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8/20(월)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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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상], 비유, 육화된 삶의 언어
부산과 시인 - 이향지/시인론
비유, 육화된 삶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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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동 우(문학평론가)
1.
이향지의 시는 결코 간단하게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관념과 서정, 추상과 일상, 꿈과 현실 등이 혼효되어 있는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표현 방식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녹록지 않은 시인의 젊은 감각과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되어온 삶의 육화된 언어에서 빚어지는 내면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에서의 다양한 주제와 내용이 세계와 자아 인식의 넓이라면, 축적되어 온 시간은 인식의 깊이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어느 하나 단순한 것이 없다. 대상 하나에도 축적된 시간만큼 비유가 함께 하고, 비유 속에 그의 삶이 녹아 있다. 하나의 지각은 또 다른 지각으로 즉각적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인과성이 탈락된 이미지의 결합 속에서 유기적 통합이나 조화의 이미지가 녹아 흐르기도 한다. 그는 이미지의 겹침이나 언어의 다의성, 또는 풍부한 메타포 등을 통해 삶의 고락과 자아의식, 그리고 담담한 일상사를 담아낸다. 그러면서도 이미지에 대한 견고한 집착이나 전통에 대한 보수주의적 관점, 관념적 주제 등에 그다지 얽매이지도 않는다. 형식과 전통의 속박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숨의 흐름에 따라 시를 쓰면서도 언어에 세심하다. 이것은 그의 시가 가지는 커다란 장점 중의 하나이다.
결코 젊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향지의 시를 ‘젊다’고 평가하는 데에는 현실과 내면 풍경을 묘사하는 이런 육화된 언어 감각과 형식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시적 태도에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중견 시인들이 초월이나 달관, 또는 서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면 이향지는 자연이나 외부 풍경을 노래하면서도 섣부를 초월이나 서정의 아름다움에 빠지지 않는다. 그것이 외부 현실이든 내면 의식이든 풍경 묘사 하나에도 현실과 이상, 나와 너, 구체적 일상사와 보편적 진실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의식 세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의식 세계를 풀어가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비유’적 표현이다.
섬이다 섬으로 왔다
바람만 불어도 뱃길이 끊기는 하늬바다
힘센 손이 쥐었다 놓은 것 같은
대해 속의 고깔모자
스스로 찾아든 유배지
자청한 볼모
바다는 뱃길을 끊고 너그럽게 풀어놓는다
모자위의 햇살은 번철 같다
너무 타서 집적거리지도 않는 에그 프라이
…(중략)…
아무리 작은 배도 섬보다 덜 흔들리고
모자보다 신발이 덜 고단하며
죽음보다 삶이 덜 지루하다
-「대해 속의 고깔모자」 부분
이향지 시는 주로 비유를 통해 자신의 내면과 삶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때로는 즉물적이고 회화적이기도 하지만 그의 비유는 보다 사변적이고 논리적이다. 예컨대 섬을 ‘고깔모자’로 비유한 이 시에서, 비유의 토대는 회화적인 면에서 비롯되지만 시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은 논리적이고 사변적이다. 시인이 살아온 외부적 현실을 “바람만 불어도 뱃길이 끊기는 하늬바다”로 묘사하는 것이나, 위태롭고 불안한 현실 속의 자신의 모습을 “너무 타서 집적거리지도 않는 에그 프라이”로 비유한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내면의 모습과 현실적 삶의 관계를 좀더 명료하게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섬은 표면적으로 고깔모자에 비유되고 있지만, 그 섬은 자신의 의식을 드러내는 대치물로 작용한다.
사실 비유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 생활에서 널리 유포되어 있는 방법이지 시만의 독특한 기법은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 사물과 추상적 언어 사이의 불투명한 장막을 걷어내고 사물과 언어를 하나로 결합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즉 유한한 언어로 무한한 대상이나 의식을 담아내기 위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비유법은 언어의 본질이다. 이향지는 누구보다 이런 비유적 표현에 능한 시인이지만, 이 비유법이 기존의 언어의 결핍에서 빚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숙성된, 삶의 육화된 체험 속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향지의 시에서 비유적 표현은 삶이 육화된 언어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 비유적 표현은 대상에 대한 인식의 결이 미세하게 각인되어 있어 지시하는 대상의 육체성을 부여하며 언어를 살아 있게 한다. 따라서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우리는 삶과 대상에 대한 시인의 인식의 결을 헤아릴 수 있다.
