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5 : [시안/편지], 내가 그렸으나 걸어보지 못한 길이 있으니

◎ 2001/7/26(목) 20:47 (MSIE5.0,Windows98) 211.104.141.80 1024x768

[시안/편지], 내가 그렸으나 걸어보지 못한 길이 있으니

《시인의 편지》--북녘 백두대간에게

내가 그렸으나 걸어보지 못한 길이 있으니

이 향 지

내가 그렸으나 걸어보지 못한 길이 있으니―. 백두대간 북녘 구간이여! 너를 생각하면 내 허리가 아프다. 멀쩡하던 허리가 철조망을 조이는 듯 아파, 먹던 밥숟갈도 놓게 된다. 이 무슨 업이며 고약한 인연이냐.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지 않으냐. 엊저녁에 먹다 남은 된장찌개 뚝배기 안에 콩나물 한 줌 씻어서 얹고, 한소끔 김을 올려 참기름 한 방울 두르고, 밥 한 덩이 비벼서 아아 맛나구나 한 숟갈 떠먹고, 두 숟갈 째 뜨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네 생각이 끼어 들었다. 동시에 내 허리가 철조망을 둘러치는 듯 아파, 뚝배기고 비빔밥이고 팽개치고 누울 자리 찾아서 뛰지 않았느냐. 말이 뛰었다지 어디 뛸 수나 있는 형편이냐. 너도 알다시피 다리뼈가 부러져서 석 달 째 절름거리고 있는 내가 아니냐.
오늘 아침 그 통증을 너의 병문안으로 받아들이마. 너는 항상 그런 식으로 네 존재를 알려왔으니까. 너의 긴 허리를 조이고 있는 겹겹의 철조망 생각하면 얼마나 아플까 싶어서 야박하게 내칠 수가 없으니까. 철조망 둘러서 갈라놓은 국토의 허리, 그 남쪽 구간이야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찾아가서 걸으며 만날 수 있다만, 그 이북 구간은 50년 넘게 만날 수가 없으니, 철조망 이북 네 쪽에서 보면 나 사는 이남 쪽이 또한 그러할 것이니, 네가 그런 식으로 내 몸을 빌어 반신불수의 네 아픔을 알리려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내가 어찌 너의 문안을 몰라라 내칠 수가 있겠느냐. 그러나, 이 무슨 업이며 고약한 인연이냐. 남북한 인구를 합하면 7천만이 넘는다는데, 너는 왜 유독 내 몸에만 들어와서, 나 좀 써라 내 아픔 좀 알려라 괴롭히며 보채며 들들 볶는 것이냐. 사람 일생은 길어야 70∼80년이다. 너는 수 천만 년은 되었을 것인데, 어리석고 짧은 인간들이 네 편 내 쪽 가르고 둘러친 철조망 하나도 스스로 못 끊어서, 내 허리를 빌려 네 아픔 드러낸다는 말이냐.
묻자. 네가 나의 모자냐? 내 큰 머리통에 꼭 맞는 단 하나뿐인 모자냐? 햇빛 속에 맨 머리 나부끼며 숱한 산등성이 걸어서 넘어온 나. 나처럼 작고 늙은 여자가 2년, 3년, 무릎꿇고 길고 우람한 너를 써줬으면 되었지, 무엇을 더 써달라는 말이냐. 이제 나도 너에게로만 향하는 일편단심 접고 남들처럼 즐거운 것 좀 써보고 싶다. 발랄한 햇볕과 바람 만나며 즐거운 것 좀 써보고 싶다. 생각 좀 해봐라. 너만을 그리며 쓰고있던 세월을. 내 조그만 몸이 지도와 자료에만 파묻혀 어느 귀퉁에서든 보이기나 했더냐. 그 오래고 곰팡내 나는 자료들을 뒤져, 뒤죽박죽이 된 역사의 북새통 속에서, 한 줄기 실오라기 같은 너를 건져서 간신히 백두산까지 이어놓았다. 그러고 나니, 내 육신이 와르르 무너져 제대로 일어설 수도 걸을 수도 없었다. 너도 내 생각 좀 해봐라. 올 5월 초, 내가 북한산에서 다리뼈 부러진 것도 따지고 보면 네 탓 아닌가. 내가 몇 년을 어두 침침한 방안에 쭈그리고 앉아 일편단심 너만을 그리고 썼으니, 운동을 못해서, 햇볕을 못 쬐어서, 먹는 족족 살로 가서, 체중이 10kg나 불어서, 다리와 심장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발길 가로막는 나무뿌리 하나도 가뿐하게 넘질 못해서, 요 모양 요 꼴이 되질 않았느냐. 아느냐? 그때도 내 맘은 제비처럼 날고 있었다. 네가 정말로 나를 생각한다면, 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두지는 말았어야지. 나를 너 쓰는 도구로만 치부하지 말고, 너를 쓴 만큼 너를 밟고 걷게 해주었어야지. 내가 그린 길을 따라 너의 이목구비 구경하고 어루만지며 백두산까지 걷게 해 주었어야지.
때는 여름. 90년만의 가뭄과 37년만의 폭우가 거쳐간 여름. 며칠째 숨 몰아쉬게 더워, 집 가진 사람들 너도나도 집을 비우고 바다로 계곡으로 피서를 가는데, 나는 또 다시 너를 붙들고, 슬픈 농이나 걸고 있구나.

