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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이 달의 작품],「구슬이 구슬을」-아름다운 분열의 힘
[현대시학/이 달의 작품],「구슬이 구슬을」- 아름다운 분열의 힘
구슬이 구슬을
이 향 지
둥근 것은 둥근 것을 안지 못한다
유리구슬이 유리구슬을 밀어내었다
구슬이 구슬을 치면 구슬 탓이냐
구슬 탓이다
동글동글 맨질맨질 전신이 정점인
저 잘난 구슬 탓이다
민다고 쪼르르 달려와서
저와 똑 같은 것을 쳐서야 되겠느냐
치자고 밀었겠느냐
둥굴둥글 어울려서 놀자고 밀었겠지
놀자고 오는 걸음이 총알 같았겠느냐
밀었거나 퉁겼거나 친 것은 구슬이네
아픈 것도 구슬이네
둥근 것은 둥근 것을 안지 못하네
(『시와 사람』200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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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분열의 힘
장 석 원 (시인)
산에 가지도 않으면서, 산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이 들면 산에 마음을 귀의 시키고 싶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나는 등산을 싫어하지 않는다. 좋아하지도 않는다. 힘이 들기 때문이다. 산은 등산과는 거리가 먼 나를 받아주고, 마음이라도 귀의하는 사람 역시 받아준다. 산은 둥글기 때문이다. 산이 <나>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든다. 눈썹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산의 둥근 얼굴을 돌아볼 때까지 산은 움직이지 않고 거기에 있다. 움직였기에 나는 산을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산을 찾아간다. 거기 산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배제된 <자연>에 무엇이 있는가를 물으면 시인은 먼저 산이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고향 통영의 바다를 두 번째로 말할 것이다. 사람이 없는 자연은 순수하다. 순수한 자연은 사람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즐거워하지 않는 자연 속에서 사람들은 깨달음을 건져 올린다. 자연은 거기 그대로 있고, 사람은 다가서려고 한다. 사람은 죽어야 자연으로 돌아간다. 살아있는 동안 사람에게 자연은 엄연한 他者이다. 둘은 시에서 만난다. 시 밖의 독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최후의 대상이 <거기 있음>을 그때에야 알려준다. 지금의 이곳에서 살며 투쟁하며 사랑하다가 마지막 순간이 되면 돌아오라고 시인의 산은 여전히 <거기>에서 둥근 팔 벌려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자는 여성이 된다. 산은 그래서 어머니처럼, 시인의 시처럼 따스하고 둥근지도 모르겠다.
「구슬이 구슬을」은 시집 『내 눈앞의 전선』에 실려 있는 「방울토마토」를 떠올리게 만든다. 구슬처럼 작고 둥글고 빨간 <방울토마토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로 시작되는 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는 방울토마토를 먹었다. 나도 먹고 그도 먹고 효정이와 경로도 먹었다. <그 아이들은 탐스러운 방울토마토였는데, 지금은 없다. 내가 먹었>기 때문이다. 먹는 사람이 있고 먹히는 방울토마토가 있다. 먹고 먹히는 이 관계를 지켜보면서 나는 먹이사슬의 순환과정을 생각한다. 뒤이어 반복이 떠오른다. 모두가 둥글다. <둥근 것은 둥근 것을 안지 못한다>. 구슬은 구슬을 안지 못한다. 방울토마토와 우리는 서로를 먹어 삼켰지만 둥근 구슬은 둥근 구슬을 밀어내었다.
둥근 것들은 깨지기 전에는, 터지기 전에는, 부서지기 전에는 서로를 안지 못한다. 두 원이 서로를 안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부를 허물어야 한다. 두 원이 서로를 맞대어 몸을 여는 순간 원은 타원이 된다. 다시 원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를 밀어내어 있던 자리로 돌아가거나, 서로를 흡수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내가 원이고 당신이 원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힘이 없으니 힘센 너에게 포섭되어야 할까. 내가 너보다 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안지 말고, 서로 해치지 말고, 너는 거기서, 나는 여기서 그냥 살아보자. 둘이 공존하는 길은 이뿐이다.
