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7 : [시와 반시/내 시 속의 그곳], 새벽에서 새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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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반시/내 시 속의 그곳], 새벽에서 새벽까지

[내 시 속의 그곳/정선 구절리]

새벽에서 새벽까지

이 향 지

도착하자마자 떠날 시간을 묻는 사람들이, 이 마을에 온다. 강원도 정선군 북면 구절리. 정선선 단선 철도가 끝나는 곳이다. 사방에서 산이 막아 하늘이 손바닥만한데, 가지치는, 가지치는, 골짜기마다 지붕 낮은 집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산다. 이 골짝에 있으면 저 골짝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런 골짝 수십 개를 한 손에 모아 쥔 종착역까지, 몇 안 되는 손님을 태우고 달려온 기차. 구절양장 휘도는 물길을 거슬러 수없이 허리를 꺾으며 달려온 기차. 머리 쪽에 붙었던 기관차를 꼬리 쪽에 붙이고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새벽 차 떠날 때 울리는 기적소리는 유난히 길고 크게 들린다. 새벽 산이 우렁 우렁 기차 울음을 따라 운다. 캄캄한 산 울음이 산모퉁이에 부딪쳐 철로 위에 주저앉거나 되돌아온다. 캄캄한 산 울음 주저앉거나 되돌아온 철로 지척에 검은 내장을 꺼내놓은 산비탈들이 있다. 석탄더미가 산처럼 쌓여있는 폐광들이 캄캄한 구멍들을 열어둔 채, 지척에 있다. 가파른 산비탈 옆구리를 열고 아득한 지하, 화석의 지층으로부터 끌어올려진 산의 내용물들이, 제 몸이 끌려나온 캄캄한 구멍 들여다보며, 지척에 있다. 무너져 가는 기둥과 지붕, 뒤집어진 광차와 녹슨 레일들만 남은 흉가 같은 폐광들이, 사람이 짓고 세우고 쓰다 팽개치고 떠나버린 물건과 구조물들이 어수선하게 버려진 채, 지척에 있다. 한때는 황금충들이 득실거렸을 곳. 얇았으나 희망 아래 단란하던 슬레이트 지붕들이, 기울고 무너지고 구멍 뚫리고 문짝이 떨어진 채, 작은 바람에도 끽끽 울며, 지척에 있다. 새벽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그런 캄캄함들 알아보지 못한다. 해뜨기 전까지는 산도 마을도 캄캄하여 별빛만 보이는 곳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새벽기차에서 내렸다. 땅에 발을 딛자마자 신선한 냉기에 소스라친다. 철로를 건너 낮은 역사를 통과하여 마을 쪽으로 걸어간다. 길옆의 지붕들이 유난히 나직하다. 어두운 하늘에 잔별 몇 개 띄우고, 텅 빈 길. 길옆 집들과 어울리지 않게 허여멀쑥 키 큰 전봇대 하나, 촉수 높은 외등을 밝혀들고 낯선 사람들 내려다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외등 갓이 덜렁거린다. 외등 불빛 닿을락말락한 곳에 작은 밥집이 있다.
그 밥집에서 이른 아침 먹고 상원산 간다. 철길 아래 굴다리 끼어 갓거리 돌아간다. 노면이 얼어서 미끄럽다. 미명 속에서 듣는 물소리 무척 괄괄하다. 기찻길 자동차길과 나란히 흐르는 좁은 강은 송천이다. 백두대간 소황병산에서 발원하여 황병산 선자령 대관령 제왕산 고루포기산 발왕산 노추산 사달산 다락산 상원산 물길을 모아 끌고 아우라지로 흘러간다. 아우라지에서 골지천을 만나 조양강이 될 송천. 좁고 깊고 굴곡 많고 물매 급하여 숫물이라 부른다. 금대봉 두타산 청옥산 오대산 반론산 물길 끌고 임계 땅 돌아온 골지천은 송천보다 품이 넓고 흐름이 덜 급하여 암물이라 부른다. 암물과 숫물이 몸을 합쳐 조양강을 낳는 아우라지. 남한강 수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두물머리지만, 그 예전 노래도 자갈밭도 이제 먼 곳에 있다. 구절리 토박이들은 송천 언저리에 좁은 터를 닦고 산비탈 파서 옥수수나 감자 더덕 심고 산나물 같은 것 캐어먹으며 살았다. 산자락마다 석탄광산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랬다. 상원산 가는 길은 갓거리 어름에서 송천을 건너 자개골로 들어선다. 그루터기만 남은 옥수수밭과 유천 사이를 지나가는 좁고도 긴 돌팍길이다.
상자개 푯골에서 길 없는 산비탈 치오른다. 날은 밝았지만 태양은 구름 속에 있다. 나목들의 능선에서 만난 지독한 눈보라. 미친 말갈기 같은 눈보라 속에서 꽁꽁 얼어, 방향마저 잃었다. 천신만고 끝에 정상은 밟았으나 기차 시간에 쫓겨 서두르는 사람들, 다리 다쳐 걸음 늦은 여자, 돌볼 겨를 없다. 유일한 낙오자. 도태된 여자. 멧돼지 우글거리는 심산에서, 혼자 눈 속에 있다. 눈 위에 남은 발자국이 유일한 길잡이. 눈보라는 그쳤으나 쌓인 눈은 깊다. 지퍽 지퍽 부는 바람, 앞서 간 사람들의 발자국 자꾸 덮는다. 그럴 때 듣는 기적소리. 오후 3시를 갓 넘긴 산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함몰한다.

