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8 : [시가 있는 산문], 야생화, 야생화, 천년 후의 야생화

◎ 2001/4/10(화) 15:02 (MSIE5.0,Windows98) 211.55.55.179 1024x768

[시가 있는 산문], 야생화, 야생화, 천년 후의 야생화

<시인의 길>

야생화, 야생화, 천년 후의 야생화

이 향 지

나는 산을 좋아해서 산에 자주 다닌다. 내가 산을 걷는 일은 나를 걷는 일과 같다. 산에 가면 꽃이 핀다. 나는 꽃을 보려고 산에 가는 건 아니지만, 꽃피는 산이 좋다. 내가 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내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꽃은 산이 아닌 곳에서 더 많이 피지만, 산꽃들은 도시의 길섶이나 들판에서 피는 꽃과 다르다. 산꽃들은 대부분 작고 수수하다. 흙이 있고 온도와 습도가 맞으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는 오래 동면한다. 야생화의 삶과 시인의 길, 무엇이 다를까.
야생화는 저 하나만으로도 자족한 꽃이다. 야생화는, 저 한 포기만으로도 한편의 완성된 시다. 시인된 내가 그토록 추구하던 완성이, 보잘것없이 여겨온 야생화의 길에서 발견되었다. 아무도 심지 않은 꽃. 스스로 피는 꽃. 야생화는 시인이다. 제 몸 속을 흐르는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싹 튼 자리에 무덤을 짓는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꽃이 옆에 있어도, 피를 섞거나 패러디하지 않는다. 초롱꽃은 초롱꽃, 개별꽃은 개별꽃, 솜다리꽃은 무너질 때까지 솜다리꽃이다. 이것은 내가 나에게 요구하는 시인의 모습, 임무와 맥이 통한다.
자연은 때로 가혹하지만, 그 채찍이 오히려 이 꽃들의 삶을 견고하게 했다. 제 뿌리가 규정하는 種의 계율, 제 種의 역사의 시계 위에 발을 딱 붙이고, 때맞춰 꽃 피우고 씨앗을 맺고 죽는다. 이듬해 그 자리에서 다시 싹튼다. 지난해의 것과 똑 같은 꽃을 피운다. 얼마나 당당하고 자족한 삶인가. 얼마나 확실하고 황홀한 재생인가.

그러나 이 자족함, 이 황홀함의 땅은 빠른 속도로 파괴되고 있다. 우리가 염려하는 시의 위기, 문학의 위기가 야생화의 위기와도 맞물려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제 이 꽃들을 보려면 점점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인간들의 이기심과 횡포에 쫓겨 뒷걸음치는 자연. 바위산 꼭대기까지 뒷걸음친 뒤에는 아득한 추락이 있을 뿐이다. 뿌리째 캐어다가 재배를 한다지만, 사람의 손을 타고 사람이 가꾸기 시작하면 이미 야생화는 아니다. 겉모습이 같다고 같은 산꽃은 아닌 것이다. 재배한 취나물이나 참나물 맛은 자연 속에서 채취한 나물 맛과는 딴판이다. 야생화도 그럴 것이다. 시도 그럴 것이다. 비료 먹고 자란 야생화! 그것은 고통 없이 태어나는 시들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걷는다. 자연을 향해. 폭포 아래로 물맞으러 가는 사람처럼, 고통을 향해. 새로운 고통으로 묵은 고통이 치유되기를 소망하면서, 배낭 하나 등에 지고 거친 자연 속으로!

내 밥이요 장난감이었던 산꽃 들꽃들

자연은 야누스다. 한쪽 산기슭엔 눈을 깊이 쌓아놓고, 다른 쪽 산비탈에선 꽃을 피운다. 시인은 그 양면성의 솔기를 타며, 고통과 환희를 관조하고 통합하는 자. 환희보다는 고통 쪽에 서 더 질긴 탯줄을 발견하는(할 수 있는) 자. 그러나 그 결과물인 시는, 물리적인 혼합물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일찍이 발견된 적 없는 순도 높은 화합물이자, 전혀 새로운 물질인(이기를 요구하는) 시! 그 '새로움'과, '낯섦'을 창출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분해할 수 있는 자. 시여, 나를 밟고 가라! 기꺼이 덜 된 시 아래 누울 수 있는 자. 왁자지껄한 눈부심을 등지고, 거친 길을 기꺼이 걸을 수 있는 자! 그들로 인해, 예술은 이어지고 자연은 재 탄생된다. 나는 어디쯤 있는가. 나는 터무니없는 목표를 정하고 나 자신을 닥달하며 오를 수 없는 나무를 한 그루 키우고 있는가. 제 種의 시계 위에 발을 딱 붙이고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는 야생화처럼?

