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3 : [현대시 작품상/대담], 유성호 교수와의 대담

◎ 2003/6/13(금) 14:29 (MSIE6.0) 218.155.239.98 1024x768

[현대시 작품상/대담], 유성호 교수와의 대담

제4회 현대시 작품상 / 이향지 시인과의 대담

詩, ‘나’를 들여다보고 ‘우리’를 껴안으러 가는 몸짓

유성호(문학평론가․한국교원대 교수)

청주를 출발해서 꼭 한 시간 반, 분당으로 들어서 선생의 자택을 찾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나라의 대부분의 신도시가 그러하듯이, 미로도 여간해선 없고 쭉쭉 가로지른 십자형 도로만 무수한 계획형 도시들은 찾아오는 이에게 그다지 밝은 길눈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디서 좌회전 한 번 우회전 한 번 그 정도면 대개 무슨무슨 마을이 나오고, 그 근처에서 미리 입력된 숫자들을 찾아내면 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오랜 시간을 살아온 서울을 떠나 거기서 2년째 살고 있다. 그야말로 조용히, 다른 일에는 전혀 눈 돌리지 않고, 시만 쓰고 있다. 고집스럽고 고독하게.
말이 나온 김에 선생의 그 ‘고집’과 ‘고독’에 대해 내 나름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이미 이순(耳順)을 넘긴 마당에 무슨 ‘고집’과 ‘고독’이 있으려고? 이런 의문을 가진 채 선생을 만나면 그러한 예단은 금세 금이 간다. 선생은 아직도(?), ‘시’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떠어떠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대한 완강한 ‘고집’을 갖고 계시다. 그것은 시가 어떤 명료한 전언(傳言)의 매개체가 아니라 자신의 생을 거는 내면 탐색의 작업이라는 것, 그 작업을 통해 ‘나’가 누구인지를 알아간다는 것 그리고 ‘우리’로의 확산을 불가피하게 꾀하게 된다는 것, 참신하고도 활달한 이미지를 통한 묘사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 어린아이의 시선(‘제스처’가 아니라)으로 사물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오랜 삶의 시간을 순간으로 통합하여 그 고통과 치유 과정을 그린다는 것, 이런 등등의 경험적 규정에 선생은 철저하다. 그러나 오해는 없으시기를! 선생이 미리 이러한 규율을 짜놓고 시를 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를 그저 열심히 한 편 한 편 써가면 그게 놀랍게도 이러한 목소리와 울음과 몸짓으로 수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선생은 지금까지 자주 혼자였고, 지금도 가능한 한 혼자이려고 노력한다. 그만큼 ‘고독’은 선생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임에 틀림없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자신의 시적 태반이었음을 스스로 알고 계시다. 늘 고독한 적막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산행’과, 늦게 자신의 생을 걸어버린 ‘시’는 바로 그 ‘고독’의 정점에 있다. 나는 선생의 그 ‘고집’과 ‘고독’을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읽고 싶었다. 선생은 화창한 봄날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풀어서 내게 보여주셨다.

유성호 : 먼저 제4회 현대시작품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수상 소감에서 스스로 “이변”이라고 하셨는데, 정말 오랜만에 작품성 자체로 문학상이 주어진 것 같아 저로서도 기쁩니다.

이향지 : 이렇게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찾아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지요?

유성호 : 선생님께서는 수상 소감에서 “시는 나의 종교”라는 인상 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희에게 선생님은 늦은 등단의 이력과 ‘산’에 대한 각별한 애정, 그리고 누구보다도 젊고 활달한 시풍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종교와 같은 그 ‘시’는 무엇입니까?

