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0 : [시와 정신/우리 시대의 산문], 고무신

◎ 2002/12/30(월) 02:37 (MSIE5.5) 218.155.238.94 1024x768

[시와 정신/우리 시대의 산문], 고무신

<우리 시대의 산문>

고무신

이 향 지

고무신이 있다. 뽀얗게 씻어서 마루 끝에 엎어놓았다. 위에서 보면 쪽배처럼 생긴 하얀 코 고무신. 주름 잡힌 바닥에는 18½이라 찍혀있다. 18문 반. 별로 예쁘지도 않은 엄마가 발은 작고 예쁘다. 별로 꾸미지도 않는 엄마가 하나뿐인 고무신을 뽀얗게 닦아서 엎어놓은 걸 보면 외출을 할 모양이다. 어디로 가실까. 아이에게 옷 갈아입으란 말씀이 없는 걸 보면 오늘도 혼자 갈 모양이다.
고무신은 좋겠다. 엄마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간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다 돌아오는지 고무신은 절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작은 발로 콕콕 밟아도 말해주지 않는다. 코를 비틀며 다그쳐도 말해주지 않는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다 돌아왔는지 시시콜콜 이야기하기를 싫어하는 엄마처럼, 고무신도 비밀이 많고 입이 무겁다. 엄마와 함께 다니느라 진흙을 잔뜩 묻혀서 돌아오기도 하고, 물에 잠겼던 짐배처럼 흙탕물을 가득 담아 돌아오기도 하고,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옆구리가 찢어져서 돌아오기도 하고, 코빼기와 볼에 푸르둥둥 풀물이 들어서 돌아오기도 하고, 누군가 씹다버린 껌을 밟아 찐득찐득한 굽이 붙어 돌아오기도 하지만, 고무신은 언제나 웃는 모습이다. 뽀얗게 분칠을 하고 좋은 길만 골라 다닐 수 없는 엄마 발을 담아 싣고 다니느라 만신창이가 되어가지만 고무신은 언제나 만족한 표정, 허허허 웃는 모습이다.
고무신은 바보다. 엄마만을 위해 태어난 종신노예처럼 엄마 발에만 길들고 순종한다. 엄마가 방으로 들어가면 축담 위에서 꼼짝 않고 엄마를 기다린다. 춥거나 덥다고 불평하는 일도 없고, 꽃이 핀다고 꽃이 진다고 들썩거리거나 조르는 법도 없고, 비가 들이쳐서 물이 고인다고 훌쩍거리는 법도 없다. 그저 묵묵히 엄마가 벗어놓은 자리에서 다시 신어줄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리는 것이다. 엄마도 고무신 이외의 신발을 신지 않는다. 아버지도 오빠도 두 켤레 세 켤레씩의 신발이 있지만 엄마에게는 이 고무신 하나뿐이다. 엄마 발에 한번 신겨진 고무신은 언제나 흰빛이고 언제나 18문 반이다. 더 자라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고무신처럼 엄마의 눈 높이도 언제나 하얀 코 고무신 18문 반에서 정지한 채,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다. 옆구리가 터지고 바닥이 닳아서 맨질맨질해 질 때까지 엄마도 줄기차게 고무신 하나만 고집하며 신고 다닌다.
고무신과 엄마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단짝이다. 우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고무신을 닦아줄 때의 엄마 모습은 아이를 씻겨줄 때보다 더 정성을 들이는 것 같다. 조그만 면경 앞에서 가르마를 곧게 타고 참빗으로 머리를 빗을 때처럼 느리고 꼼꼼하고 정중하기까지 하다. 엄마는 고무신을 위해 수세미를 따로 준비하였을 정도다. 적당히 길이 들어 부드러워진 넝쿨 수세미를 물에 적신 후, 빨래비누를 문질러서 오래오래 닦아주는 것이다. 왼 손을 고무신 안에 오그려 넣어서 고무신 볼을 통통하게 부풀린 다음, 남은 손으론 수세미를 모아서 쥐고 부드럽게 왕복하며 때를 밀어준다. 구석구석 문질러 겉 때가 다 빠지면 수세미와 고무신을 물에 한번 헹군 뒤 비누를 한번 더 먹여서 속 때를 문지른다. 속 때까지 말갛게 벗겨진 뒤에야 비누 묻은 수세미를 흔들흔들 헹궈서 빨래줄 한 켠에 집게를 물려서 걸어놓고, 비누 묻은 고무신을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거듭거듭 헹구는 것이다. 고무신을 닦기 전에 해두는 일은 깊은 우물에 몇 번이고 두레박을 내려선 귀 달린 양동이에 물을 넉넉히 받아두는 일이다. 양동이에서 고무신까지 물을 나르는 도구는 초가지붕에서 탱탱하게 익혀서 만든 박 바가지다. 고무신 하나를 닦기 위하여 엄마가 동원하는 그릇들이 이렇게 많다. 엄마의 정성을 알아듣는 것처럼, 맑고 찬물에 목욕을 하고 난 뒤의 고무신은 콧날이 더 오똑해지고 신비스럽게 희어진다. 