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12/18(목) 20:34 (MSIE6.0) 220.78.31.3 1024x768
|
[시와 사상/텍스트의 무의식], 라캉과 시적 주체
*여기 올려두는 글은 시 전문 계간지 <시와 사상> 2003년 여름호 기획특집 '텍스트의 무의식'에 실렸던 문학평론가 박수연씨의 글입니다. 무척 깊은 독서와 연구의 결과물이라 여겨집니다. 저의 시 두 편을 텍스트로 실마리를 풀고 있는 글이어서, 같이 읽으려고 올려둡니다.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제 앞으로 왔던 풍경과 말들을 제 나름대로 정면대결하며 뚫고 나온 시들이어서, 저에게도 무척 의미가 깊습니다. 오래전에 마무리지어두고도 그 성공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만, 이 글을 읽으면서 누군가는 읽어주고 알아주는구나 느끼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저를 이해 하게 됩니다. 제가 선택했던 방법에 대해서도 긍정하게 됩니다. 저의 시 한편한편은 종점이 아니라 정류장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시를 쓰면서 저를 압박하던 분열의 징후들을 돌파하고 극복해왔습니다. 저의 경험들이 여러분의 시쓰기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시와 사상> 기획특집 / 텍스트의 무의식
라캉과 시적 주체
박 수 연 (문학평론가)
1
“작가는 어머니의 육체와 유희하는 자”(『텍스트의 즐거움』, 동문선, 85면)라고 바르트는 쓴다. 그렇다면 작가는 금기의 선을 넘어선 사람일까? 이것은 우문이지만, 심각한 우문이다. 이것이 우문인 것은 작가가 파괴될 수 없는 윤리의 선 안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 때문이 아니다. 진정한 창조성은 언제나 금기를 넘어서는 순간에만 가능하리라는 바로 그 자명한 문제가 반복되기 때문에 그것은 우문이 된다. 그것이 심각한 것은 그 때문이다. 작가는 윤리의 안과 밖을 가르는 칼날을 결코 비켜갈 수가 없다. 창조인가 윤리인가의 문제가 때로 사회 전체에 걸치는 정치적 상징으로 전화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윤리의 안쪽에서 바깥쪽을 실제적인 가능성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상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여기에 언어적 타협은 있을 수 없다. 작가에게 실제의 타협과 언어적 타협은 다른 문제이다. 작가에게 타협이 이루어진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언어 혹은 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만들어준 언어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작가의 창조성을 보증하지 않는 언어이고, 주체의 내재성이 획득되지 않은 상태의 언어이다. 참된 문학이 보편적 내면을 개별적으로 실현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과 비교한다면 타협적 언어는 개별적 발화 이전의 언어이다. 누구나 개별적 발화 이전의 상태를 경유하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다 ‘오’와 ‘아’ 식의 실패놀이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 상태에만 머물러 있다면 우리 모두는 주체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육체와 유희한다? 바르트는 위의 진술 바로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언어가 아닌 언어체, 즉 모국어/어머니의 언어이다.” 초점이 되는 것은 언어였던 것이다. 이 언어로써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어머니”와 부딪치게 된다는 것은 그 어머니에 의해 환기 되는 바의 어떤 세계가 사람들에게 문제시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란 그 언어로써 표현하려는 실재가, 표현의 가능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끊임없이 작가의 의식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 고투의 과정이 진정한 창조에 값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실재(the real)를 의식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재를 표현한다는 것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의미를 언어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언어의 세계로 들어선 이후에는 ‘실재를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고’(Lacan,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 - Analysis, P.167) 따라서 결코 실재를 만날 수 없다는 라캉의 말이 맞는다면, 혹은 그 누구도 완벽한 팔뤼스를 가진 큰 타자가 될 수 없다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패의 과정으로 귀결될 실재 찾기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주체가 보증되는 자리이다. 작가는 어찌되었든 자기 자신으로 살아남기 위해 자기의 목소리로 발화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머니의 육체와 유희하는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가 여기에서 되새겨져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작가는 아버지의 영역을 벗어나서 스스로의 언어로 실재의 세계에 진입하려는 존재일 것이다. 1960년대 이후 라캉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가 주체의 죽음이 문제되는 장소에서 주체의 탄생과 존재 방식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인데, 물론 그것은 근대철학 이후의 무소불위한 힘으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주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특수한 양태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기동일적 의식의 영역 밖에서 주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와도 같다. 시인과 작가들에게 그것은 참된 자기의 세계를 탐구하는 일과 관련될 것이다. 아래에서 살펴볼 작품은 탈주체의 시대에 바로 그 주체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그것은 불가능을 알면서도 불가능에 자신을 던져놓는 일, 이를테면 주체 탐구의 정신분석학적 윤리와도 같다.