이향지 : 제게 시는 ‘몸짓’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꼼짝 못하게 눌러 놓았던 팔다리를 풀고 ‘나’를 들여다보고 ‘우리’를 껴안으러 가는 ‘몸짓’이지요. 오래오래 깔고 있어서 납작해진 이불솜을 솜틀 기계에 털어서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면 햇솜처럼 부풀고 푹신해지잖아요. 몸이 따뜻해지고 숨 쉴 틈이 생기니 가슴도 다시 부풀고 증오도 물러나고 사랑할 마음도 다시 생기고… 몸짓이 없었다면 이런 발견은 할 수 없었겠지요.
나를 둘러싸고 움직이는 사물과 사건들을 이해하고 다가가려는 몸짓이기도 하고, “나 여기 있어요, 나 이렇게 있어요, 나 좀 구해주세요”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몸짓이기도 하고, “여기 좋군요 이리로 오세요” “내 생각은 이래요, 그렇지 않은가요?” 동의를 구하고 내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몸짓이기도 하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다 해도 이 몸짓을 계속하고 있으면 내가 숨을 쉬고 있구나 살고 있구나 실감이 나요. 그래서 ‘시는 나의 숨이다. 자유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말하기도 해요.
나는 이 몸짓을 통해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간을 허물어갑니다. 내 몸은 내 선조들의 몸이기도 하고 내 후손들의 몸이기도 하니까, 자주 자주 ‘몸짓’을 하여 피가 잘 돌게 도와야지요.

유성호 : ‘몸짓’이라는 은유를 통해 시의 절실함과 소중함을 들려주셨는데요, 그렇다면 그 ‘몸짓’을 늦게 시작하게 되신 삶의 과정도 듣고 싶고요.

이향지 : 중․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잘 쓴다고 칭찬은 받았으나 옹아리 같은 거였고, 대학 때는 좀 치열했습니다만, 지속적으로 치열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 없는 상황이 계속 닥쳤거든요. 결혼을 하고 서울로 오고 보니, 나를 돌볼 겨를이 없었어요. 의무의 노예가 되어버렸던 거죠. 그렇게, 그렇게, 20년 이상 눌러놓았더니 죽을병이 찾아오데요. 저승 문턱에 걸렸다 살아나니까 눈앞에서 무서운 것들이 사라지더라구요. 이제는 덤이다. 이제는 내 차례다. 아무도 말리지 마라. 다 떨치고 내 일에 매달릴 수 있는 뻔뻔함이 생겼어요. 마흔일곱 등단이면 환갑이라고 수군거렸는데 어느새 14년이 흘러갔군요. 그동안은 정말로 치열했습니다. 좀 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유성호 :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의 시에서는 다른 여성 시인의 영향 같은 게 거의 안 보입니다. 그동안 여성 시인들을 두고 ‘여류(女流)’라고 불러온 관행에 비추어 본다면, 선생님의 시는 그들의 시와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선생님 시세계에 강한 영향이나 암시를 준 시인들은 혹시 계신지요?

