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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상/산문], 부산, 내 청춘의 가나안  

'04 가을호 <시와 사상> 산문
―부산과 시인③

부산, 내 청춘의 가나안



     이  향  지

 부산! 언제 생각해도 가슴이 뛴다. 내 일생 중 가장 풋풋하고 피가 뜨겁던 이십대 초반,  4~5년을 섞여 살았다. 부산은 나의 첫 기항지였다. 지난 한때 거쳐 온 정류장이 아니라 추억과 감사로 출렁거리는 내 젊음의 정처(定處)다.

 부산의 많은 곳에서 나는 아직 살고 있다. 중앙동 도로변 이층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 범일동행 버스를 타고 입시학원으로 가는 나. 엄마가 주신 쌀자루를 들고 여객선 부두를 빠져나오는 나. 처음 보는 기차에 놀라 뒷걸음을 치는 열세 살의 나. 사이렌 소리와 함께 올라가는 영도다리, 넋이 빠져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는 나. 전차 끊긴 밤거리를 내다보는 스물 한 살의 나. 태종대 절벽을 나풀나풀 걸어 내려가는 나. 절벽 아래 좁다란 모래밭에서 분홍빛 고동껍질을 한 주먹 주워들고 꽃처럼 웃는 나. 긴 대롱 끝에 펄펄 끓는 액체를 묻혀서 들고 입으로 훅 불어서 전구를 만드는 아저씨, 에디슨처럼 존경하며 눈을 떼지 못하는 나. 새 고무신이 빙빙 돌며 산처럼 쌓여가는 신발공장에서 엄마의 다 닳은 말표 고무신을 생각하는 나. 국제시장 좌판에서 오백 원짜리 빨간 구두를 흥정하는 스물 세 살의 나. 물이 질질 흐르는 초고지에 잉크 만년필로 교정을 보는 무수한 날들의 나. 조방 앞에서 온천장행 버스를 기다리는 나. 장전동 언덕배기를 뛰어서 오르내리는 나. 한 장뿐인 셔츠를 빨아서 들고 세탁소로 뛰어가는 여름 새벽의 나. 밥 대신 국화빵 붕어빵을 눈물 섞어 삼키는 나. …….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부르며 튀어나오는 어린 나, 젊은 나, 행복한 나, 고생하는 나…. 그 무수한 ‘나’들은 부산이 좋아 부산에 남아 지금도 나를 부른다.

 나는 통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대학을 다녔다. 전쟁은 끝났으나 가난은 끝나지 않았던 1960년대 초. 피난민처럼 스며들어 혼자 대학을 다녔다. 학교와 자취방, 아르바이트 장소 사이를 궤도 위의 전차처럼 오가며 살았기에, 부산의 명소보다는 그 무렵 거리풍경을 더 가깝게 기억한다. 부산은 노는 곳이 아니라 사는 곳이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밤 12시 통금 사이렌이 울릴 때까지 사람들도 탈것들도 휴식을 몰랐다. 살고 있었기에 땀내가 부끄럽지 않았고 살고 있었기에 구멍 난 양말이 부끄럽지 않았고 살고 있었기에 비가 새는 신발이 부끄럽지 않았고 살고 있었기에 몇 번씩 염색하고 기운 옷이 부끄럽지 않았고 살고 있었기에 제때에 못 먹는 고통쯤은 당연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부산은 생의 아름다움으로 생의 누추함 생의 부끄러움을 감싸고 덮어 줄줄 아는 너그럽고 젊은 땅이었다. 한 사람이 살아남아 다른 사람을 살리고 다른 사람의 기운으로 살아난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살리며 구석구석으로 생의 기운을 전파시켜가는 그런 땅이었다. 그 많은 피난민이 몸 하나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도 부산이 발산하는 무궁무진한 생기(生氣)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 청춘의 가나안. 부산은 참으로 고마운 곳이다. 밥 의외의 것을 바라보면 죄가 되던 시절. 학교는 장학금을, 교수는 격려를, 선배는 가정교사 자리를, 학보사는 기자석을, 버스 차장은 삥땅 친 버스표를 잡혀주었다. 부산 안의 모든 사람, 부산 안의 나무 한 그루, 부산 안의 돌멩이 하나까지 나를 도와주었다. 부산이 내뿜는 무궁무진한 생기(生氣)가 나를 끌어안고 당당한 인간으로 키워준 것이리라.

 곤궁하였으나 자유로웠으며 재주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부산.
 부산은 내 문학이 꽃봉오리를 맺은 곳이기도 하다. 내 고향 통영의 자연 속에서 저절로 싹이 튼 작은 꽃나무는 금정산 기슭의 맑은 공기와 싱싱한 햇살 속으로 옮겨와 마음껏 가지를 뻗고 꽃봉오리를 맺을 수 있었다.

 나는 부산대학교 문리대 63학번이다. 내가 다니던 때 부산대학은 문학 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학생 중에는 글 잘 쓰는 친구들이 많았고, 학교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동기를 부여하면 보다 나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 저마다 노력하게 된다. 내가 입학 하던 해 생긴 부대문학상 제도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씩 발행되는 <부대신문>도 매력 있는 지면이었다. 수천 명 고정 독자가 확보되어있어서 반응도 즉각적이었고 적지 않은 원고료도 챙길 수 있었다. 일년에 한 두 차례 발간되던 <문리대학보> 등도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하였다. 서클활동도 활발했다. 중앙문단으로 가는 간선도로 역할을 장담하고 나섰던 <간선문학동인회>는 부산대 문학도들의 얼굴이기도 했다. 부산대 안의 내노라하는 문사들은 모두 속해 있었고 나도 그 일원이었다. 부산 안의 다른 대학들과 합동으로 개최하는 시화전․시낭송회도 자주 열렸다. 부산여대의 <석류알동인>들과 송추문학제를 열기도 했다. 대구와 부산의 8개 대학 문학도들이 합동으로 영남문학제를 열기도 했고, 진주에서 열리는 개천예술제에도 참가하였다. 나도 문학행사마다 빠지지 않고 붙어 다녔다. 서로 붙어 다니면서 경쟁적으로 실력을 키워갔다. 그 당시 날리던 문학도들은 대부분 프로의 길을 걷고 있다.

