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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10/31(수) 13:01 (MSIE5.0,Windows98) 211.198.157.192 1024x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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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評/새로 쓰는 나의 연보], 느림을 즐기며, 종점까지
새로 쓰는 나의 연보
이 글은 시인들이 만드는 시잡지 '[詩評] 2001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청탁서에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써달라는 부탁이 있었기에, 그리하느라고 하였습니다만, 워낙 경황없을 때 쓴 글이라 마디가 뚝뚝 끊기고 매끄럽질 못하군요. 그러나, 이 못난 글도 저의 한쪽 모습이니 어쩌겠습니까. 허둥허둥 송고한 그대로의 원고를 손질않고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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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을 즐기며, 종점까지
이 향 지
이삿짐을 싸다말고 글을 쓴다. 손톱을 깎다말고, 밥을 먹다말고, 머리를 감다말고, 문득문득 쳐들어오는 불안과 맞닥뜨린다. 며칠 후면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 나는 아파트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내가 가는 곳은 18층인데, 올려다보니 아득한 창공 속이었다. 내 희망은 늘 푸른 하늘을 닮는 것이었는데, 막상 내 몸이 창공 속에 상주할 것이라 생각하니 아득하고 불안해 지는 것이다. 나는 마당 있는 집에서만 살았다. 문을 열면 나무가 있고, 문을 열지 않아도 사계절 내내 나무그림자가 수런거리는, 마당 있는 집에서만 살았다. 그런 내가 흙 한 줌 만질 수 없는 고층의 주민이 된다. 숨쉬는 공기도 그만큼 메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 불안의 진짜 이유는 높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윗집 소리, 아랫집 소리, 옆집 소리를 들리는 대로 받아들이며 살아야하리라는 데 있다.
이번 이사는 그러므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에 속한다. 그만큼 두근거리고 불안한 것이다. 그러나, 이 변화로 인하여 내 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다. 그동안 내 시는 울타리를 높이 치고 나 자신 위에만 엎드려 있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나'만의 울타리를 해체하고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위층 소리 아래층 소리 옆집 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 또한 그들 중의 하나임을 인정치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과 내가 견고한 벽 속에서 함께 숨쉬고 움직이는 공동체임을 수긍해야 한다. 내 시도 자연히 그런 쪽으로 새로운 문을 열게 되지 않을까.
나는 걷는 사람이다. 산에서도 걷고 평지에서도 걷는다. 걷는 사람은 느리다. 나는 한때 이 '느림'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더 빨리! 좀 더 빨리!" 목표를 향하여 돌진하는 시대에 느릿느릿 처져서 걷는 보행자라니! 속도전에 떠밀린 구식무기처럼, 눅눅하고 처참할 때가 많았던 것이다. 나는 이 '눅눅함'과 '처참'을 산을 걸음으로써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걸어온 산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백두대간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지리산 천왕봉에서 백두산 장군봉까지 물을 건너지 않고 이어지는 분수령을 말한다. 좁은 개울하나도 건너지 않고 이어지는 산길. 백두산과 지리산을 연결하는, 가장 거리가 짧고 빠른 길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을 걷는다는 것은 이 분수령의 마루금을 따라 걷는다는 뜻이다. 백두대간의 총 길이는 도상거리 1,577킬로미터. 남쪽에 사는 우리가 자유롭게 답사할 수 있는 구간은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의 640여 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국토의 분단으로 백두대간도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허리 잘린 백두대간의 진부령 이북구간을 사이버산행으로 연결했다. 산경표를 비롯한 고문헌에 통과지명만 드러나 있었을 뿐, 정밀지도 위에서 자세한 궤적을 밝힌 것은 내가 처음이다. 남쪽 구간은 수많은 사람들이 답사하여 그 면모가 세세히 밝혀졌지만, 북쪽 구간은 자료 속에만 흩어져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하여, 한 줄기 백두대간의 존재, 그 이목구비를 세세히 들추어 이어놓은 것이다. 백두대간에서 분기하는 정간(正幹)과 정맥(正脈), 백두대간에서 발원하는 강줄기들도 추적해 놓았다. 과학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시대에 제작된 고문헌들이 필연적으로 안고있는 오류들도 밝혔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을, 내 일생 중 가장 보람 있는 일로 꼽는다. 실제로 걷는 것보다 더 힘들게 통과한 산봉우리와 고갯마루들. 길이 있다면, 실제로 그 길을 걸어보고 싶다.
나에게 있어서 시와 산은 같은 이름이다. 직립하고 전진하고 상승하려는 본능의 명령에 따라 서고 걷고 오른다. 오른 만큼 내려와야 하는 곳이 산이다. 산은 말없이 정직을 가르친다.
나는 이 낡고 오래된 스승을 통하여 '보행자의 느림'이 지닌 장점을 알게 되었다. 길 안에서의 '느림'은 좋은 자리를 선점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빠르게 지나치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느림'을 통하여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백두대간 북쪽 구간을 연결할 수 있었던 상상력이나 힘도, 산을 걸으면서 습득한 경험과 지구력 덕분이었다.
내 시는 내가 걸어온 산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시의 원동력에는 '호기심'이 있다. 궁금하면 찾아가서 보고 듣고 만지고 기록하여 돌아온다. 궁금증이 큰 곳일수록 그만큼 이야기도 많았다. 저 큰 산 뒤에 가려져 있는 산봉우리는 어떻게 생겼을까? 저 산봉우리 아래의 골짜기들은 어디 어디로 향할까? 끝없는 호기심의 인도를 받으며 무수한 산을 넘고, 오르내렸던 것이다. '북한 쪽 백두대간, 지도 위에서 걷는다'를 쓰는 중에도, 그 너머의 땅이 궁금하여, 여러 번 바다를 건넜고, 여러 편의 르포도 썼다. 우리 산을 걸으면서 산문 쓰는 일도 몇 년 째 계속해오고 있다. 시인이 되었으면 시에만 매달려야하는데, 나는 시보다 많은 산문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시의 백두대간을 향하여 떠날 때가 되었다. '새로 쓰는 나의 연보'는 모름지기 시를 주인으로 삼는 내용이어야 한다. 이 희망 이 약속을 실천하기 위하여 좀 더 노력할 것이다. 보행자의 '느림'을 즐기며, 生의 종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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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評>, 200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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