동국여지지도' 앞이다. 그러나 그 지도들은 유리 안에 들어있다. 그때에 이런 지도를 그렸느니라. 이 정도만 알고 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서야 한다.  
   녹우당까지 보고 나니, 해남을 떠나도 되겠다. 이번엔 계곡면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강진∼영암∼나주를 거쳐 광주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기로 한다. 그 사이 또 한번의 밤이 우리를 지나갔다. 돌아오는 길목마다 봄이 무르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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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어떤 곳인가?
전라남도 해남군(全羅南道 海南郡)은 한반도의 서남쪽 땅끝에 자리잡고 있다. 영암·강진에 접한 북쪽과 동북쪽을 제외하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다. 해남군의 가장 남쪽 끝이 우리 국토의 땅끝이기도 하다. 리아시스식 해안을 끼고 펼쳐지는 바다는 곳곳에 절경을 품고 있고, 명산과 명찰, 유적 등도 두루 볼 수 있어서 관광지로도 인기가 높다.
해남의 총면적은 993㎢(전 국토의 1.0%, 전라남도 총 면적의 8.9%)로 전남에서 가장 넓은 땅을 보유한 군이다. 이중 임야는 약 47%, 농경지는 약 40%로 주요 기반을 농업에 두고 있다. 인구는 약 10만명(2000.12.31.현재). 1개 읍(邑:해남읍)과 13개 면(面:삼산·화산·현산·송지·황산·문내·마산·산이·북평·북일·화원·옥천·계곡), 513개 리(里)로 구성되어 있다.

◇해남의 유래
'본디 백제의 새금현(塞琴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침명(浸溟·일명 投溟)으로 고쳐 양무(陽武·지금의 강진)군에 딸린 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 해남(海南)으로 고치어 영암군에 속하였다. 조선 태종 9년에는 진도(珍島)현과 합하어 진해현(珍海縣)이 되었으며, 12년에 고을의 치소(治所)를 영암에 딸린 현(現) 옥산(玉山)땅에 옮기었다가 세종 19(단기3742)년에는 다시 갈라서 해남 현감이 되다.(동국여지승람·한국지명연혁사전, 참고)' 세종 30년에는 황원현을 합하여 당악(棠岳)이라고 하다가, 그 뒤 도로 해남현이 되어(한글학회 편찬, '한국땅이름 큰사전', '한국지명총람' 참고), 오늘까지 그 이름을 이어오고 있다. 인접 군과의 행정구역 통폐합은 몇 십 차례 더 있었으나, 그 큰 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현의 진산은 금강산(金剛山·481m)이었다. 지금도 성곽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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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호, 월간 山. '책속의 책'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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