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9 : [나의 시를 말한다], 박남희 시인과의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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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를 말한다], 박남희 시인과의 대담

<현대시가 선정한 이 달의 시인/박남희 시인과의 대담>

바다를 품고있는 항아리

이향지·박남희

시 쓰기는 시인에게 있어서 축복이면서 동시에 형벌이다. 그것은 시라는 자식을 낳은 모성으로서의 기쁨과 그것이 자라면서 요구하고 규정하는 어머니 됨에 대한 구속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를 낳은 어머니는 시의 칭얼거림에 마냥 두손들고 있을 수만은 없다. 때로는 철모르는 시에게 채찍을 들고 시의 시답지 않음을 꾸짖기도 해야한다. 그러면 시는 시의 어머니에게 말하리라. 당신은 자식을 꾸짖을 만한 자격과 당위성이 있느냐고.
그러므로 철들지 않은 시를 기르고 있는 시의 어머니 역시 그 본질은 야누스적이다. 내가 만난 이향지 시인 역시 이러한 시인됨의 양면성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한번 맞은 새똥을 떨어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몸이 '蒼天이 될 때까지 불로 씻는' 사제적 시인관을 가지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 쓰기는 '한번 맞은 새똥'을 떨어버리는 행위이거나, 어쩌면 그 '새똥'을 끝끝내 자신의 분신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야만 하는 천형으로서의 삶의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향지 시인에게 가을은 너무 일찍 왔다. 시인의 이파리는 미처 盛夏를 겪어보지도 못하고 단풍이 들어버렸다. 시인의 마음은 아직 여름의 무성한 綠陰을 꿈꾸고 있는데, 시인의 몸은 이미 가을의 한복판에 서있다. 시인은 새똥 맞은 이파리를 물로 씻지 않고 불로 씻고 있다. 여기서의 '불'은 제의적 염결성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내적 에너지이다. 나는 알고 있다. 그 '새똥'은 쉽게 이파리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그 나뭇잎의 시인됨을 끝끝내 증거 해주리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믿는다. 이향지 시인이 곱게 물든 단풍잎으로서가 아닌, '새똥'이라는 갑갑한 훈장을 기껍게 여기는 튼실한 나뭇잎으로 끝끝내 살아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이향지 시인을 만나기 위해 2호선 전철을 타고 역삼역에 내려 아담한 찻집에 들어섰다. 그의 시를 통해 이미 시인의 열정과 삶의 자세를 확인한 바 있지만, 처음으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시인은 사뭇 커다란 항아리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질박한 삶의 형식 속에 바다보다도 더 큰 삶의 내용을 품고 있는 어딘가 미묘한 항아리 같은 모습이었다. 시인의 어투 역시 항아리처럼 어눌했지만 어딘가 막히지 않는 달변과 열정이 느껴졌다. 말의 늪을 지나 언어 저편에서 울려나오는 이향지 시인의 마음은 따뜻했다. 봄볕이 드는 창가에서 우리는 모처럼 서너 시간 동안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박남희 ―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선생님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 달의 시인이 되신 것을 먼저 축하드립니다. 89년도 『월간문학』으로 40이 넘으신 나이에 등단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늦게 등단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 선생님의 등단하실 때의 말씀부터 듣고 싶습니다.

이향지 ― 반갑습니다. 박남희 시인께서는 97년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데뷔하셨지요? 박시인의 당선시「폐차장 근처」 퍽 인상깊었습니다. 한 생(生)의 질주를 끝낸 폐물들 곁에서, '비로소 자유롭다'고 노래할 수 있는 시인은 어떤 분일까 궁금했었지요. 장자처럼 바가지를 두드리며 죽은 자의 자유를 노래하는 것으로 끝나는 시가 아니라,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 놓아버린 주검 위에서 새로운 풀들이 자란다는 발견이 뭉클했기 때문이지요. 단정하고 따뜻한 내면을 만날 수 있는 시였거든요. 그에 비하면 제 시들은 불화(不和) 할 수밖에 없는 세계와의 엎치락뒤치락 입니다.