이향지 : 보들레르를 가장 많이 읽었습니다. 그냥 읽은 것이 아니라 필사하며 분석하며 읽었습니다. 산문시 운문시 일기 평론들… 그 깊이와 적나라함과 진지함과 당당함과 치열함을 흠모합니다. 사랑과 증오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관련 연구서나 번역본들은 거의 다 갖고 있을 정도로 빠져 있었지요. 『악의 꽃』은 제 배낭에 담겨 설악산도 오르고, 한라산 지리산도 오르고, 금강산 백두산 킬리만자로에도 올랐습니다. 그의 시는 외롭고 어려운 길의 동행이 되어주었습니다. 그의 문전에도 이르지 못하겠지만, 그가 추구하다 간 미(美)와 불멸은 저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김수영을 좋아합니다. 보들레르도 김수영도 여성에 기대어 글을 썼으면서도 오히려 혐오하고 폄하를 서슴지 않았던 남자들입니다. 그분들의 시를 읽으면 억눌려 있던 나의 여성이 반대편으로 튀어 오릅니다(웃음). 이런 요소들까지 포함해서 그들을 좋아합니다. 자극을 받으니까요. 제 시에 들어 있는 음악성은 우리 정형시와 김소월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유성호 : 아닌게 아니라 보들레르나 김수영의 ‘(온)몸’의 시편들과 선생님이 방금 비유해주신 ‘몸짓’으로서의 시가 상통하는 것 같군요. 그 공통점은 그만큼 철저하게 자신을 던지는 시의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내 눈앞의 전선의 ｢自序｣에서 “시가 覺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내 시는 낯설어 보일 것이다. 시가 言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내 시는 미래로 보일 것이다. 나는 대답을 듣기 위해 시를 쓴 것은 아니다. 내 시는 질문이다.”라고 쓰셨습니다. 이는 명징하게 선생님의 시관(詩觀)을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 ‘낯섦’과 ‘미래’와 ‘질문’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이향지 : 생략이 지나친 점 없지 않습니다만, 일각의 게으름과 몰이해를 꼬집으려는 의도도 포함된 말이었습니다. 낯설고 다른 것에 호기심을 갖고 다가와서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외적인 조건만 보고 너는 아니라고 단정부터 해버리는 고정 관념에 던지는 질문이었지요. 많은 시인들이 계속해서 시를 생산하는 것은, 계속해서 새롭자는 노력 아닙니까.
覺은 끝입니다. 갈 데까지 다 가버려서 다음 단계를 기대할 수 없는 꽉 막힌 깨달음이라는 거죠. 단정하고 가르치려 들죠. 그런 시가 좋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시인들이 스스로를 경계하며 주고받는 농담 중에 ‘道트지 말자’라는 것이 있는데, 覺이야말로 바로 그 道튼 말 아닙니까. 시에서 覺을 배제시키면 공허한 말놀이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 것만이 전부이고 내 것만이 옳다는 주장에 주저앉아서는 발전이 없죠. 覺은 쓰기 쉽습니다. 지나간 사람들이 覺해 놓은 것을 자리만 옮겨 옷만 갈아 입혀 다시 覺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설령 새로운 覺을 접했다 하더라도 言 안에 넌지시 섞어두어야 탄력이 생기고 더 아름답지요.
또한 覺은 진술에 기댑니다. 그만큼 운신의 폭이 좁아지지요. 言은 묘사를 동반하기 때문에, 말랑말랑하고 순발력도 뛰어나고 포용할 가슴도 껴안을 팔도 갖추고 있습니다. 言은 覺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그러나, 言은 覺처럼 강요하지 않습니다. 言은 살아 있는 것들의 몸짓입니다. 覺은 단상 위에 있고자 하고 유아독존을 꾀하지만 言은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것들을 껴안습니다. 어느 편이 더 넉넉하고 탄력이 있고 바람직한지는 자명해지지 않습니까?
覺이 바위라면 言은 흙과 같습니다. 산 위의 바위가 아름다운 것은 흙과 함께 하기 때문이지요. 대지의 뿔이기도 한 그 바위들은 굳은 단상 위에 있을 때보다, 흙에서 일어선 나무와 풀과 꽃들과 함께 할 때가 더 아름답지요. 言에는 흙처럼, 흙에서 돋은 나무나 풀처럼, 여성적인 공간이 있습니다. 言에는 소리가 있고 운율이 함께 합니다. 言은 직접적입니다. 느낌이 살아 있지요. 시에 넓이와 깊이를 더하고 살아 있는 감각을 부여하는 데에도 言의 시가 훨씬 우월합니다. 맺고, 끊고, 늘이고, 당기고… 시에 맛을 더하는 데도 言이 우월합니다. 그래서 내 시는 言이라고, 言의 시에 미래가 있다고 言했던 것입니다.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는 호기심이 많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질문이 많은 것은 끊임없이 생기는 이 호기심 때문입니다. 다 아는 사람은 호기심이 없겠지만 모르는 것이 많은 어린 사람은 호기심을 버릴 수 없지요.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어린아이입니다. 나는 나의 이 어린아이를 내쫓을 생각이 없습니다. 시인은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아야 합니다. 늘 보던 물건도 세상에 처음 나온 사람이 낯선 것을 바라보고 궁금해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면 숨겨놓았던 모습을 드러내며 말을 걸어줍니다. 시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노력에, 이보다 더 좋은 자세와 방법은 없겠지요.

