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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1/6(월) 16:37 (MSIE5.5) 218.155.236.95 1024x768
[시집/해설] 말, 시간이 빚어낸 능청스러운  

*시집 [내 눈앞의 전선] 해설

 

말, 시간이 빚어낸 능청스러운



                                                     문 혜 원 (문학평론가)

 시집은 쫀득쫀득하다. 오랫동안 푹 삭힌 젓갈처럼 간이 잘 배었다. 아마도 그것은 시집이 나오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숙성된 난숙함일 것이다. {구절리 바람소리}가 1995년에 출간되었으니, 2001년 '산시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을 예외로 한다면, 7년만에 나온 시집인 것이다. 그렇게 나온 그녀의 시들은 교묘하고, 능청스럽고, 넉넉하다.
 시집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노파'라는 단어가 맴을 돌았다. 할머니, 할멈, 노인이라는 단어들과는 달리, '노파'라는 단어는 나이가 많다는 중립적인 의미 외에 교묘함, 능수능란함, 앞날을 꿰뚫어보는 예지의 능력 혹은 축복과 저주의 능력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백설공주를 찾아간 왕비가 扮한 것도, 여신 헤라가 제우스와 관계한 여성을 찾을 때 扮한 것도, 모두가 이 '노파'의 형상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장차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될) 아이에게 저주를 내리는 노파가 있는가 하면, 그 저주를 상쇄시켜주는 노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과 악은 인간의 가치 기준일 뿐이다. 그들이 인간을 찾아오는 것은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며, 그 경고를 무시한 인간은 하늘의 뜻을 어긴 것이므로 응당 그에 해당하는 징벌이 따른다. 이런 맥락에서 '노파'는 무당이나 점쟁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하늘과 땅, 신과 인간 사이에서 수시로 외양을 바꾸며, 그 양쪽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경계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노파'는 무언가 비밀스럽고 음흉한 듯 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누구든 그녀의 말을 들으면 귀가 솔깃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런 노파의 능란하고 절묘하게 짜여진 이야기를 듣는 느낌, 이 시집은 그런 느낌을 준다.

1.시간이라는 요술 거울
 노파의 한 손에는 시간이라는 지팡이가 쥐어져 있다. 가장 먼저 실려있는 시 [낙관]은 보이지 않는 '시간'이라는 추상명사를 낙관에 새겨져 있는 무늬로 가시화한 솜씨가 돋보인다.  

    연꽃 한 송이 돌 속에 꽃핀 몸을 새겨 넣을 동안

    새 한 마리 돌 속에 나는 몸을 새겨 넣을 동안

    소나무 한 그루 돌 속에서 달빛 두르고 걸어나올 동안

    대나무 한 그루 돌을 뚫고 구름에서 일어설 동안

    내가 뻘 속에 주저앉아 진흙 꽃봉오리나 밀어내고 있을 동안
                                   - [낙관] 전문

 연꽃 한 송이가 돌 속에 꽃핀 몸을 새겨 넣거나 소나무 한 그루가 돌 속에서 달빛을 두르고 걸어나올 '동안'은, 현실적으로 보면 낙관을 새기는 시간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표면적인 의미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마지막 연에서 선명해진다. '내가 뻘 속에 주저앉아 진흙 꽃봉오리나 밀어내고 있을 동안'은 낙관을 새기는 것과는 무관한 상징적인 시간이다. '진흙 꽃봉오리'는 1연의 '연꽃'과 연결되면서 불교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뻘'이 현재의 시간을 상징한다면 '꽃봉오리'는 영겁을 의미하는 연꽃이며, '진흙 꽃봉오리'는 '진흙'으로 상징되는 현세와 '연꽃'으로 상징되는 영겁의 시간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뻘 속에 주저앉아 진흙 봉오리를 밀어내는 나'의 자리는 현세이면서 동시에 영겁을 넘보는 경계의 자리인 셈이다.
 현실과 영겁이 교차하는 시간적인 특징은 修辭的인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각각의 연을 마감하는 '동안'이라는 부사는 '언제부터 언제까지'라는 시작과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즉 '잠을 자는 동안', '네가 없는 동안' 등 헤아릴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비교적 구체적이며 한정된 시간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부사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개의 연의 내용은 불가능한 상황의 연속이다. 연꽃 한 송이가 돌 속에 꽃핀 몸을 새겨 넣거나 대나무 한 그루가 돌을 뚫고 구름에서 일어선다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섯 개의 연을 마감하는 '동안'은 이처럼 측량 불가능한 관형절과 연결됨으로써 그 자체가 모순어법을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은 수사적 장치는 고려가요 [정석가]를 연상시킨다.

