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4/13(금) 14:28 (MSIE5.0,Windows98) 211.218.204.202 1024x768 [에세이], 말   [에세이]생활 속의 명상 / 말   자기 말을 들어보자                                                 이  향  지  (시인) 저는 시인입니다. 세상에 대해 하고싶은 말을 시로 쓰는 사람이지요. 제가 쓰는 시는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가장 말을 아끼고, 삼가고, 여러 규정과 조건을 염두에 두면서 써야하는 글입니다. 저는 시를 선전하려는 게 아니라, 제가 시를 쓸 때는 절에서 언행을 삼가듯이, 여러 규정과 조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저의 생각을 좋은 시의 그릇에 담아내려고 노력하지만, 실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생활 속에서는 실천이 어렵더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또 시는 제가 쓰고 있을 동안은 저의 것이지만, 일단 발표를 하고 나면 제 것이 아니지요. 말도 그렇습니다. 한 번 입 밖으로 나간 뒤엔 이미 자기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입술 밖으로 내뱉은 뒤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말. 그러나 말이 정말 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말은 듣는 이의 기억 속에 집을 짓습니다.   말은 소리가 몸입니다.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를 타고, 그 떨림으로 전달됩니다. 그러나 말의 몸, 즉 말 한 사람의 목소리는 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상대방의 기억 속에는 그 목소리에 실려온 내용만 남게 되지요. 보이지 않는 소리에 실려온 말은, 말의 정신이지요. 말의 육체는 사라지고 말의 정신만 남아, 들은 이의 기억 속에 저장되는 것입니다. 말이 전달되는 순간의 공기 중의 떨림은 사라져도, 말하는 이의 표정과 목소리는 함께 남습니다. 그것도 말한 사람이 말하고자한 바가 100% 이해되어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의 수준과 능력, 들을 때의 감정지수에 따라 얼마쯤, 혹은 아주 많이 왜곡되어서 기억된다고 보아야겠지요. 이처럼 들은 이의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말은 그 말을 들을 때와 비슷한 경우를 만날 때마다 강시처럼 되살아나서 다른 이에게로 전달되지요. 그것도 그분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여서 다른 이에게 전하고…, 다른 이는 또 다른 이에게 전하고…, 몇 차례 오고가는 사이에 본래의 말은 사라지고 엉뚱한 말이, 말한 이의 이름을 붙이고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지요.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도 이래서 생겼겠지요. 모습도 없는 말이 왜 그렇게 오래 남아, 왜 그렇게 모습을 바꾸면서 멀리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말이 태어날 때 지니고 나오는 말 자체의 에너지 때문입니다. 말은 제가 태어날 때 지니고 나온 에너지를 양식으로 스스로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言]은 말[馬]이로구나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잘 한 말은 나를 태우고 다니지만, 잘 못한 말은 나를 끌고 다니며 곤혹스럽게 합니다. 나는 내가 한 말에게 고삐를 쥐어주지 않으려고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말은 입 밖으로 뱉기 전까지는 내 안에 있으므로 내가 주인이지만, 일단 입 밖으로 내보내고 나면 내 말이 나의 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잘한 말은 경치도 좋고 편편한 길로 나를 태우고 다니지만, 잘 못한 말은 울퉁불퉁하고 나쁜 길로 나를 끌고 다니며 불편하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 말에게 끌려 다니지 않고, 내 말의 고삐를 꽉 잡고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야생마와 길든 말을 비교해 봄으로써 가능할 것 같습니다.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우면 아예 말을 하지 않고 살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요. 이 말은 또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는 속담을 상기시키는군요. 실제로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있습니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 수도승이 큰 종을 완전하게 만들어낸 한 소년의 통곡을 마날 때까지 침묵으로 지내는 이야기를 줄거리로 담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무엇인가를 이룰 때까지 그 일에만 전념한다는 뜻을 의미하는 침묵이고, 일정한 기간 동안의 '참음'을 내용으로 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침묵이 금이다'라는 것이 있지만, 가족들과 함께 살고 외출도 해야하고, 사람도 만나야하는 생활 속에서 침묵하기란 말하기보다 더 어렵고, 더 큰 오해를 낳지요. 안 하기도 어렵고, 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전하기도 어려운 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랑으로 맺어주기도 하고, 엉뚱한 오해를 낳아 좋은 사이를 갈라놓기도 하는 말.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고 외딴 곳에서 혼자 살수도 없는 일. 어떻게 하면 듣는 이도 좋고, 말하는 이의 인격도 돋보이는 말을 하면서 훈훈한 사랑을 나누며 살 수 있을까요? 그건 연습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우리가 외출 전에는 거울을 보면서 매무새를 가다듬듯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전에 자기 말을 한 번 들어보세요. 방송인이나 연기자들은 그게 직업이니까, 그런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그런 곳에 출연할 일도 없는 내가 왜? 무엇 하러? 하고 생각하신다면, 자신을 향하여 한 번 물어보세요. 나는 내가 말하는 모습과 내 목소리를 정말 알고 있는가? 거울을 보거나 사진을 찍어봄으로써, 자신의 겉모습은 알고 있지만, 자기 안의 정신이 남 앞에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지는 알고 있기 어렵지요. 누군가와 대화할 때 무심코 나오는 나쁜 버릇은 어떤 것이며, 내 표정과 말투에는 어떤 좋은 점이 있는가? 자기가 하는 말을 직접 들어봄으로써 자신에 대한 확신도 생기고, 단점의 교정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시인들이 좋은 시를 쓰려고 긴 습작기를 거치고, 무명의 설움을 오래 견디면서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듯이, 생활 속에서 말을 하는 사람도 그렇게 오래 참고 자신의 말을 개발해 간다면 무한한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 *한문화 / 단행본, [생활 속의 명상]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