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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내 눈앞의 전선], 삶의 심연과 미적 섬광  

현대시 2003년 3월호
현대시 리뷰/이향지 시집 『내 눈앞의 전선』

삶의 심연과 미적 섬광



   이 창 민 · 문학평론가


이향지 시인이 정월에 『내 눈앞의 전선』을 '천년의 시작'이란 출판사에서 펴냈다. 읽고 나니 주저 없이 좋은 시집이란 판단이 선다. 미각과 감동, 문채와 의미를 고루 갖췄으니 훌륭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문에서 지기 시를 '질문'이라고 규정하고, 시를 '각(覺)'으로 간주하는 이에게는 낯설게 보이고, '언(言)'이라 생각하는 이에게는 미래로 여겨지리라 추측했는데, 작품 내용이 이에 부합하니 빈말이 아니다. 그런데 시인의 말은 회갑을 지낸 나이나 시인으로서의 연조를 감안하면 이채롭다. 적지 않은 시인들이 이 정도에 이르면 질문보다는 대답, 생소함보다는 친숙함, 미래보다는 현재나 과거를 요강처럼 표명해왔으니, 시는 종당 깨달음에 이르거나 문장으로 다한다는 것이다. 각성에 도달하거나 언어로 마감하는 시가 드물지 않아, 전자는 선시에 접근하고 후자는 순수시를 지향한다. 선시는 예로부터 이어오는 전통적인 양식으로 그 가치를 인정치 않을 수 없고, 순수시는 이십 세기에 들어와 만들어진 갈래지만 현대시의 지형 안에 확고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향지 시인이 쓴 '각'이니 '언'이니 하는 말은 이 같은 범주 자체를 겨냥한 것은 아니고, 다만 그런 양식을 빌려 대답할 수 없는 문제에 대답하려는 태도를 부정한다. 대답은 불가능하고 질문만이 가능한 시의 대상은 무엇일까? 이 시집의 문맥을 따르자면, 그것은 삶이다. 여기서 삶은 대답 없는 질문이고, 해답 없는 물음이다. 시로서 삶에 답을 제공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일정한 관념형태를 제기하거나 특정한 신념 형식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나니, 이렇게 되면 깨달음으로서의 시건 언어로서의 시건 간에 관념시에 근접한다. 삶은 결코 관념일 수 없으니 관념시는 삶의 맥락을 빗나가기 쉽다.
 기존의 질문에 맞추어 현실을 설명해 내는 것은 '주의(主義)'이고, 기존의 해답을 부정하고 현실을 문제화하는 것은 과학인데, 현실의 인지 형식으로서 문학은 전자보다는 훨씬 후자에 가깝다. 과학과 문학은 다 대상에 대해 안다고 주장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전에 없었던 질문을 새롭게 만들어 낸다. 추상적 개념과 구체적 감각에 의거한다는 차이는 있을지라도, 양자는 공히 대답을 변주하지 않고 질문을 갱신하는 데 주력한다. 강령도 그럴듯한 시가 될 수 있고, 교리도 훌륭한 시가 됨은 물론이다. 하지만 형식 없는 삶을 질료로 삼아 질문을 제기하려 하지 않고 대답을 제시하고자 한은 시가 좋은 시가 되기는 어렵다. 이 시집에도 「그림자의 언덕」처럼 '대답'이 중요한 시어로 등장하는 시가 있지만, 그 시의 배경은 현실을 벗어나 있고, 인물은 실제와 거리가 멀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어느 새벽 어두운 숲에서 화자는 언덕을 오르는 세 사람을 먼저 만나고 이어 그들을 찾는 또 한 사람을 만난다. 중세의 수도승처럼 검고 긴 만티카 차림을 하고 침묵으로 언덕을 오르는 이들은 모두 '지나간 것들' 혹은 '지나간 것들의 그림자'이다. 그 숲에서 화자는 자신의 위상이 다만 바라보는 자, 단지 대답을 듣는 자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꿈일 수도 있고, 환각일 수도 있고, 상상일 수도 있으며, 허구 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라면 삶의 주체로서 시인은 행위하고 질문하는 사람이 된다.
