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8/22(수)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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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학], 말과 감정의 깊이
말과 감정의 깊이
― 이향지의 시
여 태 천(시인)
1.
이향지 시인이 문단에 발을 들이고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으나 그녀가 시를 제 몸 속에 품어온 지는 훨씬 오래 전의 일이다. 그녀는 너무 늦게 온 시인이지만 그 감각은 늦음을 무색하리만큼 젊고, 그 언어는 멀리까지 나아가서도 살아있다. 그녀의 시가 담고 있는 내용과 시를 완성하는 언어에서 이 사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등단 이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시를 써온 이 시인 앞에 흔히 관행처럼 따라붙는 ‘산의 시인’이라는 꼬리표가 있다. 몇 해 전, 그녀는 이 땅의 산과 자연을 몸으로 체험하고 고통스럽게 기록한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이라는 산시집을 간행한 적이 있다. 그 이유만으로 ‘산의 시인’이 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녀의 시를 단 한편이라도 읽어본 이라면 그 말의 속뜻이 산에 대한 관념을 언어로 기록했다는 데 있지 않음을 짐작할 것이다.
확언하건대, 그녀는 자연과의 동일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자기위안의 안온한 시쓰기를 한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다. 그녀는 지금은 누구나 인정해버린 외면화된 자연과 삶을 과감하게 말의 안쪽으로 불러들이는 데 온몸을 바쳤다. 상징적 죽음과 삶은 그 과정에서 새로이 그 이름을 얻기도 했다. 그래서 종종 이향지의 시들은 상징과 우의로 읽힐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외면화된 친숙성을 그 근거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어의 순수한 의미작용에 해당하며, 보편적인 이해와 특수한 사례 사이의 유비적 일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직접적이다. 가령, 다음 시에서 결합과 분리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낳는 것은 비유로 사용된 ‘줄’이다.
줄에 묶인 즐거움
줄에 묶여서도 꼬리치는 메리를 두고
열매는 떴다, 줄에 묶인 메리도 따라서 뜨고
줄만 남은 마당
사과 놓고 대추 놓고 밤 놓고 감 놓고 배 놓고
좌포우혜 가려서 차릴 제사가 열 넷인데
너무 세게 팽개쳐진 줄은 늘어져서 꼼짝도 안 한다
걱정이 돼서 나무, 나무, 부르며 흔들어보면
흙에 내린 발을 조금 당겨보다 다시 늘어진다
열매는 왜 뜰까
송곳니 빠진 아래턱처럼 가문의 남자들 모여
유세차 음복하고 이웃에 비빔밥을 돌릴 때
반의 반쪽이라도 단 열매를 끼워서 맛보이는데
자다가 일어나 깨무는 후식에 떫은 씨앗이 박혀
퉤퉤 뱉을 때 가문도 함께 뱉어졌다
― 「열매는 왜 뜰까」 부분
‘열매는 왜 뜰까’라는 상징적인 질문을 제목으로 취하고 있는 이 시는 그 상징과 무관하지 않은 객관적 질서로서의 현실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줄’이 지니고 있는 결합과 분리의 이중적 의미는 말의 바깥에 대한 이해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줄’은 그것을 사이에 두고 있는 두 대상의 긴장을 그대로 담고 있다. ‘줄’이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면 헛될망정 그것은 ‘즐거움’일 수 있겠다. 그러나 “줄에 묶인 즐거움”은 이 헛된 욕망의 즐거움이 아니다. 이 ‘줄’을 두고 ‘열매’와 ‘메리’가 차례로 떴다. 그 목적지는 없고 다만 사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줄만 남은 마당”이라는 구절은 ‘줄’이 ‘나’를 중심으로 하는 대립적 관계의 상징을 넘어서는 다른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제사’를 통해 우리는 이 줄이 가문의 과거와 지금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무와 마당[가문]은 모두 ‘줄’의 바깥을 상징적으로 완성한다. 나무는 열매를 거느리고 마당[가문]은 그 안쪽[가족]을 감싼다. 그러나 이 포섭에 소외가 없을 수는 없다. 소외는 분리를 낳는다. 나무와 마당[가문] 안에서 주체는 대타자인 나무와 마당[가문]의 부름에 응하고, 그것의 질서를 내면화하는 가운데 하나의 주체로 태어난다. 예컨대, “유세차 음복하고 이웃에 비빔밥”을 돌리는 것이나 자다가 일어나 그 후식을 깨무는 것도 모두가 그 질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를 통해 주체는 나무와 마당[가문]의 중심에 있게 된다. 그러나 규범적 질서와 규칙을 내면화한 주체가 영원히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그 역시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곁가지 작은 열매들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 소외된 주체는 자신의 실존을 망각하거나(“퉤퉤 뱉을 때 가문도 함께 뱉어졌다”) 억압당하고 있는(“가지가 부러졌으니”) 주체다. ‘줄’은 이 예속화와 주체의 소외를 상징한다. 열매가 ‘뜨는’ 것은 이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과정, 즉 긍정적인 분리의 과정이다.
