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9/12(금) 08:45 (MSIE6.0) 218.155.187.120 1024x768
[창조적 시론을..], 나는 퇴행한다, 고로 존재한다  

[시와 사상], '우리 시대의 창조적 시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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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퇴행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향 지


 나는 지금부터 머리도 꼬리도 없는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창조란 본디 두루뭉수리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우리 시대의 창조적 시론’이라니 폭신한 풀밭이 느껴진다. ‘창조적’이 ‘시적’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하여’를 보니 이 또한 시론을 위하자는 장임을 알겠다.

  시론이 시를 쓰는가. 단언컨대, 아니다. 시가 자연이라면, 시론은 인공의 건축물 같은 것. 어느 쪽이 먼저였고, 우선인가는 자명해 진다. 시론이 시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가 시론에 묶여 전전긍긍해서는 안된다.

  시는 창조물이다. 창조는 ‘유일한’ ‘새로움’을 전제로 한다. 시론은 그 창조물을 왈가왈부 재단하는 규범에 속한다. 규범은 오래되고 고형적이고 때 묻은 것에 속한다. ‘규범’은 ‘억압’을 전제로 한다. ‘규범’은 ‘모두’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규범의 눈금과 잣대는 평균에 맞춰져 있다. 시는 평균을 지향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뿐인 시, 한 편뿐인 시. 모든 시인은 자신만의 유일하고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시인들은 초조해지고 시론을 기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내 책꽂이에도 여러 권의 시론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탐독하지는 않는다. 특히 시를 만들고 있을 동안은 절대로 들추지 않는다.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나만의 개성을 죽이는 데 일조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내 시는 내 마음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내 마음. 내가 시를 쓰는 것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마음에게 내 나름의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다.

  나는 내 시를 나의 삶이라고, 다른 ‘나’라고 부른다. 사람에겐 누구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한다. 성악가는 노래를 부르고 무용가는 춤을 추고 피아니스트는 건반을 두드리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나는 시를 통해 나를 표현하고, 내 안의 나를 만나왔다.

  나는 무엇을 쓰는가. 나에게 가장 절실했던 순간들을 쓴다. 내 생각에 나는 약자이며 부당하게 억압 받는 자이며 변두리로 밀려난 자이며 상처받은 자이며 고독하다. 그러므로 기쁜 일보다는 슬픈 일, 기막힌 순간들, 상처의 기억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들을 더 많이 써왔다. 그런 곳이야말로 시가 필요한 장소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는 어디에 쓰이는가. ‘나’의 삶을 들여다보고 내 안의 ‘나’를 이해하고 안아 들이는 데 쓰인다. 그리고 필연처럼 남을 안게 된다.
 이런 이유로 시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고 나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처음 한 말이 아니다. 나도 깊이 따지지 않고 보편적인 희망에 편승할 적이 많다. 내 역사가 얄퍅하고, 늘 내 것이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승의 끝은 늘 괴롭다. 괴로움을 느낄 수 있을 동안만 시를 쓸 것이다.
 내게 가장 두툼한 것은 과거다. 시는 과거에서 오는 것이다. 시는 과거를 아름답게 하는 데도 쓰인다.

  내게 시는 몸짓이다. 오랫동안 꼼짝 못하게 눌러둔 ‘나’가 있었다. 몸짓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주 어리거나 깊은 병에 걸린 사람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종족끼리도 몸짓은 통한다. 그러므로 몸짓은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언어이다. 몸짓은 묘사를 동반한다. 나는 이 몸짓을 말로 그리기 위해, 많은 연습을 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굳은 혀가 풀렸다. 이제는 ‘나’가 말을 한다. ‘나’의 몸짓의 말. 그것을 받아 적으며 ‘나’를 읽는다.

  내 몸은 문명 속에서 편리함을 누리며 살지만, 내 시는 멀어져가는 자연과 원시의 공간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거기에서 오히려 낯설고 새로움을 발견하였다. 나를 먹이고 나를 입히고 나를 재워주는 문명으로부터 뒷걸음치는 곳에 진정한 새로움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이처럼 원시로, 원시로, 뒷걸음치면서 이것이 진보라고 믿는다.
 나는 퇴행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야생화를 스승으로 삼았다.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산기슭이나 들판에서 스스로 싹틔우고 스스로 꽃피우고, 혼자 힘으로 힘껏 견디다 불가항력의 순간이 오면 스스로를 꺾을 줄 아는 야생화. 나는 그 풀꽃들의 강인함과 개성을 스승으로 삼았다. 그 꽃들은 저마다 특징이 있다. 어떤 꽃은 작고 초라하고 향기도 없지만, 크고 화려하고 향기로운 꽃을 닮으려하지 않는다. 작은 꽃은 작은 대로 큰 꽃은 큰 대로 아름다움이 있다. 어떤 꽃은 봄에, 어떤 꽃은 여름에, 어떤 꽃은 가을에, 어떤 꽃은 이른 아침에, 어떤 꽃은 달이 뜰 무렵에, 어떤 꽃은 양지 녘에, 어떤 꽃은 응달을 골라서 피지만, 다른 꽃의 빛깔과 향기와 때와 계절을 탐내지 않는다. 야생화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단점과 장점이란 인간의 잣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가 보아주든 말든 자신의 조건에 맞추어 피고 지는 풀꽃들. 그 당당하고 강인함 앞에 나는 무릎을 꿇는다. 야생화야말로 내가 닮고 싶은 시인들이다.

