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4/30(수) 21:15
[국토/짧은 글 긴 생각], 한 열흘 피어 있기 위하여  

"짧은 글 긴 생각"

한 열흘 피어 있기 위하여



      이 향 지(시인)


동백꽃이 피었다. 한 열흘 피어 있기 위하여, 붉은 동백이 피었다. 열 겹 스무 겹 눈꺼풀. 괭이갈매기 울음소리로 들어올렸다. 다홍빛 꽃잎들이 포개져서 샛노란 꽃술들을 들어 올리고 있다. 아직 덜 핀 꽃잎 사이로 아, 아, 소리치는 봄바람. 저 붉은 한 송이들을 피우기 위하여, 동백 잎사귀들은 쉴 틈 없이 해풍을 닦았다. 저 붉은 한 송이들을 피우기 위하여, 굴곡 많은 해안선은 바장바장 조바심을 쳤다.

동백꽃은 다도해의 꽃이다. 남쪽 바다 고향 언덕을 너무 사랑하여서 꽃빛이 저리 붉은가. 천리 밖에 옮겨놓아도 살기는 살지만, 꽃이든 사람이든 좋아하는 곳에서 살게 두어라. 목포, 신안, 영암, 강진, 해남, 진도, 완도, 장흥, 보성, 순천, 고흥, 여수, 광양, 하동, 남해, 고성, 통영, 거제…. 썰물에 드러난 갯돌마다 하얀 석화가 만발 할 즈음, 사람들은 입맛이 다시 도져서 굴곡 많은 해안선을 돈다.

동백꽃은 뒷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매화보다 먼저 피고, 산수유보다 먼저 피지만, 요란한 몸짓도 향기도 터트리지 않는다. 벌과 나비가 입대기 전에, 다도해 바람이 먼저 수정한다. 열매가 크고 단단해서 향기로운 기름을 남긴다. 열매가 다 익은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동백기름. 우리 여인네들의 머릿결은 그 향기를 알고 있었다. 동백꽃은 통 꽃이다. 나팔꽃처럼 통 꽃이지만 꽃잎이 두텁고 꽃빛이 선명하다. 잎사귀도 꽃을 닮아서 구질구질 하지 않다. 꽃이 필 때도 수줍고 아름답지만, 질 때도 꼿꼿하고 깨끗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떨어질 수 있는 용기.  

내가 가장 처음 만났던 동백꽃은 통영 충렬사 홍살문 안에 두 줄로 심어져있었다. 아름드리 고목나무에 크고 붉은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있었다. 그 나무 아래서 놀고 있으면 싱싱하고 붉은 꽃을 선물처럼 떨어뜨려 주었다. 갓 떨어진 꽃을 지푸라기에 꿰어 목에 두르고 놀았다. 근래 가장 그럴싸한 동백꽃은 풍랑에 갇혀서 어슬렁거리던 홍도 절벽위에 있었다. 저절로 생겨난 것인지 잘 가꾼 방풍림인지, 제법 굵직굵직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도시의 매연도, 사람의 손길발길도 닿지 않는 섬 속에서 저마다 열심히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그때 그 숲에서 통영 충렬사 홍살문 안에 심어져있던 고목나무들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꽃은 가장 먼데서 핀다는 것을 알았다.

누가 보아주든 말든 두텁고 윤나는 잎새들을 더욱 빛나게 닦고 있는 동백나무들. 한 열흘 피어  있기 위하여 일 년 내내 꽃봉오리를 다듬어온 꽃나무들의 노고. 가늘지만 그 깊은 뿌리에 엎드린다.♧

*《국토》200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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