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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지론], 깔깔 웃는 소녀
제4회 현대시 작품상 / 작품론
깔깔 웃는 소녀
― 이향지 시인에 관해
황 현 산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벌써 8년 전이다. 내가 <작가세계>의 편집을 맡으며 세계사시인선을 주관하고 있을 때, 그 시리즈의 하나로 선택된 이향지 시인의 『구절리 바람소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좀 이상하지 않아요? 왜? 내가 물었다. 아줌마 시인이지 않아요. 그게 어째서... 시만 잘 쓰면 됐지. 내 대답에 다시 물음이 되돌아왔다. 시를 정말 잘 쓰는 건가요? 나는 대답이 쉽지 않았다. 이 시집은 독자들을 호오의 양편으로 완강하게 갈라놓는 그런 시집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한 번 이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어떤 설명으로도 이해를 얻어내지 못하는 시집이 있다면 이 시집이 바로 거기 속할 것이다.
『구절리 바람소리』가 높고 강한 기운을 담은 시집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사실 전략적으로는 실패한 시집이었다. 우선 통일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고달픈 산행기(山行記)에서 어린 날의 추억담까지, 말의 유혹에서 생활의 발견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사물에 대한 독자적 시선의 즐거움과 시쓰기의 심적 고통까지, 다양한 방향에서 다양하게 솟아올라 엇갈리는 주제들을 요연하게 정리해 줄 지력선이 시집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주제들은 항상 감정의 응어리와 연결되어 있지만, 이 감정은 낱낱의 시에서 깊은 웅덩이를 파고 고립되어 있다. 게다가 이 응어리를 표현하는 말은 개인적 관용의 특성이 강해서 읽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기 십상이다. 한 편으로, 긴 시간을 누르며 준비된 이 시집은 자주 화해하기 어려운 형식들을 번갈라 사용하고 있어서 그 때마다 독자에게 마음의 준비를 새롭게 요구한다. 어떤 페이지는 상형시가 차지하고 있는데, 그 다음 장에서는 서두와 결구를 갖춘 음송시를 만나게 된다. 시인이 선택한 문체(文彩)들도 독자를 괴롭혔다. 직유와 은유, 암시와 직설, 유추의 문맥과 경탄의 문맥, 지시 수준이 다른 이런 언어체들이 한 시에서 뿐만 아니라 한 시구에서 동시에 사용되어 번번이 독서의 집중력을 흩으러 놓았다. 엄연한 상징적 표현과 성긴 우의가 겹쳐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동음이의어의 신소리가 끼어든다. 『구절리 바람소리』는 읽기에 편안하지 않았다.
이 시인이 쓴 몇 권 분량의 산문에서 보게 되는 명료하고 날렵한 문체를 염두에 둔다면 시의 이 불편함은 기이한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불편한 특성이 시의 힘을 만들고 시인의 개성을 부각시킨 것이 사실이다. 이향지는 시인으로서의 자기 운명을 통찰하고 있었다. 그는 50이 다 된 나이에 등단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자신이 시의 딜레탕트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명료하고 날렵하게 쓸수록, 쾌락한 문체를 자랑할수록, 그 위험이 더욱 가까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시 「솔깃한 대목」에서 잘 열거하며 말하고 있듯이, 솔깃한 유혹들이 그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는 명약관화하다. 그는 ‘자기 식으로’ 썼으며 몇몇 매니아들에게는 특별한 노력을 강요했다. 그래서, 며느리밥풀 꽃을 노래한 「며느리밥풀꽃」의 한 구절을 빌린다면 “이 긍지만 높은 작은 꽃의 蜜室에 닿기 위하여, 벌은 제 무게로 허공을 파며, 더 자주 날개를 움직여야 한다”.