왜 뜰까, 자주 묻던 작은 열매까지
까치발 떠서 들여다보던 우물로 뛰어든 뒤에야
감나무 옆 우물을 하루 낮 밤 철철 넘치게 하던 해일
찝찔하게 물맛이 바뀐 깊은 우물 아래
먼 바다가 들고나는 수로가 새로 열린 걸 알았다
― 「열매는 왜 뜰까」 부분
묶여있는 개와 나무에 매달린 열매처럼 그 누구도 자의적으로 그 관계를 철회할 수 없다. 상징적으로 제시된 “열매는 왜 뜰까”라는 의문이 해소되는 지점은 ‘줄’이 우물과 바다로 들고 나는 ‘수로’의 이미지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시인의 관심 대상이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의 문제로 넓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줄’로 상징화되는 이 특별한 관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억압과 구속이 아니라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되고 반복되는 생의 영속성이다. 그것이 바로 “줄에 묶인 즐거움”이다. 하나의 열매가 ‘뜨는’ 것은 일회적 분리지만 그것은 전체 생명의 불멸을 완성한다. 때로 그 역할을 ‘씨앗’이 담당한다.
땅을 암만 짚어도 싹이 안 난다고
벌거숭이 씨앗 둘이 아스팔트에서 울고 있다
감싸주던 果肉을 한꺼번에 잃고
우리도 저렇게 울어본 적이 있지
서로를 부둥켜안을 만큼의 넝쿨만 돋아도
한 나무 무성하게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서로 밀어가며 힘껏 뒹굴어보라고
내가 뱉은 씨앗들은 또 어디어디서 저렇게 울고 있을까
약해지지 말자, 나는 지금 사과를 사러가는 길이다
눈이 내리도록 줄기에 붙어있어도
포도씨는 떫다, 두텁고 달콤한 果肉 속
사과씨 배씨도 떫다
떫어서 퉤퉤 뱉어주어야
멀리까지 튀어서
또 한 나무가 땅 짚고 일어서는 것
아무리 뒹굴어도 제 눈물밖에 짚을 곳 없는 씨앗은
새벽에 떠나는 큰 트럭을 탔다
― 「또 한 나무가 땅 짚고」 전문
짐작했겠지만 이 시 역시 생명의 불멸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감싸주던 果肉을 한꺼번에 잃고” “벌거숭이 씨앗”이 되어 울 때가 있다. 그 생의 마지막 순간에 느끼는 ‘씨앗’의 맛은 떫다. 그것이 떫은 이유는 모든 생의 고뇌와 고통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달콤한 果肉”과 ‘씨앗’의 떫음. 물리적인 사실을 우리는 매우 흔한 비유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시인은 그 떫음에서 달콤함으로 전환되는 미적 감각을 ‘씨앗’이 “또 한 나무가 땅을 짚고 일어서는 것”이라는 비약적인 상상을 통해 새롭게 제시한다. “서로 밀어가며 힘껏 뒹”구는 ‘씨앗’처럼 그녀의 시에서 새롭게 어떤 움직임의 주체가 되는 것은 과거의 우리이거나 지금의 우리이거나 미래의 우리다. 그러므로 시인은 아스팔트에서 울고 있는 “벌거숭이 씨앗”을 보고 “약해지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한다. 떫은 ‘씨앗’은 “퉤퉤 뱉어주어야” 한다. ‘씨앗’은 죽어서(“멀리까지 튀어서”) 다른 것을 살린다(“또 한 나무가 땅 짚고 일어서는 것”). 한 개체가 새로운 개체로 거듭나는 과정은 언제나 고통을 동반한다. “아무리 뒹굴어도 제 눈물밖에 짚을 곳 없”지만 그 고통의 말들이 너무 멀리 가지 않는 것은, 아니 멀리 갈 수 없는 것은 감정의 저 깊은 곳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기 때문이다.
