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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書評] 章湖 시집 <신발산>//[추모]章湖 선생을 기리며
[書評] 章湖 고희 기념시집, <신발산>
발에 의한 발을 위한 발의 신발들, 그리고 산
이 향 지
태어날 땐 누구나 아기, 그리고 맨발이다. 맨발의 아기가 70여 년을 탈없이 살아, 고희를 맞게 되었을 때. 홀로 서고 홀로 걷기 위하여 신다 버린 신발은 몇 켤레나 될까? 더구나 그 신발들의 주인이 평지의 안락을 거부하고, 산으로 산으로만 향하던 육체와 정신의 소유자라면, 아마 작은 산을 이룰 만큼 되지 않았을까?
장호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신발산(한국문연 현대시刊, 값8000원)』은 걷지도 못하는 아기의 발에 신겨진 '꼬까신발'에서부터 박물관에 진열된 '짚신 土器'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직립하기 위하여 만들어 신었던 온갖 형태의 신발들, 발에 의한 발을 위한 발의 신발들, 그 다양한 신발들을 통하여 읽을 수 있는 개인과 시대의 삶, 그 무수한 국면(局面)들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끈질기고도 애정 어린 성찰들로 꾸며져 있다.
'신발 닦는 일이 취미라면 / 웃을 테지.// 하지만 나는 일삼아 / 신발을 닦는다.// 오늘 속은 하루가 분해서다./ 내일 앙갚음하기 위해서다.// 먼지를 털어 주고 약을 발라주고 / 솔질을 하고 앉았으면 꿈이 부푼다 백주에.// 농익은 산중 열매를 따먹는 꿈.' ('신발을 닦는다' 전문).
노시인은 이제 숨가쁜 운율 대신, 찬란한 수사 대신, 은근 슬쩍 눙치는 상징과 느린 가락으로, 마치 막걸리사발과 김치와 두부접시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친구에게 이야기나 하듯이, 누구에게나 있음직하고 알고 있는 사건과 경험들을 시속으로 끌어들여 넉넉한 공감대를 만든다. 책머리 '시인의 말'에서 "서정을 배제한다"고 공언한 시집이지만, '풍류가 따로 있나 / 어깨로 바람을 치고 나가면 풍류지'처럼, 편편에 녹아있는 풍자와 해학은 여전히 눈부시다.
'시인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신발은 인간만의 것이다. 날짐승 길짐승도 모두 발을 달고 있지만, 그 발에 신발이 신겨져 있지는 않다. …내 신발에 대한 이런 남다른 집착은 등산에서 비롯되었다. 평지와는 딴판인 산지에서는 오르건, 내리건, 바위건, 눈얼음이건 신발 없이는 얼씬을 못한다. 신발만 발에 맞으면 피로에 젖은 몸뚱어리를 살려내고 빈사지경에 이른 조난에서도 스스로를 구조할 수가 있다. 그 냄새나는 신발이 오히려 인간발전의 기틀이 된다는 내 신념은 여기서 싹튼다.…'
두 발로 걸어서 격동의 세기를 통과한 사람만이 느껴서 전할 수 있는 아픔과 회한까지 한 공간에서 숨쉬게 엮어놓은 시집. '많은 것에 눈뜨고 난 뒤 / 많은 것에 눈감고 난 뒤 // 도통한 사람들 틈에 끼어 나는 못 산다'고,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고, '북한산 벼랑'으로 설악산 설동으로, 달아나던 분이었지만, 이 시집의 표제가 된 아우슈비츠의 '신발산', 휴전선에 '버려진 신발', '고드름 같은 팔뚝을 휘두르며 / 아이들이 진눈깨비 내리는 대학로로 / 진출하는 것을 보고 나는.// 산에는 눈이거니 하고 / 교외로 빠지는 버스를 타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늘 뒷걸음만 치고 있었다.('진눈깨비'전문)'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류와 민족의 상처와 반성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
'일터를 떠나 들앉았더니 / 보자는 사람이 없다 // 어차피 혼자 태어난 이승 / 혼자 갈 채비를 차리는데 // 댓돌 아래 신발 그가 보챈다 // 꼭 가야할 데가 있어서가 아니라 / 신발 따라 가자는 거다'고 노년의 쓸쓸함을 내비치기도 하고, '산이 떠다밀지는 않는다 / 산은 그저 미끄러지는 사람을 내려다볼 뿐이다'고 추락의 예감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고희에 펴낸 시집이 이 정도로 당당하고 힘이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길 없는 산을 혼자 헤치고 나온 산악인의 저력에 기인한다.