    무쇠로 황소를 만들어다가
    무쇠로 황소를 만들어다가
    쇠나무산에 놓습니다
    그 소가 쇠풀을 먹어야
    그 소가 쇠풀을 먹어야
    유덕하신 님 여의고 싶습니다
                   - [정석가] 5연

 무쇠로 만든 황소가 쇠로 만든 풀을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불가능한 일을 조건절로 내세운 것은, 뒤의 서술부분('유덕하신 님 여의고 싶습니다')이 불가함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과장어법이다. [낙관] 역시 애초부터 불가능한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는 면에서 이와 유사한 발상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석가]의 불가능성이 主文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데 비해, [낙관]에는 '-한다'에 해당하는 主文이 없다. 불가능의 상황들만이 '동안'이라는 시간부사와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불가능한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을 이루기까지의 시간은 사실상 무한인 것이다. 계량할 수 있는 만큼의 시간 부사인 '동안'은 불가능한 상황들과 결합되면서 영원의 시간으로 탈바꿈된다. 불교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찰나'에 해당하는 '동안'이 영겁의 시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향지는 현실과 초월, 찰나와 영겁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어놓기도 한다. "날아가야 하는데 날아가야 하는데/ 날개는 장마보다 멀리 있네요"([봄])에서, 날개가 멀리 있다는 것은 공간상의 거리감이다. 그 공간상의 거리감을 시인은 '장마보다 멀다'고 표현한다. 지금 시점은 봄이므로, 이 봄이 다 가고 여름이 오고 깊어져서 장마가 오는 그 시간만큼보다도 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공간적인 거리감은 시간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자주 나타나는 비약과 생략 또한 계량화된 시간의 흐름을 가로지르는 방식이다. 예컨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은 달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달의 움직임은 홈통을 통해 본 풍경의 변화로 대체된다. "홈통 밖은 부서진 달빛만 자자하다"가 "한번 더 실눈을 뜨고 홈통 속 들여다본다/ 달은 없다, 구멍뿐이다"([둥글고 환한 구멍])로 바뀌는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시간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2
    죽을 다 먹은 뒤,
    복작대던 냄비 안과
    빈 숟가락을 들여다본다

    텅 빈 뱃전에 비스듬히 기대있는 노 하나

    주변도 중심도 물도 기름도 밥도 죽도
    사라진
    둥근 배 안

    나는 다시 노를 든다, 앉았던 항구를
    두 삿대를 일으켜 밀어낸다

    식탁, 이 불멸의 항구를 찾아
    어깨가 처져서 돌아올 저녁 뱃사람들을 위해
                          - [밥으로 죽 끓이기] 부분

 그런가 하면 현실의 시간은 시인의 생각 속에서 잠시 정지했다가, 어느 순간 진저리치며 다시 이어지기도 한다. 이 시의 앞부분에서 그녀는 밥에 물을 붓고 끓는 양을 바라보면서 "지켜서서 바닥을 저어주며 끝내 떠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식구들을 위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일어난다. 시간은 죽을 끓여먹는 짧은 순간(밥으로 끓인 죽이라는 것에 유의할 것) 정지했다가, 저녁밥을 지어야 하는 현실로 다시 연결된다. 아니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시인이 그 흐름을 잠시 망각했을 뿐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정지한 동안, 시는 전혀 다른 상상력의 영역으로 성큼 넘어가 있다. 죽을 담고 있던 냄비는 배가 되고 숟가락은 배를 젓는 노가 되며, 식탁은 고단한 뱃사람들인 식구들이 돌아와 기댈 항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죽을 끓이는 일상적인 행위는 고단하고 쓸쓸한 이들이 서로 기대어 사는 인생의 한 장면으로 연결된다. 여기에 개입되어 있는 것 또한 시간이다. 그녀의 시에서 시간은 추상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 공간적인 거리를 측량할 수 있는 척도가 될 뿐만 아니라, 상상력의 수평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요술거울과도 같다.      

