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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리뷰/서평], 무욕의 힘으로 이루어낸 詩山
서평/이향지 시집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무욕의 힘으로 이루어낸 詩山
엄 경 희 (문학평론가)
1.
산은 크고 높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산에 오른다. 산의 거대한 몸은 수많은 길과 나무와 동물과 벌레와 계곡을 품어낸다. 그러면서 산은 저잣거리의 속된 삶으로부터 서서히 수직 상승하여 하늘 깊은 곳에 그 머리를 파묻는다. 산은 만물의 집이면서 동시에 땅과 하늘을 잇는 신성의 공간인 것이다. 우리의 자연시 전통 속에서 산이 꽃, 새, 강 등과 더불어 지속적인 시적 제재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인들은 산의 신성함에 빗대어 개인의 감정뿐 아니라 고결한 시대의 사상과 이념을, 혹은 성스러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노래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이향지의 세 번째 시집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은 자연시의 맥락을 형성하는 하나의 지류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출간된 가상 산행기 『북한 쪽 백두대간, 지도 위에서 걷는다』(창해, 2001)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듯이 이 시인의 산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할 수 있다.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또한 12년 간의 산악 체험을 바탕으로 씌어진 열정의 산물이다. 한 마디로 이 시집은 시적 언어로 그려진 산악 지도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넘어야 할 무수한 봉우리와 고개, 그리고 가야할 길과 갈 수 없는 길이 수천 갈래로 뻗어있다. 시인은 '길'에 취해 산을 넘고 또 넘는다. 그것은 이 시인에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행위이며, 삶의 의미를 되찾는 일이다. 시집 서문에 실려있는 시인의 고백이 이를 말해준다.
죽음은 내 안에서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점점 두텁게 에워쌌다. 아무도 소생을 믿지 않았고, 나 자신도 그렇게 떠밀려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정신만은 말짱했다. 그때 내 소원은 걷다가 죽는 것이었다. (……)방에서 마루로, 뜰로, 문밖으로, 길로, 더 좁고 울퉁불퉁한 길로, 전진해온 여정은 느리고도 느렸다. 그 느린 전진을 3년쯤 계속하였을 때, 길 끝에 서있는 산을 만났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죽어가는 육체를 이끌고 "방에서 마루로, 뜰로, 문밖으로, 길로, 더 좁고 울퉁불퉁한 길로", 그리고 비탈진 산으로 가기까지 한 영혼이 스스로를 다스리며 풀무질해야했던 용기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경이로움이 아닐 수 없다. 느리고도 느린 전진을 끈기 있게 견디면서 이향지가 조우하고 있는 산길의 "새로운 빛과 공기"는 그의 생생한 경험의 언어를 소생시킨 원동력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체험의 언어는 가고자하는 내적 열망이 애초에 없었다면 생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2.
'가다'라는 동사는 '의지'로부터 발원한다. 특수한 목적을 지향하든 아니면 그렇지 않든 가고자하는 마음을 갖는 것 자체는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안 보이는 저 쪽/안 보이는 저 쪽/절개지 돌 깨는 소리에/하늘 쏟아지며 왔다"(「水皮嶺의 봄」), "눈을 짚고 넘어지면 눈을 짚고 일어선다"(「北魚, 雪海에 빠지다/-고루포기산에서」), "짐이라곤 작은 물통과 비스킷 몇 조각뿐인데/해 뜨는 쪽으로 귀가 열린 창문은/그것마저 버리고 가자 덜컹거린다"(「靑峰 가는 길/-야간산행」)와 같은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이향지의 시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드러나고 잇는 지향은 '가다'이며,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의지적이다. 그러나 그의 가고자하는 의지는 어떤 목적을 향해있지 않다. '가다' 혹은 '걷다'라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는 목적이다.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위에 사로잡힐 때 인간은 더없이 무욕한 존재가 된다. 이처럼 무욕의 상태에 이르러서야 "뽀오얗게 분이 피도록 익은 팥배 한줌과/주머니에 가득한 산초 열매 향기가/해 돋도록 달려온 길의 선물"(「動樂山」)임을 無償의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스스로를 "나는 내 걸음에 취한 사람"(「動樂山」) 이라고 흔쾌히 말한다. 이와 같이 무목적의 도보가 반복될 때 그것은 자연스럽게 어떤 리듬을 내포한 미적 행위가 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향지의 시가 강한 의지를 내포함과 동시에 때로 참신한 음상징과 경쾌한 리듬을 지니게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별, 조오타!