나는 어릴 때 야생화들 틈에서 살았다. 내 주변에 지천이던 들꽃과 산꽃들은 내 소꿉살이의 밥이요, 장난감이었다. 자운영꽃 수북 따서 머리에 얹으면 족두리 같았다. 클로바꽃은 내 약속의 꽃반지, 꽃시계였다. 민들레꽃 지고 난 뒤 씨앗이 둥글게 익으면 대궁 꺾어 후후 불어 바람에 날려보내곤 했다. 민들레 씨앗들이 가는 곳, 궁금했지만 내겐 날개가 없었다. 어린 삐비와, 꽁무니를 빨면 단물이 나오는 인동초꽃은 내 간식이었다. 꽃 피기 전의 원추리는, 하얀 대궁이 보일 때까지 나물칼로 도려다 데쳐서 무쳐서 밥 비벼 먹었다. 참취 미역취 우산나물 구슬봉이…. 그때 내 삶터는 자연 속에 있었고, 나는 자연의 한 부분이었다. 그들 속에서 놀며, 살며, 무수히 밟고 꺾어도 죄 같은 것은 몰랐다.

산꽃은 산에서 피고, 산에서 죽는다. 들꽃은 들에서 피고, 들에서 죽는다. 싹 튼 곳이 무덤이다. 햇빛을 좋아하는 꽃. 반 그늘을 좋아하는 꽃. 축축한 그늘을 좋아하는 꽃이 다 다르다. 바위틈을 좋아하는 꽃. 부엽토를 좋아하는 꽃. 다른 나무를 휘감고 피는 꽃. 땅속에서 입술만 열고 피는 꽃. 자연이 심은 꽃. 자연이 거두는 꽃. 그러나 모든 꽃이 다 시선을 끄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시선을 끌고 발길 붙드는 꽃 위에 나 자신을 겹쳐보고, 먼 원형을 만날 때, 시는 잉태된다. 현재의 나와 통합을 이루었을 때, 시는 태어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 시는 이처럼 야생화의 생리와 겹쳐있다. 山中에 胎를 묻었다는 물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내 문학의 토양이 야생화의 그것과 많이 같기 때문이다.

산은 내 무능과 게으름을 벌하기 좋은 곳이다. 나는 뒤늦게 시인이 되었다. 눈 내린 산길, 아무도 없는 산길은 울기 좋은 곳이었다. 시인 초년의 겨울은 북한산을 헤매며 넘겼다. 그해 겨울 북한산 눈은 내 눈물로 녹았던 거다. 내 눈물로 녹인 눈밭에 손바닥만한 양지가 생기고, 작고 노란 양지꽃이 몇 송이 피던 날, 그때 나는 내 머리 위에도 푸른 하늘이 있었음을 알았다. 나만의 산행은, 계속해서 평범에 안주하지 못한 반골을 벌주기 위한 의식이었다. 편안한 산보다는 험한 산. 고통, 더 큰 고통이 기다리는 쪽으로 나는 조금씩 전진해갔다. 쇠락한 육체를 끌고 길이 있는 곳보다는 길 없는 곳. 이정표가 없는 곳. 오직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 지상의 목표로 떠오르는 극한의 땅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버려 두고 돌아오기를 되풀이했다. 몸이 살기 위하여 방치해 두었던 정신의 정당한 반격이었다. 그 몹쓸 짓을 10년 이상 했다. 이 가혹한 행위로 인해 깊이 깨달은 것이 있다면, 죽음과 삶 사이엔 벽이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기쁨은 작은 것들, 빛 없는 것들의 삶, 그것의 재발견이었다.