 시작 대상과 방법으로 대략 나눠보면, 이향지의 시는 생활 서술과 풍경 묘사로 갈라져 전자는 삶의 단면을 부각하고, 후자는 미적 현상을 포착한다. 「청동벽걸이」란 시에는, 그것이 시간의 거울이며, 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나와 나를 깨우는 나를 함께 인지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른 작품에서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주로 삶의 기억 속으로 침투하고, '나를 깨우는 나'의 시선은 풍경의 이면을 가로지른다. 일반적으로 풍경 묘사에서는 시간이 문제되지 않으니, 이 시에서 시간의 거울을 통해 보는 것은 "허공 속에 붐비는 삶의 구멍들"과 "한 여자를 가로질러간 삶의 무늬들"이다. 삶은 순간순간 사람의 몸과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며 지나간다. 「소극적인 대책」에서 삶은 '관(管)'같다고 하고, 사랑을 '관(棺)'같다고 한 후, "관(管)을 관(棺)으로 삼기엔 너무 좁지 않느냐"고 묻는다. 삶은 어둡고 옹색한 긴 터널과도 같아 빠져나가기 어렵다. 그 속에서는 앞으로 기건 뒤로 기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관의 입구는 밝고 둥근데 출구도 그러하다. 관이 삶이니 입구와 출구 밖은 죽음이다. 삶은 어둡고 모난 것이고 죽음이 오히려 밝고 둥글다는 생각도 일리가 있으나 그렇다고 삶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시의 물음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대해 속의 고깔모자」에 나오는 한 구절과 상통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삶이 아무리 보잘 것 없더라도 "죽음보다 삶이 덜 지루하다."
 우연에 가까운 「오래된 칼」에 따르면 삶은 스스로 마모시키는 과정이다. 두텁고 날카로운 다섯 치의 날을 가진 칼이 죽은 고기를 썰어 이가 빠지고 둔해진다. 자꾸 칼을 갈아 다섯 치의 칼날이 점점 짧아져 두 치도 안 남는다. 머지 않아 칼은 한 치도 안 남을 것이고 끝내 자신을 겨눌 것이다. 필연의 사슬에 얽매인 삶은 욕구와 충족, 생산과 소비라는 원환을 그리며 스스로를 소모한다. 「모래 위의 귀향」에서 시인은 밀물과 썰물로 모래밭을 고르는 바다를 보며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열 번이나 되풀이되는 '일하라'는 명령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일'은 유기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대해 규정되는 반복적인 노동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바다의 노동은 만조를 이룰 때까지 쉬지 않고, 인간의 노동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삶의 바탕은 신체의 유지이니, 노동은 자연이 부과하는 필연성이다.  「심연을 먹어치우는 벌레」와 「봄」에서 시인은 삶을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과 올라가지도 넘어가지도 못할 항아리에 비유했다. 어느 것이 되었든 인간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눈도 귀도 없지만 나비가 되기 위해 애벌레는 나뭇잎을 갉아야하고, 어른이 없는 집에서 어린 계집아이는 싫어서 울면서 보리밥을 먹어야 한다. 