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 : [畵評]서시환의 그림산행전에 부쳐

◎ 2001/4/9(월) 21:50 (MSIE5.0,Windows98) 211.218.205.158 1024x768

[畵評]서시환의 그림산행전에 부쳐

*[무등산 장불재] 그림/서시환 (화가)

1년 5개월을 동행하며 지켜본 서시환의 세계

이 향 지 (시인)

내가 서시환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어느 도예가의 거실에서 였다. '풀뿌리'라는 제목이 붙은 그 그림은 좁은 아파트의 한쪽 벽면을 압도할 만큼 넓은 화폭에, 피가 밴 것처럼 붉은 황토를 가득히 깔아놓은 것이었는데, 그 드넓은 화폭에는 초록빛 풀대궁들이 거친 붓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황토 위의 풀'들은 서너 포기에 불과했지만 한결같이 비틀거리는 모습이었고, 무참히 대궁이 잘린 채 초록빛 선혈을 뚝뚝 떨어뜨리거나, 어지럽게 흩어진 잎새들을 확대시켜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을 대하는 순간, 감탄하고 이해하기에 앞서 형언할 수 없는 저항을 느꼈다. 흙을 저렇게 곱게 그릴 수 있는 화가가, 저 풀들은 왜 저렇게 확대시켜 망나니의 낫날에 봉두난발이 된 풀밭의 형상으로 처리해야만 했는가? 그를 사로잡고 있는 관념의 색채가 너무 낯설고 강렬해서 내 감성은 그 화폭 속의 풀대궁처럼 비틀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황토밭의 한쪽 귀퉁이에서 어수선한 풀들이 뽑힌 자리가 우물처럼 깊게 패여 초록빛 풀물을 가득히 담고 흔들리는 것을 발견했고, 그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황토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젊은 화가의 순정과 저항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그림 속의 초록빛 우물은 내 안에서 옹이의 형태로 잠자고 있던 상처의 뇌관을 건드렸는데, 내가 감지할 수 있었던 결과는 상상의 허공에 화려한 불꽃놀이를 펼친 것이 아니라, 액체의 속성이 지향하는 '흐름' 더 나아가서는 '흘려보냄'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그 무렵 나는『월간 山』의 장수 프로그램인「그림산행」을 같이 꾸려갈 파트너를 찾고 있던 중이었고, 들불처럼 타오르는 의지와 자신 속에 내장된 본성을 캐려는 집요함을 겸비한 화가라면 아무리 멀고 험한 산길이라도 함께 걸어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또한 두 번째의 개인전을 끝내고 새로운 세계와의 접목을 꿈꾸고 있던 터여서, 우리들의 만남은 쉽게 이루어졌다.