2. 거울을 밀고 들어가기
 요술 거울을 밀고 들어가면 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요술거울에는 무언가를 비추어본다는 일상적인 쓰임새에 다른 기능이 첨가되어 있다.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쁜가를 말해준다든지, 멀쩡한 키를 축소시켜 난장이를 만든다든지. 그런가 하면 비밀스러운 지하통로로 연결되는 입구는 십중팔구 책장이나 거울 뒤에 있다. 또, 커다란 거울을 바닥에 놓고 내려다보면 거울은 마치 심연을 감추고 있는 물처럼 일렁인다. 그것이 거울의 깊이이며 곧 상상력의 깊이이다. 시인은 시간이라는 요술거울을 살며시 밀고 들어간다.
 공교롭게도 이 시집의 3부의 제목이 '거울'이다. 제목에 걸맞게 3부의 앞부분에 놓인 시들은 시각적으로 역상의 형태를 그려 보인다. [무채색의 새벽]은 맨 아래 행에 있는 '거울'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분수 모양의 형태를 이루고 있고, [창 없는 겨울이 지나간다]는 '창 없는 겨울이 지나간다'는 구절을 행과 행 사이에 배치해서 상하와 좌우가 동형을 이루도록 되어있다. 그 거울을 통과해서 들어간 곳에, '어린 나'가 있다. 꽃신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나([봄]),아버지 대신 약을 파는 나([好生藥局]), 바지랑대를 지키는 나([바지랑대 하나에])….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며 엄마를 그리워하던 '어린 나'([이 무거운 아버지를])는 자라서 엄마가 되고, 딸을 낳고, 다시 그 딸이 딸을 낳는다. 내 무릎을 파서 아이를 심고([봄 둘]), 다 자란 아이를 애지중지 보듬어 안고([감을 깎으며]), 그렇게 키운 자식들에게 버림받으면서([엄마의 풍선을 찾아가는 풍선의 노래]) 자신의 '여성'을 대물림한다. 이런 부분에서 이향지의 시는 다른 여성 시인들의 여성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해석을 보인다. 여성은 여성의 몸을 빌려 태어나고, 나면서부터 그 운명을 물려받고, 그러면서도 엄마와 닮은 자신의 운명을 부정한다.

    나는 어머니를 찢고 들어왔지요
    어머니 피로 첫 옷을 입었고
    어머니 비명으로 첫 귀를 열었고
    어머니 손가락으로 첫 눈을 떴고
    어머니 숟가락으로 첫 밥을 먹었지요
    내 피가 내 아이의 첫 옷이 될 때까지
    그 안에서 무럭무럭 자랐지요
    누군가를 찢지 않고는 미궁 벗어날 수 없나니
    나는 내 아이가 때맞춰 나를 찢게
    긴 끈을 풀밭 입구까지 이어두었지요
    내가 찢고 미궁 벗어날 때 어머니 물
    모두 나를 따라와 내 딸에게로 갔지요
    어머닌 나로 인해 질긴 돌이 되었으나
    나와 내 딸이 붙잡고 빠져 나온 긴 끈
    질기게도 아직 그 풀밭 어귀에 이어져 있지요
    질긴 어머니 잘 찢기지 않지만
    반 쪽 거울 들고 오는 발가숭이에겐, 이처럼
    쉽게 돌이 되어 넓은 풀밭 이어가지요
                          - [돌 속의 넓은 풀밭] 전문