그러나 노시인은 지금 병상에 누워있다. '새 신발을 줘도 안 바꾼다./ 주어진 길만 밟은 신발과 / 길 아닌 길로만 끌고 다닌 신발과 / 다르다 말다' 오순도순 함께 걸어온 '낡은 등산화'마저 벗어놓고, 나무처럼 쓰러지셔서 의식마저 놓으셨다.
무슨 기미를 느끼셨던가. "우편 발송에서도 빼놓았으니, 이 시집은 꼭 와서 가져가라!"고 부르셨다. 차일피일 하다가 1998년 12월 31일 저녁 어스름에야 뵐 수 있었다. 시인의 오른쪽 발 족탁(足拓)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시집 <신발산>. 이 시집의 표제는 <신발산>이 지만, 시인의 관심은 '맨발의 족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맨발의 족적 속에는 70평생을 걸어온 길이 혹은 끊어지고 혹은 이어지며, 혹은 뱅뱅 돌거나 허공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섬으로도 떠밀리고 산으로도 치받다가, 한 겹 종이 위에 그을음 같은 무늬로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덧없다는 말씀은 아직 않으리라. 기적을 기대한다.
*월간 산,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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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章湖 선생을 기리며
'외로운 고집불통'과 '해맑은 소년'이 함께 세 들어 살던 고목나무에게
이 향 지 (시인·산악인)
선생님! 기억하시지요? 1995년 10월 21일의 상원산 산행. 강원도 정선군 구절리 구절여인숙, 허름하고 작았으나 따뜻하던 방. 선생님께서 "띳집 같다" 글에 쓰신 그 방. 그 방에서 이틀을 묵으며 상원산 다녀와서, 혼자 새벽열차 타고 떠나신 일. 기억하시지요? 상원산에서 옥갑산까지 연결종주를 하고, 조양강 꽃벼루 쪽으로 내려오던 날. 윤재웅 선생은 바쁜 일이 생겨서 증산역으로 달려가고, 선생님과 저만 여량 택시를 불러 타고 구절리로 되돌아 온 일. 구절리역 앞 만나식당에서 저녁 드실 때 "나는 반주로 꼭 막걸리를 먹어야겠다!"고 고집을 부리신 일. 기억하시지요? 저는 바람 드세고 가로등도 뜸한 구절리 밤길, 사달골 갈림길까지 혼자 걸어가서 막걸리를 한 됫박 구해다 드렸지요? "친구 없이 술을 어찌 먹느냐?"하셔서 자개골 김성학씨 불러다 드렸지요? "여자 없이 술을 어찌 먹느냐?"하셔서, 옆에 앉아 한잔 따라 드렸지요?
그 박찬에 그 막걸리 병 다 비우실 때까지 김성학씨는 꼼짝없이 붙들려 있었고, 저는 긴 산행 끝의 피로도 아랑곳 않고 횡설수설 길어지는 선생님 쪽 연속극보다, 만나식당 신희 모친이 보는 안방극장 연속극이 더 재미있어서 한동안 그쪽으로 옮겨 앉아있었지요. 그 일 노여우셔서, 다음 날 새벽 기차를 타고 혼자 훌쩍 떠나셨지요? 그 전전날 청량리역 떠날 때 기차를 놓쳐서 함께 오지 못했던 후배 시인 이윤학과 박형준이 그 날 밤늦게 구절리까지 찾아왔었고, 저는 선생님과 저 사이에 가로놓였던 야릇한 적막이 화들짝 달아나는 것 같은 기쁨에 "선생님! 윤학이와 형준이가 지금 도착했으니, 처음 계획대로 노추산까지 다녀가시지요?" 문 똑똑 두드려서 말씀 드렸는데도, "알았어요! 약 발라요!"하시고는 방문도 안 여셨지요? 그 일로 저도 토라져서, 다시는 선생님과 산행을 같이 않았지요?
선생님! 떠남은 무엇이며, 머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같이 왔던 사람들이 차례로 떠난 뒤, 저는 산이 아닌 바다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초겨울 동해바다 고랫등 같은 물굽이가 제가 밟고 서있는 모래톱을 향해 달려오고, 기세 좋게 달려와선 새하얀 물거품을 남기고 모래 속으로 잦아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날 저도 선생님이 타고 가신 새벽열차를 타고 혼자 서울로 돌아왔지만, 돌아오긴 했지만, 상원산 정상에서 찍은 제 사진과 함께 "笑收하시오!" 적어보내신 쪽지도 받아보고, 그 날 이후 여러 지면에 "가래톳이 섰다"거나 "몸살이 났다"거나 "미안하다"는 구절들을 넣은 시를 발표하신 걸 알았지만, 외람되게도 저는 그 시구들을 저에게 주시는 변명으로 받아들이고는 있었지만, 안부조차 여쭙지 않고 지냈습니다.