우주를 흙과 물, 공기와 불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사람, 특히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예술가의 입장에서 보면 '혼'을 하나 더 추가시켜야 한다. 그는 나와 함께 산행을 하고 『山』을 그리면서도 집요하게 황토를 추적해 왔다. 그는 백설에 파묻힌 '한라산' 백록담 화구벽에도 불꽃같은 황토를 얹어놓고, 동쪽 바다 깊고 푸른 물 속에서 머리만 내밀고 있는 '독도'에도 황토를 몇 점 찍어놓고, 소백산 기슭에 만개한 새하얀 사과꽃 위에도 황토마을에 남기고 온 집을 황톳빛으로 그려서 얹어놓고, 변산반도 채석강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살갗에도 진하디 진한 황토를 입혀놓는다. 그는 또 한지에 콩테로 처리한 설악산의 '가야동 천왕문' 컴컴한 얼굴에도 황토수염을 달아놓고,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앉은 속리산 '석문'도 황토를 바탕으로 그려놓았다. 그가 그리는 모든 바위, 모든 나무, 모든 마을의 집, 모든 바닷가의 배와 그 배들이 드리우고있는 그늘, 산을 오가며 만났던 세월의 기념물들, 떠 오르는 해와 지는 해, 심지어는 꽁꽁 얼어붙은 설화와 시퍼런 파도에 이르기까지, 황토는 집요하게 그에게 붓을 들리고 화폭 속으로 침입한다. 그림 속에서 황토가 빠졌거나 잠재태로 남아 보이지 않을 경우, 'sh' 또는 'SH'로 표시하는 사인을 황톳빛으로 남긴다.
그를 이렇게 사로잡고 있는 '황토'는 무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가 잘 그리고 즐겨 다루는 집, 배, 바다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치고 고독한 영혼이 돌아가서 안기고 싶은 모성의 이미지. 그것은 바로 그의 고향의 흙빛이며, 어머니로 대변되는 모성의 이미지들에 다름 아니라고. 그가 그 붉은 황토의 실체를 자신의 그림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 계기는 '그녀를 만나는 방'에서 피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초기 작품이 생명이 가미되지 않은 황토일 뿐인 황톳빛을 보여주었다면, '그녀를 만나는 방' 이후의 작품들에서 채택한 황톳빛은 피가 돌고 생명이 꿈틀거리는 빛을 띄고 있다. 그 붉은 황토는 그의 그림을 소통 불가능의 관념화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러나 그 붉은 황토, 그 고향의 흙빛은 새로운 부담의 형태로 그의 영혼을 사로잡고 조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작품 '허물벗기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황토로부터 벗어났으나, 황토에서 한쪽 발을 뽑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 '허물벗기 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황토로부터 흘러내렸으나, 황토의 하단에 고여 흐르지 못하고 있는 액체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 액체는 '풀뿌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선명한 초록빛이다.
그는 초록을 황토 다음으로 즐겨 쓴다. 그 초록빛은 그가 황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견한 빛깔이다. 색환에서 빨강의 대칭에 놓이는 초록색. 그 빨강에 노랑을 조금 섞어 황톳빛으로 희석시켜 정곡을 비켜간 점이 다를 뿐이다. 속리산 '비로산장의 뜰'에서 하늘에 떠있는 물의 형태. 그날 우리가 종일 맞았던 그 맑은 빗방울에서도 그는 아무렇게나 흘러서 대지에 스미지 못하는 자신과 자신의 관념을 하늘에 떠있는 초록물의 형태로 작품의 중심에 삽입시켰던 거다. 벗어나고 싶으나 벗어날 수 없는 황토와, 흐르고 싶으나 흐를 수 없는 물 사이에 그는 머무르고 있다.
나는 얼마 전, 광주의 무등산을 취재하러 갔던 길에 그를 황토의 화가로 기억하게 한 배경을 만날 수 있었다. 한 지붕 아래서 하룻밤을 묵으며 그의 가족들을 만났고, 그의 오늘을 있게 한 분들의 희생과 깊은 사랑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자신을 향해 날 끝을 들이댈 수 있는 예술가를 사랑한다. 나는 그가 스스로를 겨냥한 날 끝에 찔려 피흘리며 추구하는 세계의 진실이 좀 더 열린 공간으로 시선을 돌리기를 희망한다.

월간지『山』은 이 땅의 산악인들이 읽고 사랑하고 키워온 책이다. 『山』은 열대 우림 속의 나무들처럼 나날이 키가 자라고 팽창하는 콘크리트 밀림에서 생활하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돌아가야 할 땅이다. 『山』에는 그곳으로 가는 길과,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모든 상황들이 계절을 따라 펼쳐진다. 『山』은 우리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이다. 그와 나는 1년 5개월 동안 초읽기에 몰리는 마감시간까지 글과 그림을 붙들고 다듬으며, 하나의 지면을 꾸려왔다. 우리의 능력이 우리를 끌고 온 게 아니라, 우리의 혼과 『山』이 나누어준 정기가 그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는 새로운 세계로의 도약을 꿈꾸는 자신의 희망에 따라 「그림산행」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山』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회를 연다고 한다. 완성을 향해 걸어가는 예술가의 길에는 종착역이 있을 수 없다. 그는 골고다의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그의 모습을 그림 속에서 보여주었다. 고통의 길을 즐겁게 갈 수 있는 길이 바로 그길이 아닐까? 이즈음의 그의 관심은 하늘 쪽으로 향하는 것 같다. 하늘의 빛깔은 바다 빛과 같은 것이다. 나는 그의 관심이 그가 추구해온 근원의 중심을 향해 한 걸음 더 깊이 다가가고 있는 것을 안다. 그의 새로운 도약에 갈채와 빛이 함께 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