  시는 ‘나’라는 인간이 나 아닌 사람들과 어우렁더우렁 살면서 경험하고 느낀 바를 시라는 형식을 빌어 전파시키는 행위인데, 어떤 형태로든 발표를 하고나면 ‘모두’의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나의 시 쓰기는 누군지 알 수 없는 독자에게 ‘나’와 내 생각을 팔고 싶다는 욕망이 바탕에 깔려있다. 어디에 담아 무어라 이름 붙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줄까. 공감해줄까. 칭찬 받을까. 아닌 척 해도 속마음은 이처럼 잣다랗고 벌거벗은 욕망에 붙들려있다. 그러나, 발표하는 시는 외출을 앞두고 매무새를 고치는 사람처럼 무수히 거울에 비춰보게 된다.  

  내 손을 떠나자마자 미아가 되고 마는 시가 많을수록 마음은 초조해지고 능력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고 물러설 줄을 모른다. 좀 더 좀 더 몸을 닦달하고 정신을 채근하면서 부득부득 전진해왔다. 그래서 얻은 것은 얼마쯤의 평정이다. 부득부득 닦달하며 겪어낸 시간들이, 나를 얼마쯤 성숙시켰다. 여기서 말하는 ‘성숙’이란 ‘어른’과는 다른 말이다.

  나는 시 앞에서는 어린 아이다. 어른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너무나 뻔하고 뿌연 것만 보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눈으로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자. 이것은 내 시에 맑음과 새로움을 주는 비결이다.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모든 것이 신선하고 의문투성이다. 아이는 호기심이 많다. 늘 보는 사물도 난생 처음 외출에 나선 아이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전혀 새로운 무늬와 모습을 드러낸다. 전혀 새로운 소리를 들려준다. 전혀 새로운 몸짓으로 말을 걸어준다. 나는 그것들을 전신으로 받아 적는다. 다 받아 적은 뒤에 보면 그것들이 나의 말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숙’의 때는 어떻게 알아차리는가. 시를 다른 사람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쓴다는 것을 진실로 알아채게 되었을 때다. 그러나 그때까지가 참고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웅녀가 어둡고 습한 굴속에서 마늘과 쑥만 먹으며 백일을 견뎌 드디어 인간으로 탈바꿈한 경우를 떠올려보자. 신화나 민담은 공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내 시도 그러한 고비를 무수히 넘기고 났을 때 동전만한 하늘이 보였다. 그러나 백일 뒤에는 또 다른 백일이 있다. 백일, 백일, 백일···, 은 끝도 없이 이어져 온다. 그야말로 ‘行行重行行’이다. 가고 가고 또 가고 가서 만나게 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곳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行行重行行’의 과정은 모든 것을 던져도 좋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나는 이처럼 과정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다.    

  내 안에는 우는 여자가 있었다. 너무 오래 아파서 수없이 까무러쳤다 깨어나 보니 수수만년 좁은 골방에 갇혀 숨도 못 쉬며 살아온 벙어리 여자가 울고 있었다.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일면식도 없는 여자들이 두루뭉수리로 겹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면서 명치끝을 걷어차고 있었다. 어느 때는 나무 같고 어느 때는 물고기 같은. 어느 때는 새를 닮고 어느 때는 벌레 같은. 어느 때는 요조숙녀 같고 어느 때는 창부 같은. 물결이며 바람이며 파문이며 아우성이며 눈물이며 한숨이며 속삭임이며 욕설이기도 한···. 한 여자, 겹친 여자,가 나를 두드리며 울고 있었다. 나는 그 겹친 여자를 조각조각 불러내어 불 붙여 날려주었다. 어릴 때 굿판에서 본 소지처럼 훨훨···.
  이제 내 안엔 우는 여자 없다. 나는 이제 ‘우리’ 것을 보고 ‘우리’ 말을 들으러 문밖으로 나간다. 어떤 길을 만나건 청신호의 반대쪽으로 걸어갈 것이다.  

