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4 : [출판저널/에세이], 책 고프던 아이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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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저널/에세이], 책 고프던 아이를 생각하며

책이 있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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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고프던 아이를 생각하며

이 향 지 (시인)

책이 참 흔하다. 흔한만큼 대접도 예전만 못한 것 같다.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책이, 내 앞에도 성(城)처럼 쌓여있으니 말이다. 남의 책을 빌려다, 종이와 글자를 뜯어먹을 듯이 읽던 날들을 생각하면, 책에게 미안해진다. 책 한 권마다에 깃들어있는, 지은 이와 만든 이들의 혼신을 다한 정성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나는 책 고픈 시절을 살았다. 나는 책 고픈 아이였다. 한 해 두 해가 아니라 20여 년을 책 고픈 헝그리로 자랐다. 글자를 깨우치게 되자 많은 책을 읽고 싶었지만, 내가 태어난 때는 식민지 말기. 교과서 아닌 내 책을 가져보고 싶었지만, 내가 한창 자라던 때는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1950년대 전후. 몸이 자라고 질문이 늘어갈수록 새로운 책들이 필요했지만, 절대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호기심과 감수성이 가장 왕성하던 10대, 20대를, 나는 책 고픈 아이로 살고, 자라야했던 것이다.
책은 언제나 밥 다음이었다. 학비 다음이었다. 교과서 다음이었다. 교복 다음이었다. 참고서 다음이었다. 학용품 다음이었다. 학비, 교과서, 교복, 참고서, 학용품 값도 제 때에 충당하지 못할 만큼 어렵던 시절. 그밖의 것들을 꿈꾼다는 것은 일종의 죄였다. 나뿐만 아니라 내 또래 모두가 그렇게 자랐을 것이다. 학교 도서관의 장서들도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국가도 국민도 전쟁 후유증과 기아의 모면에 온힘을 쏟고 있을 때. 내가 정말로 읽고 싶은 책들은 구경조차 해보지 못한 목록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책읽기가 계속 되었다. 어디선가 책이 한 권 생기면 모두가 엎어져서 돌려읽었다. 누군가 책 한 권을 학교에 가지고 오면, 누구는 몇 교시까지, 누구는 몇 교시까지 순서가 정해져 있어서, 수업 시간에 책상 밑에 숨겨놓고 읽다가 들켜서 벌서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도 그런 일로 벌을 몇 번 섰다. 공부 안하고 소설책 읽다 벌을 몇 번 섰다. 그런 날 선생님은 뒤통수에 눈이라도 붙은 것처럼, 잡아 일으키셨다. 야속한 선생님! 나도 그렇게 들켜서 벌을 몇 번 섰다. 교실 문밖에 손들고 꿇어앉아 있거나, 화장실 청소를 하는 벌이었다. 읽는 사람 혼자만 서는 벌이 아니라 책 주인과 함께 서는 벌이어서, 나란히 손들고 꿇어앉아서 듣는 "너 담엔 책 안 빌려준다"는 핀잔이 더 큰 벌이었다.
운 좋게 집으로 갖고 올 수 있는 날은 밤을 새워 읽었다. 누구는 무슨 요일까지 누구는 며칠까지 순서가 정해져 있었기에, 어렵게 빌린 책을 다 읽지 못하고 돌려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기 사정이 좋지 않던 때였다. 삼십 촉 알전구 불빛도 초저녁에만 잠깐 구경할 수 있던 때였다. 나는 토막 초를 보이는 대로 주워 모았다 책 읽는데 썼다. 달빛에 읽거나 반딧불이를 모아서 책을 읽었다는 고사들을 떠올렸지만, 그때의 책들은 붓으로 먹물 찍어 큼직큼직하게 썼던 글자들의 모음 아닌가. 작은 활자로 촘촘하게 찍어낸 신식 책을 호롱불이나 촛불아래서 장시간 읽는 다는 것은 피로와 위험과 잔소리가 함께 하는 일이기도 했다. "불낼라!" "초 아껴라!" "아직도 안자나?" 이것은 내가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잔소리였다. 대청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듣는 안방문 소리. 그 부드럽게 열리는 미닫이 소리에도 쫑긋 세워서 붙여놓은 귀는, 부리나케 촛불을 불어 끄곤 했다. 