긍지“만” 높다는 것은 자기비하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이다. 며느리밥풀 꽃의 이 긍지와 원망은 시인 자신의 고적감일 터인데, 『구절리 바람소리』 전체가 실제로 고적감과 소외감의 시집이다. 이 감정들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아마도 그 첫 시의 제목인 「별과 지붕이 없는 곳에서」일 것이다. 시인은 집을 버리고 “땅끝”까지 갔으나 머리에 별을 이지는 못한다. 이 정황은 일상에서 탈주하여 다른 지평선을 아득하게 내다본 자리에서 멈춰 서야 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이겠으나 늦은 나이에 발걸음을 시작한 이 시인에게는 개인적인 초조감이 또한 덧붙어져 있다. 탈출의 자리가 패주의 자리와 아슬아슬하게 엇물려 있다. 항상 애써 개척한 자리는 밀려난 자리와 겹쳐 있으며, 시인은 거기서 해방감과 회한을 동시에 끌어안는다. 어둠 속의 바닷가, 인적 없는 산등성이, “희디흰 탄식이 녹아 흐르”는 폐광촌의 빈집들, 낙엽이 덮인 철책선 근처의 참호, “버린 닻들이 있는” 포구, 이제는 용도가 폐기된 잎갈나무 숲, 이런 후미진 자리를 이 시인만큼 깊은 감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시인은 드물다. 폐허가 거기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폐허의 형식을 통해서만 자유를 엿볼 수 있고 생각다운 생각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홀로 서 있거나 홀로 잠자리를 찾아야 하는 이 외진 곳에서 시인은 묵은 기억에 몸을 떨고 인생을 통찰한다. 많은 시를 이 스산한 바람소리 속에서 썼다. 빈한한 자리에서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 갑자기 눈에 충격을 준다는 점에서 이 시들은 환시적이다. “별과 지붕이 없는 곳”의 “적당히 식고 적당히 무너진” 것들 앞에서는 아직 강건하게 끓고 있는 자신의 갈증을 만난다. 잎갈나무 숲에서는 뽑히지 않는 나무와 거기 감긴 비닐 조각들의 날아가려는 욕망 사이에서 누더기가 된 열정의 한 세월을 신음한다. “길보다 낮은 집 지붕들이 눈에” 들어오는 탄광 마을에서는 제가 만든 길을 타고 떨어지는 거미를 본다. 동음이의어의 신소리가 끼어드는 것도 이 때이다. 그것이 명백하고 엄격한 지시 언어와 암시적 전복 언어 사이에 하나의 경계를 만든다. 시인은 이 신소리를 이용하여 자기 앞에 다가온 생각이 얼마나 단단한 것인가를 살피려는 듯 잠시 마음을 준비하는 절차와 같다. 그는 「九切里 바람소리」의 마지막 두 행을 이렇게 쓴다.
구절리는 못 떠도 메주들은 잘 떠서
검고 푸른 홀씨들을 구절리 밖으로 날리는 밤
앞의 ‘뜨다’는 ‘떠나다’의 뜻이며 뒤의 ‘뜨나’는 ‘발효하다’의 뜻이다. 떠나야 할 폐촌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뜨지 못함으로 뜬다. 못 뜸이 뜸을 만들고, ‘잘 뜸’이 떠남을 막는다. 시인 자신의 처지가 또한 그렇다. 그는 일찍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오래 떴다. 이 신소리는 깊고 단단하다. 「며느리밥풀꽃」에서는 이렇게 쓴다.
바삐 걷거나, 키대로 서서보면 잘 안 보이는 이 풀꽃들을 더듬어 가는 동안에도, 나는 몇 번인가 끼니를 맞고, 밥상을 차리고, 주걱을 든다.
나는, 이 보라 보라 웃고 있는 며느리밥풀꽃을 밥처럼 퍼담을 수가 없다.
이 꽃들의 연약한 실뿌리들은, 대대로 쌓여 결삭은 솔잎을 거름으로, 질기게도 땅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보라”는 꽃의 색깔이며 동시에 “날 좀 보소”라고 말하는 꽃의 하소연이다. 꽃의 색깔 자체가, 사람의 그것이건 벌의 그것이건, 이목을 끌기 위한 장치이며, 주의를 얻지 못한 상심이 ‘보라’의 피멍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이 신소리는 매우 신기하다. 시인이 주걱을 드는 것은 그 꽃이 밥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시인은 시쓰기를 방해하는 일상의 작업과 함께 살아왔으며, 많은 시간을 보람 없이 보냈다. 그러나 주걱을 들 때마다 시쓰기를 중단해야 했던 기억이 그에게 이 풀꽃 앞에서 바삐 걷거나 작은 키를 위에서 굽어보지 않게 하는 너그러움을 만들었다. 그는 주걱의 기억으로 밥풀꽃을 만난다. 이향지는 살아온 내력을 모두 바쳐 이 꽃을 본다. 그리고 생명력과 비애감이 함께 섞인 “보라 보라”로 웃으며 말을 건다.
시가 이용하지 못할 것은 없다. 『구절리 바람소리』는 시쓰기의 불리함 일체를 딛고 일어선 시집이다. 이향지는 이 시집의 <自序>에서 “이것들을 떠나보내고 나면 내 생애의 멀미도 가라앉으리라!”고 썼으며, 실제로 이 멀미는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뒤이은 시집 『내 눈앞의 전선』에서는 무엇보다도 말이 순탄해졌다. 감정의 응어리는 남아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거나 감추기 위해 상징과 은유에 기대지 않는다. 말하자면 열정을 이용하여 자신과 독자를 끌고 들어가는 함정을 만들기보다 계단이나 사다리 같은 것, 더 나아가서는 몇 사람은 충분히 붙잡고 떠오를 수 있는 풍선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시의 기조는 여전히 환시적이지만, 이 환시는 즐겁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람과 사물의 관계에서, 사랑의 감정을 더 많이 누리며, 이 사랑으로 시인은 기억과 관찰의 사소한 특징에서 신기한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말에는 들리지 않게 농담을 섞는다.
