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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4/21(수) 11:59 (MSIE6.0) 220.78.29.91 1024x768
[대해 속의 고깔모자], 은유의 체계와 couple-ring의 原理  

이 글은 순천대 송수권 교수의 시창작 강의록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졸시 '대해 속의 고깔모자'를 새로운 각도에서 접하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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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 교실의 현장학습과 실기론>
은유의 체계와 couple-ring의 原理
―한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

               송수권(시인․순천대 교수)

《상상력 개발을 위한 유형 학습》에서 지금까지 논의해 온 것은 ‘한편의 시를 어떻게하면 잘 쓸 수 있는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그리고 시란 결국 ‘발상과 표현’의 문제라고 정의하였다. 발상에 있어서는 ‘상상력의 코드 번호 찾기’이고 표현의 문제에 있어서는 경구나 완전문구(로고송) 또는 속담류의 직설로는 시가 되지 않으니 반드시 한편의 시에는 은유체계가 완성되어야 한다고 정의했다. 은유체계란 곧 비유와 상징을 뜻하며 어떤 경전이나 어떤 저술도 이 체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인문학적 바탕이 없이는 고도한 지적능력(상상력)을 발산 할 수도 없으며 설사 이 능력(직관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표현기법이 없이는 한편의 시를 완성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쉬운 예를 들면 한편의 영화에서도 카메라의 기법 없이는 그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장면 장면에 걸치는 카메라의 기법에서 C.U와 O.L이라는 기법을 예를 들어 명해보자. C.U(클로즈업)는 피사체를 화면 가득 접사하는 기법으로서 심리적 충격요법을 가하는데 사용되는 기술이다. 가령 농촌의 궁핍한 생활 속에서 서울에 유학 간 아들의 등록금을 마련하고자 황소를 장에 몰고 나가 팔았는데 한 마을의 불량배 청년이 그 날 밤에 돈을 강탈하려고 문구멍을 뚫고 방안을 엿보는 장면이라면 카메라는 방안에 들어와 문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는 ‘눈’을 묘사할 것이다. 이 탐욕스러운 ‘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아마 그때 카메라의 기법은 C.U의 기법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눈동자가 화면 가득 펼쳐짐으로써 관중은 그 눈동자를 통해 탐욕스러움과 음흉함을 실감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O.L(오버랩)의 기법에 대해 말해보자.
그 장면을 실제로 지문으로 표시해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S#1 어느 벌판
    한 탈출병이 폭설 속을 기진맥진 걷고 있다.
S#2 S#1과 같은 장면
    한 탈출병이 허기진 채 쓰러진다.(O.L)
S#3 S#2와 같은 장면
    한 탈출병이 눈 위에 쓰러져 기어가고 있다.(O.L)
S#4 S#3과 같은 장면
    눈발 속에 쓰러진 탈출병의 두 군화발이 드러나 있다.(C.U)
S#5  어느 장면
     탈출병이 강물을 손으로 움켜 마시고 있다.(C.U)

이상으로 상요된 O.L기법에서 우리는 이 탈출병의 고통과 인내, 그리고 살아남으려는 생명의 의지는 물론 여기에 다른 많은 시간과 공간의 거리까지가 함축되어 있음을 효과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것이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의 표현 기법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한 편의 시도 언어로 표현되는 영화이며, 그 생명이 곧 드라마틱한 긴장(Dramatic-tent)속에 놓여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영화 속의 이미지나 시속의 이미지는 표현 매체만 다를 뿐이다. 영화 속의 이미지를 처리하는 것은 카메라이고 싯고의 이미지를 처리하는 것은 언어라는 점이다.

[1] couple-ring(가락지)이 한 쌍인 경우

----(중략)----

[2] couple-ring이 여럿인 경우  

    섬이다 섬으로 왔다
    바람이 불면 뱃길이 끊기는 하늬바다 작은 섬
    힘센 손이 쥐었다 놓은 것 같은
    대해 속의 고깔모자

    스스로 찾아든 유배지
    자청한 볼모
    바다는 뱃길을 끊고 너그럽게 풀어 놓는다

    모자 위의 햇살은 번철 같다
    너무 타서 집적거리지도 않는 에그 프라이

    모자 속의 시계는 느리다
    돌담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처럼 느릿느릿 간섭하며 간다
    머리카락 끝에서 발톱 끝까지 흡,착,흡,착, 훑으며 간다
    어느 쪽으로 가나 수평선에 갇힐 것이므로
    반짝이는 수면마다 지나간 것들이나 가득히 펼쳐질 것이므로

