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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학], 시에 나타난 지리산의 세 측면
시에 나타난 지리산의 세 측면
이 숭 원 (문학평론가․서울여대교수)
1.비극과 통한의 공간
지리산은 천왕봉을 주봉으로 하며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경남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 일대에 걸쳐있는 해발 1,915미터의 거대한 산이다. 해발 1,950미터인 한라산보다는 낮지만, 넓이로는 동서길이 50킬로미터, 남북길이 32킬로미터, 둘레 약 320킬로미터에 이르러 남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이다. 신라시대부터 신령스러운 5악의 하나로 꼽혔으며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고하여 지리산(地異山)이라 불렀고, 또 멀리 ‘백두대간으로부터 흘러왔다고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했으며, 옛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으로도 알려져 있다.
산세가 워낙 웅대하고 심원하여 난세를 피해 은거하려는 사람들이 숨어들기를 자주 하였다. 조선조 말에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전세가 열세에 몰리자 피난하여 은둔하였으며, 일제 말에는 항일지하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이 은거지로 삼았으며, 1948년에는 여순사건에 관련되었다가 도주한 좌익세력의 일부가 들어왔고, 1950년 6․25전쟁 때는 북한군 잔류병력과 남로당 잔여세력이 유격전의 거점으로 지리산을 이용하였다. 그런가하면 1980년 광주민주항쟁에서 계엄군에게 쫒긴 시민군이 몰래 숨어든 산이 지리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리산은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은 비극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 한편으로 그 산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변방으로 휘몰린 반골들의 응집소였기 때문에 저항의 공간으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인간 역사의 어지러운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는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땅으로 점철되어 왔지만, 하나의 자연 풍광으로 바라볼 때는 지리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구분 없이 언제나 아름답고 웅혼한 보습을 드러내어 많은 탐방객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데 그 비극의 땅에 빛 고운 철쭉이 물들고 무성한 녹음이 펼쳐지고 황홀한 단풍이 불붙고 찬연한 백설이 휘덮인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사의 모순을 다시 돌이켜보게 하고 비극의 치욕을 다시금 되씹어보게 하는 뜨거운 상징으로 작용한다. 인간사의 처절함과 자연의 찬란함이 대비될 때 오히려 통한의 심정은 더욱 선연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억압에 대한 분노와 극복에의 의지도 더욱 맹렬하게 솟아오르는 법이다.
----(중략)---
2.생명의 만다라
지리산은 웅혼하고 아름답다고 했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것은 사실 지리산의 어느 한쪽 면만을 보고 이야기한 것이지 한눈에 담아볼 수 없는 그 거대한 산지에 대해 어찌 가볍게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산에는 심미적 안목만으로 논할 수 없는 어떤 고귀하고 기품있는 상징성이 깃들여 있다. 『論語』雍也篇에서 공자는 仁者樂山이라는 말로 어진 사람의 덕성을 산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다. 仁者는 靜이요 仁者는 壽라고 했으니 어진 사람은 산처럼 고요하고 산처럼 자신의 모습을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한다는 뜻이리라. 이 구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주석을 달았는데 朱子는 의리에 바탕을 두고 중후한 인품으로 함부로 옮겨 다니지 않는 자세를 들었고(安於義理 厚重不遷), 또 다른 사람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 에 편안히 머물며 움직이지 않지만 만물이 그 안에 저절로 자라나게 하는 너그러운 포용의 섭리를 들기도 했다(安固自然不動而萬物生焉).
우뚝 높이 솟아 있는 산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온갖 초목과 조수가 움직이고 있으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으며 강한 것이 있으면 약한 것이 있어 그 자체의 조화 속에 모든 것이 순조롭게 운행되고 있다. 이렇게 만물을 생육케 하면서도 그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소유로 고집하지 않으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남이 가지고 가도 기꺼이 내어줄지언정 방해하는 법이 없다. 듬직하게 버티고 서있는 산은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고 만물이 화합을 이루는 생명의 소우주인 셈이다.
사람으로서 군자의 품계에 오를만한 어진 사람이 있다면 응당 이와 같은 산의 덕성을 보여줄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동양문화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산은 그런 덕성의 표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특히 지리산처럼 호남과 영남 각처에 걸쳐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산이라면 모든 것을 포용하는 仁人君子의 표상으로, 만물을 생육하고 사방에 분양하는 자연섭리의 표상으로 인식될만하다. 지리산은 그 드넓은 날개폭으로 만물을 감싸고 음과 양을 화합하게하며 만물을 생육번식하게하며 생명의 기운을 사방으로 발산하여 주위의 모든 것을 생명의 자장으로 끌어들인다. 이 조화의 원융상은 불교에서 말하는 화엄세계와 같고 만다라와 같다. 만다라란 부처의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우주 전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원융상으로 구성된다. 모든 생명이 차별 없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화엄의 원융상이 자연이고 자연만물이 살아 숨쉬는 웅대한 공간이 지리산이다. 다음의 시편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지리산을 바라본 것이다.
지도를 보라 이 산은 물의 태극을 그린다
전라도 남원 땅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빙글 돌아
경상도 남강으로 가고
경상도 하동 땅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빙글 돌아
전라도 섬진강으로 간다
빙글 돈다
빙글 돌아도 아주 돌지는 않고 산맥을 끼고
태극의 반쪽만큼만 돌아 보이고
남해 바다. 그 커다란 만다라 속에서 만나
둥글게 출렁인다
내 몸은 그 만다라 기슭에서
싹트고 둥글어진 물방울
지도를 보라 지리산 꼭지점마다에서
쪼끄매! 쪼끄매! 우는 새는
그냥 새가 아니다
지리산 머리에 흐르는 안개는
그냥 안개가 아니다
― 이향지, 「지리산 ―삼각고지에서」전문
지리산엔 이런 나무들이 어깨동무하고 살지요.
노각나무시닥나무만주고로쇠당단풍나무사스레나무물갬나무고로쇠나무피나무전나무나래회나무미역줄나무쇠물푸레철쭉음나무진달래주목야광나무마가목까치박달구상나무산딸나무귀룽나무부게꽃나무뽕잎피나무….
나는 그들 곁에서 살며, 날며, 두 귀로 하늘 만지는 까투리지요.
지리산 고원엔 이런 풀꽃들이 향기를 나누며 살지요.
호오리새터리풀강활처녀치마동의나물참별꽃개별꽃비비추산오이풀구절초칼잎용담투구꽃미역취참취단풍취곰취떡취어수리모시대얼레지….
나는 그들 틈에서 놀며, 달리며, 햇살 나르는 다람쥐지요.
(중략)
오늘 나는 그것들을 골고루 껴안고 비추고 싶은 아침햇살이지요.
높거나 낮거나 길거나 짧거나 움푹 꺼졌거나 높이 드러났거나 아름답거나 덜 아름답거나 환하거나 어둡거나 여리거나 강하거나….
가리지 않고, 탓하지 않고,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하늘 아래서, 하나의 지리산을 이루었지요.
― 이향지, 「지리산 ―벽소령에서」부분
3.역사의 공간
지리산은 호남과 영남의 중요 지역을 껴안고 있기 때문에 그 주변에 오랜 전통이 배어있는 반촌 부락이 많아서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또 웅숭깊은 자락마다 사찰과 유적이 많아 선인들의 유풍과 법도를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리산은 역사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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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학』2003년 여름호/『거창문단』2003년 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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