시인이 처해 있는 현실이 비록 고통과 절망에 흔들리지만, 그는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볼모로 자청하면서 유배지와 같은 현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시 「소금의 행로」의 표현대로, “바다로 곧장 떨어지는 빗방울은/ 소금이 되지 못”하고, “고기의 내장을 들락거리지 않은 물은/ 거름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기의 내장, 즉 고통스럽고 추악한 현실일지라도 그 흙탕물을 들락거릴 때 진정한 삶(거름)의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고통과 절망이 오히려 희망을 낳는다거나 절망은 끝끝내 절망일 뿐이라는 인식과는 다르다. “아무리 작은 배도 섬보다 덜 흔들리고/ 모자보다 신발이 덜 고단하며/ 죽음보다 삶이 덜 지루하는” 표현에서 읽을 수 있듯이, 시인은 고통이나 절망의 진실성을 호도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심스럽게 희망과 기다림(인내)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통도 오십 년쯤
어둠에 절였다 동쪽 하늘에 걸면,
저렇게 둥글다
-「일출」 부분
그가 고통스런 현실을 어떻게 견뎌왔고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이 시는 고통과 희망을 동시에 되살려 놓고 있다. ‘일출’은 고통 앞에서 겸손을 터득한 자에게 비칠 수 있는 미래고 희망이다. 희망은 단순한 달관이나 혹은 전원 풍경과 같은 소재나 대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삶의 고통과 절망에 대한 인식과 대응 태도에서 그녀는 고통 자체가 역설적으로 희망이 된다는 초월적 낭만적인 인식이나 고통은 끝내 고통일 뿐이라는 패배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전세계를 보이는 그대로, 즉 현실의 고통을 미화하거나 다르게 해설하지 않고 또 약화시키거나 더럽히지 않고 이 울림을 그대로 감지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자신이 직면해 있는 세계의 회피나 반항이 삶을 이겨내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보다 현실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다.
2.
이향지의 시는 일견 사변적인 면을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현실성과 구체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의 사변적인 시와 알레고리 형태의 시적 비유는 항상 현실성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황당하거나 허황되지 않다. 그는 일상적인 현실을 바탕에 두고 적절한 논리와 적절한 직감과 적절한 비유를 섞는다. 적절하다는 말이 적절하지 않지만, 그의 시는 찬찬히 읽어 내려가면 그의 삶의 모습이 겹치고, 그의 내면이 겹치고, 그의 기억이 겹치고, 그의 의식이 겹쳐진다. 때문에 이 겹겹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는 그의 시를 읽는 관건이 된다.
바지랑대 하나에 온 식구의 뻘래가 매달려
저마다 떨구는 눈물
…(중략)…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빨래와
언제 드러누울지 모르는 바지랑대
곁에서 놀며
온 식구 빨래들이 줄줄이 떨구는 눈물에
목덜미 콧등 머리칼 적시며
젖은 노래나 부르는
-「바지랑대 하나에」
이 시에서 시인은 빨래를 지탱하고 있는 바지랑대의 모습을 통해 삶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빨래를 지탱하고 있는 바지랑대의 모습과 떨어지는 물방울(“눈물”)은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가족(온 식구)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고, 바지랑대를 지키는 집보게로서의 시인은 그런 가족에 대한 사랑과 희생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은 바지랑대와 빨래를 보면서 언제 드러누울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삶을 관찰하고 통찰한다. 그러니까 빨래를 하고 빨래를 널고 난 뒤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고, 이것을 다시 삶의 본질의 문제로 넘긴다. 그것은 “목덜미 콧등 머리칼 적시며” 그것을 지켜내야 하는 힘겨운 과정이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히 가족간의 사랑이나 희생의 의미에 머물지 않고 삶의 본질을 통찰하는 차원으로까지 인식의 폭이 확장된다. 예컨대, 「밥으로 죽 끓이기」에서, 냄비를 배로 비유하고, 숟가락을 노로, 식탁을 항구로, 식구를 뱃사람으로 비유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죽을 끓이는 과정을 통해 가족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지만,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끝끝내 풀리지 않아 떠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신의 살에서, 몸에서 덜어낼 것은 떠내야 하는 것이 현실이고 삶이라는 인식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제 날을 좀더 가혹하게 칼 갈이로 갈아”(「오래된 칼」)내는 행위, 곧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하는 과정과 다른 것이 아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면, 시인은 지금 놓여있는 현실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생의 의미를 찾는다.
