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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내 눈앞의 전선], 고통의 수락을 넘어선 여성적 글쓰기와 생명적 가치의 발견  

[서평/내 눈앞의 전선]-<<시작>> 2003년 봄호 게재.

고통의 수락을 넘어선 여성적 글쓰기와 생명적 가치의 발견


- 이향지 시집 『내 눈앞의 전선』

        이연승  문학평론가


1. 여성 현실의 재인식과 ‘무거운 아버지’


이향지의 네 번째 시집 『내 눈앞의 전선』은 4부로 구성된 시집 전체의 배열과 구도를 염두에 두면서 읽어나갈 때, 시간 의식과 여성성에 대한 사유로 모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년 전에 출간된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2001)이 산에 대한 애정과 동경의 헌사였다면, 이번 시집은 『구절리 바람 소리』의 연장선상에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이미지와 언술 방식을 보여준다.
이전의 이향지의 시정신이 탐색해 가는 산에 대한 열정, 여성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 은유, 이미지, 시각적 형태미 등이 동원하는 시 형상화의 열정을 염두에 둔다면 이향지는 대단히 풍성한 상상력의 소유자인 듯하다. 이향지 시가 갖는 독특한 무게감은 세계와 ‘나’의 관계를 치열하게 탐색하고 사유하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와 ‘나’의 관계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이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은 대다수의 시인들에게 궁극적인 화두가 되겠지만, 이향지에게 세계와 ‘나’의 관계는 단순히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거나 되비추려는 피상적인 모티프가 아니라 한 여성적 자아의 존재론적 물음을 담고 있기에 주목을 요한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시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여성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가 한층 깊어졌다는 점이다. 시인은 여성의 내부를 탐사하고는 그 깊은 곳에서 ‘여성적 정체성’과 ‘영원한 생에 대한 직관’ 이라는 여성 특유의 내면성을 일깨워낸다. 이향지는 단지 여성적 정체성을 위해 시를 끌어오지는 않는다. 시인은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를 위해 만물의 존재상을 빌어오거나 합일하는 시를 구축한다. 그것은 상처입은 한 실존적 개인의 정체성을 우울하게 특화시키거나 신비화시키지 않으면서 인간의 선험적 정체성인 신화적 세계를 한층 고양시키는 시쓰기를 통해 나타난다.
우리 시에서 여성성에 대한 인식은 이미 기존의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활발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많은 여성 시인들이 각각의 독자성을 지니면서 자신들의 삶과 고통을 독특한 상상력과 언어를 매개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보인다. 그러나 시 양식을 통해 표출되는 여성성에 대한 인식이나 모티프가 모두 진정한 의미를 생산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기 연민에 빠진 나르시시즘적 태도를 보이거나 여성들의 삶의 기반을 너무 도식화시키는 병적인 징후가 발견되기도 한다. 이향지의 시집에서 보이는 여성성에 대한 인식이 기존의 여성시와 전혀 다르거나 낯선 기대지평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비유와 이미지는 사물과 세상을 여성적 시선으로 용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내면 풍경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재독을 요한다.

    나는 어머니를 찢고 들어왔지요
    어머니 피로 첫 옷을 입었고
    어머니 비명으로 첫 귀를 열었고
    어머니 손가락으로 첫 눈을 떴고
    어머니 숟가락으로 첫 밥을 먹었지요
    내 피가 내 아이의 첫 옷이 될 때까지
    그 안에서 무럭무럭 자랐지요
    누군가를 찢지 않고는 미궁 벗어날 수 없나니
    나는 내 아이가 때맞춰 나를 찢게
    긴 끈을 풀밭 입구까지 이어두었지요
    - 「돌 속의 넓은 풀밭」부분


