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3 : [에세이], 명태사람과 멧새소리

◎ 2001/5/28(월) 18:00 (MSIE5.0,Windows98) 211.218.205.137 1024x768

[에세이], 명태사람과 멧새소리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
백석의 「멧새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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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새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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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 / 백석의 〈멧새소리〉

명태 사람과 멧새소리

이 향 지

나는 지금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멧새소리〉를 듣는다. 병상에 누워서 듣는 〈멧새소리〉는 몸의 부자유를 더욱 일깨운다. 반신 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묶여서 듣던 〈멧새소리〉는, 더더욱 그러했다. 병실 창 밖엔 연두 잎이 만발하였는데, 백여 미터 저쪽에서 손짓하는 신록 숲이 피안처럼 멀다. 신록 끝엔 튀밥처럼 아카시아꽃이 널렸다. 코를 킁킁거리며 공기를 길게 들여 마셔도 비릿한 꽃향기까지는 닿지 못한다.
명태는 어떨까? 깊은 산중 외딴집 추녀 끝에서 고드름을 매달고 말라 가는 명태는 과연 어떨 것인가. 넓은 바다 속에서 헤엄치던 몸이 처마 끝에 수직으로 매달려 있다. 제 몸 씻어 내린 물이 꼬리 끝에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날. 알과 내장은 소금에 절여져 젓갈로 탈바꿈 중이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바다를 언제 떠났나. 어떤 탈것에 실려서 이 산골까지 왔나. 감지 못하는 눈동자 속으로 구름만 흘러간다. 박탈당한 자유. 끈을 놓아버린 생(生). 찢기고 토막 나서 먹힐 때까지, 처절한 순응이 있을 뿐이다.
꼬리 끝에 고드름을 길다랗게 매달고 말라 가는 명태나 몇 마리 지키며 낯선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은 또 어떨 것인가. 눈은 쌓이고, 길은 끊기고, 설은 다가오는데 주머니는 비었다. 돌아가야 할 집,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먼 곳에 있다. 곧추서서 걸어야 할 몸이 문턱에 걸려 길게 엎드려 있다. '門턱에 꽁꽁 얼어서 /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나무열매나 풀 씨들이 눈 속에 묻히자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온 작은 멧새들. 그 작은 것들의 자유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 작은 것들의 지저귐과 절대 비상에도 미치지 못하는 명태 사람의 부자유.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明太다'. 발목에 길다랗게 고드름이 달렸다.

같은 시도 읽는 사람의 장소와 처지에 따라서 이렇게 느낌이 달라진다. 그동안 나는 백석의 〈멧새소리〉를 읽을 때마다 50여 년 전의 덕장을 만나곤 했다. 이번엔 시 스스로가 나의 병상을 찾아와서, 다친 몸을 위로하고, 곁에 없는 사람들을 가깝게 느끼게 해준다.

