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12/18(목) 01:26 (MSIE6.0) 218.155.239.57 1024x768
|
[문학과 사회/좌담], 한국문학의 깊이를 더듬어보니 흥겹도다
이 글은 「문학과 사회」2003 여름호에 게재되었던 좌담 <한국문학의 깊이를 더듬어보니 흥겹도다>에서, 저의 시집 [내 눈앞의 전선]에 해당된 부분만 발췌한 것입니다.
-------------------------------------------------------------
한국문학의 깊이를 더듬어보니 흥겹도다
정과리(문학평론가.연세대 교수) : 박수연(문학평론가.충남대 교수)
정과리 _ 이향지의 『내 눈앞의 전선』으로 넘어가자.
박수연 _ 연배에 비해서 아주 젊은 시를 쓰고 있다. 내 느낌으로는 1990년대 들어 많은 여성시인들이 사용한 무의식적 진술의 세계와 현실 의식 사이에 걸쳐져 있는 세계 같다.
정과리 _ 무의식적 세계? 그게 뭔가?
박수연 _ 「방울토마토」같은 시는 현실을 현미경적으로 묘사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묘사의 세밀성이 과잉됨으로써 오히려 비현실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한다. 「서울, 회색 종점」마지막 부분 : “택시를 잡으러 뛰어가는 남자는 내 신랑/회색 비둘기가 날아간다/회색차가 굴러온다/회색 문이 열린다/안녕! 여기는 회색 종점/안녕! 난 회색 종점에서 출발해”는 무의식적 연상의 진술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동시에 시인 자신의 생의 사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의식과 현실 사이에 놓인 시 그것이 이향지의 시적 자리라고 생각한다.
정과리 _ 1990년대 시인들의 한 특징적 경향은, 시가 삶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시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시를 썼는데, 1990년대 이후에는 삶이 너무 지루해서 시를 쓴다. 그래서 언어를 어떻게 비틀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낼까? 그것이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현실에 대한 통찰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도식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세상은 불모다 ; 우리는 내 멋대로 살고 싶어 죽겠다 기타 등등. 절실하다는 느낌을 안 줄 때는 허전하고 아쉽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나는 이향지도 그런 경향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삶의 내력에 조응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집 없는 기억」을 읽어보자: “리어카를 따라갔다/호마이카 장롱보다 작은 리어카”로 시작한다. 특이한 문법이다. 우선 이 정황은 리어카와 장롱의 불균형이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렇게 이사하는 일이 실제로 있는 것이다. 아니 시인에게 일어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말법 속에 숨으면 더욱 우스꽝스럽게 된다. “호마이카 장롱보다 작은 리어카”라는 시구를 읽고 얼핏 ‘호마이카 장롱보다 작다니! 얼마나 작은 리어카인가!’라는 감탄을 발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부피로 봐서 모든 리어카는 호마이카 장롱보다 작다. 그러니까 어법은 비현실적인 정황을 만드는 척 하면서, 사실적 정황을 문득 독자 앞에 세워놓는 것이다.
박수연 _ 얘기를 좀 더 확장시켜보자. 이향지 시인에게 ‘거울 이미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게 상당히 정신분석학적 논리에 근거해 있다. 「둥글고 환한 구멍」에 “조리개를 좁히고 망원경으로 당겨 볼수록 달은 더 없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다가갈 수 없는 실재를 암시한다. 「노파」의 마지막 연도 “깊은 우물을 찾아 간다/가도, 가도, 길이 멀다”라고 쓰고 있다. 「네 번째 풀밭」에서는 “사람이 심지 않은 풀들이 고개들/여백이 없었다, 붉은 흙의 완강한 침묵을/잔디 그리던 붓으로 덮어버리고 있었다”라고 끝맺는다. 언어의 문제에 집착함으로써 나올 수 있는 시구들이라고 생각된다. 그 언어와 실재 사이에 단절이 있다. 그 사이에 거울이 가로 놓여있는데, 이 거울은 라캉의 거울이다. 「무채색의 새벽」은 사선을 중심으로 두 개의 대비되는 이미지를 대칭시키고 있는데, 시의 중간부터 대비되는 이미지가 아니라 단독적 이미지가 진술된다. 통일된 자아가 형성되었다는 걸 뜻하겠다. 이 자아는 아직 주체가 아니다. 제목에 유념한다면 무채색은 색깔이 개별성을 띠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개별화되지 않은 존재들. 즉 주체로서 호명되지 않은 존재들의 세계인 것이다. 「동백」에서는 1연에서 “이슬을 받아먹으며 자란 혀가 한 그루/솟아있다”라고 쓴다. 이때 혀는 언어를 분절하는 기구임이 분명하다. 2연에서는 “해풍에 터진 혓봉오리들이/핏빛으로 맺혀있다”라고 쓰고, 3연에서는 “이파리들의 안타까운 손짓말”이라고 쓴다. 마지막 연에서는 “소리의 나무가 폭포수처럼 치솟아 바다를 덮을 때까지/오, 오, 오, 핏빛으로 갈라터진 혓봉오리들이라도/붉게, 붉게, 피워서, 파도에 떨구어야 한다”로 끝맺고 있다. 상처입은 혀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 대신에 손짓말만 있을 뿐이다. 소리가 없다는 것은 기원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1990년대적 특징인 듯하다. 그렇다보니, 역설적으로 자기정립을 지향하는 시들이 자주 눈에 뜬다. 주체로 호명되지 못했으니 그에 대한 열망이 있겠다. 표제시인 「내 눈앞의 전선」이 대표적인 경우다. 전선과 나무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는 시인데, 마지막 연에서 “전선은 나무를 흔들면서 제 不變을 흔들고/나무는 전선을 치면서 제 不眠을 치는 것이다”로 끝난다. 양태는 다르지만 전선과 나무의 공통적인 지향점은 자신의 존재 양식 혹은 자기 정립이다.
