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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12/18(목) 22:37 (MSIE6.0) 220.78.31.3 1024x768
[문학동네/리뷰], 우연과 충격 -이향지 『내 눈앞의 전선』  

[문학동네/리뷰]- 이향지 시집 『내 눈앞의 전선』

용기/스밈/고양


     김용희 (문학 평론가․ 평택대 교수)


1.형식의 극치

 문제는 언제나 여기에 있다. 말해야 할 어떤 것을 어떤 방식으로 말할 것인가 하는, 즉 ‘말할 것으로서의 본질’과 ‘말하는 방식으로서의 형식’ 사이에 언어의 강렬한 긴장이 놓여있다. 사실 인간이 어떤 사실을 인지하는 과정에서는 형식화의 통로를 거치게 되는 것이다. 지각의 그 순간도 실은 형식화의 과정이다. 문자가 생기기 전, 신화와 마술적 주문, 의식(儀式)은 하나의 언어형식 속에 담겼다. 형식은 정보를 보존하고 전승하는데 유효하다. “옛날에 옛날에……”라고 말하는 방식에서 청자는 이미 그것이 특정한 유형의 언술방식(전설이나 민담)과 관계하는 것임을 안다. 옛날이야기는 어떤 방식과 어떤 구조 안에 형식화 되어 있다. 사물과 세상을 해석하고 인지하는 과정은 어떠한 ‘언어형식 안’에서 그것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클리언스부룩은, 인간은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형식을 창조한다고 말한다.
 어떤 언어형식으로 세상을 받아들일 것인가. 각각의 말하기는 각각의 언어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각각의 언어방식은 각각의 세계를 창조해 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문학행위야 말로 이러한 말하기 방식의 가장 첨예한 형태이다. 그것은 말하기의 어떤 방식, 즉 어떤 언어의 방식으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물론 문학언어는 관습과 형식에 의해 제도화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에 끝없이 길항하는 모순적 알리바이를 가진다).
 어떻게 말 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문학언어가 가지는 숙명적 고뇌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시야말로 말하기 방식의 그 극단에서, 말하기 형식의 극치에서 전율하는 언어다. 시는 언어형식, 표현의 방식으로만 가장 미적인 것을 드러내려한다. 이 표현형식이 미적 감각적 만족을 일으킨다. 독자는 산문과 다른 독특한 말하기의 방식에 관심을 집중한다. 시는 분명 일상어와 다른 말하기의 방식을 그 존재 근거로 삼는다. 표현형식으로 자기를 근거화한다. 시에서 운율, 리듬, 연과 행의 구분은 문학 텍스트를 수용하기 위해 주어지는 관습의 부가구조이다. 이것은 문학적 전통에서 형성된 것이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사회관습의 지배하에서 시적 자질은 특수한 텍스트로서 미적 텍스트를 구성하게 하는 지각양식을 가진다.
 그러나 독자, 즉 향수자들이 시의 양식을 수용하는데 있어서는 문화적 관습과 규칙들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경로를 지닌 듯 하다. 시는 말하기의 형식에 있어서 일종의 과정 중에 있는 장르이면서 우리 의식의 본원성과 긴밀하게 연루되어 있는 것이다. 즉 시를 구성하는 음과 양, 강과 약의 반복, 시간의 등가적 분할을 전제한다. 그것은 우주생명의 기본적인 맥락을 연상시키는 통일성을 제공한다. 시에서 리듬이 주는 생명적 본원성은, 노래의 가사는 사라지고 노래의 선율만 남아있는 경우에서도 알 수 있다. 허밍처럼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노래의 느낌만이 남아 우리의 내면을 들쑤셔놓고 가는, 그 알 수 없는 느낌은 개념화 이전의 세계이기에 더욱 강렬하게 우리 내면에 각인된다. 즉 명료한 정보와 각주가 이식되는 것이 아니라 불투명한 주관적 느낌이 무의식에 흩뿌려져 존재의 본질을 건드리는 것이다. 독자는 시 읽기를 통해 관습적 문학방식을 숙지하는 동시에 말하기 방식의 끝없는 변주를, 그러면서 무의식적인 생래적 운율에 생명현상의 일체감을 느끼는 복합적인 문학전달 방식에 직면한다. 시는 김우창 선생의 말대로 주관과 주관이 접지하는 가장 마술적인 교감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시에 대해서는 다른 문학장르와 다르게 미적 언어소통의 과정에 대한 지점을 더욱 예민하게 언급해야 한다. 시는 형식 그 자체만으로 본질을 드러내려 한다. 시는 말하기 방식을 민감하게 실험하는 장르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른 언어들과의 주관적 경계를 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서, 시를 가장 시적으로 만들어 주는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말하기의 방식을 문제 삼았다. 그중에서 일단 이번 글에서는 세 가지 항목을 살펴보고자 한다. 시를 가장 시적인 것으로 느끼게 해주는 말하기의 방식에서 은유와 운율, 언술방식에서의 이미지 중첩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고 싶다.  