2.
그녀의 시에서 딱딱하게 굳어있던 관념의 덩어리는 언제나 말들의 움직임에 의해 숨을 쉰다. 가령, 시집 내 눈앞의 전선에 수록된 「바다 밖에서의 목욕」은 잊고 있던 ‘나’의 몸이 샤워를 통해 구체적으로 감각되는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거꾸로 서서 신음하며 미로를 통과한 물. 머리에 계속 쏟아진다 내 머리에 계속 쏟아지는 물은 맑고 투명한 탯줄. 나는 투명한 탯줄 끝에 전신을 매달고 부글거리는 거품. 씻는다 나는 탯줄에 매달린 채 거품. 씻어주고 씻는 자.
― 「바다 밖에서의 목욕」(<내 눈앞의 전선>) 부분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와 탯줄은 서로 닮았다. ‘나’는 샤워기의 물줄기에 의해 원형적 모태인 바다에 연결된다. 이때 실제의 물줄기는 잊어버렸던 몸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지금 바다 밖[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바다 안[자궁]에서의 일이다. 실제의 목욕 장면에서 만져지는 육체는 태아가 처음으로 세상에 그 생명을 내미는 순간 느끼는 육체처럼 살아있다. 여기에서도 생명의 순환은 이어진다. 바다가 ‘나’를 품고 ‘나’는 다시 누군가를 잉태한다. 몸을 “씻어주고 씻는 자”로서의 여성의 정체성은 생명의 순환으로 그 의미가 확대된다. 시인은 몸의 감각을 그대로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바로 그 대목에서 그녀가 지닌 예민한 시적 감각이 빛난다. 같은 시집에 실린 시 「더그매」는 시인의 시적 사유를 몸의 감각으로 집약시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손 하나 대지 않고 내 행동과 사고를 지배한다. 그와 나 사이의 가로막 2밀리미터. 나는 그것을 몇 억 년의 시간을 압축시켜놓은 화석의 두께라고 생각한다.
― 「더그매」(<내 눈앞의 전선>) 부분
천장과 지붕의 중간지대인 ‘더그매’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빛과 어둠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기도 하지만 “행동과 사고를 지배”하기도 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는 그 공간은 끊임없이 ‘나’를 간섭하고 압박한다. 그러나 시는 여기에서 나온다. 의식이 모르는 수많은 사태들, 육체가 기억하는 모든 감각들이 모여 시가 만들어진다. 불편함이 시가 되고, 의식도 무의식도 아닌 중립적 에너지가 시를 만든다. 마치 그것은 고체도 액체도 기체도 아닌 플라즈마처럼 새로운 언어를 생산하고 특별한 순간마다 강렬한 빛을 발한다. 이향지의 시에서 종종 말랑말랑한 말들은 매우 직접적으로 제시되는데, 대체로 그 말들은 이 중립적 에너지의 변종인 경우가 많다. 그 말들은 시의 밖과 안을 서로 결합하는 동시에 분리하기도 하며, 언제나 시속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경계에 있다.
꽃이 뛴다
꽃을 넘어
고구마밭 말뚝을 뽑아 와야 한다
치마는 길고 꽃은 갈수록 키가 높아진다
꽃을 넘어 말뚝을 뽑아오면 바지를 사준다고
엄마는 안보이고 엄마말만 선반 위에 있었다
채송화는 넘었지만
봉선화도 넘었지만
말뚝 근처에 꽃 둑을 이룬 코스모스는 못 넘어
두 손으로 잡아 당겨 꽃줄기를 불끈 누르고
엉덩이를 반쯤 틀어서 오른 쪽 발을 넘기고
반쯤 더 틀어서 꽃 너머로 남은 발을 옮길 차롄데
꽁무니 들린 치마 속으로 코스모스가 와르르 들어와버려
떠들썩한 꽃 이파리 두 손으로 탁탁 쳐서 털어버리려다
누르고 있던 꽃줄기까지 한꺼번에 일어나버려
바람 부는 꽃 둑처럼 치마 속이 부풀어버려
어떡해 어떡해 못 넘은 꽃 둑을 짓이기며 다리 뻗고 앉아