2
라캉이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를 구분하고 인간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갈 즈음의 아이의 존재방식을 존재의 변증법과 소유의 변증법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어머니가 결여하고 있는 것 즉 팔뤼스가 됨으로써 어머니와의 이자관계를 지속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아이는 그 관계를 지속시킬 수 없다. 아버지에 의한 거세의 위협은 아이에게는 실존의 문제에 해당하고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포기한 채 아버지의 세계를 긍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아이는 스스로가 어머니의 팔뤼스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아이는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는 것 같은 팔뤼스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소유의 변증법 시기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인간의 자아 형성이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부터라는 사실 또한 잘 알려진 것이다. 거울 단계란, 조각난 신체의 환상에 시달리는 아이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를 통합된 신체의 존재로 인식하고 자아를 형성하는 시기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에는 미묘한 전도가 있다. 아이가 거울 속에서 보는 자신의 모습은, 자기 자신이기는 하되 원래의 자기 모습과는 정반대로 비쳐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자아가 형성되기 때문에 결국 자아란 순수 의식의 구성물이 아니라 영상화된 타자의 결과물이 된다. 자아는 자아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다음 시가 거울 단계의 과정과 결과를 예시해 준다.
나는 서쪽으로 돌고 싶은 바람개비야/나는 동쪽으로 돌고 싶은 바람개비야
네가 왜 내 날개를 다치면서 돌아/네가 왜 내 날개를 다치면서 돌아
왜 내 말 따라해/왜 내 말 따라해
동편네야/이 서편네야
이 미친/이 미친
날개들의
새벽이
밖에
서
부
터
샌
다
발치에서, 커다란 거울 하나가 지키고 있다
― 이향지 「무채색의 새벽」(『내 눈앞의 전선』)전문
논리적인 의미로 보면, 시는 거울 앞에서 돌아가는 바람개비의 형상을 묘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논리이지 현실 연관적 논리가 아니다. 바람개비가 왜 거울 앞에 있는지,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시간이 왜 미친 날개들의 새벽인지, 그리고 그 새벽이 밖에서부터 샌다는 말이 무엇을 지시하는 지에 대해 시는 어떠한 연관적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어떤 의미가 솟아난다면 그것은 라캉이 말하는 바의 은유의 한 형태를 빌어서인데, 은유란 “무의미(nonsense)로부터 의미가 발생할 때”(「무의식에서의 문자의 심급 또는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 『욕망이론』, 69면) 형성되는 것이다. 이 은유의 과정을 거쳐 의미화 되는 심리적 운동이 기표라는 증상(symptom)으로 표현되고, 이로써 시는 의미의 섬광(‘의미의 섬광’은 ‘시적 섬광’이란 말을 바꾼 것이다. “시적인 섬광은 인간의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나타나는 기표와 은유를 통해 그 고유성을 소멸 시킨 기표 사이에서 만들어진다.”(라캉, 「무의식에서의 문자의 심급과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68면) 이를테면, 위 시에서 의미의 섬광은 시의 기표들이 은유로써 형성하는 순간적 결과물인데, 그 섬광은 다른 기표를 대신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끈덕지게 주장하는 기표와 자리를 빼앗긴 기표의 결합물이다. 이 은유로 의미화 되는 심리적 운동이 증상(symptom)으로서의 기표로 표현되고(‘은유는 증상이다’), 다른 기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환유적 연쇄로써 지속되면서 그 섬광의 근거로 작용하게 된다고 라캉은 말한다.)을 통해 독자들에게 의미화 된다.