2.우연과 충격 ―이향지 『내 눈앞의 전선』

    연꽃 한 송이 돌 속에 꽃 핀 몸을 새겨넣을 동안

    새 한 마리 돌 속에 나는 몸을 새겨넣을 동안

    소나무 한 그루 돌 속에서 달빛 두르고 걸어나올 동안

    대나무 한 그루 돌을 뚫고 구름에서 일어 설 동안

    내가 뻘 속에 주저앉아 진흙 꽃봉오리나 밀어내고 있을 동안

                           ―「낙관」전문


 이향지 시집의 첫 번째 시 「낙관」은 그녀의 이번 시집 전체에 대해 하나의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연꽃과 새와 대나무가 돌에 새겨지는 과정들, 이것은 야콥슨 식으로 일종의 계열 측에서의 은유들이 병치되어 나타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각각 사물들이 통사론적 병렬현상을 보여준다. 연꽃 한 송이가 돌 속에 새겨지고 새 한 마리가 돌 속에 새겨지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한 그루씩 밖으로 몸을 드러내는 과정들이 텍스트 위에 도열한다. 그리고 그 각각의 사물들의 움직임과 대칭적 위치에 ‘내’가 중첩된다. 이 각각의 시적 대상들은 모두 ‘낙관’을 형상화해내는 은유이다. 낙관은 작품에 작가가 자신의 이름이나 아호를 쓰고 도장을 찍은 일이다. 그러니까 작품을 마침내 세상 밖으로 밀어내는 마지막 행위이다. 연꽃과 새와 소나무와 대나무가 암흑의 덩어리인 돌을 뚫고 생명의 몸으로 탄생되어 가는 과정은 창조의 지난한 인고를 암시한다. 이러한 과정은 시인이 뻘밭과 같은 자신의 일상에서 진흙봉오리와 같은 시언어를 밀어내는 과정과 병치된다. 뻘 속이라는 무정형의 삶 안에서, 어둡고 질척한 미분화의 세계에서 시적 형상물인 꽃 한 송이를 건져 올리는 행위, 이것이 일상어에서 창조적 발견, 시적 충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은유인 것이다. 시인은 「낙관」이란 시를 시집의 첫 머리에 두어 자신의 내면에 웅크린 사물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메타시처럼 보여준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시집에 낙관을 찍는다.
 이향지의 시에서는 이질적인 것들이 통합되고 대림적인 것들이 결합되는 독특한 양식의 은유들이 자주 등장한다. 마치 연꽃과 새와 소나무와 대나무가 딱딱한 대지의 배꼽인 돌을 통과하자 새로운 몸으로 탄생하는 것처럼, 낙관이 찍히자 작품이 독자에게 환신의 몸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이를테면 「대해 속의 고깔모자」에서 섬은 “대해 속의 고깔모자”로 비유되고 다시 그것은 “시계”로 변이된다. 섬 위에 비치는 햇살은 “모자 위의 번철”로, 다시 그것은 “에그 프라이”로 변이된다. 차를 타고 둘러보는 섬의 풍경은 “풍경과 속도의 궁전”으로, 다시 “궁전 밖에 해당화” “해당화 발등에 뜨거운 몽돌밭” “몽돌밭 위에는 태엽 풀린 시계 하나”로 사물들은 비유의 연쇄를 만들어 간다. 사실 은유를 만들고자하는 충동은 인간의 근본적인 충동이다. 그것은 이질적인 사물들의 갑작스러운 병치를 통해 새로운 의미로의 전이, 의미의 확산을 꾀한다. 그것은 사물을 새로운 것으로 창조해 나가는 문학적 직관의 힘과 관계한다. 그런 점에서 이향지 시에서의 은유들은 독자에게 더욱 곤혹스러운 창조적 영감, 상상적 관여를 부추긴다. 문학적 직관은 개념화 이전, 의미화 이전에 의미파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마침 그곳을 지나갔다
    마침 배가 고팠고
    마침 그를 먹었다