우리 모두가 안락하게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변화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서로를 갈구하지도 않아야 한다. 사랑이 가져다주는 짧은 행복 후의 긴 고통은 두렵기 때문에, 사랑하는 <나>는 유한하기 때문에 영속하는 사랑을 위해서는 모든 대상들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어야 한다. 이제 자신의 삶을 세속적인 일상에서 빼내어 홀로 초연한 종교적 영혼이 되는 길뿐이다. 자연과 <나>의 관계, <산>과 시인의 관계가 그렇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라가는 <깊은 우물의 노래는 깊은 우물에게만 들린다>(「노파」)고 하는 이 <노파>시인은 대상이 <나>를, <나>가 대상을 서로 관여할 수밖에 없음을 이렇게 말한다.
바람이 늘어진 전선을 흔들면
전선은 박태기나무 안 푸른 저수지를 흔든다
전선은 나무를 흔들면서 제 不變을 흔들고
나무는 전선을 치면서 제 不眠을 치는 것이다
― 「내 눈앞의 전선」6~7연
「구슬이 구슬을」은 정 반대이다. 둥근 것이 둥근 것을 밀어내고, 서로가 서로를 안지 못하는 상황이 2연에 제시된다. 2연 1행의 <구슬이 구슬을 치면 구슬 탓이냐>는 물음은 돌연하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기 힘들다. 2행의 <구슬 탓이다>의 주인 역시 알기 어렵다. 서정시의 단일한 화자 <나>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는 물음과 대답의 맥락은 구슬이 구슬을 안지 못하고 밀어내는 1연의 상황과 이어진다. 두 화자는 청자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는다. 둘의 대화는 갈라져 있다. 둘의 말은 서로를 안중에 두지 않고 밀어내고 있다. <구슬이 구슬을 치>는 이유는 <구슬 탓>이 아니라는 의도를 A가 표현했는데, 청자 B는 그러한 의도를 무시하고 <구슬 탓이>라고 대답한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는 상황이 만나지 않는 평행선처럼 이어진다. <동글동글 맨질맨질 전신이 정점인/저 잘난 구슬 탓>이라고 덧붙이자 이번에는 더욱 강도 높은 말로 반박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 한다. <민다고 쪼르르 달려와서/저와 똑 같은 것을 쳐서야 되겠느냐>. A가 높게 소리친다. <치자고 밀었겠느냐/둥글둥글 어울려서 놀자고 밀었겠지>. B가 다시 말한다. <놀자고 오는 걸음이 총알 같았겠느냐>.
둘의 대화는 분열되어 있다. 서로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시의 단일한 맥락을 파괴하는 타인의 목소리가 삽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때의 <분열이란 자기 분열적인 언어실험이나 콜라쥬 같은 모더니즘적 기법과는 다른 맥락에 있다. 그것은 단일한 가치와 단일한 진리치를 담지한 언어, 순수하고 보편적이어서 이질성이 틈입할 수 없는 <나>의 언어에 대한 포기를 의미한다.>(이장욱, 「<단일한 말>의 저편 : 미하일 바흐친과 현대시」,『서정시학』2003년 여름호) 2연은 시인의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읽는 <나>를 불러들이고, 작품 안의 <화자>를 독립시킨다. 시인은 화자와 다른 <나>사이에서 타자들의 말을 인용할 뿐이다. 10, 11행의 <밀었거나 퉁겼거나 친 것은 구슬이네/아픈 것도 구슬이네>를 누구의 말로 판단할 것인가는 정해져 있지 않다. 타인들의 이질적인 말에서 형식적으로 빠져나와 있는 3연이 시인의 말이라는 점만 확실하다. 2연 10행과 11행은 시인의 말이면서 화자의 말이고, 읽는 <나>의 말이면서 시 속에 나타나지 않는 청자 <너>의 말이기도 하다.
