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12/30(월) 02:31 (MSIE5.5) 218.155.238.94 1024x768 시, '황무지의 얼굴' 이렇게 썼다   시 '황무지의 얼굴' 이렇게 썼다. "시"    황무지의 얼굴   --킬리만자로에서         이 향 지  정글지대의 까마귀도, 수염이끼 너절한 큰나무들도, 이곳까지는 올라오지 않는다. 누가 자꾸 귓속으로 매미 떼를 집어넣는다. 조금만 더 가면 마지막 산장, 조금만 더 가면 구름의 늪이다. 누가 자꾸 쿵쿵거리며 골속을 돌아다닌다. 흙먼지들이 일으키는 작은 회오리들, 발밑에서 비틀거리는 현무암 조각들.  그것들만이 살아 있다. 그것들만이 가볍게, 그것들만이 빙글빙글, …졸음이 …졸음이 …졸음이…  내 좌우의 날개를 이룬 사람의 깃털들, 십여명. 마른 옥수수 울타리같이 웅성거리고 있다. 건너편에는 한 청년이 있다. 처음보는 얼굴이다. 조끼까지 받쳐입은 정장차림, 이십대 후반의 백인이다. 빗질자국이 남아잇는 금발. 깊고 푸른 구멍을 가진 갈색눈동자. 손을 내밀면 닿을듯한 거리에서, 표정없이 건너다본다. 너는 누구냐? 그도 나도 말을 걸거나 악수를 청하지 않는다. 그는 테두리 없는 거울 속에 들어있는 것 같다. 둘러선 사람들의 내용을 알수없는 웅성거림 환하게 두르고……  알루미늄 산소통에 코를 박고 있었다. 포터대장 패트릭의 석탄빛 손등 너머로, 킬리만자로의 태양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극한에 처해진 육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묘사해보았다. 높은 곳, 더 높은 곳을 지향하던 정신이 무참히 주저앉는 날이기도 했다. 1995년 8월 15일. 그날도 나는 정상을 향해 걷고 있었다. 킬리만자로의 정상은 우후르피크, 해발 5,895미터. 언제나 만년설에 덮여있으며, 구름 속에 머리를 감추고 있다. 그날은 해발 3,700미터에 있는 호롬보산장에서 해발 4,700미터에 있는 키보산장까지 걸어야 하는 날이었다. 다음날 새벽에 정상을 탈환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아침에 스노캡을 보았을 때는, 행운의 여신이 함께 하는 듯 했지만, 아프리카의 지붕은 이방의 여자에게 쉽사리 정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4,000미터를 넘으면서부터 이명이 심해지더니, 4,400미터를 넘어서자 열 걸음도 계속 걸을 수 없다. 눈이 감기고 다리가 흐물흐물 녹아 내렸다. 100미터를 오르려면 1,000미터만큼의 고통을 겪어라. 한 걸음을 전진하려면 열 걸음만큼의 고통을 제물로 바쳐라, 킬리만자로의 여신은 이렇게 주문하는 듯 했다. 가장 큰 고통은 이명과 졸음. 앉으면 편안했고 누우면 더 편안했다.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배낭까지 포터에게 맡기고 빈 몸으로 걷고 있었지만, 몸이 가장 큰 짐이었다. 몸 두고 갈 수 있는 곳, 그곳에서의 영접이 가장 가깝고 따뜻했다. 내 고통을 어루만지듯 뜬금없는 풍경들이 펼쳐지곤 했는데, 그것은 눈뜨고 꾸는 꿈과 같은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황무지였는데, 무수한 사람들이 둘레에 나타나 웅성거리기도 하고, 여름 숲속에 있는 듯 매미 떼가 울어댔다. 가장 또렷한 것은 내 앞에 나타났던 백인 남자의 모습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침묵의 무리였는데, 측은한 듯 바라보거나 부드럽게 에워싸거나 건너편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마 킬리만자로를 지키는 신들이거나,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의 내 모습이거나, 그 산에서 죽은 사람들이었을 거다. 그들은 나를 그렇게 자신들의 무리 속으로 영접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만난 풍경은 책장에 가득 꽂힌 책이었다. 이곳에도 책은 있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책장을 만나는 순간 나는 갑자기 내게도 집이 있다는 생각이 났다. 고도를 낮추자 환상은 사라졌지만, 구체적인 통증이 온몸을 에워쌌다. 그때 그 편안하고 행복하고 외롭지 않던 순간에 좀 더 전진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죽은 표범과 만년설 위에서 뒹굴며 놀고 있으리라. --------------------------------- *2002년 <시안시인 엔솔로지>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