백두대간 북녘 구간이여. 너는 나의 길이다. 걸어온 길이 아니라 걸어가야 할 길이다. 너는 나의 미래다. 머지 않은 미래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만남. 너는 꿈. 내 꿈의 상반신―. 너와 나의 만남 되새겨보자. 나는 반세기 가까이 너 같은 것 몰랐다. 너 같은 것 몰라도 잘 살고 있었다. 나 여덟 살 때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남북이 나뉘었어도, 내 인생은 그다지 잃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나 마흔 일곱 살 때 처음으로 백두산 갈 일이 생겼다. 그 여행은 내게 구름 가득한 호수 하나를 안겨주었다. 내가 정작 올라야할 봉우리와 능선은 그 호수 건너에 구름 속에 있었다. 그 호수 복판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있어서, 그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내 마음에도 건널 수 없는 선 하나가 그어졌다. 나는 때때로 그 선이 내 가슴 안에서 핑핑 소리내어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일년 가까이 지내고 있을 때, 문득 한 생각이 찾아왔다. 그 선을 넘지 않고 그 봉우리에 오르는 길. 지리산 천왕봉에서 출발하여 분수령 마루금만 타고 5,257리를 걸어가면 만나는 봉우리. 그 두 봉우리 사이의 길. 백두대간(白頭大幹)이었다. 바로 너였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백두산 장군봉까지 작은 개울 하나도 건너지 않고 이어지는 길. 도상거리 1,577km. 나는 그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그 길은 철조망을 허리에 두른 반신불수의 길임을 알았다. 분단 국토의 상징처럼 백두대간에도 철조망이 둘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 북쪽은 어떻게 갈 것인가. 지금 내 처지로는 다른 길이 없어, 지도 위에서나마 그 상반신을 찾아서 이어주기로 하였다.
그 일을 위해 더 먼저 한 일은 우리 땅의 산계(山系)와 수계(水系)를 족보식으로 가름하여 놓은 산경표(山經表)를 이해하는 길이었고, 그 다음 한 일은 그 산경표에서 가름한 산줄기를 현대지도와 비교하며 직접 답사해보는 것이었다. 소수의 사람들이 절반의 백두대간을 향해 곧장 뛰어들고 있을 때, 나는 오랫동안 산길을 함께 걸어온 산우들과 1대간(大幹·白頭大幹)·1정간(正幹·長白正幹)·13정맥(正脈·청북정맥·청남정맥·해서정맥·임진북예성남정맥·한북정맥·한남정맥·한남금북정맥·금북정맥·금남정맥·금남금북정맥·호남정맥·낙동정맥·낙남? ㅈ?중 휴전선 이남에 있는 9정맥의 답사부터 시작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 땅을 속속들이 아는 데 필요한 가장 가까운 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고, 그렇게 한 것이 주효했음을 긴 답사를 통해 확인하였다. 가장 첫 번째 대상은 백두대간처럼 남북으로 분단되어있는 한북정맥(漢北正脈) 답사였다. 한북정맥이란 한자가 지시하는 그대로 한강 수계 중 강의 북쪽에서 흘러드는 물줄기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강원도 철원의 수피령에서부터 경기도 파주의 장명산까지를 한달에 두 번정도 주말마다 끊어서 타는 사이에 일년 이 흘렀다. 그 다음은 한강 수계를 강의 남쪽에서 가르는 분수령 한남정맥(漢南正脈), 그 다음은 속리산 정상까지 한남정맥을 연장시키는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그 다음은 금강 수계 중 북쪽에서 흘러드는 물줄기를 가르는 금북정맥(錦北正脈)…. 이런 식으로 호남정맥의 들머리까지 이어갔다. 그 사이에 세월은 5∼6년이 흘러갔고, 그 사이에 백두대간은 '신작로'라고 불릴만큼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백두대간으로 곧장 달려갔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완주기를 발표했다. 