저는 우리 나이로 마흔 일곱에야 등단을 했습니다.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는 자각이 그 무렵에 더욱 절실해졌다는 것이, 제 늦은 등단의 첫 번째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저에게 등단은 시쓰는 일에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는 절차요 동기요 관문이었죠.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고, 결혼 후에도 시를 놓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의무와 책임감이 따르지 않으니까 언제나 뒷전으로 밀어놓게 되더군요. 저는 또 오래 아팠습니다. 뚜렷한 병명도 없었지요. 등단 얼마 전에는 제 주위의 누구도 제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믿지 않을 만큼 길게 아팠습니다. 잠드는 건 몰라도, 죽는 것은 안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였어요. 그 끈질기고 잦던 사신(死神)의 초대를 적극적인 시쓰기를 통해서 이겨낸 것 같습니다. 이제야 압니다. 그 아픔은 제 안의 제가, 저를 저의 밖으로 끌어내 달라는 호소였다는 것을요.

박남희 ― 선생님의 첫 시집 『괄호 속의 귀뚜라미』의 후기를 보면 <시인을/시인하기 위하여/부인을/부인했다 많은 날//부인을/시인하기 위하여/시인을 부인했다 많은 날>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런 글을 보면 선생님의 문학적인 삶과 가정적, 또는 일상적인 삶이 서로 상충되면서 마음 고생이 크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이향지 ― 시도, 삶도, 몰두를 필요로 하더군요. 시는 한층 더하구요. 제 경험으로 보면 뮤즈는 샘이 많은 신입니다. 예를 들어 산문을 쓰려고 하면 시가 와요. 칭얼거리는 시를 돌보지 않고 계속 산문을 쓰고 있으면 시가 멀리 가버려요. 시를 다시 만나려면 처음 시작하는 사랑처럼 공을 들여야 배시시 문을 열고 되돌아오더군요. 어떨 땐 내가 두 마리의 토끼를 번갈아 쫓아다니느라 둘 다 놓치고 있는 멍청한 사냥꾼은 아닌가 반문하곤 했지요. 그러나 몰두할 수 있는 세계가 확실해진 지금은 더 행복합니다.

박남희 ― 선생님의 시 「日出」의 끝 연을 보면 <가자! 가자! /새벽은 메두사처럼 살아 돌아온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는 제우스의 아들인 페르세우스에 의해 목이 잘려 죽임을 당한 괴물인데, 선생님의 시에서는 마치 불사조의 이미지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그리고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서 대표적인 여성성인 '아름다움'을 상실한 저주받은 괴물로 등장하는데, 혹시 선생님의 시 「괄호 속의 귀뚜라미」,「wren! wren! 또는, 굴뚝새! 굴뚝새! 또는, 아래아 한글 기동배치명령어 ww에 관한 열세 단계의 낱말놀이」,「뚜껑이 덮인 우물」,「옷」등의 '억압받는 여성성'에 대항하는 페미니즘 계열의 작품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여성시인으로서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이향지 ― 이 질문은 '변죽'을 울려서 '중심'을 캐려는 의도인 것 같군요. 신화 속의 메두사는 페르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신화는 끝난 것이 아니지요. 신화는 '神'들의 이름을 빌려서 엮어놓은 우화일 뿐이니까요. 신화가 되풀이되는 한, 메두사도 죽은 것이 아니지요. 그리스 신화의 내용도 그렇지 않습니까? 페르세우스가 처치하기 어려운 상대를 만날 때마다 자루 속에 넣어 다니던 전리품, 즉 메두사의 머리를 꺼내 보임으로써 상대를 돌로 만들고 승리하지요. 