이렇듯 그는 비유를 통해 일상사의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사실과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을 연결시키고, 철학과 미학을 결합시킨다. 때문에 현실성과 구체성을 잃지 않음으로써 섣부른 초월을 지향하지 않으며, 또한 정신주의로 빠지지도 않는다. 그에게 비유(삶의 육화된 언어)는 단지 무엇인가를 꾸미고 설명하는 장식적인 도구의 차원을 넘어서 ‘통찰의 수단'이며,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이향지에게 삶의 육화된 언어는 일종의 정신화된 시적 장치이다.
연꽃 한 송이 돌 속에 꽃 핀 몸을 새겨 넣을 동안
새 한 마리 돌 속에 나는 몸을 새겨 넣을 동안
소나무 한 그루 돌 속에서 달빛 두르고 걸어나올 동안
대나무 한 그루 돌을 뚫고 구름에서 일어설 동안
내가 뻘 속에 주저앉아 진흙 꽃봉오리나 밀어내고 있을 동안
-「낙관」 전문
마치 자신의 삶의 태도를 詩作 과정으로 옮겨 놓은 듯한 이 시에서 순간과 영원의 접점에 도달했을 때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시 제목 ‘낙관’은 예술 작품을 만들고 난 뒤 이루어지는 마지막 행위라는 점(落款)에서, 그리고 그것을 돌 속에 새겨서 영원히 남긴다는 점에서, 현실과 이상,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의 결합을 갈망한다. 그것은 시를 통해 삶을 완성하고, 삶을 통해 시를 완성하려는 태도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에게 시 혹은 삶은 “뻘 속에 주저앉아 진흙 꽃봉오리”를 밀어내는 행위이지만, 이 순간의 경이로움은 현재적 삶의 덧없고 무상함과 고유한 아름다움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한다. 보들레르에 따르면, “미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요소와 제약되어 있는 상대적 요소로 형성된다”. 마찬가지로 이향지에게 시 혹은 인생은 비속한 평범성의 물결을 멈추게 할 수 있으며, 영원한 것이 현실적인 것과 일시적으로 결합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미에 대한 불멸의 욕망을 표출하고 충족시키는 매개라 할 수 있다. 「더그매」의 마지막 연에서 말하듯이 그는 “고통을 양식으로 나의 고통을 시로 쓴다. …… 모순을 이고 모순을 밟고 간다”. 그 고통이 ‘육화된 삶’이고 그 양식이 ‘비유’이다. 따라서 그에게 ‘비유’란 모사되어야 할 하나의 ‘현실’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의 눈에 들어오는 외양의 진부함을 뛰어넘어, ‘순간성’(ephemerality)과 영원성이 하나가 되는 곳인 교감(correspondence)의 세계로 들어가는 수단이자, 상상력의 근원이다. 그것은 모순을 끌어 안으면서 이겨내는 방법이며, 존재의 상처와 그 근원을 치유할 수 있는 모태이다.
이향지의 시를 지배하는 것은 추상의지(내면성)이지만 그는 외부세계와의 절연 속에서 내면과 순수 언어를 탐구하는 게 아니라 이렇듯 사물과의 친화성 혹은 교감을 지향한다. 삶의 깨달음을 감각의 교환을 통해 언어를 낯설게 하고, 인식을 새롭게 한다. 다시 말해 그는 나와 사물의 교감, 혹은 사물과 사물의 교감을 그의 내면, 혹은 가족사, 혹은 외부적 현실과 적절히 조화시킨다. 그러니까 이향지는 삶과 내면 풍경의 내용을 비유적 형식을 빌어 표현한다. 그것이 ‘산’이건, ‘바다’건 아니면, 그 중간(“더그매”)이건 상관없다. 어느 것도 명확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고, 또 결정짓지 않으면서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부서지면 부서지는 대로(「자미원 폐광에서」) 그 자체로 현실과 맞닿아 있는 것이 이향지의 시이다. 이것이 이향지 시가 지닌 매력이다.
* 시와 사상 (2004년 가을호)
*강동우(문학평론가) 경남 마산 출생, 2001년 <현대시>(평론) 등단.
한양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한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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