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2 : [현대시작품상/자전에세이], 꽃 핀 가지와 生의 비린내

◎ 2003/6/13(금) 14:17 (MSIE6.0) 218.155.239.98 1024x768

[현대시작품상/자전에세이], 꽃 핀 가지와 生의 비린내

제4회 현대시 작품상/자전에세이

꽃 핀 가지와 生의 비린내

이 향 지

나는 태어났고 나는 살고 있다. 나를 둘러싼 생의 조건들은 대부분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지만 대체로 순응하며 잘 견뎌왔다. 어릴 때는 어른들 말씀을 잘 들었고 지금도 생활권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열심히 하면 성적이 조금 더 오르고 그렇지 못하면 조금 더 떨어지는 보통 아이였다. 평범하고 평범하지만 못 먹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고춧가루가 많이 든 음식이다. 돌이켜 보건데 내가 말 잘 듣는 아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선천적으로 잘 먹지 못하는 매운 말씀들을 피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던 것 같다.
내 어머니는 나 때문에 매를 든 적이 없다. 내가 대학 때 연애질을 해서 졸업을 하자마자 결혼을 하겠다니까 그동안 들인 밑천을 뽑지 못하게 되어 투덜투덜 하셨지만 지금은 그 사위를 가장 좋아하신다. 아버지에겐 딱 한번 귀썀을 맞고 손들고 꿇어앉아 벌을 선 적이 있다. 해지기 전에 들어오라는 지시를 어겼던 때문이다. 잘못에 비해 가혹하다 싶었지만 벌이 끝날 때까지 같이 벌서며 앞에 앉아 계셨다.
아버지는 생애의 대부분을 백수로 사셨지만 나를 가장 예뻐하셨다. 어려운 한자가 빽빽하게 섞여있는 신문을 일찍부터 척척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 덕분이다. 아버지의 아침 즐거움은 목침 높이 베고 눈을 지그시 감고 내가 읽어드리는 신문을 듣는 것이었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버지 영향인 것 같다. 내가 지니고 있는 자격증들을 하나도 써먹지 않고 한국경제기획원이 직업으로 인정해주지도 않는 ‘주부’와 ‘시인’을 겸업하며 지내는 것도 아버지의 백수를 닮았나싶다.

‘향지’는 본명이다. 아버지가 지었다. 한자로는 ‘香枝’라 쓴다. 12월에 태어난 아이 이름을 ‘꽃 핀 가지’를 뜻하는 ‘향지’라 지으신 걸 보면, 아버지의 이상이 얼마나 드높았는지 균형 감각이 얼마나 뛰어나셨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내 이름이 ‘향지’가 된 것은 창씨개명의 영향이다. 내가 태어난 것은 1942년. 일제 말기였다. 식민지의 산천은 먹을 수 있는 풀이 없을 정도로 헐벗었을 때였다. 소나무 송진과 가정집 부엌의 놋그릇까지 군수물자로 착취해가던 때. 어느 집이나 가난하여, 밥 굶고 학교 못가는 아이들이 수두룩하던 때. 남달리 솜씨가 좋고 부지런한 어머니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쌀밥은 아니었지만 때맞춰 먹고 때맞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고향은 통영이다. 다도해 물목에 자리 잡고 있어서 바다가 호수 같았다. 잔고기들이 떼 지어 노니는 모습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 맑은 바다. 어디로 가나 반짝이는 것들이 있었다. 그 반짝임들은 나 모르는 사이에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나의 뼈대를 이루었다.