우선, 서쪽과 동쪽, 동편네와 서편네는 거꾸로 된 모습과 방향을 지시하지만 그와 관련된 날개는 동일한 자아의 것이다. 거울 밖과 거울 안의 존재는 동일한데 그 모습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형태의 방향은 반대이되 그 형태에 대한 생각은 통일된 자아의 그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다음, 6행부터의 시행이 5행과 마찬가지로 빗금으로 나뉘어져 서로를 되비치는 상태로 있지 않고 단독적으로 씌워진다는 것은 그 빗금으로 표상되는 거울상이 통일된 자아의 형성을 위해 기능하는 일을 형식적으로 그려본 일에 해당할 것이다. 시의 마지막 행은 그 통일된 단독적 언어, 혹은 언어는 주체의 언어이니까, 통일된 자아의 토대에 바로 거울이 놓여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거울은 주체를 거꾸로 되비치면서 통일된 자아를 만드는 일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의 제목이 “무채색의 새벽”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새벽은 그것 자체로 무엇인가가 탄생하는 국면의 상징이지만, 그 새벽이 무채색이라는 말은 탄생된 것들의 개별성이 아직까지는 확보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거울 단계에서의 나(I)는 타자와의 변증법적 동일시에 의해 객관화되기 이전의 주체이며 언어가 그 보편구조 속에서 주체기능을 부여하기 이전의 주체이다.”(라캉, 「주체기능 형성모형으로서의 거울 단계」,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40면) 그것은 주체의 탄생을 예기하기는 하지만, 색들이 하나로 합해져서 쉽게 분간되지 않는 환상적 장면만을 연출할 뿐이다. “거울 단계는 본질적으로 불충분함으로부터 예기(anticipation)에로 내던져진 한 편의 연극”(같은 글, 44면)인 것이다. 그런데 그 환상적 무채색의 “새벽이 밖에서부터 샌다”고 시인은 쓴다. 밑도 끝도 없는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인가가 샌다는 말은 그것이 어떤 결여나 공백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뜻할 것이다. 무게만으로 따진다면, 사물들의 흐름은 그 새어버린 쪽으로 기울게 마련인데, 이것은 심리적 기울기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는 어머니가 결여하고 있는 것, 즉 팔뤼스를 욕망하는데, 이 팔뤼스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영원히 상실된 것 혹은 결여된 것이다. 라캉은 이것을 「정신병의 가능한 치료에 대한 예비적 질문에 대하여」(Ecrits, 557면)에서 다음과 같은 은유공식으로 드러낸다.
아버지의 이름 어머니의 욕망 타자
----------- · ------------ → 아버지의 이름 (········)
어머니의 욕망 주체가 생각하는 기의 팔뤼스
이 공식에서 팔뤼스는 어머니가 욕망한다고 아이가 생각하는 기의이다. 이때 아버지의 이름은 그 기의에 대한 은유로 작용한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기표는 팔뤼스를 대체해버렸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분수식에서 횡선이 뜻하는 바의 의미의 저항선 아래로 영원히 억압되어 버리기 때문에 결코 팔뤼스를 직접 드러내지 못한다. 팔뤼스는 오직 은유를 통해서만 그 그림자를 언뜻 비칠 수 있을 뿐이다. 아이가 요구(demand)하는 것이 사랑이고 이 사랑이 팔뤼스가 되려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팔뤼스의 억압은 그 사랑을 언제나 텅 빈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심리적 기울기는 언제나 그 빈 쪽으로 나 있는 것이다.
