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5/2(수) 19:41 (MSIE5.0,Windows98) 61.74.118.146 1024x768 [에세이], 거품과 돌멩이   거품과 돌멩이 --노혜경의 시평을 읽고              이  향  지 시를 발표하는 행위는 남에게 자신의 시를 보이는 계기도 되지만, 스스로 자신의 시를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계기도 된다. 나는 후자 쪽에 더 의미를 두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시를 발표해왔다. 여기에 싣는 시 '잠깐의 쟁기질'은 <현대시학>에 발표했던 것이고, 아래에 있는 평은 노혜경 시인이 <정신과 표현>에 게재했던 것이다. 이 글 중 아래쪽에 있는 것이 <현대시학>에 발표할 당시의 원고이고, 위에 따로 정리해 놓은 것은 시평을 읽은 후, 오래오래 시간을 두고 수정한 것이다. 발표 당시의 원고와 노혜경 시인의 글을 연결해서 올려본다. 잠깐의 쟁기질 번쩍이는 보습을 어깨에 걸고 걸어오는 저 농부는 나와 언제 만났더라? 처음 보는 농부와 그의 보습에게 내 옥답의 쟁기질을 부탁했던가? 그 농부와 끝없는 들길을 걸어 미래의 들판으로 향해갔던가? 갓 태어난 올챙이들이 가냘픈 꼬리로 무거운 몸을 밀고 가는 무논 속으로 점령군처럼 진흙방울을 튀기며   지나가게 했던가? [-------------<전반부 생략>-------------- 번쩍이는 보습을 어깨에 걸고/걸어오는 저 농부는/나와 언제 만났더라?//처음 보는 농부와 그의 보습에게/내 옥답의 쟁기질을 부탁했던가?//처음 보는 농부와 끝없는 들길을 걸어/미래의 들판으로 걸어갔던가?//갓 태어난 올챙이들이/가냘픈 꼬리로 무거운 몸을 밀고 가는/무논 속으로//점령군처럼 진흙방울을 튀기며/지나가게 했던가?//그 농부도 보습도/나도 진흙투성이가 되어/벼이삭이 돋는 논두렁길에서 작별했던가?//개구리소리 사라진 들판에서/발목을 뒤덮은 진흙을 핥으며/소는 생각하네//그 잠깐의 쟁기질을 부탁한 게/정말 나였던가? --이향지, <잠깐의 쟁기질>, 현대시학 7월호 ....정찬일의 은유가 찰나적이고 무시간적인 의미의 발생을 다루고 있다면, 이향지의 이 시는 하나의 이미지가 어떻게 해서 의미의 계열을 구축해 내는가를 훨씬 능숙하게 보여준다. 농부와 나의 우연한 조우는 현실에 없는 어떤 시간과 공간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며, 나와 농부가 언제 만난 적이 있는가라는 의문은 "농부"라는 기호와 "언제"라는 기호의 조합에 의해 이미지들을 사방으로 뻗어가게 만든다. 말하자면 상상력의 자유로운 활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구사되는 이미지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서로 뻗치며 또한 유기적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잠깐 텍스트의 안쪽으로 들어가보자. 우선, "보습"은 "번쩍"인다. 쇠로 된 날의 번쩍임은 새것의 이미지를 물어들인다. 이 새것의 이미지는 "처음 보는"이라는 말에 의해 구체화되며, 한편 논 가는 도구인 "보습"은 "옥답의 쟁기질"이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연관된다. 이 시의 맨 처음 일어나는 행위인 '만남'은 그리하여 처음 보는 농부와의 만남이 우연한 조우가 아니라 "옥답"을 "쟁기질"하는 행위를 통해 "미래의 들판"을 가꾸기 위한 예정된 만남임을 암시한다. 만남과 헤어짐 사이에 "잠깐의 쟁기질"이 있다. 물이 가득찬 논인 내 옥답을 갈기 위한 만남이 우연일 수는 없는 것이다. 풍요와 다산의 여성적 이미지가 넘쳐흐른다. "갓 태어난 올챙이", "진흙투성이", "벼이삭 돋는" 길 등등의 이미지들이 달려가는 장소가 과연 어디일까를 생각해보자. 다만 이 시가 지니고 있는 결함은, 이미 상상의 공간 속에서 충분히 구축된 이미지들을 그 자체로 즐기지 않고 현실세계와 관련을 맺으려 한다는 데 있다. 세계와의 관련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관련맺음 때문에 풍부하게 뻗어나가던 이미지들이 현실원리에 입각하여 필요한 부분만 선택되고 나머지는 버려진다는 데 있다. 대개 우화, 또는 알레고리로 이용되는 이미지들의 운명이 그러한 바, '나'라고 하는 일견 모호해 보이지만 풍부한 외연을 지닌 기호가 '소'로 밝혀질 때, 또는 제한될 때, 앞부분에서 마음껏 펼쳐지던 상상력이 일종의 생태학적 우화시로 변질해 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전반부가 보여주는 이미지들의 능숙한 확장은, 이미 우리 시의 어떤 부분은 말 그 자체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을 알아채는 경지에 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다.   --------<이하 생략>-----------.] 나는 처음 이 시를 쓸 때, 마무리까지 온전히 해서 빈틈 없는 그림을 잡혀주는 것이 필자의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독자의 상상력이 뻗칠 수 있는 공간을 박탈해버렸던 것이다. 이 시평을 읽고  그것을 깨닫게 되었고, 뒷부분을 과감하게 잘라냄으로써, 배경을 공백으로, 아니 드넓은 상상의 공간으로 남겨두었다. 남의 시를 평할 때, 그 장점만을 취하여 무조건 띄어올리는 것과 적절한 지적으로 보완의 기회를 주는 것, 그 양자 중에 택하라면 나는 단연 후자 쪽이다. 그러나, 막상 내 시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하는 말을 들을 땐 좋지 않았다. 시간이 한 참 흐른 뒤, 거품과 돌멩이가 다 같이 소중함을 느낀 것이다.    시의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다. 되풀이 되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말을 만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또 그것을 적절히 채집하여 나의 것으로 붙잡아두기는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시가 아무 때나 쉽게 씌어지는 물건이라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내 깊은 안의 생각을 단칼에 재단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나머지 날들을 다 주고 바꾼대도 아깝지 않으리라.  거품은 가라앉고 돌멩이만 남았다. 거품이 씼어준 돌멩이. 거품을 벗고 일어선 돌멩이. 손에 꼭 쥐어본다. 단단한 것, 남은 것이 더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