내게 떠돌이를 심어준 것은 뱃고동소리다. 통영에서는 어디로 가나 뱃고동소리가 들렸다. 오전 9시 전후와 낮 12시 전후에 가장 잦게 울리는 큰 뱃고동 소리가 마음을 자디잘게 부수어놓곤 했다. 부두에 나가지 않아도 무슨 배가 들어오는지 어느 쪽으로 나가는지 환히 꿰뚫고 있었다. 부산까지 4시간, 여수까지 4시간. 나는 얼마나 자주 그 배들의 궤적을 따라가다 길 잃고 되돌아오곤 했는지 모른다. 육로가 미비하여, 바다를 건너는 도리밖에 탈출구가 없던 시절. 나는 당산나무 언덕에 올라 운하처럼 좁다란 앞바다를 오고가는 여객선들을 바라보며, 내가 떠날 그 날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이 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게 되었을 때. 나도 드디어 떠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멀어지는 고향 언덕을 바라볼 수 있었다.

시는 공기처럼 나에게 왔다. 나를 들락거리며 같이 살았다. 시가 무엇이며 어떠해야하는 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특별한 재료나 도구 없이도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 특별한 공간 없이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혼자 썼다 지웠다 고치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일. 나를 불러내고 나를 고치고 자유롭게 하는 일. 낱말을 고르며 느릿느릿 몽상하는 시간들이 무엇보다 좋았다.
너무 빨리 변하고 너무 빨리 잊혀지는 세상에 정말로 좋아서 느릿느릿 골몰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행복하지 않은가. 시는 느릿느릿 나를 바꾸어 간다.

칭찬이 글을 쓰게 했다. 진학하는 학교마다 관심을 기울여주시는 고마운 선생님들이 계셨다. 충렬초등교와 통영여중·고, 부산대를 나왔다. 고등학교 때는 문예부장을 맡았고 교지 편집도 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2학년 중반부터 4학년 후반까지 ‘부대신문’ 문화면 편집을 맡았다. 일주일에 한번씩 발행되는 학보 한 면을 꾸려가며 공부를 하느라 등단은 꿈꿀 겨를도 없었다. 매주 신문이 발행될 때마다 720원(당시 한 학기 등록금이 12,500원) 안팎의 교정료를 받았는데, 그 돈으로 방값도 내고 자취를 할 수 있었으니 그 큰 수입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일이 재미있었다. 당시의 동료들은 일간지나 대학 강단으로 진출하여 성가를 드높여왔지만, 졸업과 함께 서울로 와버린 나는 잊혀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내가 마흔 일곱에야 다시 문 밖으로 나와, 이제껏 굽히지 않고 걸어올 수 있었던 힘은 그때에 그들과 함께하며 길러진 저력 덕분인 것 같다.
재학 중 받은 가장 큰 상은 ‘제4회 부대문학상’이다. 단편소설 ‘撞着’. 당선작 없는 가작이었다. 박목월·손소희·김종출 선생께서 심사를 맡으셨다. 김종출 선생은 모교의 교수님이셨지만, 박목월·손소희 선생님은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웠다. 손잡고 격려해 주신 기대를 배반하고 오랫동안 사는 일에만 빠져 있었다. 강당 가득 모였던 학생들 앞에서 쉬지 않고 쓸 것을 약속 했었다. 밥 먹고 사는 동안에도 문득 문득 그 약속을 떠올렸다. 잊지 않았기에 괴로웠었다.

나는 야생화다. 나는 내가 필요해서 필요한 자리에서 저절로 피었다.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산기슭에서 작은 꽃을 매달고 외로워서 외로워서 몸을 떨며 울기도 했다.
시가 좋아서 시를 썼고 지금도 쓰고 있지만, 국문과나 문창과 같은 문과 출신이 아니다. 자극을 주고받고 서로 이끌어줄 친구나 선후배나 스승도 없다. 이런 점이 내 늦은 등단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문학 전공자가 반드시 좋은 작품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문단에서 외톨이라는 것은 분명 문제가 된다. 문제가 되는 점이 더욱 문제겠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뛰어들었다. 언제나 문 열어놓고 나를 기다리는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는 지름길을 모른다. 몇 시간, 며칠, 몇 년이면 통과할 수 있는 거리를 그 몇 배 씩 헤매며 멀리 돌아왔다. 그래서 더 많은 풍경을 접하고 더 다양한 경험을 하였지만 그 모두가 내 문학에 이로운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였다.
내 앞에도 무수한 갈림길이 있었다. 다 지내놓고 보면 어느 길이 더욱 좋았을지 알게 되지만, 후회하지 않을란다. 그 길은 가보지 않은 길이다. 그 길에는 또 어떤 쓰디쓴 일이 기다리고 있었을지 아는가. 어떤 길에도 어려움은 있기 마련이다.