다시 시로 돌아가면, “새벽이 밖에서부터 샌다”는 말은 바람개비가 구성하는 영역의 외부에 있는 무엇인가가 결여와 공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것은 그 결여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움직임의 순수 표현이 된다. 바람개비는 기둥에 묶여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저쪽을 향해 끝없이 움직이지만 결코 저쪽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순수한 움직임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신의 기원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기표들의 연쇄와도 같다. 밖으로 샌다는 것은 그 밖으로 표상되는 바의 타자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실재, 참된 것, 완전한 것은 결여된 것이다. 팔뤼스는 궁극적으로 결여 자체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팔뤼스가 있다고 믿어지는 곳, 팔뤼스를 소유한 아버지가 있다고 믿어지는 곳을 라캉은 상징계라고 부른다. 팔뤼스를 소유한 아버지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곳에 진입한 아이는 우선 타자와의 차이를 인식할 수밖에 없다. 상징계는 그렇게 타자와의 차이 속에서 존재하는 주체를 개별적으로 호명하는 세계이다. 그곳에서 아이는 더 이상 어머니를 욕망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곳은 무엇인가가 새고 있는 곳, 결여되어 있는 곳이며, 그렇기 때문에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기울기가 그곳으로 향한다는 것은 그 차이와 결여를 메꾸어주는(메꾸어준다고 믿어지는)실재적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대상 a라고 지칭되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주체들은 팔뤼스의 욕망을 대상 a로 바꾸고 그것을 참된 대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상징계의 주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것은 주체의 개별적 정립이라는 문제에 닿아있다.
전선은 그대로 둔 채 나뭇잎만 떨어졌다
집과 집의 경계를 처마 끝보다 높이며
골목을 건너 골목을 하나 더 가로지르고 있는
전선은 허공을 긋고
허공에 늘어져 있다
늘어진 전선의 가장 늘어진 부분이
박태기나무 머리를 지나가고 있다
빗방울들은 여름내, 푸른 잎에 묻힌 전선의
가장 늘어진 부분을 타고
박태기나무 머리로 흘러들었다
바람이 늘어진 전선을 흔들면
전선은 박태기나무 안 푸른 저수지를 흔든다
전선은 나무를 흔들면서 제 不變을 흔들고
나무는 전선을 치면서 제 不眠을 치는 것이다
― 이향지 「내 눈앞의 전선」(『내 눈앞의 전선』) 전문
시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는 자기를 보여준다. 시가 “전선”으로 시작하고 “나무”로 끝난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작이 의미의 환기에 기여하고 끝이 의미의 결론을 맺어준다는 점에서 “전선”과 “나무”는 동일한 비중을 갖는 정황 요소들이다. 동일한 비중이지만 그것들은 처음에는 주는 요소와 받는 요소로 정확히 구분되어 있다. 전선은 늘어진 몸으로 집과 집 사이의 경계를 까마득히 긋는데, 이로써 시는 “경계”의 은유를 통해 정황 요소들이 자신만의 영역에서 기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전선은 전선이고 나무는 나무이다. 그 둘이 어떤 관계인가 하면, 전선은 제 몸을 빌어 나무에게 빗물을 주고 나무는 빗물을 받아 여름 내 머리(→나뭇잎)를 키우는 관계이다. 시의 첫 행은 그 관계에 대한 선언적 제시이다. 그 둘이 아무리 얽혀 있어도, 아마 가을인 듯 싶은 때에 문득 보니 “전선은 그대로 둔 채 나뭇잎만 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일방적 주고받음은 실은 상호적인 관계였음이 밝혀진다. 바람(바람은 나무와 환유적 관계를 형성한다)이 전선을 흔들 때 비로소 전선이 “푸른 저수지”를 흔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얽혀 들어가는 일을 통해서만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들은 서로 차이 나는 존재들이지만, 그 차이가 넘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또한 서로에게 부재하는 존재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타자에게 얽혀 들어가는 타자가 되어야 한다.