그것은 익기도 전에 떨어진 낙과와도 같았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완주가 아니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백두산 장군봉까지 분수령 마루금을 따라 이어지는 백두대간, 그 긴 길을 생각할 때,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약 640km를 걸어온 사람들이 발표하는 완주기는 실상 반주도 못되는 것이었다. 나는 5∼6년을 계속해온 정맥 종주, 그 나머지 구간들을 잠시 접어두고, 남쪽 사람들이 더 이상 진입할 수 없는, 진부령 이북 구간을 초등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구간은 실제로 걸을 수 없는 곳이니, 지도 위에서나마 그 구간을 그려 가상산행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가까이 있으나, 갈 수 없는 땅. 체제와 이념이 달라 자칫하면 필화(筆禍)를 부를 수 있는 부담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시작했고 마무리지었다. 우선 자료부터 모았다. 북한에 대한 것이면 인문·자연·민속·역사·지리 등, 가리지 않고, 있는 곳을 찾아 뛰었다. 국토와 산맥에 관한 글이며 지도며 고문헌들을 보이는 대로 구입해들였다. 말이 그렇지 어느 누구의 지원도 없이 나 혼자 이일에 매달린다는 것은 너무도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가까운 사람들이, 절반의 성공에 주저앉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절반의 백두대간을 전체인양 오해하는 일을 나 몰라라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내 몸을 내 나머지 날들을 그 일에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연재를 맡고있던, 월간 《山》이 지면을 제공하였다. 매달, 매달, 적당한 구간을 끊어 연결종주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러시아와 북한이 합작하여 만든 군사지도를 기본도로 삼아 개념도를 그리고, 총독부시절에 제작한 한국근세지도를 대조하며 지명을 넣고, 통일부 등을 통해 구한 자료들을 대조하여 현재의 지명과 행정구역을 표시했다. 말이 쉽지. 그 일은 눈이 빠지고 다리가 마비되는 고통이 수반하는 일이었다. 동쪽 바다에 바짝 붙어서 지나가는 산맥을 쓰면서, 그 산맥의 어느 지점에서 분기하는 지능선을 따라 서해안까지 추적해가는 작업이 병행해야하는 일이었다.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고문헌들이 안고 있는 오류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과학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시대의 열매들이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고쳐놓을 수 있는 오류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도 보았다. 그런 것이 눈에 띌 때마다 수정해나갔다. 그리고, 수필형식의 본문을 썼다. 남과 북이 공감하되 양쪽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지 않는 소재를 골라야했기에, 나의 뿌리까지 하얗게 표백되어 드러나는 작업이었다.
맨 몸으로 터널을 뚫는 것과 같이 막막하고 힘든 일을 일년 이상 계속하였을 때, 화산재가 쌓여서 이루어진 고원지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내 경험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형들이었다. 내 글에게 현장답사를 시키기 위해 한 해에 백두산을 세 번 찾아갔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압록강 끝에서 두만강 끝까지 국경을 따라 달리거나 걸으며, 강 건너 우리 땅을 건너다보며 그 시점 현장 상황들을 르포 형식으로 전하는 일을 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졸저《북한 쪽 백두대간, 지도 위에서 걷는다》는 한 권의 단행본으로 올 봄에야 완성을 보았다.