파리 잡듯이 모기 잡듯이 치마 속 꽃잎을 뜯어내다가
말뚝까지 가기도 전에 밤이 와버려
무슨 일인가 궁금한 말뚝이 꽃 둑까지 찾아와버려
어떡해 어떡해 책방에 가던 길이었는데
선반 위 엄마 말을 너무 믿었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이 많은 꽃을 나 혼자 언제 다 살아
― 「치마 입고 꽃 넘기」 전문
‘꽃’을 넘어 말뚝을 뽑으러가는 이 시는 소녀의 성장 이야기다. 그러나 사춘기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임을 “꽃을 넘어 말뚝을 뽑아오면 바지를 사준다”는 엄마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짐작하듯이 ‘꽃’은 여성을 비유한다. 그러나 이 비유에는 어떤 간격이 있다. 시에서 호명되는 ‘꽃’과 그 계열체인 ‘채송화’와 ‘봉선화’는 여성에 대한 정서적 등가물이다. 그러나 화자는 익숙한 ‘채송화’와 ‘봉선화’를 넘어설 수 있지만 그가 쟁취해야 할 ‘말뚝’ 근처에서 둑을 이루고 있는 ‘코스모스’를 넘지 못한다. ‘코스모스’가 꽃이 지니는 또 다른 비밀의 장소라는 점에서 우리는 주체할 수 없는 다양한 여성성을 떠올리게 된다. 이 꽃을 뛰어 넘는 순간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대척의 자리에 ‘말뚝’과 ‘바지’가 있다. 이 둘을 이어주는 것이 ‘엄마’이고, 그녀를 대신하는 것이 ‘엄마의 말’이다. ‘꽃’[치마, 채송화, 봉선화, 코스모스]과 ‘말뚝’[바지], 그리고 ‘엄마’[엄마의 말]는 상징의 트라이앵글이다. 그 상징이 내포하는 단일한 의미는 자명하다. ‘엄마’는 딸의 편이 아니다. 모성 이미지는 어쩌면 자기위안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엄마의 말’은 권위만 있을 뿐이지 ‘꽃’과 ‘말뚝’을 이어주지 못한다.
그러나 화자는 “선반 위 엄마의 말을 너무 믿었”다. 그 믿음이 바깥의 시선에 의한 정체성의 확인이라면 그것과 관계없이 내면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치마가 길어지고 꽃의 키가 높아지며, 치마 속이 부풀어지고 치마 속 꽃잎을 뜯어내는 일련의 환상적 장면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 과정 중에도 정체성은 바깥의 시선에 의해 끊임없이 간섭을 받는다. 예컨대, “궁금한 말뚝이 꽃 둑까지 찾아와”버린다. ‘말뚝’은 그 흔한 남성적 권위를 대표하는 욕망의 대상이다. ‘말뚝’을 뽑음으로써 아름다움으로 비유되는 여성성을 벗어나 남성의 전유물인 ‘바지’를 입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아름다움 역시 남성이 만들었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 이 많은 꽃을 나 혼자 언제 다 살아”라는 화자의 말은 체념과 절망의 탄식이 아니다. 이 시는 한 소녀가 그의 생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여성의 정체성은 아직 충분히 재현된 적이 없다. 그것이 남성의 시각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성은 남성의 말에 의해 규정되었던 것이다. 여성의 정체성 문제에는 필연적으로 언어와 권력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시인은 우의적 수법을 통해 말이 가지는 권위에 대한 전복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제도와 관습 안에서 겪는 정체성에 대한 여성의 불편을 말했다. 이 시는 그래서 여성의 몸에 대한 아주 오래된, 그렇지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이야기다.
3.