라캉의 타자라는 문제 설정은 주체로서의 인간이 인격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가지게 되는 개체와 환경의 상호 작용이라는 문제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주체는 단순한 정신분석학적 주체가 아니다. 그는 주체라는 말로 철학적 법적 언어적 함축을 보여준다. 주체는 ‘발화’와 ‘발화 행위’로 나뉜 언어상의 주체이고 자기 의식의 철학적 주체이며 별개의 힘(가령 군주의 힘)에 종속된 법적 주체이다. 그 속에서 인간이 형성된다고 라캉은 말한다. 그런데 그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그는 스피노자를 영유하면서 정신분석학에서의 종래의 심신 병행론을 개별체와 사회의 관계로 바꾸어 놓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인격은 ‘개인의 신체적 작용들을 하나로 합친 총체에 ’병행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그의 고유한 환경에 의해 구성되는 총체성에 병행되는 것이다.’ 요컨대 관념의 질서는 종래의 심신 병행론에서 이해하는 것처럼 신체의 질서로 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의미에서 “관념의 질서와 결합은 사물의 질서와 결합과 동일하다”(B. 스피노자, 『윤리학』, 서광사, 1990, 73면)고 스피노자는 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세계관은 사고와 연장이 하나의 실체로 귀속된다는 사실을 밝혀놓음으로써 주체의 문제를 타자들과 관계 맺으면서도 주체 자체의 문제로 이해해야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에 대해 주체가 주체 외부의 환경과 맺는 관계 혹은 자기가 타자와 맺는 관계는 결국은 내부와 외부의 관계라는 해석이 나올 수 있겠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내부와 외부의 양태들은 하나의 실체에서 이루어지는 변용들이다. 모든 차이는 하나의 실체가 다양하게 뻗어내는 속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를 영유한 라캉에게 인격은 실체의 속성에 해당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주체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그것을 끌어들일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끌어들인다.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잘못 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트는 시작에서부터 그 자신을 분석하듯이 신경증을 분석해야만 진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Seminar I, Norton, 1988, p.2)
이로써 시의 마지막 연의 비밀이 밝혀진다. 그 비밀이란, 각각의 존재들은 자기의 내재성으로 끝내 살아남으려 한다는 것, 타자와의 관계에서 타자에 의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문제인 주체로 정립된다는 것이 그 비밀이다. “전선은 나무를 흔들면서 제 불변을 흔들고/나무는 전선을 치면서 제 불면을 치는 것”이며, “주체는 결국 사회적 요구들(타자들:인용자)의 체계 대신 자신의 고유한 체계를 대체물로 갖는”(B. 오질비, 『라캉, 주체개념의 형성』, 동문선, 2002, 75면) 것이다.
3
자기를 정립한다는 말은 자기의 언어로 세계를 해석한다는 말과 같다. 한 편의 시는 그 세계 해석의 자기 언어를 의미화하는 고정점이다. 시가 시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인간이 상징계에 들어선 이후 그는 아버지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언어는 타자의 언어이며 규칙의 언어이다. 이 언어는 이미 세계를 만나는 방식이 결정된 언어이다. 시가 언어를 그런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시인은 타협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된다. 이 언어가 개별적 발화 이전의 언어라고 앞에서 썼던 것은 타협적 언어를 통해서는 자기 자신으로서의 주체가 세계의 비밀에 가 닿으려는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시인은 현실의 지배적인 힘이 그어놓은 금기의 선을 결코 넘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주체→자기 자신’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시인은 상징적 기표들의 저 밑에 은폐되어 있는 실재를 향유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는 ‘소유의 변증법’에 묶인 채 그것을 운명으로 수락하면서 체념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어떤 내재적 보편성으로 묶일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외적 존재라고 오인된 아버지에게 호명된 한 명의 개인일 뿐이다.
그러나 문학은 ‘존재의 변증법’으로 돌아가려는 주체의 끝없는 시도이다. 다른 말로하면, 그는 상징계의 삼각관계에서 아버지 혹은 삼인칭이 없는 상상계의 이자 관계로 돌아가려는 사람이다. 문학이 불가능을 꿈꾼다는 것을 정확히 이런 상태를 가리킨다. 그가 존재의 변증법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사랑으로 맺어진 이자적 관계를 내재성으로 삼아서 타자와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때 세계는 그의 언어로 새롭게 명명되는 세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가 자기 자신에 의해 탐색되는 대상이되 자신과 동일시 되는 타자라는 점에서 세계 전체는 내재적 동질성으로 연결된 장소가 된다. 시인이 이렇게 실재를 완전히 향유할 수 있을 것인지 묻는 것은 다시 우문이 된다. 그것이 우문이더라도 많은 시인들이 아랑곳없이 그 길을 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
*<시와 사상> 2003년 여름호 게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