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3 : [에세이], Global Etique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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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Global Etiquette

자연에 대한 예의, 사람에 대한 예의
― 흐뭇한 기억과 씁쓸한 기억 사이에서

이 향 지

자연에 대한 예의! 사람에 대한 예의! 산악인이 갖추어야 할 두 가지 덕목이다.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절제와 노력! 염치와 겸손을 아는 마음! 양보할 줄 아는 미덕! 책임질 줄 아는 풍토! 여기에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양심과 사랑까지 추가되어야 한다.

'예의'라는 낱말 속에는 이처럼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덕목들이 모두 내포되어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같이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추상적이다. 가시적(可視的)인 것이 아니라 심정적(心情的)이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사회에 꼭 필요한 덕목이요 규범이면서도, 교통법규처럼 제재를 가할 수도, 명확한 기준이나 잣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예의(禮義)!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이것을 우리는 지키자고 한다. 갈수록 거대해지는 문명의 그늘로부터 [사람의 아름다움]을 되살려내자고 한다. 갈수록 메말라 가는 세기말의 살풍경으로부터 [자연의 아름다움]을 지켜가자고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 세계 속의 자연을 내 울타리 안의 초목같이 돌보고 지키는 [지킴이]가 되자고 한다.

산은 인간의 야성(野性)이 가장 드러나기 쉬운 곳이다. 남의 실수에는 얼굴을 찌푸려도 나의 실수에는 관대한 것이 인간이다. 나라는 인간도 그 범주 안에서 앙앙불락하는 부류일 뿐이지만, 찬물에 세수하고 거울을 보는 심정으로 내가 걸어온 산길로 돌아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대면에서 빚어졌던 몇몇 풍경들을 되살려 본다.

내가 단골로 다니는 안내산악회의 고참멤버 중에 차인규(70)라는 분이 있다. 그분은 수십 년 산을 탔다. 그분은 산에 올 때, 폐 필름통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그분은 애연가다. 담배가 너무 좋아 피우기는 하지만, 자신이 버리는 꽁초와 담배 재에 더운 기운이나 불씨라도 남아 있어서, 산불이라도 나게 되면 어쩌겠느냐. 이게 그 이유이다.

어디서 산불이 났다는 기사를 읽거나, 아까운 나무들이 화염에 휩싸이는 광경을 TV에서 볼 때, 나는 습관처럼 그분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분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폐 필름통 재떨이를 떠올리게 된다. 그분의 산 사랑은 요란한 구호를 외쳐대는 것도 아니고, 대중의 이목을 끌려는 몸짓도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산을 내 몸 같이 조용히 사랑하고, 그 사랑을 조용히 실천할 뿐이다.

산이 좋아서 산으로 가는 우리들! 도시의 공기가 메마르고 삭막해 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짓밟히고 뭉개지는 우리 산! 쓰레기를 버린다거나, 나무를 꺾는다거나, 산불을 낸다거나하는, 자연에 대한 실례(失禮)는, 그 살풍경과 손실이 금방 눈에 띄지만, 사람의 사람에 대한 실례는 어물어물 묻혀버리게 마련이다.

좀체 잊혀지지 않는 씁쓸한 기억 한 조각! 1995년 9월 17일 설악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 나는 오색∼대청봉∼봉정암∼가야동계곡∼백담사∼용대리로 이어지는 코스를 탔다. 나는 그때까지 가야동계곡을 가보지 못했었다. 봉정암 마당에서 만난 가이드가 일러주는 대로 봉정암 사리탑을 지나서 용아릉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계곡으로 내려갔다. 능선에서 내려다 볼 땐 분명 길 같은 것이 있었는데, 막상 내려가 보니 발을 옮기기도 어려울 만큼 삭막한 비탈이었다. 뒤따라오마 던 가이드는 오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설악산에 밝은 사람이었고, 해외원정을 나간 회장 대신 그날 산행의 총책을 맡고 있었다. 그런 그가 '사리탑까지 올라가지 말고 계단 중간쯤에서 큰바위를 끼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라'고 일러주지 않고, '사리탑을 지나서 용아릉 쪽으로' 가게 한 것은 분명 고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의심도 않고 고행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설상가상 빗방울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굴과 지도를 적시며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비. 봉정암 마당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여섯 사람이 내 뒤에 있었다. 대부분 설악산이 초행인 사람들. 여자 셋과 남자 셋.