유성호 :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시가 완결성보다는 과정성(過程性)을 중시하시고, 시 안에 생각의 결과보다는 생각의 과정이나 방법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까닭이 바로 그 ‘질문’ 때문이겠군요. 그렇다면 선생님 시에 ‘노파’의 목소리와 ‘처녀’의 목소리가 공존한다는 평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향지 : 옳은 말씀 같아요. 저도 제 시를 통해서 저를 들여다보는데 정말 그렇더군요. 제게 ‘노파’와 ‘처녀’는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이어요. 저는 처녀를 지나온 노파이니까요. 일부러 그렇게 꾸며서 구겨 넣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저희끼리 시 안에서 만나고 자유롭게 섞여서 놀면서 자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제 안에는 처녀의 말만 아니라 태아의 말이나 젖먹이의 말도 들어 있고, 정충이나 난자의 말도 들어 있고, 그것이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거지요.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노파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노파란 거푸집에 찍혀 나온 고형물이 아니라, 느릿느릿 노파로 옮겨온 어린아이지요. 그러니까 젊은 말이나 어린 말이나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거지요. 뿐만 아니라 몇 천 년 전 조상의 말도 들어 있을 수 있고, 몇 천 년 후의 후손의 말도 들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전혀 이상할 것 없고, 그것을 이상하게 보는 고형적 시각이 더 이상한 거지요.
노파는 쭈글쭈글하지만 지혜롭고, 처녀는 불완전하지만 신선하죠. 노회함과 미숙함이 공존하는 집. 그것이 나의 몸이고 나의 정신이고, 현재이고 희망이고, 내 시는 그것들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지요. 이것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분열이 계속되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고, 낡은 세포를 새로운 세포로 교체하려는 세포분열과도 방불한 것이니까, 내 안의 그 노회하고/철없는 것들의 울룩불룩거리는 합일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요.

유성호 : “느릿느릿 노파로 옮겨온 어린아이”라는 표현이 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시에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많이 농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가족사의 편린도 여기저기 많이 나옵니다. 물론 꼼꼼히 읽었을 때에 그것은 발견됩니다만, 가족을 비롯한 인간 관계는 선생님의 ‘시’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습니까?

이향지 : ‘밀접하다, 한마디로 거기서 시가 나온다’라고 대답 드려도 무리가 아닐 것 같습니다. 가족이란, 핏줄을 나눈 부모 형제건, 내가 몸으로 낳은 자식들이건, 나 자신이 선택한 배우자건, 배우자에 딸린 핏줄들이건,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해주고 기꺼이 희생해준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내게도 가족이 가장 가깝고 소중하지만 소중하고 가까운 곳에서 갈등이 생기고, 이래서는 안 되는데 반성하지만 마음대로 안 되니 그것이 괴롭고, 한 괴로움이 해결되기도 전에 다른 괴로움이 찾아와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곤 하지요. 구성원들끼리 욕망의 충돌이 생기고, 충돌로 인한 갈등이 자꾸 중첩되니까 사랑이 흔들리고, 관계가 어려워지고. 천사끼리라면 모를까. 대부분 그렇지 않은가요.
그러나 그런 것을 빤히 사실적으로 직접화법으로 드러내 보이면 재미가 없으니까 슬쩍슬쩍 건드리면서 끼워놓는 겁니다. 오퍼센트만 끼워놓아도 백퍼센트 알아채는 것이 독자니까,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다고 자상하게 잡혀줄 필요는 없지요. 강물에 종이배 띄우듯이 나뭇잎 한 장 띄우듯이 그 정도로만 끼워놓아도, 호흡을 맞추면서 꼼꼼하게 읽어보면 앞뒤 말이 만나면서 자음과 모음이 부딪치면서 말하고자하는 정황을 다 드러내주니까요.