코 고는 소리, 물 가는 소리!
별, 별, 별, 조오타!
코 고는 소리, 물 가는 소리!
―「양폭산장」부분
쯔비! 쯔비! 꽁지깃을 들어올릴 때마다, 기억의 진달래가 화들짝! 화들짝! 솔잎사이에서 핀다.
―「쌀바위 가는 길/-가지산에서」부분
우리 조카 정로가 묘문 밖에서
꿩 있다! 불러서 달려가본 그 새
꿩 있다! 소리에 놀라 날아 가버린 그 새
―「楊子山 발치에서」부분
바람이 분다.
대천 해수욕장에서 일광욕하던 바람이, 초겨울 억새머리를 흔들며 분다.
광천 토굴에서 새우젓 익히던 바람이, 처녀바위를 돌아와서 들썩들썩 분다.
보령 땅 청라 언덕에서 백합 피우던 바람이, 명대계곡 거슬러 올라 아리랑 스리랑 분다.
―「오서산에서」부분
시인은 산의 다양한 생명체들을 정물로 박제화하지 않는다. 이향지의 별, 진달래, 꿩, 바람은 생명의 활달한 리듬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살아서 움직인다. 특히 「오서산에서」는 '∼분다'가 열 한번이나 반복되고 있는데 이는 마치 라벨의 볼레로를 들을 때처럼 언제 끝날지 모르는 동일한 리듬 속으로 독자를 몰고 간다. 이러한 리듬감은 「지리산 / -벽소령에서」와 같은 작품에서도 발견되는데, 변주 없이 계속되는 동일한 리듬의 반복이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 이를 통해 이 시인의 집요한 내적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으며, 그 에너지가 끝도 없이 계속 될 것 같은 산길과 닮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즉 「오서산에서」와 같은 시에서 느낄 수 있는 리듬감이 곧 산길의 리듬이면서 동시에 밤낮 없이 산길을 걸었던 자의 생명적 리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리듬을 통해 산과 시인이 하나의 호흡으로 숨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3.
이향지의 시가 생명적 리듬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리듬이 구축하는 의미의 세계는 당연히 건강하고 긍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예순을 바라보는 그가 비슷한 연배의 시인들의 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허무나 죽음을 별로 문제삼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시인은 "내 길은 어둠으로 왔으나 빛으로 간다"(「가을 오대산」), "우리들의 뱃속이 淸明이었다"(「楊子山 발치에서」)라고 산행체험에서 얻어진 정신의 밝음과 맑음을 고백한다. 이러한 그의 시의 건강성은 지극한 생명들과 접촉함으로써 얻어지며, 세속의 공간에서 발견할 수 없는 미적 가치와 교감할 때 획득된다. 이 모두가 가고자 하는 의지가 바탕이 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가고자 함은 또한 '멈추다'와 균형을 이룰 때 지속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멈춤' 가운데 만나지는 자연의 선물이 별이다.