선생님! 산은 무엇이며, 그 산을 오르고 내리는 사람은 또 무엇이었습니까?
'산을 즐길 줄 모르면 이 산은 못 오른다. 가팔라서 숨이 차고 멀어서 지치는 일마저 오히려 산이 주는 혜택으로 맛들일 수 있는 끈기가 있는 이에게만 이 산은 품을 연다. 상원산은 그만큼 멋없이 큰 산인데다가 널리 알려지기는커녕 놓임새마저 후미지기가 그만이다. …아침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구절리는 폐광촌답게 늦잠이 한창인데, 아침 바람마저 매차다. 이 황량한 산촌을 남달리 사랑하는 시인 이향지의 그 '구절리 바람소리'라는 시 구절의 "다락산 노추산 상원산의 희디흰 탄식이 녹아"흘러서인지 모른다.…(월간산, 96년 2월호 '김장호의 名山行脚'중에서)'고 쓰셨지만, 전화조차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합니다. 그 날 선생님이 혼자 떠나신 것은 단순한 노여움 때문이 아니고, 지병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산악인 김장호'의 강건하심만 생각했지, 상원산 산행만으로도 몸살을 앓으실 정도로 기력이 떨어지신 노인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 앞에서는 틀니를 뽑아서 헹구실 정도로 화통하게 열어놓고 대하시더니, "나 다리 아프고 몸살기가 있어서 집에 먼저 갈란다!"는 말씀도 못하신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젊은 후배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하신 선생님의 '외로운 고집불통'을, 저의 '옹졸함'은 이해를 못했던 것입니다.
선생님! 이름은 무엇이며, 일과 예술은 또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선생님의 제자가 아니었으니 '金長好 교수님'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학자 金長好 박사'가 우리 국문학사나 비교문학사에 남긴 족적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저는 '시인 章湖'의 詩보다는 '자연인 김장호'의 에세이를 더 좋아하였습니다. '산악인 김장호'의 [韓國名山記]와 [名山行脚]을 더 유용하게 읽었습니다. 유려한 문장, 철저한 고증, 이민족의 탄압 속에서 창씨개명되었던 이 땅의 지역이름 산이름들은 선생님으로 인하여 그 진면목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누가 있어서 선생님이 하시던 일을, 선생님처럼 계속해서 마무리지을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 자유는 무엇이며, 멍에는 또 무엇이었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두 겹의 이름을 쓰고 계셨습니다. '長好!' '章湖!' 부르는 소리는 같지만, 글자에 담긴 뜻은 수직과 수평처럼 서로 다르지요. 본명에선 장대처럼 '긴 것이 좋다[長好]'하시고, 필명에선 '반짝이는 문채의 호수[章湖]'를 지향하셨습니다. 무릇 글이란 종이 위에 쓰여진 후에야 생명을 얻는 것. 선생님께서는 반듯한 생애의 紙面 위에, 작은 바람에도 눈을 뜨는 예민한 물결을 가진 호수를 올려놓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그 호수를 드디어 이룩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종이 위의 호수는 균형감각을 견지할 동안만 호수입니다. 한 장 종이 위에 올려놓은 물은 조금만 상처받아도, 약간만 자세가 기울어도 아래로 새거나 옆으로 쏟아지기 마련이지요. 선생님의 본명이 선생님의 생애에 선사한 작은 당근이었다면, 선생님의 필명은 선생님 자신이 선생님의 학문과 예술에 가하는 가혹하리만큼 커다란 채찍이 아니었던지요? 호수의 바닥은 비록 울퉁불퉁할지라도 표면은 늘 물결 잔잔한 수평의 수면을 보여주려 하신 선생님. 그 날 그렇게 떠나신 일도, 표면의 물결은 보여주되 울퉁불퉁한 호수의 바닥만은 끝내 보여주지 않으려 하신 '章湖의 반듯한 고집' 때문이 아니었던지요?
선생님! 저는 문경의 운달산과 부안의 변산, 정선의 상원산에서 만났던 고목나무 한 그루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나무의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 나무 속에는 겉은 딱딱하나 속은 한없이 무르고 정이 깊은 사람 하나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때는 '외로운 고집불통' 같고, 어느 때는 '해맑고 장난기 많은 소년' 같았습니다. 이제 그 산엘 열 번 백 번 다시 가도 그 나무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어 서럽습니다.
선생님! 불은 무엇이며 흙은 또 무엇이었습니까?
선생님의 육신은 뜨거운 불길을 거쳐, 고요하고도 고요한 흙 속에 계십니다. 저는 生의 일회성을 수긍합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윤회를 믿으셨습니다. 지금은 무엇이 되어 저희 곁에 다시 돌아와 계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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