유성호 : 선생님 시의 화두를 ‘시간성’, ‘여성성’, ‘육체성’으로 읽고 있는 평자들의 의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요? 그리고 선생님 시 가운데 ‘물’ 이미지의 중요성을 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향지 : 시를 쓸 때, 평자의 시선을 염두에 두지는 않습니다만, 내 몸에는 많은 시간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내 정신에도 그럴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장점이자 결점일 수도 있고, 그런 사실을 못 느끼면 좋겠는데 나는 그것을 지나치게 느끼고 있고, 그러니까 시에 그렇게 드러나는 것일 겁니다. 여성은 내가 가장 불편하게 여기는 생의 조건입니다. 그것은 ‘여성’이라는 그 자체보다, 여성인 나를 둘러싼 제도와 관습이 구분하고 제약을 가하고 요구하는 바가 불편하고 불평등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 몸은 생명의 집이고, 욕망의 집이고, 생산의 밭이기도 합니다. 나는 몸을 통하여 태어나고 몸이 있기에 존재합니다. 다른 몸을 낳았습니다. 다른 몸을 먹습니다. 다른 몸의 거처이며 길이 되기도 합니다. 나를 둘러싸고 지나쳐 가는 아픔을 기쁨을 갈망을 몸을 통해 생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도 몸으로 씁니다. 무엇을 하건 어디에 있건 이 육체를 망각하고 외면할 수는 없지요.
물은 나의 탯줄이자 고향입니다. 나는 물에서 왔습니다. 물을 보며 자랐습니다. 물을 마시며 삽니다. 내 몸의 가장 많은 부분을 물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잠시도 그 존재를 망각할 수 없지요. 물에는 흐름이 있습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흐르는 물의 가장 마지막 집은 바다입니다. 그 마지막 집인 바다는 바로 나의 고향입니다. 물은 이렇게 순환합니다. 나는 이 커다란 순환 고리에 실린 물방울 같습니다. 의식하든 안 하든 이것들이 어울려 나를 이루고 나의 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유성호 : ‘시간성’을 그 어느 것보다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 『내 눈앞의 전선』에 처음 실려 있는 ｢낙관｣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여성성’은 ｢돌 속의 넓은 풀밭｣이나 ｢뚜껑이 덮인 우물｣에, ‘육체성’은 ｢둥글고 환한 구멍｣과 ｢잠깐 본 항아리｣에, 그리고 물 이미지는 ｢바다 밖에서의 목욕｣에 정말로 아름답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아무래도 선생님께는 ‘산’에 대해 여쭙지 않을 수 없는데요. “산은 나의 예배당”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이니까요. 물론 세상에 나와 있는 몇 권의 책이 그 열정과 정성을 가늠케 합니다. <<문학사상>>에 쓰신 바 있는 ｢겨울산, 그 환한 적막 속으로｣에서는 산을 두고 “한시적인 내가 불멸을 느끼는 장소”라고 하셨습니다. 그 ‘불멸’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이향지: 산은 제가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장소입니다. 산을 걸으며 건강을 되찾고 지구력을 길러왔습니다. 산은 멀리서 보면 정물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산은 죽어 있는 것 같지만 많은 것을 살리고 있는 생명의 터전입니다. 주검조차 삶 쪽으로 움직이게 하는 장소지요. 살아 있던 것들이 죽어서 새로 사는 것들에게 몸을 나누어주고 있는 모습은, 겉보기엔 징그럽지만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살고, 죽어서 다른 것들을 살리는 모습. 이어, 이어, 행하고 있는 모습. 나는 거기서 불멸을 보았습니다. 개체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전체의 생명은 불멸입니다. 산이 그것을 바라보게 하고 느끼고 깨닫게 하였습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창조물을 영원히 살리려고 노력하지요. 시인이건 조각가건 돌에다 새겨서 남기려고 합니다. 쇠에도 새기고, 특수 금속에도 새기고, 타임캡슐에 담아서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예술품들이 모두 명작은 아니지 않습니까?
산은 자잘하고 빛나지 않는 것들에게 제 몸을 헐어주고 나누어주며 그저 서있을 뿐으로도 불멸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한한 나는 살아 있을 동안 최선을 다하여 걷고, 죽어서 산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멸의 일부를 누릴 것입니다. 이어, 이어, 누릴 것입니다.

유성호 : “개체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전체의 생명은 불멸”이라는 말씀은 선생님께서 본래적으로 견지하고 계신 생태적 사유를 정밀하게 요약하신 것 같아요. 결국 우리의 삶이 거대한 자연의 순환 과정 중에 놓여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선생님께서는 “나는 그의 고통을 양식으로 나의 고통을 시로 쓴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시에서 근간이자 바탕이 되는 그 ‘고통’은 무엇입니까?