이향지의 시는 자기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세상의 내력에 조응시키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내가 뻘 속에 주저앉아 진흙 꽃봉오리나 밀어내고 있을 동안
― 「낙관」(<내 눈앞의 전선>) 부분
이라고 화자가 발화하는 동안에 “연꽃 한 송이” “새 한 마리” “소나무 한 그루” “대나무 한 그루”는 암흑의 덩어리인 돌을 뚫고 생명의 몸으로 탄생한다. ‘낙관’을 통해 작품의 탄생 순간이 기록되듯이 시인은 자신의 삶을 언어로 기록한다. 시란 언어가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생명이다. 이 시 한 편만으로도 우리는 그녀의 언어가 얼마나 오래 자신의 감정들을 지그시 눌러 왔는가를 알 수 있다. 이번 신작시편에서 꽃게와 화자와의 대결구도를 재미있게 기술하고 있는 다음 시에서도 감정의 깊이는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꽃게여, 내 칼의 허기를 용서하라
그리고 너무 빤히 내 눈을 쳐다보지 마라
수긍하라, 너를 침몰시킨 것은 바로 너 자신이었다
― 「먹히기 전에」 부분
“수긍하라, 너를 침몰시킨 것은 바로 너 자신이었다”라는 진술은 어설픈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구절 앞에 시인은 “너무 빤히 내 눈을 쳐다보지 마라”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말을 적고 있기 때문이다. 한결 넓어진 시야를 갖게 된 시인은 꽃게에게 “지나친 분노와 후회는 너 자신의 鮮度를 떨어뜨릴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향지 시인은 가장 치열해야 할 자신과의 싸움에서 단 한번도 타협을 하지 않았다. 때로 지난하고 힘겨운 그 싸움과 그것으로 인한 불화로 인해 헛되이 감정이 솟구치기도 했지만 언제나 말들의 무게에 의해 그 균형을 잃지 않았다. 예컨대 “얼음이면서 불”인 ‘氷果’에서 우리는 시인의 말과 감정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포도값이 좋으면 여기저기 포도밭이 새로 생기지요
포도값이 떨어지면 여기저기 포도밭이 버려지지요
산비탈 포도밭이 가장 나중 태어나고
산비탈 포도밭이 가장 먼저 버려지지요
버려진 포도밭은 헝클어지구요
헝클어진 넝쿨은 엉겅퀴 까마중 수크렁과 놀구요
버려진 포도알은 작고 성글구요
성근 포도알에 여름 햇살은 더 많이 스몄지요
헝클어진 넝쿨 틈에
쪼글쪼글 말라서 언 포도가 몇 알 붙어있어요
쪼글쪼글한 얼굴 위에 백설 모자를 쓰고
모자가 녹을까봐 산그늘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얼음이면서 불인
氷果,
씹을수록 달디 단 실이 들었어요
머리를 덮어오는 겨울 산 그림자
몸에 남은 수분을 더욱 짜내며 이어가야 할
실 한 가닥이
이 열매에겐 아직 남아있습니다
운 좋은 날이면 만날 수 있어요
눈에 손에 입에 뱃속에 달디 단 햇살 지피는
氷果,
발끝의 돌이 싫어 포도를 포기한 포도나무에겐
달고도 아픈 회초리지요
― 「氷果」 전문
필요에 따라 취하고 버리는 게 결정되는 세상의 냉혹함을 진술하고 있는 시인의 말이 그 영역을 벗어나는 지점은 포도밭이 아닌 포도알에 대해 집중하기 시작하는 2연 부분이다. 버려진 포도알은 비록 작지만 그 성근 포도알에 더 많은 여름 햇살이 스민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판단이 개입된다. 체험의 진실성보다 감정의 진실성이 더 느껴지는 대목이다. “쪼글쪼글 말라서 언 포도”는 누군가의 “쪼글쪼글한 얼굴”이다. 그것은 ‘노파’의 얼굴을 닮았고, 시인을 닮았다. 이 포도알 속엔 깊은 성찰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얼음이면서 불”인 포도알의 이중적인 이미지는 훨씬 매력적으로 한 인간의 내력을 상상하게 한다. 이향지의 시에서 처녀의 탄력적인 언어와 노파의 깊이 있는 감정의 언어가 교차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시인은 ‘氷果’ 안에서 “씹을수록 달디 단 실”을 발견한다. 그러나 누구나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포도알이 수분을 짜내어 ‘실’을 만들 듯, 감정의 깊은 곳에서 언어의 ‘실’을 만든다. “몸에 남은 수분을 더욱 짜내며 이어가야할” “실 한가닥”[언어]이 “얼음이면서 불”인 ‘氷果’[시]를 만든다. “운 좋은 날” 그것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내적 성숙이 동반된 특별한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氷果’는 관념적이지만 감정의 깊이가 만든 언어다. 그러니 그녀의 말이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데우지 않을 수 없다(“눈에 손에 입에 뱃속에 달디 단 햇살 지피는”). 그녀의 시는 전언의 매체가 아니라 치열한 내면 탐색의 과정이자 그 결과다. 그녀는 언어를 통해 언어적으로 포괄할 수 없는 개념들을 현시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완고한 현실을 대하는 감정의 깊이는 시인의 언어가 보여주는 특별한 지점이다. “얼음이면서 불”인 ‘氷果’와 같은 시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정말로 “달디 단” 맛이 느껴진다.
([서정시학] 2006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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