    트럭 짐칸을 얻어 타고 곧추선 언덕을 넘는 동안이
    풍경과 속도의 궁전이다

    궁전 밖에는 해당화
    해당화 발등에는 뜨거운 몽돌밭
    몽돌밭 위에는 태엽 풀린 시계 하나
    파도의 잔소리 듣고 있다

    아무리 작은 배도 섬보다 덜 흔들리고
    모자보다 신발이 덜 고단하며
    죽음보다 삶이 덜 지루하다

    ― 이향지, 「대해 속의 고깔모자」전문
     <2003, 현대시 작품상 수상작>  

 위의 시는 모두 7연으로 된 연시다. 그만큼 ‘쌍가락지’를 많이 끼고 나온 시다. 때문에 단순한 시가 아니고 이 많은 쌍가락지(couple-ring)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평가나 독자의 수준도 이 시의 내용만큼 ‘눈높이’가 있어야 한다. 70%의 독자가 이 수준에 못 와 있기 때문에 ‘무슨 시가 이따위냐?’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이런 경우 70%의 독자(대중)라는 것은 의무교육 수준에 불과해서 대중가요나 따라 부르고 짓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포퓰리즘(대중성의 오락)의 시를 우리 문창과 교실에서는 <딴따라 詩> 또는 <바깥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오염된 詩>라고 밖에는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시가 국정교과서에 실린다거나 더 나아가서는 대학 교재에 실리고, ‘대입 수능시험’에 출제될 리는 만무방하니 고급독자는 안심해도 된다. (그런데 현행 국정교과서에 실린 시는 이 정체성을 상실하였다는 여론의 비판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말이 잠시 비끌렸지만 <대해 속의 고깔모자>가 어떻게 쌍가락지를 끼고 나왔는가 검증해보도록 하자. 우선 제목의 원관념(T)은 ‘섬’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줄 믿는다. 왜 섬을 ‘대해 속의 고깔모자’라고 했을까? ‘섬’은 하도 많은 시인들이 다룬 소재라서 참신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극서정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시인의 체험이 녹아있고 완벽한 코드, 다시 말하면 노자의 「곡즉전(曲卽全)」이라는 정신세계를 실체화 한 섬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가볍지 않고도 무거우며 만만찮은 야심작이기도 하다. 무릇 문학상이 주어질 때는 그래야하지 않겠는가. 「섬」이라 하지 않고 ‘대해 속의 고깔모자’ 얼마나 참신한가.
 벌써 T와 V의 관계에서 V로 쌍가락지를 끼우고 나온 것이 춤 한바탕 추어버릴 심산이다. 멀리서 보면 바다 위의 섬은 ‘고깔모자’로 떠있으니 말이다. ‘눈썹’이나 ‘누에’나 ‘고슴도치’등도 많은데 왜 하필 고깔모자인가.
 제1연은 대해 속의 ‘고깔모자’로 원근법에 의한 거리, 제2연은 유배지 또는 볼모로서의 외로움, 제3연은 번철 속의 에그 프라이로서 아무도 집적거리지 않는 음식(누가 까맣게 탄 그것을 먹으려고나 할 것인가), 제4연은 그 모자 속의 생체리듬(bio) 시간과 공간, 제5연은 생동하는 풍경과 속도, 제6연은 시인(도시사람들)이 추구하는 이데아로서의 궁전, 제7연은 결구연으로서의 이상적인 삶이 역설적인 진술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시는 tecnopia로서의 삶이 아니라 ecotopia로서 생태학적인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직선(고속도로)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곡선(曲線)으로서의 삶, 다시 말하면 ‘느림의 속도’를 타고 사는 삶이다. 이것이 ‘곡선의 상법(曲線, 想法)’이며 도덕경의 코드인 곡즉전(曲卽全)으로서의 삶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를 이해하려면 인문학적 바탕이 되는 ‘도덕경 81장 중 6장인 곡신불사(谷神不死)의 장과 8장인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장’ 또는 밀란쿤테라의 소설 ‘느림’, 피에르 상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등 적어도 이 분야의 독서 없이는 이해도 감상도 시 쓰기도 불가능하며 일반 독자의 수준으로는 어림없다는 말이 가능해진다.
 위의 ‘곡즉전(曲卽全)의 코드’에 들어있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자연은 애를 써서 곡선을 만드는데 문명은 직선을 만든다.
②곡선은 신이 만든 선이고 직선은 악마가 만든 선이다.
③곡선 속에 슬픔이 있고 기쁨이 있고 추억이 있고 희망이 있지만 직선 속엔 오직 죽음의 속도인 지각되지 않은 속도와 무정체의 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④자전거를 타고 휘파람을 불 수 있는 여유와 한가로움, 건달 근성은 곡선 속에서만 존재한다.(따라서 우리 삶도 자전거만한 속도면 되지 않을까)
⑤직선은 도시로 가는 길이고 곡선은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이제 천천히 걷는다는 것도 의식의 훈련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상의 방대한 철학으로서의 ‘삶’이 위의 시세계를 이루고 있다. ③④⑤⑥연은 시인의 책략에 의해 세심하게 그려진 밑그림이다. 이 밑그림이 카메라의 기법인 C.U와 O.L에 해당된다. 이 밑그림이 없다면 결구연은 시로서 성립되지도 못할 것이고 고깔모자로서의 멋스러운 춤도 맹탕이 될 것이다. 따라서 ③④⑤⑥연이 빠진 시가 곧 바깥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딴따라의 시며 뽕짝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3연부터 분석해보자.