제우스의 서자인 페르세우스는 할아버지인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비를 베고 어머니인 가이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낫으로 메두사의 머리를 잘랐죠. 즉 여자로부터 받은 무기로 여자의 머리를 자른 것입니다. 그것도 정면 대결을 한 게 아니라, 거울 같은 물건을 써서 시선은 반사면(反射面)을 보면서, 손은 메두사 쪽으로 뻗어 그 머리를 벤 것입니다. 이것은 곧 페르세우스가 계략을 써서 메두사를 손안에 넣었다는 것을 상징하죠. 신화 제작자는 페르세우스의 승리를 더 빛나게 장식하기 위해선 메두사에게 여성의 아름다움을 상실한 저주받은 괴물이란 누명을 씌워야 했을 겁니다. 이것은 곧 메두사를 포함한 고르곤의 자매들이 남성권력에 반기를 든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정벌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중 메두사는 빼어난 미모까지 갖춘 여자였을 겁니다. 또 '여성의 아름다움을 상실했다'는 내용은, 뭇 남성이 희망하는 것처럼 고분고분 '순종'하지 않는 여자였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신화 속의 신들이란, '神'의 이름으로 온갖 패륜을 저지른 후안무치들이지요. 특히 제우스는 온갖 방법으로 몸을 바꾸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취하고 팽개치고 아이를 낳게 하지 않았습니까? 제우스의 욕정의 제물이 된 여자들은 제우스 아내 헤라의 질투로 갖은 고통을 받다가, 성장한 아들의 도움으로 고통에서 풀려나지요. 즉 남자로 인해 고통받고 남자로 인해 고통에서 풀려난다는 이야기지요. 이런 내용들에 비춰보면 신화의 제작자가 얼마나 여성을 멸시하고 남성 우월 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인물이었나를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시 「日出」에서 '새벽'을 메두사에 비유한 것도 바로 이런 전거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새벽은 신선하고 희망적인 시간이지만, 「日出」의 화자가 느끼는 새벽은 고통과 환희를 동시에 되살려 놓는 두 겹의 시간이죠. '시간은 기차선로처럼 직진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왜곡되면서 윤회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지구의 자전, 달의 생몰, 절기의 되풀이, 나날의 쳇바퀴, 같은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제 입으로 제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 우로보로스 같은 형상. 둥글되 만다라에는 이르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궤적. 욕망과 고통의 간섭을 훌훌 벗어 던지지 못한 시간과 장소. 이런 곳 이런 시간에 언제까지 머물고 있을 것이냐? 가자! 가자! 부추기는 내용으로 끝나는 시가 「日出」입니다.
「日出」은 짧은 시이므로 독자를 위해 외워보죠. <어느 새벽이 내게서 훔친 피가 / 수평선을 찢고 솟는구나! // 고통도 오십 년쯤 / 어둠에 절였다 동쪽하늘에 걸면, / 저렇게 둥글구나! // 캄캄하던 나무들 바람을 흔들며 곁에 서고, / 내일 새벽에 죽을 꽃들을 점지하느라 / 온 산이 벌겋다. // 가자! 가자! / 새벽은 메두사처럼 살아 돌아온다! > 이게 그 전문입니다.
밤새도록 어두운 산길을 걸어와서 수평선을 찢고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볼 때, 그 눈부신 광휘에 마음이 홀리고 눈이 멀어도 좋을 만큼 환희를 느끼지만, 그 환희는 순간적인 것이고, 잊었던 고통이 목 줄기를 타고 오르며 숨통을 조이는 겁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또 묘한 환희를 동반하는 고통이죠. 이처럼, 두 겹의 내면을 표현하기에는 메두사가 가장 적절한 이미지였습니다.