 어머니의 몸을 찢고 나온 나는 딸에게 몸을 열어주고, 딸은 또 그녀의 딸에게 몸을 열어줄 것이다. 나라는 생명을 키운 밭이었던 어머니의 몸은 양분을 다 빼앗겨 질긴 돌이 되었지만, 그것이야말로 생명을 탄생시킨 넓은 풀밭이다. 나의 몸을 찢고 나온 딸은 나의 몸을 통해 넓은 풀밭 즉 할머니와 연결된다. 어머니라는 넓은 풀밭 안에 내가 있고 내 딸이 있다. 이러한 반복은 나와 내 딸을 품고 있는 어머니(할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어머니 역시 그 어머니의 넓은 풀밭 안에서 자라난 딸이기 때문이다. 모든 여성은 이처럼 몸에서 몸으로, 하나의 긴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돌처럼 질기게 살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쉽게 몸을 열어주는 것은, 결국은 같은 몸이기 때문이다.
 희생과 헌신의 이미지, 생명을 출산하는 몸으로서의 여성끼리의 연대감,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서로를 사는 방식 등은 다른 여성시인들에게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테마이다. 성별의 특성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체험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체험의 진실함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그녀만의 특별한 개성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의 시가 돋보이는 것은 보편적인 '여성성'에의 동의가 아니라, 그 여성성이 그녀 자신에게 어떻게 육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목욕을 하고 있으면 먼바다. 등을 밀어준다 먼바다가 등을 밀 동안 나는 손등. 문지른다 물장구치는 불빛 속에 쪼그리고 앉아 손등. 문지르고 있으면 따뜻한 물. 차 오른다 거꾸로 서서 신음하며 미로를 통과한 물. 머리에 계속 쏟아진다 내 머리에 계속 쏟아지는 물은 맑고 투명한 탯줄. 나는 투명한 탯줄 끝에 전신을 매달고 부글거리는 거품. 씻는다 나는 탯줄에 매달린 채 거품. 씻어주고 씻는 자. 미끈거리는 양막. 다 벗고 나서 수도꼭지를 잠그면 끝없이 딸려 나오던 탯줄. 뚝 끊어진다 먼바다는 끊어진 탯줄과 함께 벽. 속에 남는다 나는 끊긴 탯줄. 말라서 떨어질 때까지 타월. 속에 있다 아니다 벽. 속에서는 먼바다가 혼자 태반을 낳고 나는 타월 속에 젖은 배꼽을 남기고 마른 옷. 속으로 들어간다 먼바다는 남은 탯줄. 다시 돌아간다
                              - [바다 밖에서의 목욕] 전문

 '나'는 목욕을 하고 있다. 쪼그리고 앉아서 손등을 문지르고, 비누칠을 하고, 샤워기를 틀어놓고 물줄기로 거품을 씻어 내린다. 탯줄을 통해 몸 안의 아이를 키웠던 나의 몸에 연결되는 또 하나의 탯줄.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줄기는 먼바다와 연결된 것이다. 바다는 자궁과 생산과 모태라는 원형적인 상징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관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도꼭지를 통해 내 몸에 쏟아져 내리는 물로 감각된다. 샤워기는 모양의 유사성에서 탯줄과 연결된 단순한 비유인 것처럼 보이지만, 일반적인 상징인 '바다'를 '나'의 몸과 연결시키는 육체화의 고리이다.
 일반적인 원형 상징인 '바다'는 수도꼭지를 통과하며 내 탯줄이 되고 그 끝에 '나'를 연결시킨다. 産道를 따라 내려오는 태아("거꾸로 서서 신음하며 미로를 통과한 물"- 꼬불꼬불한 수도관을 돌아나오는 물)는 자궁 문턱에 있다.("투명한 탯줄 끝에 전신을 매달고 부글거리는 거품" - 비누칠을 한 몸) 이윽고 태아가 나오고, 탯줄이 끊어진다. ("미끈거리는 양막∼탯줄. 뚝 끊어진다" - 거품을 씻어내고, 샤워가 끝나 수도꼭지를 잠갔다) 태아는 이제 모태와 완전히 분리되었다.("먼바다는 끊어진 탯줄과 함께 벽. 속에 남는다 - 수도꼭지를 잠그자 샤워기의 물이 그쳤다) 태아의 독립된 생의 시작이자, 그 몸의 원형인 바다와의 잠시의 조우의 끝.("나는 끊긴 탯줄. ∼벽 속에서는 먼바다가 혼자 태반을 낳고") 그러므로 이 목욕은 어미 몸으로부터 분리된 태아가 세상에서 하게 되는 최초의 목욕과 같다.
 이 시의 제목이 '바다 밖에서의 목욕'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이 제목은 은연중에 '바다 안에서의 목욕'이 당연한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생명의 원형인 바다 혹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는 상태가 가장 안정적인 것이라면, 지금의 나는 바다를 벗어나 있는 상태에서 원래의 바다(어머니의 자궁)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나'는 "씻어주고 씻는 자"이다. 즉 샤워기처럼 쏟아지는 탯줄을 통해 물을 맞는 '씻는 자'인 동시에 내 안에 탯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씻어주는' 자이다. 이향지는 이 한 구절로 모태로서의 자아와 더 큰 모성에 안겨있는 자아라는 이중성을 명쾌하게 貫해버린다. 생명의 원형인 바다는 다시 돌아가 생명을 품는다.("먼바다는 남은 탯줄. 다시 돌아간다") 여성의 몸이 태아를 출산하고 다시 원래의 몸으로 되돌아가듯이. 바다는 '나'의 몸을 품고 있는 거대한 태반이면서 동시에 '나'의 안에 있고, '나'는 끊임없이 바다로 회귀하는 몸이면서 또한 바다를 품고 있는 몸이다. 이향지는 이처럼 복합적이고 순환적인 여성성을, 관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몸이 익힌 언어로 표현해낸다.  
 이 여성성은 남성과 적대적이거나 남성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라 그 모두를 싸안고 있다. 그녀의 시에서 남성과 여성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기대는 관계이다. 뼈가 부러진 아내를 위해 우족을 씻고, 젖은 홍화씨를 볶는 어깨가 구부정해진 남편([내 사랑은])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남성 대 여성이라는 강파른 이분법은 보이지 않는다.