그래서 좋은 시를 썼는가. 아니다. 그러나 걷고 있을 동안의 몰두. 그 집중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있었다. 왼발 오른발을 옮겨놓는 단순한 행위 속에 동물의 본성이 스믈스믈 깨어나, 깊은 내면의 말과 풍경을 흘려주었던 것이다. 정지해 있던 시계바늘이 다시 도는 것을 느꼈다. '먼 나'와 '가까운 나'는 이처럼 길항한다. 아직 그런 단계에 있다. 그런 과정에 있다. 그러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더 걸어야 하고, 고통을 더 겪을 것이다. 야생화가 몸 하나로 참혹한 자연을 견디며 마침내 작은 꽃 한 송이 밀어 올리는 것처럼.

꽃이 필 때 산은 공기의 밀물을 겪는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꽃이든 필 때가 가장 아름답고, 꽃봉오리가 벙그는 순간의 향기가 가장 강렬하기 때문일 것이다. 단풍은 산정에서부터 들어 뒷걸음쳐서 내려오지만, 꽃은 산 아래쪽에서부터 고도를 높이며 피어 올라간다. 꽃피는 길은 潮水로 치면 밀물이요, 사람의 걸음으로 치면 '登山'일 것이다. 단풍드는 길은 潮水로 치면 썰물이요, 사람의 걸음으로 치면 '下山'과 같다. 산아래서 보던 꽃을 산정에서도 볼 때가 만조를 이루는 순간이다. 그러나, 모든 꽃이 정상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야생화들은 제가 살고 필만한 땅을 인간보다 더 잘 안다.

자연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같은 길을 닷새나 일주일 간격으로 왕복해보면, 그것을 알게 된다. 자연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빛이 있고 바람이 흐르는 산 속에서는 주검조차도 삶을 향해 몸을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에는 온갖 생물이 엉겨서 산다. 네발 달린 짐승에서부터, 땅속의 지렁이까지. 새와 나비 같은 날것들까지. 주검을 분해하는 미생물들까지, 먹이가 있는 쪽, 삶이 있는 쪽을 향해 움직인다. 식물은 빛 있는 쪽으로 가지를 뻗고, 물이 있는 쪽으로 뿌리를 뻗는다. 바람 있는 쪽에 씨앗을 두고, 비가 오거나 어둠이 내리면 꽃잎을 닫는다. 모두가 살기 위한 노력. 살아남기 위한 노력. 이 단호하고도 엄정한 자연의 법칙, 때로 그것을 거스르고 싶은 나. 잎사귀도 없이 보시기 같은 꽃 한 송이만 불쑥 밀어 올리는 애기앉은부채꽃 같은 나. 위대한 자연 속에서 자주 몸살을 앓는다.

야생화들과 만난 이야기

같은 산을 백 번쯤 올라보면 안다. 어떤 꽃이 언제쯤 어떤 기슭에서 피는지. 어떤 것들 틈에서 피고, 어떤 향기를 풍기는지. 무리 지어 피는지, 혼자 피는지, 어떤 모습으로 지는지. 공기 중 햇빛의 함량과 바람의 방향에 따라 산의 표정이 바뀌듯, 야생화들도 시시각각 표정을 바꾼다.
나는 꽤 많은 산을 다니면서 많은 꽃을 만났다. 일부러 찾아간 적은 없지만, 깊은 산,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일수록 귀한 꽃들이 피어 있었다.