껐다가, 들어가시는 소리가 나면 다시 켜곤 했는데, 촛불도 호롱불도 껐다 켤 때마다 냄새가 났고, 고요한 밤에 성냥 긋는 소리는 아무리 조심해도 감출 재간이 없었다. 아시면서도 모르는 척 눈감아주신 아버지.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밥상 앞에서 들키고 마는 촛불 퍼머넨트. 작은 바람에도 펄럭거리는 촛불에 지지직 타 들어간 앞 머리카락. 그 화상(?)까지는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읽는 책들. 얻어 읽고 빌려 읽고 숨어 읽는 책들이 제대로 읽힐 리가 있었겠는가. 그런 류의 헝그리 독서는 내 책을 갖고싶다는 갈망을 더욱 부추겼다. 그러다 드디어 내 책을 두 권 갖게 되었는데, 중3때던가, 고1때던가, 학용품 값을 조금 더 부풀려 받아서 산, 소월 시집 《초혼》과 하이네 시집이 그것이었다. 두 책 중 《초혼》을 특히 좋아해서 어떤 날은 가슴에 품고 자기도 했다. 내 시가 갖고있는 음악성은 그때 소월과 깊이 친하면서 전염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초혼>은 술술 외운다.
그 전까지 내가 접할 수 있었던 시들은 교과서에 실린 시.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소개해주시는 시. 친구들이 어디선가 베껴온 시를 다시 베낀 것. 그런 정도가 전부였다. 나는 그런 시들을 노트를 따로 만들어 필사해서 읽었다. 종이에 베껴 써서, 벽에 붙여놓고 외웠다. 그러다 내 책이 생겼으니, 누웠을 때 잘 보이는 벽에는 <초혼>, 앉았을 때 잘 보이는 벽에는 <산유화>…. 이런 식으로 써 붙여놓고 눈맞추며 외웠다. 지금 흔하디 흔하고 팔리지 않는 시집들을 생각하면, 그때 나의 시와 시집 읽기는 얼마나 뜨거운 행위였던가.
나는 이제 책 부자다. 그때에 비하면 그렇다. 내 글을 쓰는데 필요한 자료들은 도서관에 가지 않아도 될 만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책들이 자주 필요하다. 내 책을 내기도 한다. 아는 이들이 저서를 부쳐오기도 한다. 빼놓지 않고 읽는 잡지들도 여러 가지다. 나의 책 성(城)은 날마다 높이와 부피를 더해간다. 그러나, 나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읽는 일보다 쓰는 일에 더 매달리는 날들이 더 많다. 이러다 내 글에서 텅텅 빈 깡통 소리만 날지 모른다. 초조할 때도 있지만, 그토록 소원하던 책들이 내 둘레에 성곽을 이루고 있으니, 나는 먹지 않아도 배부른 부자처럼 포만감을 느낀다. 아이들은 자라서 곁을 떠났지만, 책들은 성을 쌓고 내 곁을 지켜준다.
그들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책은 아버지가 주신 것 들이다. 희귀본들은 아니지만, 실로 묶은 고서들이다. 나는 그것들을 실이 끊어지거나 책장이 떨어지기라도 할세라 벌벌 떨며 아낀다. 출장 길에 내가 좋아 할만한 책이 보이면 사다주신 것이다. 그 어려운 시절. 그 책들을 나에게 사다 주시기 위해 아버지는 점심을 굶으셨을 지도 모른다. 나의 그 끝없이 곯고 있는 책 배를 조금이라도 채워주시려고, 빠듯한 여비 한쪽을 도려내셨을 것이다. 나는 그 책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느끼고, 내가 밤새워 책 읽는 밤이면 대청 건너 방에서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없었을 아버지의 걱정을 떠올리고, 한없이 포근해진다.
이제 책은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책을 낸다. 많고 흔한만큼 좋은 책을 가려 읽기가 쉽지 않다. 신문 지상에서 가장 흔히 보는 것도 책 광고다. 예전에 약 광고가 판을 칠 때는 사람들이 약을 남용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제 책을 남용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좋은 것을 좋다고 널리 알리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정말 좋은 책, 유익한 책들이 광고를 많이 하는 책들에 밀려 그늘로 가라앉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신문에서 띄워주고 광고를 많이 하는 책들이 양서로 인식되는 사례는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어떠한 저울과 잣대로 그것을 재고 바로잡고 막을 수 있을까. 책들의 운명이 그 예전 토막 촛불 앞의 내 앞 머리카락 같지 않은가.

*《출판저널》304호 '책이 있는 에세이'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