되돌아가는 기차가 보내는 먼 기적소리. 그것은 버려진 자, 남겨진 자의 자유를 일깨우는 소리. 오늘 뒤에는 내일이 있다. 막힌 곳에서는 돌아서고, 길 없는 비탈에선 돌멩이처럼 구르면 된다. 다 버린 뒤에 찾아오는 깨달음. 가파른 산비탈 아래 길이 있었다. 관수터널을 빠져나온 철로가 길고 긴 허리를 아우라지 쪽으로 트는 게 보이지만, 그 길목의 이름조차 모르는 여자. 아는 곳 새벽에 도착한 구절리 뿐. 아스팔트길 만나 터덜터덜 걷는데, 지나가던 차가 뒷걸음쳐 왔다. 구절리 반대쪽으로 걷고 있었다고.
젖은 옷을 말리며, 다음 날 새벽열차 기다린다. 바람이 분다. 야생마 천 마리가 다투어 달리는 것 같은 바람소리. 바람이 커지면서, 갑자기 밤이 되었다. 폐광에 쌓였던 석탄더미에서 검은 알갱이들이 날아올라, 이 골짝 저 골짝 폐광에서 한꺼번에 날아올라, 캄캄한 차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붕 낮은 집들과 외등 갓이 바람에 떤다. 목구멍이 텁텁하고 눈이 아프다. 밥집 아줌마는 쉴새 없이 물을 끼얹어 부엌바닥을 씻는다. 길 쪽으로 난 창문은 바람과 탄가루를 들여놓지 않으려고 합판을 덧대고 도배까지 했다. 비로소 발견하게된 구절리의 진짜 얼굴.

9년 전 겨울. 그렇게 발목 잡힌 자 되어, 마음 한 쪽을 거기 묶어두고 살아온 여자. 가고가고 또 가던 마을 찾아왔다. 그때 그 새벽 기차는 2년 전부터 끊겼다. 하루 여섯 차례씩 드나들던 기차도 아침 저녁 7시, 두 차례밖에 다니지 않는다. 구절리 역사는 문을 닫았다. 표 받고 표 팔던 역무원도 없다. 청량리와 구절리를 바로 이어주던 통일호. 그 새벽기차는 이제 오지 않는다. 개나리 우거졌던 울타리를 터서 만든 넓은 길 걸어 철로 위에 서니, 개나리 울타리만 듬성듬성 노란 꽃을 달았다. 아우라지 쪽 가리키는 새 이정표만 텅 빈 철길 옆에서 혼자 말쑥하다. 잘못 왔는가. 잘못 왔는가. 폐석 다져 사방공사 끝낸 산비탈은 여전히 검은데, 아카시아 묘목들 가지 뻗고 꽃 피기도 전에, 못 보던 간판들 우후 죽순 같다. 송천 거슬러 종량동 가는 길에 오장폭포 물줄기 만난다. 검은 바위틈에 진달래꽃 피어 벙긋 웃는다.
*시와 반시, 2000년 여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