북한산 양지꽃은 내 앞에 봄이 아직 남았음을, 알려준 꽃이다. 도봉산 소나무 능선 반 그늘 속에서 만난 며느리밥풀꽃은 간신히 살고 있는 어떤 여자를 떠올렸다. 작고 오종종했다. 꽃 문이 땅쪽으로 향해 있어서, 무작정 태양을 선호하는 꽃들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나는 그 꽃을 위해 시 한 편을 썼는데, '며느리밥풀꽃'이란 부제가 붙은 '草心歌'가 그것이다. '자미원 민들레'는 강원도 정선의 두리봉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던 길에 만났던 민들레를 위해 썼다. 자미원 간이역 철로 옆, 굳을 대로 굳어진 석탄부스러기 틈에서, 어느 별에서 떨어진 꽃단추처럼 샛노란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폐광 후 광부들이 떠나버린 마을, 개들만 우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꽃을 뿌리째 떠서 옮겨 심고 싶었다. "모종삽을 다오" 말만 그렇게 했지, 나만 돌아왔다. 그 꽃은 분명 나보다 강인한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덕산이나 해미에서 오르게 되어있는 가야산 능선은 내가 어질머리가 도져서 도중하차한 곳이다. 그날 나는 남연군(대원군의 아버지)묘가 있는 쪽으로 혼자 내려오고 있었다. 개복숭아꽃이 활짝 피어 벌이란 벌은 모두 공중 춤을 추고 있을 때. 이것들 봐라! 내 시선이 내 무릎을 끌어다 쪼그려 앉힌 곳. 거기 조그맣고 하얀 별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별꽃'이란 이름이 들어가는 꽃은 많다. 참별꽃 개별꽃 참개별꽃 등등. 그것들은 꽃잎의 숫자와 꽃잎에 빨간 점이 있고 없고에 따라 이름을 구별한다. 야생화의 이름 속에도 지독한 신분차별이 존재한다. 인간의 입김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소백산 상월봉 기슭을 점마 쪽에서 오르다 태백제비꽃 한 그루 뿌리째 뽑은 적 있다. 제비꽃은 오랑캐꽃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 꽃도 모습은 분명 오랑캐꽃인데, 꽃잎이 두툼하고 꽃빛이 달랐다.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었건만/오랑캐꽃/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께/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이용악, 오랑캐꽃)" 나도 그렇게 햇빛이나 조금 가려주고 떠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꽃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무슨 순교자처럼 부처의 설법을 펴기 위해 죽어간 이차돈처럼 흰 피를 뚝뚝 흘려서 내 수첩과 옷, 카메라 껍데기가 온통 오랑캐꽃 흰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나에게 가장 강렬하게 죄를 알게 한 꽃. 지금도 어느 책갈피 속에 납작하게 말라서 나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이 꽃은 나에게 말없는 자연의 저항을 알게 했다. 아무리 작고 미미할지라도, 함부로 뽑지 않으리라. 호랑이 눈에 토끼 눈에 내가 그냥 사람이듯이, 무수한 산꽃 들꽃들, 그냥 야생화라 부르리. 그 꽃에게 약속했다.
태백제비꽃은 태백제비꽃, 하늘나리는 하늘나리다. 경기도 가평의 주금산에서 하늘나리를 꺾은 적이 있다. 개복숭아도 땄다. 느릿느릿 억새풀을 헤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비가 쏟아졌다. 억수 같았다. 천둥번개가 머리 위에서 우르르 쾅쾅거리고, 따악딱 땅을 쪼개는 듯 한 소리! 소름 돋는 섬광! 가까운 어딘가에 벼락이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우산을 멀리 던지며 다급하게 빌었다.

우르릉 쾅쾅 소리. 먹구름에 칼금을 그으며 내리치던 번개. 무서웠다. 동이물을 들이붓는 것 같던 소나기. 죽음의 공포가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그때의 다급함, 그 원색적인 참회의 방식을 잊지 않고 있다. 죽음이 목전에 칼을 들이댈 때, 나는 과연 얼마나 담담할 수 있을 까. 무엇을 지니고 던져야 할까. 그때 알았다. 그러나 이 시를 보면 그 다급한 속에서도 나를 꺾은 '손'들을 용서 못하고 있다. 하늘나리를 칠 수 있는 것은 하늘나리 뿐이다. 그래서 두 하늘나리는 갑자기 불어난 흙탕물을 같이 건너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야생화, 야생화, 천년 후의 야생화를 찾아 떠난다. 길 없는 곳으로! 누군가 지나간 길은 이미 길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천년 후의 시를 찾아서! 텅 빈 광주리처럼 가볍고 깊어져서 내 안의 꽃길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야생화들이 그때에도 남아있기를 빌며!

*시안, 2000년 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