이향지 : 여자. 아래쪽에 있는 존재. 머리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부터 끊임없이 간섭 당하는 존재, 여자.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생의 조건들. 그것들이 나를 묶어두고 지배하고 부자유스럽게 한다. 이런 복합적인 것들이 내 고통의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고통을 양식으로 나의 고통을 시로 쓴다”는 시 ｢더그매｣에 나오는 구절인데, ‘더그매’란 집의 뚜껑이 되는 지붕 아랫면과 천정 윗면 사이의 공간이지요. 그곳은 늘 컴컴하고 환기도 잘 안 되고, 매끈하지도 못하고, 못도 삐죽거리고, 춥고, 덥고, 답답하고, 어지러운 전선들을 잔뜩 끌어안고 있지요. 그러나 그 공간으로 인하여 나의 거처는 외부의 찬 공기나 더운 공기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지요. 그러니까 ‘더그매’는 일종의 완충지대입니다. 이 완충지대 덕분에 나는 외기와 직접적으로 싸우지 않아도 되고, 말끔한 전등 아래서 덜 춥고 덜 더운 곳에서, 안락한 공간에서, 시를 쓸 수도 있지요. 그런데 나는 그 고마운 존재를, 어느 때는 나 자신 같기도 하고 어느 때는 내 남편 같기도 한 그 고마운 존재를, 내 머리 위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나를 간섭하고 압박하는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를 통하여 ‘더그매’를 이해하고, 모순도 수긍하고, 내 고통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유성호 : 선생님의 시에 ‘사랑’은 늘 저류에 흐르는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늘 결핍과 부재에 시달리기는 합니다만 선생님의 시적 캐릭터들은 사랑의 열정과 소진을 동시에 안고 흘러갑니다. 선생님 시를 ‘사랑의 시학’이라고 할 수 있겠는지요?

이향지 : 제 시는 사랑을 바로 드러내기보다는 반대편을 비추는 방법을 취해왔습니다. 결핍을 보여줌으로써 그 반대편을 떠올리게 하지요. 돌이켜보면 저는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만, 늘 그렇지 못하다고 부족하다고 투덜거리는 버릇이 있었나 봐요. 시를 쓰면서 그 욕심을 조금씩 고쳐왔고, 사랑받지 못한 것은 나의 부족 탓이다 깨닫고 반성도 할 수 있었지요.
궁극적으로 시는 사랑하자고 있는 것이고, 나도 내 안의 사랑을 되살리기 위해 시를 씁니다. 사랑하자 사랑하면서 살자, 이런 말을 바로 드러내 놓지는 않지만, 내 시가 내 사랑 있는 곳을 깨우쳐 알게 하였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짚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유성호 :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도, 종교가 하는 일도 결국 ‘사랑’이라는 점에서, 선생님께서 하신 “시는 나의 종교”라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오네요. 결국 선생님께 그 ‘사랑(시쓰기)’은 고통의 치유 과정이기도 했겠는데요. 자신 안에 축적되어 있는 시간들에 한편으론 순응하면서 한편으론 저항하면서 살아오신 셈이 아닐까 합니다. 조금 화제를 바꿔서, 선생님은 처음으로 아파트 생활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생활 공간을 옮기시고 나서 달라진 것은 있으신지요?

이향지 : 공동 주택에 익숙하지 않아서 고생 중입니다. 무엇보다 내 마당이 없어져서 늘 함께 하던 나무들이 없어져서, 개가 없어져서,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어요. 나 편하자고 그것들을 죽게 만들었구나 싶어서요. 우리 아파트 바로 옆에 분당 센트럴파크가 있는데, 거기 가면 또 그것들 생각이 나요. “유나! 너 내 앞에 참 많이 있구나!” 이런 상태의 계속입니다.
그러나 공간 구조 조정은 이루어졌어요. 아이들이 독립을 했기 때문에 침실 아닌 방에 작업실을 들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공원이 있어서 산책하기 좋고, 오랫동안 안 하던 운전도 하고, 가고 싶은 곳으로 아무 때나 혼자 훌쩍 떠날 수도 있으니 좋고, 그렇습니다만, 내가 내지 않는 소리 때문에 느닷없이 생각이 끊기고, 그래서 괴롭고, 어디로 가나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없는데 나는 문제가 생기는군요.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는 것이 함께 사는 데는 불편하고, 이 불화는 내 안에서 새로운 시를 익히고 있을 것입니다.