삶의 가치는 삶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을 위한 노동이 소비를 위한 생산과 생산을 위한 소비의 순환에 그치듯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삶은 재생을 위한 고통스러운 소모와 소모를 위한 즐거운 재생이라는 순환을 벗어나지 못한다. 시인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삶의 자취들은 어느 것이나 이러한 마모의 과정을 표상한다. 삶의 철학이 알려주는 대로 삶이란 자기 반성을 통해 규정되는 현상이니, 시인 또한 삶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그런데 개인의 삶은 하나의 가족에서 비롯되어 다른 하나의 가족으로 끝나므로, 여기에는 가족에 대한 기억이 포함된다.                      
 「바지랑대 하나에」에서 시인은 바지랑대를 지키는 집보게로 등장한다. 바지랑대 하나에는 온 식구의 빨래가 매달려 저마다 눈물을 떨군다. 「이명」에서 그는 한 학기에 한 마리씩 돼지를 팔아 대학을 다니는 처녀가 된다. 돼지를 밀도살하라고 뒷마당을 빌려주는 집에서 자취를 하며, 돼지 국물을 얻어 마시고 애인을 기다린다. 팔려 가는 돼지와 죽어 가는 돼지의 울음소리가 지금도 귀를 울린다. 「창 없는 겨울이 지나간다」에서 어머니는 초가지붕 밑에서 포대기를 꿰매다 허벅지를 찔리고, 토막 촛불을 모았다가 모두 딸에게 준다. 왜 어머니는 허벅지를 찔린 후에야 등잔의 심지를 돋우었는지, 왜 딸은 그 지극한 불빛 아래서 연애소설만 읽었는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호생약국(好生藥局)」에서 아버지는 가로수처럼 늙어가며 도무지 팔리지 않는 약병들을 혼자 지키다 캄캄하고 아득한 계단을 내려온 딸이 약국에 들어서면 반대로 계단을 올라 기원으로 들어간다. 호생약국 위층에는 종일 기원이 있고, 그 옆에는 평화여관이 있다. 호생이 좋은 삶인지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인지 여자가 아들을 안고 산다는 것인지 '좋구나 사는 일'이란 뜻인지를 물으면 아버지는 큰손으로 딸의 머리만 헝클어 놓는다. 아버지에게 호생은 정주의 거처여서 그 위에서 천천히 복기나 하고 싶어 하지만 딸에게도 그런 것은 아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약이나 파는 호생을 벗어나 빨리 자신의 계단을 오르기를 꿈꾼다. 이런 것들이 "한 여자를 가로질러간 삶의 무늬들"이다. 이런 삽화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하지만 그것들을 가로질러 어떤 의미가 관통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여기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할 수가 없는데, 이것들이 없으면 자연의 순환과 생식에서 벗어난 인간에게만 고유한 인생이란 이름의 삶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는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지에 대해 답할 수는 없지만 그 대답을 이것들 밖에서 찾을 수는 없다. 「더그매」의 마지막 문장, "나는 모순을 이고, 모순을 밟고 간다"는 말이 가리키는 바가 이러한 삶의 속성일 것이다. 이 시집에는 예순 한 편의 시가 실려 있지만 '시'란 낱말은 바로 이 시에 단 한 번 나온다. "나는 그의 고통을 양식으로 나의 고통을 시(詩)로 쓴다." 마지막 연은 이 문장으로 시작해 앞의 문장으로 끝난다. 삶은 고통이자 모순이다. 그는 모순을 감수하며 고통을 시로 쓴다. 삶에 대한 이같은 시인의 태도나 의식이 명료한 비유로 형상화된 작품으로 「밥으로 죽 끓이기」가 있다.