    깊은 우물 옆에는 단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단감나무는 갈비뼈가 하나 더 모자랐다
    늑막염을 오래 앓다 오래 전에 죽었다
    단감나무 자리에는 작은 창이 있는 방을 만들어
    밤마다 불빛을 걸어둔다  
                     - [노파] 부분

 남편이 죽고 난 후 홀로 남은 노파는 밤마다 그 자리에 불빛을 걸어둔다. '단감나무'에 비유된 노파의 남편을 '갈비뼈가 하나 더 모자랐다'고 표현한 부분에서는 대상에 대한 연민이 가득 느껴진다. 이 구절은 아담의 갈비뼈로 여성을 만들었다는 성경의 이야기와 늑막염을 앓았다는 현실적인 상황을 한데 묶어놓은 것이다.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는 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한 지위 혹은 기득권을 보장하는 것처럼 해석되기도 한다. 갈비뼈가 '하나 더' 모자랐다는 표현은 그처럼 왜곡된 해석을 조롱하면서 남성에게 둘러씌워진 권위와 힘, 강건함이라는 허울을 벗겨낸다. 늑막염을 앓다가 죽은 남편은 병들고 아파서 죽는 연약한 인간일 뿐, 더 이상 여성 위에 군림하는 강자가 아니다. 부부란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며 익숙해져서 서로를 자신의 일부로 느끼게 되는 관계이다. 그들이 갈등과 대립의 관계를 넘어서 편안해지기까지 개입되는 것 역시 시간이다.

3. 오래된 '노파'의 말
 여성성과 더불어 이 시집에서 주목되는 또 한가지 특징은 육체성이다. 그것이 단지 생명을 배태하고 길러서 세상으로 내보내는 여성으로서의 체험을 말하는데 그쳐있다면, 육체성이란 진부하기 그지없는 테마일 것이다. 그녀의 시가 다른 여성시인들과 구별되는 것은 육체성을 가장 육체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절묘한 능력 덕분이다.

    달빛이 부서진다
    달빛이 부서진다
    삼복 날 부채같이 훌렁거리는 개꼬리에 감겨
    섣달 보름 둥근 달빛이 부서져 내린다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니 얼음이 쩍쩍 붙는 밤

    자정에 개밥 주러 나온 게으른 여자가
    냄비바닥에 들러붙은 젖은 밥알을 긁을 때
    스테인레스 숟가락 등에 부딪쳐 부서져 내린다
    숟가락 목으로 탁탁 쳐서 끈끈한 밥알을 떨굴 때
    숟가락 자루 쥔 손등에 걸려 부서져 내린다
                           - [둥글고 환한 구멍] 부분