이 주인 없는 말을 읽는 순간 나는 분열된 시를 강렬하게 붙잡고 있는 시인이 떠올랐다. 둥근 것은 둥근 것을 안지 못한다. 유리구슬이 유리구슬을 밀어내었다. 그러나 이건 사실이 아니다. 시의 마지막에서 <둥근 것은 둥근 것을 안지 못하네>라고 말해도 나는 믿지 않는다. 시의 분열을 감싸고 있는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바깥의 자연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나>의 시선이 제거된 <순수한> 타자성이 먼저 요구된다. 이 말은 분명 모순이다. 순수는 추상에 가깝고, 타자는 추상이 아니다. <나>와는 다른 것이라는 이질성이 전제되지 않는 한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내가 다가간다고 해서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 내가 자연이 싫다고 해서 자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과 나, 대상과 나에게는 중간항으로서의 매개물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몸>이라고 생각하고, 시인의 <구슬>이 바로 우리의 몸이라고 판단한다. <몸은 몸을 안지 못한다/몸이 몸을 밀어내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적이 아니라고 인정하고 따스하게 받아들이는 몸의 행위인 포옹의 이미지는 둥글다. 둥글게 팔을 걸쳐 타인의 등에 손을 대고 서로의 가슴을 맞대는 포옹은 예컨대 서로가 서로를 먹어버리는 행위, 둥근 원이 둥근 원을 만나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 하나의 원이 되는 행위와 유사하다. 자연과 사람이, 시인과 산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아니라 몸이 필요하다. 시의 두 번 째 몸을 이루고 있는 타자들의 말이 읽는 나와 말하는 화자와 언어를 사용한 시인을 매개한다. 이를 위해 시인은 단일한 주체의 말을 일부러 분열 시키고 있다. 찢어진 그 틈으로 팔딱팔딱 뛰고 있는 그 <새빨간 심장>이 보인다. 시인의 사랑은 몸의 언어로 둥글게 펼쳐진다. 그것은 혼돈이고, 신비이다. 타인의 세계는 <나>를 소멸시켜야만 다가설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귀의하고 싶어하는 <나>를 먼저 지우라고 요구하는 둥근 산, 둥근 시가 있다.
시인은 <야생화다. 나는 내가 필요해서 필요한 자리에서 저절로 피었다.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산기슭에서 작은 꽃을 매달고 외로워서 외로워서 몸을 떨면 울고>(「꽃 핀 가지와 生의 비린내」, 『현대시』2003년 6월호)있다. 그녀의 자전 에세이에서 나는 산에 살고 있는 야생화 한 포기를 보았다. 그녀는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외롭다. 산은 움직이지 않는 그녀를 보듬어 주지 않는다. 그녀는 산에서 깨달았지만 그 깨달음을 시에서는 배척한다. 아니 그녀는 깨닫지 않는다. 그녀의 몸이 깨닫는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은 죽어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서 움직인다는데 매력이 있다.> 깨달음이 시에 여과 없이 드러나는 순간 시는 멈춘다. 깨닫지 못하는 자와 깨닫지 않는 자의 차이는 크다. 깨달음을 시에 드러내지 않는 것과 깨달음을 몸으로 실현 시키는 것의 차이는 더 크다. 죽기 전까지 산과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죽을 때까지 <외로워서 외로워서 몸을 떨며 울>수밖에 없는 그녀의 시는 산을 향해, 자연을 향해, 대상을 향해, 타자를 향해 끝없이 다가서려고 한다.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움직이는 <言>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타인의 말이 그녀의 시에 강력한 동력을 제공하리라고 믿는다.
죽어서 산의 일부가 되어 자연의 순환에 동참하겠다는 그녀의 말에서 나는 불멸하는 어떤 것을 떠올린다. 나는 한 가수에게 불멸을 배웠다. 나에게 <불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파편이다. 진주처럼 아픈 음유시인의 목소리는 분노 때문에 자주 분열된다. 그는 소외된 소수의 고통을 단어 하나 하나에 담고, 자신의 몸을 악기 삼아 노래한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분열된 목소리를 듣는다. 반짝이는 목소리의 파편들은 <나 모르는 사이에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나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분열을 받아들여야만 불멸을 알 수 있다면 분열 되겠는가. 정신의 분열이든 육체의 분열이든 받아들이겠는가. 그녀는 받아들일 것이다. <향기로운 가지(香枝)>에서 떠오르는 불멸하는 이미지가 분열이기 때문이다. 전체도 부분도 아닌 그것은 나를 타인의 세계, 대상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 무성생식이든 유성생식이든 새 생명을 탄생 시키려면, 거대한 생명의 질서에 참여하는 둥근 물방울이 되려면, 하나를 둘로 나누고 그 둘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갈라진 가지에서 나는 소멸을 거부하는 뻗어나감을 느끼고, 그 끝에서 아름다운 분열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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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2003년 7월호 ‘이 달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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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원:1969년 충북 청주 출생. 2002년 대한매일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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