섬(T)-------------고깔모자(V)  
                     V1 번철(햇살)
                     V2 에그 프라이
                     V3 모자 속의 시계(시간)
                     V4 담쟁이넝쿨(살아있는 시간의 생동적인 이미지)
                     V5 흡,착,흡,착,(도시의 시계는 똑,딱,똑,딱,)
                         (시인의 개인 상징어)
                     V6 막힘없는 수평선(공간)
                     V7 언덕을 넘는 트럭(살아있는 풍경과 속도)
                     V8 궁전(시인의 이데아)
                     V9 해당화와 몽돌밭(풍경)
                     V10 태엽 풀린 시계(폐기 처분된 시간)
                     V11 파도의 잔소리(살아있는 소리)

이상의 ‘쌍가락지(couple-ring)'들을 끼고 나와 있기 때문에 시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으며(시는 까발리는 유통언어가 아닌 침묵 속의 언어) 시인이 추구하는 시정신의 세계가 노자의 삶(曲卽全)과 일치하는 ’곡선의 미학‘으로서 그 상징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곧 은유의 체계이것이 곧 테크노(기술문명)로 사는 삶이 아니라 eco-topia(생물학적)로서의 삶을 지향한다. 그래서 현대의 기계적 삶은 쓸모없는 삶이며 이제 ’천천히 걷는다는 것도 특별한 의식 훈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삶의 원리가 설명된다. 바로 이것이 노자의 6장에 나오는 곡신불사(谷神不死, 골짜기의 여신은 죽지 않는다)의 장이며 그 여신인 현빈(玄牝)마마의 자궁(玄牝之門)에서 흐르는 샘물이며, ‘쓰고 써도 마르지 않는구나(用之不渴)’라고 감탄하는 대목이다. 또 이 대목은 8장의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좋은 삶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는 순리적인 삶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위의 시에서 절정을 이루는 ④연과 ⑤연을 짚어보자. ④연의 고깔모자(섬) 속의 시간은 돌담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로 시각화 되어 있다. 시간이 넝쿨로 뻗는다니 기발한 표현이지 않는가! 또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훑으며 똑,딱,똑,딱(관습화 된 삶이 아닌)가지 않고 호흡을 하며 ‘흡,착,흡,착’하면서 생체리듬(춤) 그대로 맥박 치며 간다는 개인 상징어(불교에서 ‘흠’~‘흠’으로 탄생과 죽음을 상징함)는 기발하지 아니한가. 그래서 ⑤연은 이 살아있는 생성이 시간을 타고 트럭으로 넘는 고갯길마다 펼쳐지는 풍경은 얼마나 새로운가. 좋은 풍경 하나가 때로는 우리들을 천국의 문으로 데려다 준다고 하지 않던가.
 이것이 곧 ‘풍경과 속도의 궁전’인 셈인데 옳거니! 필자는 여기까지 이 시를 곡즉전(曲卽全)의 코드에 걸어 설명해 왔는데 학생 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 느닷없이 질문을 했다. ‘교수님, 궁전이란 말은 유통 언어에 걸려있고 관습화 된 말로 시의 이미지에 손상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학생은 어떤 이미지를 넣으면 좋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더니, ‘저는 요, ’오두막집‘이나 뭐 그런 이미지가 좋을 것 같습니다. 몽돌밭도 있고, 해당화도 있고, 돌담도 보이니까요!’ 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듣고 보니 그럴 법 해서였다. 여기서 이 ‘궁전’이란 말은 후일담으로 남겨 두기로 하자. 왜냐하면 다음에 작자를 만나서 알아본 다음 그 답을 드리겠다고 약속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는 말, ‘교수도 학생에게 배우는구나!’라고 스스로 감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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