잦은 낙석에 전전긍긍하며 이끼와 썩은 나무에 미끄러지며 거기까지 내려갔기 때문에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나는 아니, 우리는 제 발로 걸어 들어와서 조난을 당한 것이다. 그 계곡은 용아릉 북단에서 와룡연 아래쪽으로 흘러내리는 가야동계곡의 지류로 길이는 1.5km정도, 나중에 안 이름은 음지범수골이다. 봉정암에서부터 측정하면, 가야동계곡 4거리 쪽으로 돌아 내려가는 것보다 지도상의 거리는 분명 가깝지만, 비가 조금만 내려도 금방 물이 차 오르는 구조의 사각지대다. 비가 오지 않을 때도 그늘이 짙어서 바위가 미끄럽고 이끼 투성이다. 길은 물론 없다. 그 좁고 가파른 V자 협곡 곳곳엔 둘레가 가파른 웅덩이들이 도사리고 있다. 협곡 양쪽엔 잡목만 빽빽하다.

이끼에 뒹굴며 물에 빠지며 온갖 고난을 겪은 끝에, 기진맥진 녹초가 되어서 용대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오색을 출발한지 15시간 30분이 가까운 오후 5시 50분. 우리를 기다리던 등산 버스가 주차장을 출발하는 찰나였다. 우리를 그 골짝으로 보낸 사람까지 그 차를 버젓이 타고! 그날의 등반대장이 7인의 낙오자들을 찾을 생각도 않고! 그때 나는 알았다. 그가 고의였다는 것을.

문제의 씨앗은 그날 새벽에 싹텄다. 등산주가 들깬 상태의 그가, 마이크를 잡고 등산 코스를 안내하다말고 "여러분! 가시다가 빨간 열매를 보면 무조건 따십시오! 그것이 바로 마가목이라는 겁니다! 가지는 더 좋습니다. 술을 담그거나 차를 끓여…" 바로 그 대목에서 내가 손을 들어 제지시켰던 때문이다. 사과를 받아냈던 때문이다. 그 산악회 등산수칙 제1조는 분명 자연보호였는데, 그런 망발을 계속하게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결과 나는 죽을 고생으로 보복을 당했지만, 그 망발을 저지시키지 않았다면 산을 바라보는 마음이 더 괴로웠을 것이다. 그날 설악산은 나를 도와 비를 그치게 했고, 그 골짜기를 무사히 뚫고 나올 힘을 주었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흐뭇한 이야기! 그날로부터 약1개월 전 나는 킬리만자로에 있었다. 1995년 8월 13일, 마랑구 게이트를 통과하여 만다라산장에서 1박하고, 14일엔 호롬보산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내 룸메이트였던 강호연(당시 13세)군이 밀림지대도 벗어나기 전에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 일행은 14명이었고, 출판인산악회 멤버들이 주축이었다. 나도 머리가 띵하고 고소증세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호연이를 데리고 하산하기엔 내가 가장 적임자였다. 그러나 얼마나 벼룬 끝에 온 산인가! 내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등을 겪고 있을 때. 바로 그때, 평화출판사 허창성 사장께서 "호연아! 나랑 같이 내려가자!"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그분 또한 얼마나 오래 준비해서 여기까지 왔을 것인가.

그날 밤에는 호롬보산장에서 자고, 15일 아침 키보산장으로 향했다. 해발 4400m를 넘을 무렵부터 이명이 심해지고 졸음이 쏟아지고 환각까지 겹쳤다. 작은 회오리들이 흙먼지를 밀어 올리다 사그러지곤 하는 황무지엔, 걱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지키며 따라오는 포터 대장 패트릭 뿐이었다. 나직한 언덕에서 키보산장이 손짓하는 곳까지 왔지만, 시간은 이미 오후 4시를 넘었고, 내 수족은 내 의지 밖에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내가 설령 죽을 각오를 하고 키보산장까지 간다한들 거기서 밤을 보낼 순 없을 것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얼굴한 번 찡그리지 않고 내 배낭을 지고 따라온 패트릭에게 되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 어려운 말을 하고 나자, 나는 참을 수 없이 울음이 쏟아졌다. 목표물을 눈앞에 두고 되돌아서려니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황무지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내 옆에서 그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호롬보산장에 나를 부탁하는 편지를! 끝까지 책임을 다하려는 가이드의 모습. 황무지에 쭈그리고 앉아 편지를 쓰는 패트릭의 모습은 '킬리만자로의 꽃' 바로 그것이었다. 킬리만자로! 정상엔 오르지 못했지만 [사람의 아름다움]을 만난 산이다.

*1999.4월호, 월간 산.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