 부산시절 나의 글쓰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시․수필․칼럼․기사 등 내 앞으로 오는 글이면 무엇이든 피하지 않고 썼다. 그냥 쓴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즐김’을 넘어 ‘의무’에 이른 글쓰기. 그런 글쓰기로 생활비와 용돈을 해결하며 한 학년씩 진급을 했다. 4학년 때는 단편소설「당착」으로 부대문학상을 받기도 했는데, 기뻤으나 부끄러웠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작품이었다. 나는 좀 더 나은 글로 보답하겠노라 공개석상에서 약속을 하였다. 그런 약속 따위 들은 이들은 곧 바로 잊었겠지만 나는 그날로부터 40년 가까운 지금도 그 약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 스스로 물러설 수 없는 골짜기로 나를 몰아넣은 것이다. 벅찬 약속을 먼저 던져놓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생리.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나는 자랑할 것이 없는 인간이다. 대학 2학년부터 4학년까지 3년 가까이 부대신문 문화면 편집을 맡았었는데, 청탁을 하고, 투고작을 선정하는 권한이 순전히 내 재량에 달려 있었다. 여기저기 빠지지 않고 낑겨 다닌 것이 순수한 내 실력 때문이었는지 그 당시 내가 두르고 있던 작은 권력(?) 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아리송하다. 사심 없이 공정하였다고 자신할 수 있지만, 나도 모르는 새 교만에 빠져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손끝으로 나부랑거리는 재주를 믿고 무릎 꿇고 바닥부터 공부할 생각을 못하였던 걸 보면 분명 그랬던 것 같다. 그 벌로 마흔 일곱 살이 되도록 등단을 못했으리란 생각까지 든다.
 그 당시 부산에는 고향이 같은 청마 선생님도 계셨고, 학교 가까운 곳에 이영도 선생도 계셨고, 학교 안에는 김정한 선생도 계셨다. 더구나 김정한 선생님은 내 친구의 아버지셨다. 내 졸작에 과분한 상을 주신 손소희, 박목월 선생도 계셨다. 졸업하고 곧장 서울로 올라왔으니 그때의 인연을 들먹이며 찾아뵐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도무지 그럴 줄을 몰랐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느라 일초일초가 버거웠던 까닭도 있겠지만, 어릴 때부터 칭찬만 받아온 나는 문학을 여기(餘技) 쯤으로 여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때의 그 무지, 그 미숙, 그 물정 모르고 피 같은 세월을 흘려보낸 잘못. 부끄러움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담고 또 담아서 그득해진 다음에야 터져 나오는 소리를, 이 적수공권은 기다릴 줄 몰랐던 것이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나의 모교 부산대 운동장 아래쪽에 공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 공병대 격납고 이마에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라는 표어가 붙어있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흙먼지가 날려도 떨어질 줄 모르는 표어. 군인들의 기합소리가 금정산 공기를 쩌렁쩌렁 흔들어도 부동자세로 붙어있던 딱딱한 군용 표어. 너무나 네모 나고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명령 일변도인 그 세 마디에 담긴 뜻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루하루가 다급한 사람에게 미래는 다른 땅에 솟았다 지는 무지개와 같다. 나는 새 물이 고일 새도 없이 퍼내고 부릴 줄만 알았지, 더 멀고 긴 행보를 위한 정비에는 소홀하였던 것이다. 문학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비 없이는 먼 길을 갈 수가 없는 자동차와도 같다. 이제야 그것을 깨닫다니 너무 늦지 않은가.

 내 안에는 내 힘으로는 밀어낼 수 없는 원시인이 하나 살고 있는 것 같다. 자연이 주는 열매만 먹고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짐승을 찾아 헤매는 생리. 맨손으로 맞닥뜨려 벅찬 상대와 싸우다 상처를 입고 역부족을 느낀 뒤에야 돌멩이를 주워들고 나뭇가지를 꺾어 던질 줄 아는, 미련하고 오래된 사람이 하나 내 안에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짐승을 놓쳐 본 후에야 긴 돌을 주워서 양날을 벼루는 사람. 연장 하나 없이 사냥에 나선 오래된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가. 내 문학은 이렇게 실패를 먼저 겪었다.

 민달팽이는 자신이 기어온 길을 자랑하지 않는다. 순간순간이 눈물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길을 두고 나는 참으로 멀리 돌아서 왔다. 되돌아보면 후회투성이지만 어쩌랴 내 몫이 이것뿐인 것을. 되돌아가서 출발선에서 다시 걷는다 해도 나는 아마 똑 같은 길을 멀리 돌아올 것이다. 그때, 그때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욕심 내지 않으리라. 황새에게는 황새의 길이, 들쥐에게는 들쥐의 길이 있지 않은가. 부산의 생기(生氣)가 나를 안아 키우며 내 한계를 깨닫게 했다.

 부산은 내게 단순한 ‘정류장’이 아니라 ‘순수’와 ‘열정’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었던 기회의 땅이자 역동의 공간이었다. 후끈후끈한 에너지를 끊임없이 충전시켜준 생의 용광로였다. 나는 부산을 통하여 사랑을 알았고, 사람 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찬바람이 불기 전에 그 많은 나를 만나러 한 번 더 돌아가 보아야겠다.

*<<시와 사상>> 2004년 가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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