나는 장터구경을 극장구경보다 좋아한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지방 어느 나라로 가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은 그 고장의 난전을 어슬렁거리는 일. 조명이 휘황하고 사계절 쾌적한 공기가 흐르는 백화점 같은 곳이 아니라, 개소리 닭소리 싸움소리 생선 비린내 푸성귀 썩는 냄새 깨소금 참기름····, 향기와 비린내가 뒤섞여서 야릇한 기운을 돋구는 난전 산책이다. 거기 가면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거기 가면 갈림길에서 길을 잘 못 선택한 사람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생각하며 국밥을 훌쩍거리거나, 과거를 자랑하며 소줏잔을 꺾거나, 한 끼의 식사를 위하여 등짐을 지거나, 남들이 버리는 것들을 주우러오거나, 떠들썩한 향연을 펼치고 가짜 약을 파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를 속이지 않고는 나날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일 수록 번지르르한 차림을 하고 나타난다. 그러나 바람이 펄럭할 때보면 꼬질꼬질한 속내가 다 드러난다. 나는 그럴 때 새로운 비밀을 발견한 것처럼 웃음 짓곤 한다. 이렇게 후꾼거리고 이렇게 적나라한 곳이 어디 있으랴.
누구는 속이고 누구는 속고, 울고, 싸우고···, 파장이 될 때까지 아우성을 비비는 생의 비린내. 내 시는 그것들을 좀 더 담아야 하리라.

나는 활자의 마력을 일찍 깨우쳤다. 발표된 글이 얼마나 멀리 가며, 얼마나 오래 살아있는가도 진작부터 알았다. 점 하나도 함부로 찍지 않으려 삼가는 버릇도 그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편은 내 시의 독자다. ‘부대신문’에 실린 나의 시 ‘出口 없는 밤에’를 보고 매일 편지를 보내왔었다. 그때 그는 군복무 중이었다. 40년 가까운 지금도 그 시를 줄줄 외운다. ‘푸른 하늘을 날고/돌아와/돌 된 가슴 안으로/길은 여십시오···’ 대학촌 자취방에서 궁색을 거듭하던 나의 괴로움이 바람을 타고 철조망을 넘어가 그의 괴로움을 달래주었던가 보다. ‘목마의 신화를 아십니까?’ 이게 그가 보내온 편지의 첫 구절이다. 편지가 오고 편지가 오고··· 마침내 기차가 왔다. 한 괴로움이 한 괴로움을 안으면 두 괴로움이 사라져 천국처럼 아늑할 줄 알았는데, 한 괴로움이 두 괴로움으로 불어나 버렸다. 서로가 예민한 더듬이를 갖고 있어서 부딪칠 일이 계속 생겼다. 쟁쟁쟁 소리를 내면서도 바탕에 있는 이해와 사랑은 버리지 않았다. “시인으로 남아라!” 그는 밥을 벌러가며 나에게 부탁한다. “시인으로 남아라!” 그는 자신이 원치 않던 일로 밥을 벌어오며, 나에게 시 이외의 다른 글을 쓰지 못하게 말린다.
딸 하나 아들 하나가 그와 나의 열매다. 내 인생의 황금기를 송두리째 내주었으나 아깝지 않은 아이들이다. 때 놓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열심히 가며 행복해한다. 이점이 가장 흐뭇하다.
전혀 모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나머지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없던 아이들이 태어나서 엄마라고 불러서 환하고 가득하던 시간을 모두 내어주고 오히려 즐거워하였다. 생의 비의를 절반쯤 알고 나서 허리를 폈을 때, 내 생의 시계는 오후 세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시의 시간은 오후 세 시부터 여섯시까지. 이 동안은 어느 때보다 그림자가 길다. 시인이 나서기엔 꼭 알맞는 시간 아닌가. 그런데 나는 늦었다고 한다.