「괄호 속의 귀뚜라미」나 「wren! wren! …」같은 시들이 '억압받는 여성성에 대항하는 페미니즘의 계열의' 시로 읽혔다면 반대할 의사는 없습니다. 다만 그 방법에는 차이가 있죠. 저는 무턱대고 목소리를 높여 여성억압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시로 제 내면을 그려 보임으로써, '내가 느끼는 고통과 억압의 내용들이 이런 것이었구나'하고 우선 저 자신부터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박남희 ―「구절리 바람소리」 계열의 작품들이나 '땅끝'을 소재로 한 시를 보면 '빈민의식' 또는 '변두리의식'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는데, 이러한 의식은 선생님께서 『현대시학』(97년 8월호)<시인의 詩話>에서 "나는 시단의 외계인이며 시의 빈민에 불과하다. (중략) 나는 일찍이 빈민이었고, 앞으로도 빈민일 것이다. 나는 빈민에 익숙하다. 시인된 나는 제단 위에 누워있을지라도, 내 시는 날개를 달고 자유롭기를 빈다."고 하신 말씀으로 재삼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러한 소외의식이 늦깎이 여성시인으로서 겪게된 불이익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이향지 ―시의 본령은 넘치는 '富'와 '中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빈민의식과 주변의식에 뿌리내리고 있지요. 시의식 자체가 빈민의식, 주변의식이기도 하구요. 시라는 것은 항상 세상과의 불화가 쓰게 하고, 시의 내용도 그렇지요. 아픔도 그리움도 부족한 것도 불편할 것도 없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시를 쓰겠습니까? 저는 등단을 하고 난 뒤에야, 밥을 걱정해야할 정도로 가난하던 시절에도 느껴보지 못한 빈민의식, 주변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저 모르게 저의 발길도 그런 쪽으로 향하더군요. 되돌아서는 수밖에 더 나아갈 곳 없는 세계의 변두리.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폐광촌의 집들, 산비탈에 방치된 폐광, 잘못 찾아간 땅끝의 뻘밭 앞 같은 곳에서 저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고 저를 찾을 수 있었어요. 그런 곳에서 제 내면의 풍경을 읽었고, 그처럼 삭막한 풍경에 제 내면을 겹쳐놓고 울면서 시를 썼습니다. 그 시들은 분명 제 개인적인 감정을 뛰어넘어, 그 시절 그 지역 상황과 그 지역민들의 어려움까지 담고 있었지만, 주목을 받진 못했지요. 늦깎이 여성시인에 대한 편견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박남희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마치 제 등단시 「폐차장 근처」를 쓸때의 심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빈민의식'이나 '변두리 의식'이 수평적 차원의 존재의식이라면 선생님의 시에 나오는 '나무새'나 '비닐새'와 같이 날지 못하는 새의 이미지는 흡사 수직적 차원에서 선생님의 실존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이는 선생님의 시에서 '관'이나 '항아리'로 비유되는 삶의 공간들과 짝을 이루어 좀 더 구체적인 존재론적 시인의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는 마치 자신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미지의 성지를 찾아 떠나는 순례자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생각됩니다. 앞에서 거론한 <시인의 詩話>에 보면 '부정형의 穴地'라는 말이 나오는데 시인이 '부정형의 穴地'를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존재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아닌지요? 그리고 흡사 '자궁'의 이미지처럼 드러나 있는 '부정형의 穴地'가 상징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향지― 나무새는 '날지 못하는 슬픔'을, 나무의 몸에 감긴 비닐조각들은 '썩지 않는 슬픔'이 내 몸을 휘감고 있음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나무새는 새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분명 나무죠. 그러나 이미 뿌리가 잘렸으니 나무라고도 할 수가 없죠. 날아오를 하늘도, 뿌리 내릴 땅도 잃어버린 어중간한 존재가 바로 나무새의 모습이죠. 나무였으나 나무도 아닌, 새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새도 아닌, 이쪽에도 저쪽에도 자리가 없는 중간지대에서 우두커니 창 밖을 보고있는 나무새. 거기 제 모습이 있었어요.