어머니는 단지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라 여성성의 근원이라는 인식을 이 시는 함축한다. 타자로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의 주체인 남성의 대립자로서 존재한다면, 어머니는 창조물의 근원이기 때문에 존재의 발원지이며 인간의 존재 이유가 된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둠이면서 근원이고, 사랑이며 생의 원천이 된다. ‘누군가를 찢지 않고는 미궁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 조건은 바로 우리들 모두의 태생적 조건이자 운명이다. 중요한 사실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시간은 정지된 시간대이며 현대인의 신화적․ 원형적 공간이자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인간은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요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곳으로 회귀하려는 욕망을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탄생의 힘겨운 순간을 포착하면서 삶의 탯줄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연대성 확립의 기반을 형상화하고 있다. 육체의 파열을 통한 탄생의 체험은 고립된 개체로 하여금 이질적 존재와의 연대감을 얻게 한다는 점에서 육체의 고통을 넘어선 새로운 가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 운명과의 힘겨운 싸움을 지나면서 세계에 의해 응어리진 억압의식은 ‘나’라는 한 인간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의식과의 힘든 대결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의 어둠의 세계와 상징적 억압성에 주목한다.


    어떤 왕이 이 그늘진 뒤뜰까지 와서
    저 깊은 가슴에 맞는 두레박을 내려줄 것인가
    반항보다는 체념에 익숙하고
    모순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여자
    뚜껑을 들추면 오늘의 하늘을 담을 수 밖에
    나는 건너간다
    뚜껑 아래 여자에게 오늘의 하늘을 보여주려고
    여자속의 왕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버리려고
    발등까지 덮이는 하이힐을 신고 감색바지를 입고

    다가가는 고통과 다가오는 고통 사이에서
    듣는 발소리
    들어올리려는 힘과 누르는 힘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악취와 암흑
    뚜껑 아래 우물은 썩고 있었다
    살아서도 죽은 것처럼 썩고 있는 여자
    완강하게 뚜껑을 잡아당기며
    악취로 대답하는 여자
    내 힘으로는 도저히 바꿔놓을 수 없는 여자
    죽어서 살기에 꼭 좋은 곳에 두고
    수수꽃다리 향기를 좇아 돌계단을 오른다
    -「뚜껑이 덮인 우물」부분


‘왕’과 ‘여자’의 이항 대립적인 구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시는 ‘나’라는 매개적 인물의 등장으로 그 대립구도를 해체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원형 상징에서 우물이 환기하는 이미지는 풍요로운 여성성, 고갈되지 않는 모성의 근원적 힘이다. ‘들어올리려는 힘’과 ‘누르는 힘’이라는 역학적 구도 속에 놓인 ‘여자’는 악취와 암흑으로 가득한 세상을 굳이 거부하거나 밀어내지 않으며, 편리한 환상의 욕망에 순치되지도 않는다. 썩고 있는 우물 속에 갇힌 여자는 오로지 ‘악취로 대답’할 뿐이다. 그래서 그 여자는 ‘스스로 몸을 기울여 엎질러질 수도 없’고 ‘세상의 표면으로 길을 내어 소리쳐 흐를 수도 없는’ 여자이다. ‘썩고 있는 우물’은 삶을 감당하는 여자가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표현하는 상징적 이미지이다. 감금된 공간으로서의 ‘뚜껑이 있는 우물’은 ‘악취와 암흑’으로 드러나는 상징적인 불구의 시간에 내포된 억압성을 드러내준다. 그래서 ‘반항보다는 체념에 익숙하고/ 모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여자는 선험적 억압성이라는 내포적인 긴장을 해체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피동적인 여자다. 시인은 ‘살아서도 죽은 것처럼 썩고 있는 여자’ 의 핏줄에 각인된 선험적 억압성과 더불어 절대 타자에게 복종하는 ‘여자’ 속의 ‘왕’을 해체시키려는 모험을 감행하지만, 끝끝내 그 여자는 ‘완강하게 뚜껑을 잡아당기며/ 악취로 대답’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절대 타자의 억압성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통해서 시인은 그 이면에 여성을 억압하는 어떤 조건이 있음을 독자에게 인지시키고 있는 것일까? ‘썩고 있는 우물’이라는 고통스러운 삶의 조건에는 ‘아버지’라는 타자, 가부장이 자리잡고 있다.