사랑을 듬뿍 받고 난 뒤의 여자 얼굴처럼 충만하고 황홀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얘진 고무신을 엄마는 손 위에 올려놓고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엄마와 고무신은 물끄러미 마주보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같다. 서로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이런 순간이야말로, 앞으로의 유대를 더욱 돈독히 하자는 의식에 다름 아닐 것이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무신을 두 손에 한 짝 씩 나누어 들고 허공에 힘껏 뿌려 물기를 털어 줄 때의 엄마 모습은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힘차 보인다. 그런 다음 천천히 마루 쪽으로 다가가서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엎어주는 것이다. 고무신 코 안에 물이 고이지 않게 비스듬히 경사를 잡아주는 일도 엄마처럼 잘하기는 드물 것이다. 엄마가 둘도 없는 고무신을 신지 않을 때란 바로 고무신을 닦아줄 때와 고무신을 벗어놓고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뿐이다.
엄마는 언제 나오는가. 아이는 고무신 옆에 걸터앉아 다리를 까딱거리며 논다. 아이는 고무신만큼 엄마와 가깝지 못하다. 엄마는 언제나 아이를 두고 다닌다. 밥 먹어라 그만 놀아라 멀리 가지 말아라 옷 깨끗이 입어라 신발 아껴 신어라 아이에게는 명령만 하는 엄마가 고무신에게는 말없이 사랑만 베푸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동백기름으로 윤을 낸 머리에 짤막한 은비녀를 꽂은 엄마가 방문을 열고 고무신에게로 나올 것이다. 문지방을 넘어 서너 발짝을 걸어와서 마루 끝에 엎어놓았던 고무신을 뒤집어, 수건으로 꼭꼭 눌러 남은 물기를 닦아낸 뒤 버선 신은 발을 고무신 안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마루 위에서 고무신을 신고 버선 신은 발과 고무신이 잘 맞나 발끝을 몇 번 움직여보고, 마루 위에서 제자리걸음을 두어 번 딛어보고, 축담으로 내려서서 두어 번 더 딛어보고, 마당으로 내려서서 대문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그럴 때 고무신은 하늘 가운데를 나는 초승달같이 엄마 발에 매달려 웃을 것이다. 엄마 발에 매달려 굽신굽신 웃으며 긴 골목을 빠져나갈 것이다. 마루 끝에서부터 엄마를 따라나간 아이는 우두커니 대문 기둥에 남을 것이다. 우두커니 대문 기둥에 붙어 서서 엄마와 함께 돌아올 고무신을 기다릴 것이다.
고무신은 좋겠다. 아이는 일어서서 고무신을 뒤집어 본다. 고무신 안으로 발을 넣어본다. 아이 발에 고무신 안은 마당처럼 넓다. 아이가 앞으로 나가려고 발을 들어올릴 때마다 훌떡훌떡 벗겨지는 엄마 고무신. 앞쪽으로 발을 바짝 당겨서 신고 마루 위를 몇 발짝 걸어본다. 아이 발끝에 코가 걸려 찍찍 소리를 내면서 끌려온다. 마지못해 끌려오는 고무신 아래서 낡은 마룻장이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엄마 고무신 건드리지 말고 도로 엎어놔라. 어느 틈에 엄마가 알고 나직하게 꾸짖는다. 아이는 얼른 벗어서 마루 끝에 엎어놓는다.
고무신은 토라져서 달이 되었다. 달이 된 고무신은 아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이가 야단맞고 부랴부랴 엎어놓은 후론 허공 속의 달처럼 비스듬히 드러누워 버린 것이다. 비스듬히 드러누운 고무신은 그믐 무렵 낮달 같다. 아이는 낮달 같은 고무신을 반듯하게 세워서 엎어놓으려 하지만 한번 토라진 고무신은 아이 손이 닿을 때마다 반대쪽으로 드러누워 버린다. 반대쪽으로 드러누운 고무신은 초승달 같다. 아이는 또다시 고무신을 고쳐 놓지만 그믐달처럼 옆으로 누워 버린다. 아이의 얼굴이 초승달과 그믐달 사이에서 앵두처럼 익어간다.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다. 나쁜 고무신 나쁜 고무신 작은 손바닥으로 고무신 옆구리를 거듭 때려준다. 달이 된 고무신은 맞지 않으려고 축담 아래로 사뿐히 뛰어내린다. 엄마 고무신 갖고 놀지 말고 도로 엎어놔라. 엄마는 좀 더 크게 꾸짖는다. 아이는 맨발로 내려가 그믐달을 주워 올린다. 그믐달을 주워 올리는 사이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초승달이 팔꿈치에 걸려 그믐달 자리로 떨어진다. 아이는 두 손에 그믐달과 초승달을 나누어들고 축담 위에 맨발로 서서 울음을 터트린다. 엄마! 고무신이 내 말을 안 들어.