그처럼 막막할 때 찾아온 말이 '管', '항아리', '부정형의 穴地'같은 말들이었습니다. 저도 써놓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만, '부정형의 穴地'란 아무리 봐도 자궁의 이미지입니다. 여자라면 누구나 하나씩 갖고 있고, 저도 하나 갖고 있지요. 제가 그 글에서 '부정형의 穴地'를 찾아간다고 한 말에는 출발지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지는 내가 들어앉았다 쫓겨난 내 어머니의 자궁의 아니라, 나의 자궁일 거라는 게 바른 느낌입니다. 내 속으로 어떻게 나를 집어넣겠다는 것인지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제 의식이 갈피를 잡아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겠지만, 나 자신이 나를 찾기 위해 이미 길을 떠났다는 뜻이 아닐까싶어요. 내 안의 모성이 管같은 길을 열어놓고 상처 입고 돌아오는 나를 기다린다는 뜻도 되겠지요. 나와 나는 오랫동안 불화하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조금씩 가까워지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일지, 어떤 경로 어떤 모습으로 올지는 모르지만, 내가 나를 안아들이는 순간을 지극한 걸음으로 다가가며 저도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부정형의 穴地'란 존재의 상처, 그 근원을 치유할 수 있는 모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는 죽음이 선행되어야 하리라는 예감이 슬프기는 하지만….

박남희 ―「그 바다」나 「잠깐 본 항아리」같이 비교적 긴 산문시들을 보면, 일종의 '환상'과 '상징'을 결합시켜 보여주는 '시인의 마음의 풍경'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이러한 시들은 시인의 사적인 체험을 자유로운 상상력 속에 용해시켜 보여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런 시들을 쓰시게 된 동기와 이런 시들을 읽는데 도움이 되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이향지 ― 정신분석학 용어 중에 '적극적 명상(積極的瞑想)'이라는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깨우쳐 가는 심리학적 작업이고, 무의식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 바다」,「잠깐 본 항아리」,「그림자의 언덕」,「새벽의 행렬」같은 시들이, 그러한 경로로 저에게 왔던 것 같습니다. 제 시가 저의 내면을 열고 들어설 무렵부터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보는데, 아마 저의 '자아'가 '무의식'을 그렇게 만난 것 같습니다. 「그 바다」가 가장 먼저 가장 길게 찾아왔던 내용인데, 보이는 내용을 그릴 수 있었을 뿐, 섣부른 해석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바다」는 무려 5년이나 걸려서 썼습니다. 온갖 형태로 써보다 결국 제가 겪은 내용을 산문으로 옮기고 시적 장치를 가함으로써 완성을 시켰지요. 「그 바다」가 저를 찾아올 무렵 '나는 왜 시를 쓰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결국 한 정신과 의사와의 대담을 통해, 그게 제 내면의 에너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바다」이후에도 여러 풍경들이 뜬금없이 저를 찾아오곤 했습니다. 꿈으로 올 때도 있고, 환상처럼 올 때도 있어요. 예언적일 때도 있고, 언젠지 알 수 없는 풍경이 잠깐 보이다 사라질 때도 있어요. 하얀 공기의 소용돌이로 올 때도 있고, 선명한 실상으로 올 때도 있어요. 아직 확실한 말들이 찾아오지 않아 완성시키지 못한 것들도 몇 편 남아있고요. 이것들은 결국, 저의 자아가 무의식의 도움으로 고통을 뚫어내고 성숙으로 이르는 단계를 보여주는 것들이라 생각되지만, 저도 아직은 무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시들이, 과연 얼마나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에 저의 고민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원형(原型)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고, 깊은 내면 속에서는 결국 하나라고요. 모두 그것을 만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거라고요. 저는 또 그러한 시들을 사적인 경험만으로 방치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다만 우리 시의 풍토가 아직은 이처럼 새로운 말들을 거부하고 낯설어한다는 데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만큼 겉으로 시를 쓰고 겉으로 시를 읽는다는 뜻이 아닐는지요?