    좋은(好) 삶(生)
    사는(生) 것이 좋아(好)
    여자(女)가 아들(子)을 안고 산다(生)
    좋구나(好) 사는 일(生)
    好生이 무슨 뜻이어요 물었을 때 큰손으로 머리만
    헝클어 주시던 아버지
    … (중략) …
    아버지는 자신이 세운 好生 위에서 느릿느릿 復碁나
    하고 싶겠지만
    나는 好生 안에서 빨리 벗어나 나의 계단 오르고 싶지요
    - 「好生藥局」부분

    엄마 봉분 위에 아버지가 엎드려 흑흑 느껴 울지, 신음하는
    술잔은 계속 쏟아지지, 나는 햇볕을 가르며 다가가 무거운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지, 엄마는 병이 다 나아 봉분 밖으로
    나오지, 봉분 밖으로 나온 엄마는 딸을 못 알아보지
    … (중략) …
    내 봉분은 투명하지, 신음하는 술잔은 계속 날아오지,
    봉분 속의 엄마는 계속 아프지, 무한천공 햇볕을 가르며
    다가와 이 무거운 아버지를 일으켜 세울 딸은 아주 멀리
    있지, 내 딸이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는 날은
    - 「이 무거운 아버지를」부분


체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기억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이향지 시에 유추의 실마리로 나오는 기억의 무늬들은 시인 자신이 처해 있던 상황과 징후들을 간접적으로 반영한다. 이 두 편의 시들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질서의 단면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해체하고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여성의 의미를 되묻고 환멸의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임을 자각하고 있다. 이 두 편의 시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무겁고 갑갑한 삶의 조건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진정한 여성적 자아를 찾아나서기 위한 시적 의지를 촉발하는 존재이다.
「好生藥局」은 아버지가 세우고 일구어 나가는 ‘호생약국’이 아버지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생존의 방편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시적 자아를 불편하게 구속하는 억압의 기둥임을 지적한다. 이 시는 한자 ‘好’의 조합이 남성 편향적임을 지적하는 모티프에서 출발하지만, 아버지가 지은 ‘好生’의 기둥에서 벗어나 ‘나의 계단’을 오르고 싶다는 일탈과 해방의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야말로 자신이 생을 영위해나갈 수 있는 발판임을 말하고 있다.
「이 무거운 아버지를」에서는 죽은 엄마의 봉분에 엎드려 슬퍼하며 울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함축적인 의미와 긴장을 내포하고 있다. ‘봉분’은 현재의 삶과 유리된 의식을 드러내는 물질적 기호이다. 어머니의 봉분은 부정할수록 오히려 시적 자아를 더욱 견고하게 가두는 현실의 포획력을 상징한다. 남성적 지배질서에 순응할 수 없는, 그래서 이를 전복함으로써 여성적 질서로 대체하자는 ‘무거운 아버지’는 바로 폭력적 세계상의 중심에 있는 가부장적 권력의 기호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 이향지의 시는 남성적 세계와의 대결 혹은 싸움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선다. 그것은 상호 대립이나 증오의 단계를 넘어선, 탈남성성의 선언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여성들만이 겪는 독특한 몸의 체험이 육화된 목소리를 획득하게 되는 지점에 이른다.



2. 구원의 시간, 구원의 항아리


그렇다면 그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혹은 대타적 의미로서의 구원의 의미를 지니는 여성성의 탐구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앞의 시가 부성의 폭력성이 주체의 위기로 전화(轉化)되는 지점을 의미화하는 동시에 이를 넘어서려는 여성적 자아의 욕망을 말하고 있다면, 그 욕망과 주체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상황은 현실과 어슷나는 시간의 균열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향지 시에 나타난 억압의 상황은 단순한 대립구도나 이를 무화시키려는 가벼운 화해의지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시인은 원형적인 공간과 사물을 환기하면서 여성의 몸의 체험이 신비스럽게 사물과 합일되는 지점을 형상화한다.