이를테면 「둥글고 환한 구멍」 같은 이 시인의 걸작이 그렇다. 둥글고 환한 구멍은 물론 달이지만 그것은 달이 빠져나가 버린 홈통 저쪽의 구멍처럼 보인다. 달은 거기 있지만 달이 불러온 그리움에는 도달할 수 없다. 달을 보면서 달의 비어 있음을 보기에 그는 더 많은 것을 본다. “섣달 보름 둥근 달이 雪寒風에 떠밀린 우주로...”라고 말할 때, 시인은 우리에게 ‘이 홈통보다 더 배율이 높은 망원경을 가져 본 적이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다. 「바다 밖에서의 목욕」에서 수도꼭지를 통해 전달되는 바다 - 태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제 손등을 제 손으로 밀면서 그 공적을 어머니 - 바다의 태반에 돌린다. 이렇게 넓은 물에 몸을 담근 적이 있느냐고 묻듯이 시인은 우리를 돌아본다. 「방울토마토」에도 역시 미소를 이끌어낸다. 방울토마토였던 젊은 엄마를 두 아이가 먹어버렸다. 방울토마토였던 두 아이의 생명력을 엄마가 착취했다. 아이들은 지금 엄마 곁에 없다. 방울토마토는 없다. 비유는 범상할 수도 있는데 시 중간에 이런 대목이 끼어들어 있다.
방울토마토∙국산
중량 412g 100g 당 310원 가격 1277원 포장 연월일 00.2.17.
판매처 암호 0204437012777 업종 기타판매업
방울토마토를 먹고 남은 빈 용기에 이렇게 씌어 있다. 이 농담에는 허전함과 용서가 함께 들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사랑이 아니라 그 준비이며 연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거기에는 비극이 있다. 시 「창 없는 겨울이 지나간다」는 하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이 제목의 말을 열 세 번 반복하여 그 흐름을 끊어 놓는다. 창도 없고 불도 없는 어두운 방에서 두 마리의 박쥐처럼 허벅지를 찔리며 바느질하는 엄마와 소설책을 읽는 딸이 있다. 박쥐를 해방해야 하는데 성냥불은 이내 꺼진다. 마침내 딸은 마지막 성냥개비로 열 발가락에 불을 붙여 거꾸로 선다. 매화가 그렇게 만개한다. 기억을 사랑하기는 그렇게 힘들다.
현대시작품상의 대상작인 두 시편 「대해 속의 고깔모자」와 「뚜껑이 덮인 우물」도 이 시집에 들어 있다. 「대해 속의 고깔모자」는 결코 이 시인의 가장 훌륭한 시가 아니다. 여기에는 이 시인의 재능인 근접시선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에게 자주 투시의 전망을 마련해 주는 원거리의 시선에는 진정함이 부족하다. 그래서 지혜로운 소품 하나가 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어떤 주제라도 손가락으로 몇 번 주무르면 시로 만들어내는 재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뚜껑이 덮인 우물」은 『구절리···』 시절의 시에 가깝다. 비유체계가 복잡하고 진술의 선이 중첩되어 있다. 폐허의 자리에서 영감을 얻는 여자가 여전히 그 우물 속에 갇혀 있다가 환한 웃음과 웃음 사이에서 불쑥 암초처럼 발목을 잡는다. 이 갑작스러운 순간에 우리는 이향지를 강하게 느끼지만, 그의 시가 사랑스러운 순간이 거기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 밖의 목욕」에서처럼 잠시 누렸던 “남은 탯줄”을 되돌려 보낼 때, 「둥글고 환한 구멍」에서처럼 환한 구멍 하나만 손에 남길 때, 「창 없는 겨울이 지나간다」에서처럼 필사적으로 얻어낸 매화나무의 옆구리를 툭툭 쳐서 꽃잎을 떨어뜨릴 때, 시인을 사랑하게도 되고 존경하게도 된다.
시는 축적하지 않는다. 평생을 노력해서 얻는 빈 통장이다. 털어버린 손바닥은 순결하여, 희망이라 부를 만하다. 위반이라는 말도 그럴 때 쓴다. 나이도 무엇도 상관없이 빈 통장을 흔들며 깔깔 웃는 소녀가 고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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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2003년 6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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