좁은 계곡이 갈라놓은
산과 산의 틈을 열고
박새 한 마리 솟구친 하늘에
별이 몇 개 빠져 있다
―「폐광촌」부분
밤하늘에 별이 뜰 때 이향지의 '가다'라는 의지는 비로소 휴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별'은 다른 무엇보다 평화롭고 아름답다. 먼길을 걸어온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달콤한 휴식. 그 시간 속에 "박하향 같은 별무리"(「양폭산장」)가 "밤이면 홍수처럼"(「산길」)물결친다. 휴식은 가고자하는 자의 의지와 뜻을 온전케 한다는 점에서 '가다'라는 행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경험을 '사유'할 수 있는 것은 휴식에서 비롯된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별'을 바라보며 휴식하는 동안 낮의 경험은 인식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또 다른 시 「운달산」에서 보여지는 "산 안에 절이 있고/절 안에 사람이 있고/사람 안에 산이 있다"와 같은 구절은 수없이 반복되었던 산행의 경험이 사유의 지평으로 심화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에는 이러한 인식이나 사유보다는 '가다', 혹은 '가고자 함'에 사로잡혀 있는 시인의 의식이 압도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이 시집의 발문에서 황현산은 "산길은 그녀가 쉬는 자리도 아니며 지혜의 자리도 아니다. 그녀는 풍경 속에 파묻혀 명상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안온한 은유의 지혜에 감싸일 것을 두려워하며 한 육체가 저 거대한 물질의 덩어리에 지불해야했던 모든 노고의 기억을 그 경쾌한 시어로 계산하여 마음 속에 저장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이향지의 시에서 사유의 깊이가 엷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雪山의 벌레집/-복주산에서」의 "눈이든 바람이든 어둠이든 볕이든/겪을만큼 겪어야 날개는 온다", 「山은, 나의 虛空」의 "가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며 똥을 갈기는 새//허공은 새똥조차 무거워한다", 「노숙」의 "자연은 잔인하지만 生과 死를 수평저울에 올리고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다"와 같이 자연에 대한 경험을 인식의 차원으로 이끌고 있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대부분의 시편들은 경험 자체를 충실히 드러내는데 집중되어 있는 편이라 할 수 있다.
자칫하면 구태의연한 교훈주의나 도덕주의의 상징물이 되기 쉬운 '산'을 관념화하기보다는 '산'을 그 자체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이 산시집의 특징이기도 한데, 이것은 또한 등산가의 생생한 경험을 삶의 다양한 국면들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말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향지의 산은 산 아래의 삶과 단절되어 있는 세계처럼 보인다. 즉 그는 산밑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사의 자잘한 갈등이나 고통을 '산'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자주 쓴 풀」이나 「山竹」과 같은 시, 혹은 역사의 비극이나 분단의 아픔을 말하고 있는 시들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산길'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잇대어져 있지 않다는 인상이 지배적이다. 예를 들어 예외적으로 보이는 「자주 쓴 풀」에서 시인은 삯바느질로 생활을 꾸려가던 어머니에 대한 과거 기억과 현재 '미싱소리'를 내며 흐르는 강물을 함께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이 다른 시에 비해 보다 큰 공감력을 갖게 하는 것은 이 시가 환기하는 슬픔이 구체적으로 체감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향지의 '산'이 간직한 신성함과 야생성이 속세의 잡다한 삶마저 품어 안을 때, 그러면서도 俗으을 聖으로 이끌 때 더 위대하고 큰산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4.
컴퓨터와 텔레비전, 전화 벨 소리, 이런 것들로 가득 채워진 일상의 공간 속에서 문득 지도를 펼쳐 실핏줄 같은 길들을 들여다 볼 때처럼 이향지의 산시집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은 '길'을 꿈꾸게 하고 그 꿈으로 설레게 하는 시집이다. 길을 가는 자의 고단함과 길을 가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휴식이 거기에 있다. 나무와 새와 별은 덕릉고개 「동물이동로」를 지나가는 시인과 기꺼이 친구가 되어 맑고 순정한 한 세계를 만든다. 그런 길을 가면서 이 시인이 몇 켤레의 신발을 갈아 신어야 했을까 헤아려 본다. 그리고 이 도시의 버스 정류장과 정류장 사이를 오가면서 낡아버리곤 하는 내 신발의 비루함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뽀오얗게 분이 피도록 익은 팥배 한줌과/주머니에 가득한 산초 열매 향기"(「動樂山」)에 마음이 쏠려 그리로 달려가는 무욕의 詩心이 나를 풍요롭게 한다.
길을 버리고야 山에 들어,
山을 친다. 詩山을 친다.
내가 나를 보았으니, 보여라 雲岳!
―「운악산」부분
산과 시인이 서로를 서로에게 보일 때 잉태되는 '詩山'을 보며 나는 풍요로워 진다.
*《현대시》2001년 7월호. [현대시 리뷰/서평] 란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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