백두대간 북녘 구간이여. 내가 너를 처음 찾아가던 날 되새겨보자. 1998년 봄이었다. 그 날은 부지깽이를 흙에 꽂아도 새 뿌리를 내리고 잎이 난다는 식목일이었다. 진부령 아래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새벽에 일어나 지나가는 차에 올랐다. 진부령에서 향로봉으로 오르는 길은, 절반은 눈, 절반은 진창이었다. 눈이 수북 쌓인 산에 빗방울이 내리고 있었다. 향로봉 정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았다. 금강산이 보였다. 금강산에서 향로봉으로 뻗어오는 산줄기. 그것이 백두대간인 줄 알고는 있었다만, 수많은 산줄기 중에서 어느 것이 그것인지 구분하기란 막막하였다. 그러나, 눈 속에 발을 깊이 빠트리고 서서,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는 사이에 내 눈은 드디어 그 산줄기를 알아보았다. 아아, 저기 내가 걸어 가야할 길이 있구나. 그 날은 그렇게 눈도장만 찍고 내려왔다. 그리고 그 두 달 뒤부터 지도 위를 걸어서 그 길을 모두 지나갔다. 그리고 그 해 가을이 끝나갈 무렵, 향로봉에서 바라보던 금강산을 찾아가게 되었다. 장전만에 도착해서도, 세존봉 기슭을 걸으면서도, 천선대를 오르면서도, 해금강을 헤매면서도, 나는 금강산 주릉을 통과하는 백두대간 너에게만 몸과 마음이 쏠려 있었다. 그때 나는 마침 내 글은 삼방협곡 부근을 지나가고 있었다. 옛 경원선 철로 옆을 빙빙 돌아가는 분수령에서 숱한 기적소리 들었던 때다. 그때 나는 다리가 아니라 가슴이 무척 아팠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땅이 내 몸을 빌어 자신의 아픔을 알리고 싶어한 다는 걸 그때 알았던 거다.
백두대간 북녘 구간이여! 그러나 네가 정말 나를 불렀느냐? 내가 너를 끌어안고 살아온 것처럼 너도 나에게 하였느냐? 하긴 너는 아직 네 진짜 이름도 모를 것이다. 지금 네가 속한 북한에서는 너를 백두산줄기로 부른다. 그러나 그 이름도 회양 부근에서만 드러나 있으므로, 백두대간을 알고 지은 이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명명한 '태백산맥'이란 이름을 멀리 내친 것만 해도 얼마나 통쾌한 일이냐. 네 진짜 이름은 백두대간이다. 짤막짤막한 산맥이 아니라, 너는 우리 땅의 길고 긴 등뼈에 해당된다. 나는 너에게 네 진짜 이름을 찾아주고 싶었다. 너로 인하여 갈리는 동해와 서해 물, 너로 인하여 그 존재를 확연히 드러내는 우리 땅의 10대강(압록강·두만강·청천강·대동강·예성강·임진강·한강·금강·섬진강·낙동강)을, 그 강줄기에 배산임수(背山臨水)의 삶터를 펼치고 이어온 팔도인정을 낱낱이 그려서 드러내고 싶었다. 휴전선 이남 구간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다녀갔고, 다녀가고 있는 중이고, 수많은 글들이 발표되었으니, 나는 그 이북 잠잠하게 묻혀있는 구간과 그 그늘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들추어 밝혀주는 데에만 주력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 일은 끝이 났다. 내 생애에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 중, 가장 큰 가지 하나를 잘라내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나의 자랑으로 삼기 위해 하지는 않았다. 가만히 흙 속에 묻어두어, 다음에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의 길라잡이가 되면 족한 것이다.
