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4/10(화) 13:36 (MSIE5.0,Windows98) 211.55.55.179 1024x768 [書評] 권경업 산시집, <잃어버린 산>   지리산, 멈출 수 없는 사랑과 그리움                                                                              이  향  지 (시인)  그는 어디에 있으나 지리산에 있다. 신밭골, 쑥밭재, 치밭목, 조개골, 유평리, 무제치기 폭포…. 그는 어디에 있으나 지리산을 되살려내고, 지리산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부활시킨다. 그렇다. 권경업의 다섯 번째 산 시집 『잃어버린 산(도서출판 빛남刊, 값 5천원)』은 지리산과 지리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바치는 순정한 사랑시집이다.  그러나 이 시집 대부분의 시편들은, 지리산에서도 만날 수 없는 한 사람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사랑과 그리움을 주제로 하고 있다. '올해도 저렇게 / 후두둑 지는 진달래 / 나 혼자 보라 하십니까 // 조개골엔 아직 잔설 / 어느 하나 움 틔우기 전 / 속절없이 스러지는 저 설움을 / 수없이 보아온 내게 / 눈물도 말라버린 내게 / 또 보라 하십니까' 잔설 속에서 피는 진달래꽃에서부터, '그리움엔 / 길이 없어 / 천 길 벼랑 / 몸을 던'지는 무제치기 폭포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리산에서 만나는 사물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한 사람의 모습과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을 되살리는 추억의 소도구들이 된다.  그가 잃어버린 한 사람! 그와 함께 '잃어버린 산'! 그는 누구를 잃었는가? 어떤 산을 잃었는가? 그는 어렵게 대답한다. 1986년 아이거 북벽에서 자일 파트너를 잃었다고. 그리고 그와 함께 오르려던 미래의 산들을 모두 잃었다고. 그 없이는 자일을 다시 잡을 수 없었다고. '꿈을 꾸어도 늘 천상의 꿈만 꾸는, / 품어도, 늘 제 오르는 산보다 더 높은 것을 품은 / 피가 푸른 사람들 // 산정으로 돌아가는 옆길을 두고 / 벽으로 벽으로만 오르는 고행의 길 // 천화대 범봉 끝, 알프스 마의 벽 / 히말라야 설산 마루 / 너희 영혼의 짙푸른 하늘 / 그 무한 무소유의 자유가 / 오름의 절대 이유인 / 그대들은 구도승 //' ―「피가 푸른 사람」  고통과 그리움은 언제나 남은 자의 몫. 그는 이제 지리산을 찾아서 잃어버린 산, 한 귀퉁이라도 되찾으려고 노력한다. 저 높은 곳으로만 향하던 눈길과 정열을 한사코 끌어내려, 시절의 격랑에 휩쓸려 변모해 가는 지리산과 지리산 토박이들의 곤궁한 삶을 끌어안는 파수꾼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현실의 파도는 그의 희망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지리산과 지리산 사람들의 삶터를 파괴하고 잠식해 들어간다.    '뒤안 가득 미소 환한 호박꽃, / 철사 테메운 질항아리 해묵은 된장, / 쇠죽아궁이 아랫목 같은 토박이들 / 바람 찬 새벽, 챙길 세간 없이 / 하나 둘, 쫓기듯 떠나간 산 어귀 //…// 삽작 밖, 글썽글썽 / 어머니 손짓 같던 그 밥 짓는 연기 / 한 올 피우지 못하는, /…/ 획일의 식당가 줄지은 앞에 / 처진 어깨의 나는 실향민' ―「잃어버린 산 어귀」에서  그가 지리산 그늘에서 맞닥뜨리는 건 더 깊은 상처요 상실이다. 그러나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행간 속에서, 곤궁하나 아름다운 토박이들의 삶을 발견하고 거기에 희망을 건다.  '저것 좀 보아 / 저 무거운 산을 품고, 강이 / 어화둥둥 바다로 간다 // 야윈 등 쓸어안고 / 찢어진 상처 서로 싸안아 / 허기져도 함께 가자 / 힘겨워도 함께 가자' ―「산하(山河)」  1977년 토왕성 빙폭을 완등하고, 1982년 히말라야 파빌봉을 오르던 무렵의 그가 수직의 잣대에 매료된 산악인이었다면, '새벽눈.3'에서처럼 '써레봉 자작숲 / 누가 저리도 정갈히 / 밥상보를 덮어 / 멧짐승 아침상 차려두었나'로 따뜻하게 함축할 수 있는 그는 이제 명실공히 이 땅의 자연의 신음소리와 산아래 삶의 곤궁함까지를 폭넓게 끌어안는 산악시인으로 우뚝 섰다고 하겠다. 보라! 불혹의 사나이가 산 하나를 깊이 품으면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 한 권이 탄생한다. *월간산,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