열살 무렵이었다. 대구 떼를 가득 품은 한류가 내 고향 통영 근해까지 흘러들었다. 항구로 돌아오는 배마다 만선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요즘처럼 냉동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때도 아니다. 어판장엔 대구가 산처럼 쌓이고, 그만큼 값도 쌌을 것이다. 마당 넓은 집마다 대구를 말리느라 법석을 떨었는데, 부지런한 내 어머니가 그 황금의 때를 그냥 보낼 리 없었다. 우리 집 마당도 대구 덕장으로 변한 것이다.
아래채와 위채의 서까래마다 대못이 쿵쿵 박히고, 굵은 철사들이 거미줄처럼 마당 위를 덮었다. 곳곳에 보조 바지랑대를 세웠지만, 급조한 덕대. 젖은 대구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아기 키 만한 대구들이 빽빽하게 걸리자, 굵은 철사도 견디지 못하고 툭, 툭, 끊어졌다. 그때마다 새로운 못이 박히고, 끊어진 철사를 이어야했고, 흙 묻은 대구를 씻기느라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퍼 올려야 했다.
잔챙이고기도 자주 사 오지 않던 어머니가 아기 키 만한 대구들을 리어카로 몇 대씩 실어올 때, "옴마! 이 대구가 다 우리 꺼가?" 흥분하던 기쁨도 사흘이 가지 못해 시무룩한 불평으로 변하고 말았다. 화장실도 대문도 아래채에 있는 방들도 대구 그늘을 통과해야만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눈 높이까지 내려온 대구 꼬리들이 얼굴을 할퀴거나 뒤통수를 쳤고, 꼬리를 타고 끝도 없이 흘러내리는 진물에 옷마다 얼룩이 졌다. 마루에서 마당으로 내려서는 순간부터 키대로 곧추선 대구들의 집요한 검열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키 작은 내가 그러했으니, 키가 크신 아버지, 오빠, 언니들은 오죽했을 것인가.
식구들의 끊임없는 지청구를 들으며 대구들은 말라갔다. 느리게, 느리게, 말라갔다. 대구꼬리가 나뭇가지처럼 빳빳해졌을 때, 어머니는 드디어 덕대를 걷었다. 한 마리만 건드려도 떼를 지어 흔들리던 대구들. 버석버석 소리를 내던 묵직한 물결을 기억한다. 그 꼿꼿하고 비릿하고 우중충하던 겨울 구름 떼. 누구에게 얼마에 팔려갔는지, 그 일로 어머니가 얼마를 벌었는지, 그 돈으로 우리의 무엇이 얼마나 더 곤궁을 면했는지는 몰라도, 1950년대. 그 지독한 보리고개. 비록 통대구를 맛나게 먹지는 못했지만, 대구알젓과 장지젓은 온 식구가 물리도록 먹을 수 있었다.
그 덕장의 기억 속에는 내 귀에만 들리는 〈멧새소리〉가 깃들어 있다. 지금의 나보다 열살 쯤 젊으셨던 아버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의 읍장까지 지내셨으나, 수입 없이 지내는 날이 더 많으셨던 분. 곧추서서 마당을 덮은 대구 떼와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아야 했을, 그분 또한 명태 사람. '門턱에 꽁꽁 얼어서 /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려, 지금의 내가 듣는 〈멧새소리〉를 무수히 듣지 않으셨을까.

명태는 대구와 같은 족속이다. 나는 연중행사처럼 명태 덕장을 보러 다녔다. 겨울의 끝 무렵, 대관령 그늘 횡계리로 가면 송천 가에 벌여놓은 명태 덕장들을 볼 수 있는데, 눈이 쌓여 얼어붙은 개천가에서 덕대에 걸린 명태들을 바라보다가, 고루포기산을 오르곤 했다. 많고 많은 산중에 왜 그 무렵마다 그 산엘 가는지 나 자신조차 몰랐는데, 어릴 적 마당을 뒤덮었던 대구 덕장을 보러 가는 길이었음을 〈멧새소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시 한편이 주는 감동은 어디까지일까? 기억의 끝까지가 전부 아닐까? 인지하든 못하든 내 기억의 끝. 바닥 혹은 천장이라 불러도 좋을 어떤 끄트머리. 뒤집으면 가장 최초의 어떤 곳. 그곳에서의 상황. 가장 깊은 사랑이나 상처를 담고있는 한 때. 바로 그런 것을 흔들어 일깨워주는 시.
나는 백석의 〈멧새소리〉를 통하여, 까마득한 과거 속을 유영하였고, 현재의 내 처지를 적나라하게 만날 수 있었다. 〈멧새소리〉를 밀어보내며 외발로 일어서 본다. 바다를 벗어나기 전의 물고기. 최초의 물결이 꺼칠한 비늘을 에워싼다. 내 고통은 한시적인 것이다. 나는 다시 두 발로 일어서서 멧새들의 터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멧새소리〉를 남긴 백석(본명 백기행·1912∼1995)은 그동안의 추측과는 달리 83세까지 살았고, 사망 년도는 1995년이라 한다. 그가 농사를 지으며 말년을 보냈다는 량강도 삼수군은, '삼수갑산'으로 일컬어 온 오지 중의 오지다. 추측컨대, 백석 자신도 말년엔 이 시를 가장 좋아하지 않았을까?

<<문학사상/단행본, <나를 매혹시킨 한편의 시>, 제4권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