    그와 내가 수저를 놓고
    걷고 있는 사이
    지붕 없는 곳이 한없이 넓어져 갔다

    별 없는 밤이 옆구리를 들추며 밀려들었다

    그와 내가 손잡고
    캄캄하게 누워있는 사이
    서른다섯 송이의 장미가 피어났다 졌다

                  ―「우연」전문


 시의 말은 표면적으로 뒤틀리고 낯선 말들을 구사한다. 마침 그곳을 지나갔고 마침 배가 고파 그를 먹었고 그와 내가 수저를 놓고 함께 걸었고 그와 내가 손잡고 있는 사이 서른다섯 송이의 장미가 피어났다 졌다니…… 언어는 표층적 말과 심층적 말 사이에 긴장되고 비밀스러운 세계를 구축한다. 시인의 언어는 문맥 속에서 대립되는 두 개의 쌍을 형성한다. 외면과 내면, 텍스트 표면과 이면이라는 대립쌍의 토대 위에서 은유는 출발한다.
 가령 이 시는 이렇다. 시인은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다 그 남자를 만났고 배가 고픈 듯 외로웠고 그를 먹듯 결혼을 했다. 그와 수저를 놓고 함께 생활을 했고 지붕 없는 듯한 달동네에서 신혼을 보내고 그렇게 그와 손을 잡고 밤을 보내는 사이 서른다섯 송이의 장미가 피어나고 지듯 서른다섯 해가 지나갔다. 그러니까 그는 그녀의 남편이고 그녀의 결혼생활은 우연에서부터 발생된 모든 것들의 일체이다. 이향지의 시는 이러한 서로 충돌하고 점유하는 과정에서 상호긴장과 놀라움을 드러낸다. 남편과의 만남과 결혼과 생활의 과정은 수수께끼 같은 양식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유사한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극단적인 비유사성의 모습을 띤다. 20세기 미학적 강령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사물들을 전혀 다른 방법으로 대립시키는 방식’은 관습적 언어규범을 파괴하는 미적해방을 함축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향지 시에서의 은유는 이질적인 것들의 특이한 결합을 시도함으로써 언어의 절대적 심미성을 찾고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마당 넓은 집 우물가에 잎과 열매가 말라가면서 얼마 안되는 진을 짜서 벌레에게 나누어주는 “단감나무”를 “청렴”으로 비유한다거나(「청렴」), 감을 깎으며 비져나오는 “감껍질”을 달디단 과육이 익도록 혼신을 다해 보듬은 “꽃”으로, “무거워진 열매”를 “목 못 가누는 갓난이”로 비유한다(「감을 깎으며」). 이향지 시에서 은유들은 사물들이 또 다른 사물로 전이되는 기표의 항구적 운동성을 전제한다. 그것은 권력적 관습언어를 의식적으로 파괴하는 해체의 힘을 획득한다. 이것이야말로 언어의 위계적 고착인 기의와 기표의 결합을 깨트리는 공격적인 운동성이며 새로운 변형의 꿈틀거림이라 할 수 있다. 「우연」이란 시에서 나타난 환상과 그 환상의 파괴, 언어의 재현과 재현에 대한 붕괴, 이것이 이향지가 새롭게 구축한 현실이다. 이향지의 시는 그렇게 하여 형성된 전복의 텍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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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상의 모든 아침-임영조의 『시인의 모자』
4.이미지의 지느러미-장옥관의 『하늘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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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2003년 여름호 ‘리뷰’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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