유성호 : 윤극영(尹克榮) 선생님의 자부라는 사실이 이번에 여러 언론을 통해 널리 공개되었습니다. 물론 황현산 선생님의 시집 발문에서 이미 밝혀진 것이긴 합니다만, 그분의 동요와 시와 산문 등 다량의 유고를 곧 전집 형식으로 펴내실 계획이라던데요.

이향지 : 대산문화재단과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주관하는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인제’ 덕분에 소문이 다 나버렸네요. 자랑할 것도 없는 며느리가 누를 끼쳐드린 건 아닌지 송구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금년이 탄생 100주년이자 15주기인데,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구나 섭섭한 면이 없지 않았는데, 잊지 않은 분들이 더 많다는 것을 이번 행사로 확인하고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생전에 참 열심히 공부하고, 짓고, 쓰셨어요. 새벽 3-4시경이면 일어나셔서 손수 차를 끓여 드시며 오전 10시경까지 글을 쓰셨으니까요. 대외적으론 동요작가나 작곡가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동시․시․산문․소설․동화 등 여러 장르의 문학 작품들을 남기셨습니다. 오래된 육필 원고들이어서 다루기 쉽지 않았습니다만, 입력 작업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제가 한 번 더 대조해보고 만들 곳을 정하려고 합니다. 금년 안에 펴내려고 하지만, 잡지와 신문에 발표하셨던 글을 다 수집을 못했어요. 찾을 수 있는 데까지는 찾아서 함께 싣도록 해야지요.

유성호 : 마지막으로 선생님 시의 앞날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이향지 : 언제까지, 얼마나 더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까지와는 좀 다른 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나’에 대한 탐구에 열중하였으니, 다음은 ‘우리’에게로 시선을 돌릴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집 ꡔ내 눈앞의 전선ꡕ을 묶어내고 나서 시도를 해봤는데, 시가 착 달라붙지를 않더라구요.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접목을 모색해봐야지요. 제 생애를 거쳐 간 국면들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사건이나 사물들에 초점을 맞춰보면 보다 좋은 ‘몸짓’이 떠오르리라 믿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향지 시인의 표정에는 ‘바다’의 형상이 들어 있다. 그의 고향이 남해를 마주하고 있는 통영이기도 하고, ｢대해 속의 고깔 모자｣나 ｢바다 밖에서의 목욕｣에 대한 나의 잔상이 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표정은 ‘흐름’과 ‘소용돌이’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리고 ‘죽음’과 ‘삶’의 이미지가 공존하는 ‘바다’의 넓이와 깊이를 가지고 있다.
선생은 자신의 시 ｢낙관｣을 이야기하면서 예술가들의 오랜 인내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신의 시도 언젠가 그 낙관의 완결성을 가지게 되기를 바라신다면서. 그러나 자신의 시는 “뻘 속에 주저앉아 진흙 꽃봉오리나 밀어내고 있을 동안”일 뿐이라면서 또 시의 고행을 다짐하신다.
어느새 “항아리 옆의 감나무를 세월의 몽둥이로/꺾어 보는 사이에 저녁이 되었다”(｢된장 끓이는 저녁｣)고 말하는 시인 이향지. 앞으로도 그 아름다운 ‘낙관’ 하나를 얻기 위해 시인은 가혹한 ‘고독’을 견디면서 시에 대한 자신만의 ‘고집’을 지켜갈 것이다. 그 행로는 ‘나’를 들여다보고 표현하는 지점을 지나, 이제 ‘우리’를 껴안으러 가는 몸짓에서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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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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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2003년 6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