  모든 예술가가 그러하듯이 나도 불멸을 지향한다. 나는 유한하지만, 나도 영원히 살리고 싶다. 조각가는 불에 타지도 않고, 물에 녹지도 않고, 바람에 날아가지도 않는 재료를 택하여 망치질 톱질 끌질을 한다. 조각가가 대리석을 쪼개고 다듬어 꺼내놓은 여자처럼 불멸한다면 그게 정말 불멸일까? 나는 피가 돌고 말을 하는 불멸을 원한다. 나는 산을 좋아해서 산에 자주 다니는데, 바람직한 불멸의 모습을 거기서 보았다. 살아있던 것이 죽어서 살아가야할 것들에게 몸을 나누어 주고 있는 모습은 징그럽지만 아름다웠다. 개체는 유한하지만 전체는 불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풍경. 생명의 불멸. 나는 유한하지만 나는 불멸이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 풍경이 나를 평안하게 하고 고무시켰다. 시의 경우도 그렇다. 아무리 우뚝하고 긴 시인도 혼자서 다 쓰고 갈 수는 없다. 시인들도 이어, 이어, 시를 완성시킬 것이다. 시인은 유한하지만 시는 불멸이다.

  좋은 시는 잘 지은 쌀밥 같은 시. 잘 지은 시는 잘 지은 쌀밥처럼 소화도 잘 된다. 문제는 비중에 있다. 대답도 비중에 있다. 밀가루 음식처럼 가벼워도, 찹쌀 음식처럼 무거워도 덜 든든하거나 부담스럽다. 잘 지은 쌀밥처럼 적당이 무거우면서 행간과 여백이 살아 있는 시. 잘 지은 쌀밥 같은 시를 드리고 싶다.

   비유라는 연장통을 가까이에 두고 이것저것 즐겨 사용한다. 내가 그 통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만큼만 거리를 두고.

  내면을 그리려면 나 밖의 사물에 기대는 것이 가장 손쉽다. 저 나무와 내가 무슨 관계? 저 거북이와 내가 무슨 인연? 하지만 어떤 것을 빌어서 그려 놓아도 시는 결국 내 안의 풍경을 드러내고, 나의 말을 한다. 시 안으로 편입되는 순간 그것들이 ‘나’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것과 몸을 바꾸건 방법은 사라지고 시만 남는다.

  새로운 시를 위해 무수한 방법을 실험 했지만, 어떤 방법에도 안주할 생각은 없다. 성공했건 그렇지 못했건 한번 써먹은 틀 속에서 다음 시를 찍어낼 생각은 없다. 나는 판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거푸집은 한 편을 짓고 나면 해체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 시인의 시가 편편이 다른 것은 흠이 아니라, 새롭기 위해 그만큼 다양한 노력을 했다는 증거다.

  인간의 삶은 지루하리만큼 되풀이되는 운명에 빠져있다. 주제보다는 방법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방법에서 유일하지도 새롭지도 못하다면, 진정한 ‘창조물’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친숙하고 너무 가까워서 놓친 것 속에 그것들은 있다.

  나는 말을 따라 들어간다. 문득 찾아온 말꼬리를 물고 줄레줄레 가다보면, 꼭꼭 숨겨둔 풍경이 있고, 그 안에 내가 있다. 너무 깊은 안에 있어서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나. 말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그것들의 말을 쓰고,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럴 때 나의 안팎이 손을 잡고 하나임을 느낀다.
  말을 따라가다 보면 끊기는 순간이 온다. 그때는 몸짓을 떠올린다. 말 이전에 몸짓이 있었다. 말은 문자가 있기 전부터 있던 것이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끼리도 몸짓은 통한다. 몸짓은 가장 절박한 언어이다. 시는 바로 이처럼 절박한 곳에서 나온다. 시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런 곳이다.
 몸짓을 따라, 말이 시작 된 곳까지 되돌아온다. 한편의 시가 마무리 된다.

  시는 수공업이다. 달리는 시대에도 걷고 날으는 시대에도 걷는 나는 아주 느린 수공업자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컴퓨터와 초고속 인터넷이 판을 쳐도, 시는 또박또박 손으로 써야 맛이 살아난다. 컴퓨터에서 쓴 시도 종이 위에 옮겨놓고 볼펜이나 연필로 수정하며 마무리를 한다. 이것은 내 시에 내 체온과 지문을 묻히는 의식이기도하다.
 수공업자의 속도는 걷는 사람의 속도와 같다. 몸은 시대를 따라 날거나 달리고 있어도, 정신은 느릿느릿 걸어야한다. 걷는 사람은 길과 친하다. 느릿느릿 걷는 사람은 더욱 길과 친하다. 삶은 후다닥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 아니라, 느릿느릿 흔적을 남기며 간다. 나는 그 흔적들에서 시를 만난다. 과거가 없다면 시도 없을 것이다.

 나는 퇴행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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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상>>2003년 가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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