박남희 ― 선생님 말씀에 동감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시를 읽다보면 부분적으로 어딘가 모호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실제로 『구절리 바람소리』시집 해설에서 김정란 선생님께서도 이런 지적을 하셨는데, 선생님의 시에서 느껴지는 모호성은 무언가 다 보여주지 않고 감추려는 시적 성향과 언어 또는 형태적 실험의식 등에 기인한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딘가 객관화되어 있지 못한 관념이나 미처 상징화되지 못한 상징들, 이미지의 통일성의 혼란 등에 있지 않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호성은 필연적으로 독자들의 오독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런 문제에 관해서 한 말씀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향지―『구절리 바람소리』시집 해설에서 김정란 선생님이 지적하신 모호성이란, '말하려고 하는 바의 새로움을 언어가 미처 따라잡지 못한'것은 아닌가하는 우려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저도 그 지적에 어느 정도 공감했고,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어쨌든, 벌써 5년 전의 시집입니다. 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시인께서 지적하신 '무언가 다 보여주지 않고 감추려는 시적 성향'이라는 지적에는 무조건 동의할 수가 없네요. 오히려 저는 숨김없이 다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시적 장치를 통해 보이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주었을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언어 또는 형태적인 실험의식'은 시의 새로움을 위해 오히려 권장해야 할 덕목이 아닌가요? 또, '객관화되어 있지 못한 관념'이라든가, '미처 상징화되지 못한 상징들', '이미지의 통일성의 혼란' 등을 지적하고 계신데, 그러한 지적들 역시 제가 추구하고 있는 새로움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나온 인상적 비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세계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기존의 상징들이 깨어져나가고, 이미지의 동일성이 해체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 아닌가요? 저는 가능한 한 다양한 방식으로 상징들을 실험해 보기 위해서 다양한 상징들을 시의 행간 사이, 사이에 묻어둡니다. 제 말의 결을 따라가면서 제목과 연관시켜 읽어보면 행간 속에 묻어둔 상징들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풍자시의 경우는 제가 일부러 상징적 혼란을 조장한 측면도 있습니다. 행 갈이도 해주지 않고, 구두점도 찍어주지 않고, 주로 상자로 처리했지요. 친절하지 않은 세계에 친절하지 않은 어법으로 응수했다고 볼 수도 있죠. 마음속이 분노로 가득 차 있는데 내숭을 떨면서 얌전한 어법으로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서 언어의 카오스 속으로 푹 잠기는 거지요. 그러나 그 카오스는 카오틱한 카오스가 아니라 코스믹한 카오스, 즉 질서를 위해 움직이는 카오스입니다. 천지창조도 모두 카오스를 통과하지 않습니까? 요즈음엔 카오스모스란 말도 쓰이고 있더군요. 유행을 따르자는 것이 아니라 제 시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인용해본 말씀입니다. 시의 언어는 이미 객관화되어 있는 관념이 아니라 객관화를 향해 가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객관화되어 있는 관념에만 종사한다면, 시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아무래도 시를 투명하게 쓰라는 주문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시를 맑은 물 속의 돌멩이처럼 단번에 들킬 정도로 들여다보이게 쓰려면 차라리 광고카피나 동시를 쓰는 게 낫지 무엇 때문에 시를 씁니까? 저는 시법과 말 중에서 택하라면 말 쪽을 택합니다. 말의 형태로 육화되어 있지 않은 시법이란 시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네요. 제 시에 관해서 이야기 할 기회가 좀체로 주어지지 않아서 마음이 좀 부대꼈던 것 같습니다. 지적해주신 부분을 모두 마음에 담아두고 좀더 편하게 소통되는 어법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박남희 ―어설픈 저의 시 읽기가 혹시 선생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린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 아무튼 치기어린 우문에 현답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화제를 약간 바꾸어보지요. 