고무신이 엄마와 함께 학교까지 왔다. 낮부터 비오는 날. 하얀 코 고무신을 신은 엄마가 아이가 비올 때 신는 남자 고무신과 하나뿐인 우산을 챙겨 들고 교실 창 밖에 서있다.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한번도 찾아오지 않던 엄마가 쪽진 머리에 짤막한 은비녀를 꽂고 큰 나무 옆에 서서 비를 맞는다. 고무신과 엄마는 똑 같이 바보다. 아이에게 줄 때까지라도 들고 있는 우산을 펼쳐서 비를 피할 것이지. 싫다는 아이에게 억지로 우산을 맡기고 자기는 고무신과 함께 빗속을 걸어간다. 고무신과 엄마는 못 말리는 바보다. 아이 가슴에 무겁게 얹혀서 수십 년을 내려갈 줄 모른다.

아이는 뒷짐을 지고 아장아장 걸어간다. 서너 발짝 가다가는 팔짝 뛰면서 돌아본다. 까꿍! 아이 뒤에는 지켜보며 맞장구치는 엄마가 있다. 까꿍! 엄마는 아이를 보며 술래처럼 굴고, 아이는 툭 트인 곳에 술래를 두고 숨바꼭질을 거듭한다. 아이 발에는 앙징맞은 고무신이 신겨있다. 나비와 꽃이 잔뜩 그려진 조그만 꽃신. 초록도 있고 빨강도 있고 노랑 파랑도 있다. 무지개도 있고 새도 있고 구름도 있다. 꽃밭과 바다도 있다. 아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꿈꾸는 세상이 조그만 꽃 신 하나에 모두 그려져 있다. 머리에 쌍뿔을 세워서 묶고 뒷짐을 진 아이가, 그믐달과 초승달을 바꿔 신은 아이가, 뒷짐을 지고 걸어가다 팔짝 뛰면서 돌아볼 때마다 아이의 세상이 까꿍! 까르르! 웃는 달을 띄워 올린다. 아이가 점프하면서 돌아볼 때마다 꽃신에선 나비떼가 날아오른다. 한 마리씩 나비가 날아오를 때마다 꽃잎은 떨어지고 아이 발은 몰라보게 빨리 자란다. 넘어 질라 넘어 질라 애를 태우며 따라가면, 아이는 어느새 그믐달과 초승달을 똑 바로 찾아서 신고, 사뿐사뿐 멀어져간다.
*<<시와 정신>> 2002년 겨울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