내 생을 둘러싼 조건들에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 수두룩하지만, ‘여자’가 가장 불편하다. ‘여자’는 내가 겪은 불평등의 상징 같은 것이다.
나는 나의 연을 올려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오빠의 연만 만들어 주셨다. 그 멋진 방패연. 그것은 제도와 관습의 창끝으로부터 오빠를 지켜주는 방패와도 같은 것이었다. 나에게는 그런 방패가 없었다. 나를 그렇게 예뻐하는 아버지조차 평등하게 대해주지 않으셨다. 나는 오빠의 방패연을 올려주거나 연실에 먹일 사금파리를 몽돌로 빻아주거나 유리가루 치는 모시조각을 붙들어 주거나 아교를 끓여 실에 먹일 때 유리가루 든 헝겊을 감싸서 붙들어 주거나하는 조수 역할만 해야 했다. 언덕 위에서 연을 날리는 오빠를 보며 오빠의 연이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걸 보며 오빠의 연실이 다른 연을 끊어 먹는 것을 보며 내 연이 오르고 내 연이 이기는 것처럼 좋아했다.
내가 자랄 때 나에게는 금지된 놀이가 너무 많았다. 제기차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연날리기····. 그것들이 내가 해도 되는 놀이에 속하는 숨바꼭질 오잠이 공기돌 고무줄 모차기 줄넘기와 달라야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지금도 나는 새알을 만지지 않으려 한다. ‘여자가 새알을 만지면 그릇 깬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제비알도 참새알도 꿩알도 비둘기알도 만져보지 못했다. 오빠는 새총도 쏘고 새알도 만졌지만, 나는 금지된 장난 앞에서 구경만 하며 자랐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제약과 불평등들은 내 안에 질문으로 누적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 시는 이 땅의 ‘여자’가 사화산이 아니라 휴화산이었음을 증명하는 말들을 포함해야한다. 그러나 나는 그 말들을 시위하듯 하지는 않으려한다.

글을 쓰다 실마리가 풀리지 않으면 처음 떠나던 장소로 되돌아간다.
내 글의 시발점에는 동생의 죽음이 있다. 너무나 가까이에서 벌어진, 너무나 초라하고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장례를 보고나서다. 내 바로 아래 세 살 터울 여동생이 있었는데, 내가 열두 살 되던 해에 뇌막염으로 죽었다. 6.25 직후여서 의술도 요즘 같지 않았다. 미군 야전병원까지 데리고 갔으나 회복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무당이 왔다. 초저녁부터 울리기 시작한 징소리 북소리가 그치는 순간, 울음소리가 불일 듯 일어났다. 그 아이는 싸리나무줄기처럼 말라서 징소리를 타고 떠나갔다. 아침에 장례가 있었다. 부모보다 먼저 죽었다고 관도 없이 업어 내갔다. 방문턱을 넘을 때 엎어놓은 바가지를 힘껏 밟아서 깨고 축담을 내려설 때 항아리 뚜껑을 밟아서 깨고 대문턱을 넘기 무섭게 왕소금과 찬물을 뿌려서 쫒았다. 그렇게 쫒아내어 다시는 문턱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 늘 넘어 다니던 대문턱이 생자와 사자의 공간을 가르는 경계가 되는 순간이었다. 얼마 전까지 살아있었는데,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 묻는지 따라가지도 못하게 했다. 죽지말자 저 아이처럼 죽어서 저렇게 쫓겨나지는 말자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다. 나와는 한 이불을 덮고 자랐다. 비운만큼 내 자리가 넓어졌지만, 그 넓은 자리는 오랫동안 비어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처음 본 주검. 죽음은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얼굴에 지나치게 흰 분칠을 하고 달빛을 등지고 들창을 열고 들이닥치는 게 아니었다. 죽음은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고 요란하게 쳐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공기처럼 소리 없이 모습도 없이 아무 냄새도 없이 티 없는 몸 안으로 병으로 스며들어 천사 같은 아이를 먼저 안아 가 버리는 것이었다. 죽음은 그렇게 비정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믿지 못하는 것이 생겼다.
바깥에서 뛰놀기를 좋아하던 내가 멍하니 앉아있는 날이 잦았다. 앉아서 편지를 썼다. 일년 쯤 지나 편지가 완성되었다. 숙제를 해갔을 뿐인데 교지에 실렸다. ‘보고 싶은 숙이에게’ 내용은 잊었지만 제목은 기억한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애틋함을 글로 써서 띄우면서,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나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방법을 연습해왔다.