 가장 빼어난 시편 중의 하나인 이 시는, 그녀의 시에 나타나는 육체성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부분은 마치 마루야마 겐지의 [달에 울다]를 연상시킬 만큼 육감적이다. 그녀의 언어 속에서 섣달 보름의 달빛은 훌렁거리는 개꼬리에 감겨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내려앉는다. 그것도 '삼복 날 부채같이 훌렁거리는 개꼬리'이다. 밥그릇을 가지고 나온 주인을 보고 꼬리치는 개의 모양이 눈에 보이는 듯이 선명하다. 또한,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니 얼음이 쩍쩍 붙는 밤'이라는 구절을 읽으면, 드라이아이스를 손으로 만졌을 때와 같은 화끈한 차가움이 순간 손끝을 시리게 한다. 의미를 이해하기 전에 촉감이 먼저 전달되는 것이다. 냄비바닥에 붙은 젖은 밥알을 숟가락으로 긁는 장면 역시 숟가락을 냄비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다. 덕분에 이 부분은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을 넘어서 촉각과 청각까지를 자극한다. 농익을 때로 농익은 이 언어들은 쓰여졌다기보다 열려진 몸을 통해 밖으로 새어나온 듯한 느낌을 준다.
 능청스럽기까지 한 육화된 표현들은 시간에서 나온다. 그녀의 시에서 시간은 곧 힘이다. 낡고 오래된 것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耐性을 키우고 그럼으로써 능숙해진다.  오래되고 낡은 것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런 것이다.

    고궁 뒤뜰
    왕비가 앉았다 떠난 툇마루에 앉아
    변절한 애인을 생각할 때
    뚜껑이 덮인 우물 하나 마주 앉는다
    아무도 떠먹지 않는 물이나 넘실넘실 끌어안고
    왕비전 뒤뜰에서 늙어버린 여자
    하늘색 나무 뚜껑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래된 돌담을 두르고 마주 앉는다
    젖가슴 아래까지 차 오른 물이
    그림자일망정 왕을 담았기에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여자
    내가 잠시 허리를 굽혀 열어준다 해도
    스스로 몸을 기우려 엎질러 질 수도 없는 여자
    세상의 표면으로 길을 내어 소리쳐 흐를 수도 없는 여자
    어떤 왕이 이 그늘진 뒤뜰까지 와서
    저 깊은 가슴에 맞는 두레박을 내려줄 것인가
    반항보다는 체념에 익숙하고
    모순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여자
    뚜껑을 들추면 오늘의 하늘을 담을 수밖에

    나는 건너간다
    뚜껑 아래 여자에게 오늘의 하늘을 보여주려고
    여자 속의 왕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버리려고
    발등까지 덮이는 하이힐을 신고 감색바지를 입고

    다가가는 고통과 다가오는 고통 사이에서
    듣는 발소리
    들어올리려는 힘과 누르는 힘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악취와 암흑
    뚜껑 아래 우물은 썩고 있었다
    살아서도 죽은 것처럼 썩고 있는 여자
    완강하게 뚜껑을 잡아당기며
    악취로 대답하는 여자
    내 힘으로는 도저히 바꿔놓을 수 없는 여자
    죽어서 살기에 꼭 좋은 곳에 두고
    수수꽃다리 향기를 좇아 돌계단을 오른다
                        - [뚜껑이 덮인 우물] 전문