최근에 월간 『山』지에서 금강산이나 백두대간에 관한 기행문을 본적이 있습니다. 『현대시』 98년 11월호에서 <시적 지리지로서의 금강산>도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시 이외에 '비평문'이나 '소설'등 다양한 장르의 글들을 쓰신 경험이 있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이런 글들을 쓰시게 된 동기를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혹시 이러한 글들이 시를 쓰시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이향지 ―산은 공황상태에 빠졌던 정신에 생기를 불어넣고, 육체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었습니다. 월간『山』에는 96년도부터 글을 싣고 있습니다. 지난해 5월까지는 우리나라 명산들을 돌며 에세이를 연재했고, 지난해 6월호부터는 <북한쪽 백두대간, 지도 위에서 걷는다>를 쓰고 있습니다. 체제와 이념을 뛰어넘어 남과 북이 공감할 수 있는 온갖 재료들을 섞어가며 백두산을 향해 걸어가 보이는 작업입니다. 분단된 국토, 분단된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하여, 누군가는 꼭 해둬야 할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강산은 지도를 따라 휴전선을 넘자마자 제 발 밑으로 들어온 산인데, 바로 그럴 때 우연히 금강산 관광이야기가 터진 겁니다. 그때 저는 이미 금강산 지형을 파악하고 있었고, 자료들을 충분히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난 해 8월호에는 '금강산의 모든 것'을 혼자 써서 특집을 하게 되었고, 그 기사를 바탕으로 <금강산은 부른다>는 가이드북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첫배 타고 금강산 다녀온 뒤에는 탐승기 몇 편 써서 여비에 보탰지요.
『현대시』에 실은 글은 금강산 다녀오기 전에, 먼저 다녀간 문사들의 시나 유산기에서 알맹이를 채취하여 요소마다 다리를 놓아가며 금강산의 큰 줄기를 거칠게나마 훑고 나오는 형식을 취했던 것입니다.
저는 대학신문 편집을 하며 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땐 너무 가난해서 일주일에 720원정도 받는 교정료가 큰 도움이 되었거든요. 그때의 경험들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쓰게 만든 것 같습니다. 소설은 대학 4학년 때 단 한편 써서 교내 문학상을 받았고, 미술평이나 시집 서평들은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몇 편 써보았을 뿐입니다. 요즘 하고있는 '백두대간' 작업은 분명 벅차고 시 쓰는데 지장을 줍니다. 이 벅찬 작업이 시 쓰는 시간을 빼앗아가기는 하지만, 새로운 원기를 충전시키는 기회도 됩니다. 사실 직장가지고 시 쓰는 분들에 비하면 들어앉아서 글만 쓰는 저는 시간이 더 많은 편이지요.

박남희 ―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을 내셨는데, 세 번째 나올 시집이 궁금합니다. 언제쯤 발간하실 예정이신지, 그리고 선생님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향지 ―『구절리 바람소리』이후에 쓴 시들이 꽤 많이 모였습니다. 『구절리 바람소리』가 '고통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과정'이었다면, 세 번째 시집은 '고통으로부터 걸어나오는 과정'입니다. 언제쯤 발간될 수 있을지는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시집 다음엔 '나에게서 우리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의 시집을 한 권 정도 더 낸 뒤, 그동안 써놓은 山詩들을 발표할까 합니다. 이 희망이 뮤즈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빌고 있습니다.

박남희 ― 지금까지 대담에 임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현 문단에 대한 선생님의 소망 같은 것이 있으시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향지 ―저는 대답 없는 길을 너무나 오래 걸어 왔습니다. 가끔씩 이름도 좀 불러주고, 시를 발표할 수 있는 지면도 좀 넓어졌으면 합니다.

박남희 ― 선생님의 말씀에 저도 동감입니다. 요즘 『山』에 관한 글을 쓰시느라 무척 바쁘신데도 이렇게 시간을 할애해주신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선생님의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1999년 4월호 '현대시'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