나는 시를 통하여 나를 발견하고 자잘한 한숨들을 잠재워왔다. 들여다보면 나의 시는 나보다 더 나답다. 지금까지의 내 시는 제도와 관습에 길들여지고 타협하며 목숨을 이어온 수동적인 ‘나’가, 개발의 삽날과 가지치기를 당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나’를 만나고 불러내는 과정이었다. 자연은 죽어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서 움직인다는데 매력이 있다. 주검조차 삶 쪽으로 움직이는 장소. 그런 장소가 내 안에도 펼쳐져 있으며, 보이는 ‘나’보다 더 뿌리가 깊으며, 끊임없이 새잎을 피우고 있으며, 내가 그 힘으로 버티고 있으며, 그것들을 쉽게 만나고 쉽사리 드러낼 수가 없어서 답답하고 괴로워했다. 이유는 내가 너무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고 말문을 닫아두었기 때문이었다. 시뿐만 아니라 발도 묶어두었다. 그 기간이 20년을 넘었다. 내가 시를 다시 쓰고 산을 찾아다니게 된 것은 누르고 눌러둔 자연을 되살리는 행위이기도 했다.
내가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작정하고 본격적으로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 마흔 일곱 되던 1989년의 봄. 그때까지 나는 이길 수 없는 싸움만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졌고, 그해 여름 드디어 시인이 되었다. ‘월간문학’ 제58회 신인상 당선. 감태준 선생님 추천이었다. 어느새 등단 14년째다. 올해 초까지 네 권의 시집을 묶어내었다. 아끼는 시집은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그리고 ‘내 눈앞의 전선’이다.
등단! 시인! 처음부터 그것을 목표로 삼았더라면 아무리 삶이 어려운들 더 일찍 나서지 못했을 리 없다. 정말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쓰지 않으면 배길 수 없을 만큼 무엇이 쌓였을 때, 그때까지 나는 미적미적 도망 다니며 기다렸던 것 같다. 팔자에 있는 길은 언젠가는 가게 되는 모양이라고, 운명을 빌어 말하기도 한다.
몸으로 온몸으로 그동안의 게으름을 갚고 있는 중이다.

산은 내게 새로운 생명을 주고 굳었던 감각을 되살려주었다. 산은 내게 불멸을 깨우쳐준 장소다. 멀리서보면 정물처럼 보이는 산속에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명들이 있다. 주검조차 삶 쪽으로 움직이는 장소. 살아있던 것이 죽어서 살아있는 것들에게 몸을 나누어주는 모습은 징그럽지만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나는 거기서 예술가들이 지향하는 불멸과는 다른 불멸을 보았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창조물이 영원히 살아남기를 바라지만 사후의 운명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유한한 내가 산에서 발견한 불멸이란 생명의 불멸이다. 개체는 사라지지만 전체는 불멸이다. 나는 이것이 내가 쓰고 있는 시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한하지만 나는 불멸이다.
나는 살아서 시에 보태고, 죽어서는 산에 보탤 것이다. 몸과 마음이 텅 빌 때까지, 나는 적어도 두 가지 불멸에 참여하고 있다.
시인은 유한 하지만 시는 불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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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2003년 6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