이제는 걷게 해다오. 이 오랜 절름발이를 벗어 던지고, 훨훨 날개 달고 걷게 해다오.
먼 우주, 다른 별에 존재하는 길도 아니고, 말과 글이 낯선 땅을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음식과 토양이 달라 풍토병이 염려되는 곳도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아니건만, 백두대간이여 너의 상반신을 밟고 백두산으로 가는 길은 오늘도 닫혀있다. 너는 알까? 평지에서 절벽을 보는 이 마음을.
오라고, 가라고, 오며 가며 만나箚?생긴 것이 길 아니냐. 그렇게 생긴 길 지워지지 않게 오가는 것이 사람 사는 재미며 이유 아니냐. 백두대간 너 또한 그러한 길이며, 더욱 그러하여야 한다는 것을. 내 손과 머리를 빌어 쓰게 하지 않았느냐. 무기를 앞세우고 가자는 것도 아니고, 풍물패를 매달고 시끌벅적 지나가자는 것도 아니다. 나 먹을 것 나 입을 것 나 덮을 것 내가 지고, 백두산까지만 걸어가게 해달라는 것이다. 네 길고 우람한 어깨 위에 일개미 한 마리 올려놓듯이 나를 올려 놓아다오. 사람을 넘어 사람에게로 가자는 것도 아니고, 돌과 나무를 만나며 백두산까지만 가자는 것이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눈이 내리거나 어둠이 짙거나 뙤약볕이 따갑거나, 피하지 않고, 건너뛰지 않고, 백두산까지만 가자는 것이다. 백두산과 지리산을 한 줄기로 이으며, 예전처럼 오가며 살아보자는 것이다.
길이 길이기를 망각하고 거부할 때, 사람은 아픔을 겪는다.
돌이나 나무를 꺾거나 돌려놓자는 것도 아니다. 지나가는 고갯마루마다 거친 말뚝 세워 세 치 이름 드러내자는 짓도 아니다. 해 아래 걷고 별 아래 잠들며, 백두산을 만날 때까지만 걷게만 해달라는 것이다. 나 태어난 땅의 등줄기 어디가 어떻게 드러났고 어디가 어떻게 굽었는지, 내 눈 내 발 내 손 내 귀로, 보고 듣고 만지고 밟고 느끼고 안으며 백두산까지만 걸어가 보자는 것이다. 백두산 천지 물이 눈 아래 펼쳐지는 장군봉 꼭대기까지, 일년 이년을 바치느라, 내 명줄이 그만큼 줄어들어도 기꺼이, 기꺼이, 걸어가 보자는 것이다. 신발이 닳고 무릎이 꺾이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뭇잎에 바람 지나듯, 백두산까지만 걸어가 보자는 것이다. 너는 알까 평지에서 절벽을 보는 이 마음을!
너도 알 것이다. 내가 왜 그 길을 굳이 가야하는지를.
지도에 지도를 이어 붙이며 내가 마침내 백두산 정상에 섰을 때, 나는 말하였었다. “백두대간의 허리를 조이고 있는 철조망이 걷힐 때까지, 나는 이 산정에 있겠다!”라고. 나는 나를 데리러 가야한다. 나는 그렇게 세워두고 온 나를 영영 잊어버리게 될까봐 지난해 겨울에도 백두산엘 갔었다. 그러나, 나를 세워둔 그 산정에는 이를 수가 없어 얼어붙은 호수 건너에서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제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곳은 겨울이 길고 봄이 짧은 곳. 90년만의 가뭄과 37년만의 폭우를 아무도 없는 산정에서 혼자 겪었을 나를 생각해보아라.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 길을 나 혼자 걸어갔던 것일까?

백두대간은 한 줄기, 백두대간이 희망이다!

*<시안> 2001년 가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