    죽을 다 먹은 뒤,
    복작대던 냄비 안과
    빈 숟가락을 들여다본다
    텅 빈 뱃전에 비스듬히 기대있는 노 하나

    주변도 중심도 물도 기름도 밥도 죽도
    사라진
    둥근 배 안

    나는 다시 노를 든다, 앉았던 항구를
    두 삿대를 일으켜 밀어낸다

    식탁, 이 불멸의 항구를 찾아
    어깨가 처져서 돌아올 저녁 뱃사람들을 위해


형식도 없고 의미도 알지 못하는 삶을 질료로 삼은 작품은 거의 다 괜찮은데, 그 중에서 「밥으로 죽 끓이기」가 가장 좋다. 이 시는 두 장으로 되어 있고, 첫 장은 냄비 속 물이 끓기 시작해 풀리지 않는 참기름을 떠내기까지 죽 끓이는 과정을 서술한다. 세상은 일기를 알 수 없는 풍랑 이는 바다이고, 사람은 거기서 고기를 잡는 어부거나 교역을 하는 상인이다. 집은 삶을 위해 세상을 떠도는 사람이 돌아와 쉴 수 있는 유일한 거처이고, 식탁은 사라져서는 안 될 항구이다. 누구도 여기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고, 누구도 이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나고, 떠나기 위해 다시 돌아온다. '불멸의 항구'라는 비유는 삶이 계속 되는 한 유효하다.
 삶의 가치란, 그것이 다른 모든 인간적인 가치의 토대와 원천이 된다는 데 있다. 삶의 중요성은, 그것이 없다면 그 어떤 가치도 불필요할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로써 삶의 의의가 구명되고, 가치 판단의 준거로서 의미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삶의 무상함마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출항과 회항, 출행과 귀환을 아무리 반복해도 삶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존재는 결국 부재로 귀결될 뿐이다. 무엇이 삶의 가치를 보장하면서 그것을 무상함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을까? 이것은 오래되고도 어려운 질문이다. 이향지 시인은 타인의 기억과 의식이 삶의 무상함을 덜어줄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내가 남을 기억하고 남이 나를 기억함으로써 삶의 실재성이 보장되고, 내가 보는 것이 남이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의식이 세계의 실재성을 보장한다. 복수의 인간 사이에 성립하는 이 같은 공통 영역을 가능케 능력을 철학자들은 공동감각이라 부른다. 「노파」와 「우연」과 「내 사랑은」이란 시는 모두 부부관계를 축으로 삼고 있는데, 그들 간의 기억과 의식, 애정과 배려는 개인에게는 덧없음으로만 작용하는 시간의 압력을 최소한으로 약화시킨다. 부부로서 함께 한 시간이 서로의 기억과 의식 속에 누적되어 개별적인 삶의 무상함이 덜어지는 것이다. 결혼이 대가없는 사랑의 결실이라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일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은 계약이자 타협이므로 지배와 억압의 수단으로 유용하다. 하지만 결혼의 효용이 이것으로 다한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다. 결혼의 신비는 계약과 타협에서 화해가 싹트고, 지배와 억압이 의존으로 변하는 데 있다. 결혼은 분명 체계적인 생활의 질서이나 그것은 또한 삶의 덧없음과 죽음에의 두려움을 함께 이겨나가는 연대이기도 하다. 「돌 속의 넓은 풀밭」이나 「감을 깎으며」에 표상 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공동감각의 차원에서는 부부관계를 대치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은 중요한 것이지만 모성은 개별적 인간의 본능이고, 자식은 한 몸이나 진배없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부모는 종의 수준에서 삶의 무상함을 극복한다.
 죽음은 결코 덧없는 삶을 이겨내는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여기는 까닭에 이향지 시인은 죽음에 대해 불필요한 관심을 표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대립항이 아니라 삶의 부재일 뿐이다. 이 시집에서 삶에 대립하는 질료는 죽음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다. 앞서서 분류한 대로 미적 현상으로서의 풍경이 삶의 단면으로서의 생활에 대비되어 시집의 중심선이 형성되는 것이다.


    연꽃 한 송이 돌 속에 꽃 핀 몸을 새겨 넣을 동안

    새 한 마리 돌 속에 나는 몸을 새겨 넣을 동안

    소나무 한 그루 돌 속에서 달빛 두르고 걸어나올 동안

    대나무 한 그루 돌을 뚫고 구름에서 일어설 동안

    내가 뻘 속에 주저앉아 진흙 꽃봉오리나 밀어내고 있을 동안


참으로 아름다운 이 시는 시집 첫 머리에 실린 「낙관」이다. 시집 전체의 맥락에서 판단하면, 이 시가 아름다움 이유는 삶의 간섭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낙관은 현실적인 삶의 지형에서 벗어나 있는 양식이다. 그것은 삶의 기명 형식이 아니고 예술의 서명 형식이다. 이 시  속에 흐르는 시간은 찰나일수도 있고 영원일수도 있으나, 어느 것이라도 생활을 끌고 가는 시간 단위로는 소용이 없다.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무상한 인간 삶의 소모 과정에서 벗어나 있다. 「동백」이 그러하고, 「떠난 새집」이 그러하다. 「찔레」가 그렇고, 「화몽(花夢)」 이 역시 그렇다. 「잠깐 본 항아리」에 말해 놓은 대로 '보시기에 아름다울' '눈부심'과 '황홀'과 '신생의 모습'은 아주 잠깐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이유를 시인은 「내리는 눈발」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떠한 순수의 빛도 결국 내리고 있을 동안이다" "저 분분한 지상(地上)을 껴안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빙점(氷點)을 유지하라!"
----------<현대시> 2003년 3월호. 게재.

*이창민/문학평론가. 고려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9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양식과 심상」「전통과 맥락」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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