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8 : [문학사상/에세이], 겨울산, 그 환한 적막 속으로

◎ 2001/12/17(월) 11:57 (MSIE5.5) 61.77.91.129 1024x768

[문학사상/에세이], 겨울산, 그 환한 적막 속으로

'0201 <<문학사상>>/에세이

겨울산, 그 환한 적막 속으로

―― 生者의 마을로 돌아오는 길목

이 향 지

산이 왜 좋으냐고, 산엔 왜 가느냐고, 다그쳐 물으면 얼른 대답을 못한다. 정말 좋은 것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과 같아서, '나'를 살리면서도 그 존재를 자주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무엇엔가 다쳐서 피가 흐르고 통증을 느낄 때나 새삼 그 있는 곳을 돌아보고 호호 불어 주는 손가락처럼,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자주 잊어버리는, 내 몸의 일부 같은 곳. 내 육체의, 내 정신의, '나'라는 주체의 이름으로 지속되는 생애의, 체표면 같은 곳. 멈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것들의 무던한 삶터. 조용한 아우성이 상존하는 곳. 그런 곳을, 어찌 짧은 한 마디로 단정해서 대답할 수 있으랴.
어떤 산이 더 좋더냐 물으셔도 마찬가지다. 설악산, 지리산, 치악산, 금강산, 백두산, 한라산…. 자기 발로 그 발등이라도 밟아본 산 이름을 떠올리며, 추억의 코드와 나의 대답이 일치하기를 은근히 기대하리라. 그러나 나는 또 얼른 대답을 못한다. 내게 산은 어떤 때 어느 길로 올랐느냐가 달랐을 뿐이다.

태초에 산이 있었고, 사람은 산보다 나중에 왔다. 사람들은 쉽게 오를 수 없는 산에 더 신성한 이름을 부여해왔다. 거기에 기대어 소망을 빌고 삶을 이어왔다. 비가 내릴수록 산봉우리는 더 아름답게 드러났고, 골짜기들은 더 길고 깊어졌다. 사람들은 물길을 거슬러 더 깊은 속내에 다다를 수 있었다. 산에 이름을 부여한 것은 사람들이지만, 산이 과연 제 이름을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봉우리와 저 봉우리를 혼동하지 않고 가리키고 활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람들은 산마다 이름을 붙였다. 한 덩어리 산에도 수많은 골짜기가 있고, 사방팔방에서 기대 사는 사람들이 조금씩 다르다. 풍습이나 말씨뿐만 아니라, 한 덩어리 산을 두고 마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많다. 이 비탈과 저 비탈이 다른 나라에 속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섬이 아닌 곳에 서있는 산들은 어디로든 능선을 뻗어 다른 산과 어깨를 붙여 이어져 있고, 사람들은 자주 그 능선의 마루금을 빌어 경계로 삼는다.
내게 산은 다만 산일 뿐이다. 어떤 산은 바위가 좀 더 우뚝하고, 어떤 산은 흙이 좀 더 깊을 뿐, 어떤 산은 접근이 좀 더 용이하고 어떤 산은 그렇지 못할 뿐. 바위, 흙, 나무, 돌, 계곡, 폭포, 등성이, 거기에 깃들어 사는 새소리, 짐승소리 등, 산을 이루는 요소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또, 아무리 힘있고 건강한 사람도 산보다는 짧다. 그 짧은 사람 중의 하나인 내가, 크고 길고 느리게 움직이는 산을 두고, 어느 산의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단정하여 말할 수 있으랴.

내가 산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란, 내가 산과 함께 걸으며 겪은 경험들이 대부분이다. 그것도 거의 어떤 '곳'보다는 어떤 '때'에 관한 감동과 기억들이다. 사람의 필요에 따라 그 발치나 가슴팍이 몹시 파이어 신음하는 산이 아니라면, 어느 산이나 저마다 지닌 아름다움이 있었다. 어느 때 가더라도 산과 내가 하나되는, 그 안에서 오히려 편안해지는 그런 경험이 있었다. 비 올 땐 비 오는 날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정취가 있었고, 꽃 필 땐 그 때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낙엽이 질 때, 눈이 내릴 때, 눈이 깊이 쌓였을 때, 눈이 깊거나 숲이 너무 짙어 길을 잃었을 때, 얇은 텐트 한 장 없이 별 아래 누워 노숙을 할 때, 그 무수한 한 때들…. 저마다 다른 시간 다른 국면들이, 저마다의 정취를 품고 내게 〈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독사에 놀라고 벌에 쏘이며 달아나던 때조차, 그 곳, 그 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전율과 감탄이 있었다. 거기서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잊었던 거다. 〈산〉! 오직 그 하나 속에서 그것의 한 부분으로 꿈틀거리는 미물! 거기서 나는 편안했고, 그것을 알았기에 편안했고, 살아있음을 아름답게 느꼈다.
산도 삶터다. 단순한 삶터가 아니라 온갖 주검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재 탄생시키는 곳이다. 무생명이 생명을 창조하는 현장. 내 몸이 살기 위해 살아있는 것을 죽여서 나를 살리는 현장이 아니라, 우매에 가까운 헌신이 상존하는 곳. 축적된 시간이 살아 흐르고있는 열린 공간. 그런 곳이 산이다. 그러므로 산은 시간의 화석이다. 딱딱하게 굳어서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는 화석이 아니라,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살아 숨쉬는 화석. 그 흐름을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생명체로서의 시간. 그 느린 흐름을, 그 그치지 않는 흐름을, 그 적나라한 단면들을, 섬광처럼 만나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숨쉬는 나를 그 화석의 무늬로 각인 시켜보는 한 때를 누린다. 이보다 아름다운 '때'와 '곳'이 과연 어디 있으랴.

바위산은 가파르게 삐치고 거부하는 형상이 매력이다. 흙이 두터운 육산은 푹신한 포용의 몸짓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느 산이든 바위와 흙과 나무와 계곡과 바람과 물을 골고루 품고 있다. 거기 때맞춰 해가 깃들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별과 달이 뜬다. 크고 작은 나무와 풀과 새와 짐승들이 제 육체의 조건에 알맞은 지점에 뿌리를 내리거나 둥지를 틀고 삶을 이어간다. 그것들 위로, 곁으로, 안으로, 늘 새로운 시간이 지나간다. 삶을 멈춘 나무등걸조차 생명 있는 쪽으로 움직인다. 나도 잠시 그들 중의 하나가 되어 그 안을, 겉을, 곁을, 지나간다.
물 빠짐이나 흙이 좋은 비탈엔 어김없이 무덤이 있고, 양지바른 발치엔 크고 작은 마을이 깃들어 있다. 산에 가보면 사자(死者)의 마을이 생자(生者)의 마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덤의 것을 먹지 않은 자 어디 있으랴. 그러므로 내게 산은 생자의 마을을 거쳐 사자의 마을로 갔다가 생자의 마을로 되돌아오는 과정의 공간이며, 길이며, 한시적인 내가 불멸을 느끼는 장소이기도 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의 '때'는 눈이 내렸을 때. 사람들이 문밖에 나서는 것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깊은 눈이 내렸을 때. 아무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는 눈밭에서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 중이었는지조차 잊고, 한 걸음 한 걸음에 함몰되어 몰두할 수 있는 때. 그런 때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나는 가장 치열한 한 때를 살아내는 내 모습을 만난다. 나의 나태, 나의 허영을 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 적막이 오히려 위안이 되는 곳. 나는 사계절을 겨울산, 그 환한 적막 속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있다.
*2002년 1월호 <<문학사상>>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