정과리 _ 거기에 상호성이 있지 않나? 그 앞에 “빗방울들은 여름내, 푸른 잎에 묻힌 전선의/가장 늘어진 부분을 타고/박태기나무 머리로 흘러들었다//바람이 늘어진 전선을 흔들면/전선은 박태기나무 안 푸른 저수지를 흔든다”라고 씌어있구먼.
박수연 _ 상호성이 귀결되는 지점이 자기 정립이라는 거다.
정과리 _ 하지만 시적인 묘미가 있는 대목은 상호성일게다.
박수연 _ 자기 정립에 대해서 비교를 하자면, 황동규 시인은 사물을 사물 자체로서 묘사하면서 사물에서 사물로 의미의 율동을 변주해나간다면, 이향지 시인은 자신이 다루고자하는 대상에 시적 의장을 많이 입힌다. 시적 묘미를 주는 과정은 일종의 시적의장 아닌가.
정과리 _ 상식적으로 읽을 때 빗방울들이 전선을 타고 나무 머리 위로 흘러들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바람이 늘어진 전선을 흔들면/ 전선은 박태기나무 안 푸른 저수지를 흔든다”는 어떻게 이해되는가? 바람이 전선을 흔들어야지 나무의 푸른 저수지가 흔들린다?
박수연 _ 바람은 전선이 행위를 하는 정황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 안의 푸른 저수지는 나무의 존재태다. 전선이 나무를 살게 해 줌으로써 피어난 나무의 새로운 존재태 말이다. 이것이 핵심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정과리 _ 제목을 다시 보자. ‘전선’이란 무엇인가? 첫 행은 “전선은 그대로 둔 채 나뭇잎만 떨어졌다”이다. 전선은 사물 혹은 세상과의 대결의 선이겠다. 그런데 이 전선에서 ‘나’는 실패했다. 나는 나뭇잎을 열심히 피웠는데, 전선은 변하지 않고 나뭇잎만 떨어졌다. 즉 나뭇잎을 피워 올리려는 내 노력은 추락하였다. 그러나 또한 ‘전선’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아래의 대결의 긴장을 유지한다. 더 나아가 전선은 아래로 더 내려온다. 기하학적 구도로 보자면, ‘나’는 그만큼 전선에게 영역을 빼앗긴 거다. 그러나 그 덕분에 전선은 더욱 피부에 와 닿은 꼴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무에게 더욱 쉽게 전선을 타고 올라갈 혹은 타고 넘을 기회가 역설적으로 주어지게 되었다. 이 시가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사물들의 미묘한 상호작용 아닌가? 세상과의 대결에서 패배는 세상과의 대결선을 더욱 더 내 쪽으로 끌어당긴다는 것, 그래서 나에게 삶에의 의욕이 더욱 증가하였다는 것. 따라서 맨 마지막 연은 전선은 나무를 흔들어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동작을 과시해서 자신의 완강한 ‘불변’을 강조하지만, 나무는 그렇게 해서 좌절한 만큼 적이 그만큼 가까이 다가왔으므로 더욱 깨어있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박수연 _ 일종의 자의식인데…… 「더그매」라는 시는 이향지 시인의 시에 대한 자의식을 잘 드러내 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고통을 양식으로 나의 고통을 시로 쓴다”가 그렇다.
-----(중략)------
(917쪽~920쪽)
박수연 _ 이향지 시인이 자기 정립을 추구한다면 송희 시인은 타자 정립을 노래한다. -----(중략)---- 동일한 나무를 대상을 삼으면서 이향지 시인은 타자들과의 소통을 거쳐 자기의 불변과 불면으로 결론을 맺는데, 송희 시인은 타자들과의 몸 섞음에서 진술을 마친다. --(중략)-- 이향지와 대비되는 세계가 또 있다. “혀”에 대한 진술이 그것이다. 이향지에게 혀는 분절하지 못하는 혀였다. 송희에게 혀는 분절된 소리의 상처로 재생되는 혀이다.
--------(중략)---------
정과리 _ 잘 들었다. 지난 3개월 동안에 나온 소설과 시집들은 두루 한국문학의 깊이를 측량해볼 기회를 제공한 듯 하다. 황동규․정찬․신경숙의 텍스트들은 작가․시인 세계의 심화가 끝없는 변형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임영조․이향지․배수아․정영문의 텍스트들은 독특한 언어세계가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에 맞닿아 있음을 가르쳐준다. 장옥관․송희․이현수․김왕노의 다양한 방위로 뻗은 텍스트들은 한국문학의 회전목마대가 튼실 공사로 세워졌음을 신호한다. 때는 바야흐로 꽃 피고 새 지저귀는 호시절이니, 사방이 소란스레 흥겹다. 한국정치는 여전히 날림이고 부실공사인 탓에 비만 오면 무너지는 축대요 무릎 빠지는 나날의 이전투구지만 한국문학은 ‘꽃시절’을 기대해도 좋지 않겠는가? 언젠가, 어떤 시인이 자신을 두고 말했지? “여보게,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시인 자신이 곧 시가 아닌가? 시는 또 문학아닌가? 문학의 꽃시절이 없었던가? 문학의 꽃시절은 앞으로는 아니면 없겠지. 없는 방식으로 있겠지.(정리 정과리).
---------------------------------------------
*『문학과 사회』2003년 여름호 좌담 “한국문학의 깊이를 더듬어보니 흥겹도다”에서 발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