 이 시에는 '반항보다는 체념에 익숙하고/ 모순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여자'(우물)와 그녀의 삶을 답답해하며 탈출을 권유하는 '하이힐을 신은 나'가 있다. 그녀는 한번도 왕의 총애를  받아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그림자를 담았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아무데도 가지 않고 붙박혀 늙어간다.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세상을 향해 소리치지도 못하는 여자, 무엇이든 비춰지는 대로 아무 것이나 담는 여자. 그녀를 바라보는 '나'가 고통스러운 것("다가가는 고통")은 '나'의 안에서 그녀와 같은 맹목적인 순종의 역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려는 순간, 나는 완강하게 뚜껑을 잡아당기는 힘을 느낀다. 암흑 속에서 혼자 썩어가는 여자가, 살아서도 죽은 것과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표면상 이 여자는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을 만큼 제도와 관습에 꽁꽁 묶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바꿔놓을 수 없는' 그녀를 바깥세상으로 끌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돌계단을 오른다. .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여자가 탈출을 거부하는 것은 두려움이나 소극성 때문이 아니다. '죽어서 살기에 꼭 좋은 곳'이라는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삶은 사실상 그녀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다. 우물 밑에서 진동하는 악취는 그녀의 울분과 서러움과 한이 응축된 것이며, 고통을 묵묵히 참으며 견뎌온 그녀의 삶의 향기이다. 그녀는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는 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가 그녀를 그대로 놓아두고 돌계단을 오르는 것은 그러한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지극히 흠모하는 빛의 진액만으로 빚은 듯한 항아리를 팔에 두를 때까지, 내 오른손은 환한 계곡에서 물을 뜨고 있었다. 내 지극히 흠모하는 曲線의 세계 안에서, 뒤집어진 바다와 하늘 사이에서, 움직이지 않는 線 하나를 발견할 때까지, 환한 계곡에서 환한 바가지로 물을 뜨고 있었다. 환한 물이 담긴 바가지를 水面 위로 들어올리는 순간, 환한 바가지는 사라지고, 바가지처럼 오그린 내 손 안의 물도 나를 담고 있던 계곡도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그 바가지는 제멋대로 왔다가 제멋대로, 환한 항아리를 내 오른팔에 둘러놓고 사라진 것이다.
                            (중략)
 내 육체의 한 끝을 바닥 없는 항아리 속으로 이끌고 갔던 빛은 무얼까? 내 꿈의 전신이 뛰어들 사이도 없이 사라져버린 계곡은 왜 내게로 왔던 것일까? 어느 새벽이 에너지가 다하도록 보여준 빛과 공기의 장난들. 잠깐의 눈부심, 잠깐의 황홀. 내 어깨에 매달려 있었으나 내 팔이 아니었던 新生의 모습. 내 아픔이 사라지자 그 항아리도 사라졌다. 나는 폐경기를 넘어섰다.
                                       - [잠깐 본 항아리] 부분

 오랜 시간을 견디며 살아낸 그녀(우물)의 이미지는 폐경기에 접어든 나이든 여성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폐경기'는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 시기가 끝났음을 의미하며, 일상적인 어법으로는 '여성'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상실됨을 뜻한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이 시기에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우울증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폐경기는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는 시기가 아니라, 남녀 양성의 이분법을 넘어서며 스스로 넓어지는 계기이다. 그녀에게는 노쇠해진 육체 대신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지혜와 멀리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忍苦와 체념, 숙명 등의 현실적인 삶의 표지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무화되고,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세상이 열린다. 그녀가 잠시 보았던 '新生'은 현재와 미래, 과거가 함께 있고 현실과 꿈이 함께 있는 영역이다. 거기에서 '나이든 나'는 '어린 나'를 만나고("찔레가지 붙잡은 채 웅덩이 속 내려다본다. 찔레꽃 화관을 쓴 소녀가 물 속에서 웃고 있다." - [찔레]), 낡은 현재는 새로운 미래를 만난다. 과거를 만나는 것은 곧 새로운 미래를 보는 것이며, 미래로 가는 것은 결국 과거로 가는 것이다.([청동벽걸이])
 이 단계에 이르면, 이향지의 시들은 이미 현실 세계의 해석의 영역을 넘어선다. 오래된 시간이 투명한 항아리가 되어 오른팔에 둘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꺼번에 보이는 단계. 그것을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노파의 그것처럼 교묘하고, 능숙하고, 능청스럽다. 그녀의 능청스러움은 너무나 절묘해서, 노회함으로 변질되거나 초월 지향으로 흐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배도 섬보다 덜 흔들리고/ 모자보다 신발이 덜 고단하며/ 죽음보다 삶이 덜 지루하다"([대해 속의 고깔 모자])에서 보이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은 이러한 우려를 상당 부분 불식시킨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을 돌아다니며 그녀가 발견한 것은 결국 '인간'이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에 귀의하는 것이 상례처럼 되어있는 우리 시의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그녀의 결론은 신선함을 넘어서 경이로움까지 느끼게 한다. 그런 이유로 해서 그녀의 시는 한번 더 믿음을 가지게 한다. 그녀가 '잠깐 본 항아리'가 어떻게 육화될 것인지 기대를 걸어보는 것은, 이러한 믿음에 바탕한 것이다.  (원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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