    내 지극히 흠모하는 빛의 진액만으로 빚은 듯한 항아리를
    팔에 두를 때까지, 내 오른손은 환한 계곡에서 물을 뜨고
    있었다. 내 지극히 흠모하는 曲線의 세계 안에서, 뒤집어진 바다
    와 하늘 사이에서, 움직이지 않는 線 하나를 발견할 때까지, 환한
    계곡에서 환한 바가지로 물을 뜨고 있었다.
    … (중략) …
    내 육체의 한 끝을 바닥 없는 항아리 속으로 이끌고 갔던
    빛은 무얼까? 내 꿈의 전신이 뛰어들 사이도 없이 사라져버린
    계곡은 왜 내게로 왔던 것일까? 어느 새벽이 에너지가 다하도록 보여준
    빛과 공기의 장난들. 잠깐의 눈부심, 잠깐의 황홀. 내 어깨에 매달려 있었으나
    내 팔이 아니었던 新生의 모습. 내 아픔이 사라지자 그 항아리도 사라졌다.
    나는 폐경기를 넘어섰다.
    - 「잠깐 본 항아리」부분


여성에게 나이는 생에 관한 시간의 결절점이다. 나이란 인생의 시간에 관한 성찰이 전제된 단위들이라고 본다면 폐경기는 여성에게 새로운 자의식과 각성을 동반하는 시기이다. 이 시에 나타난 시간 의식은 현재와 과거․ 미래가 하나로 통합되고 무화되는 무시간성에 바탕을 두되, 육체와 영혼, 과거와 현재, 어둠과 빛 등의 경계를 지워버림으로써 척박한 현실에서 자아를 영위해 나가는 새로운 가치와 전망을 보여주고 있음이 주목된다.
항아리는 빛과 물, 곡선과 직선, 감김과 풂, 그 변형들을 통해 자아의 의식을 성취하는 매개물로 등장한다. 시적 자아는 그러한 대립의 역학을 통해 빛과 공기, 물과 영혼이 합일되는 근원적 자기 동일성을 회복하게 된다. 항아리는 삶의 즐거운 하모니, 영원한 생에 대한 직관을 표현하는 중요한 시적 기호가 되는 것이다. ‘잠깐의 눈부심, 잠깐의 황홀’이라는 찰나의 순간이기는 하지만 시인은 그 순간의 의미, 신생의 모습을 통해 ‘내 아픔이 사라지’고 ‘항아리도 사라’지며 ‘폐경기를 넘어서’는 몰아(沒我)를 경험하고 무아를 성취한다. 텅 빈 무위에서 비롯되는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시인은 신화적이고 신비스러운 소멸의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항아리는 여성의 비밀스러운 공간이자 제의적 사물이며 생의 신비와 순결성을 간직하고 있는 사물임이 분명하다. 물과 빛, 신생의 시간과 여성 인체의 리듬의 조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적 리듬의 표현임을 인지시켜 준다. 그 우주적 리듬의 표현과 여성적 정체성 탐구의 이면에는 아픔을 겪고 난 자가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생에 대한 직관과 성찰이 숨어 있다. 이제 이향지는 여성성이라는 이름조차 초월한 인식적 정체성인 생명적 가치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나의 천장. 천장 위의 천장. 2밀리미터의 합판과
    한 겹 도배지가, 그와 나를 동거하면서도 별거하는 빛
    과 어둠, 상층과 하층으로 갈라놓았다.
    … (중략) …
    나는 그의 고통을 양식으로 나의 고통을 詩로 쓴다. 함께 어
    두워지기를 그는 얼마나 비는가! 나는 즐거움도 숨긴다. 그는
    창과 방패를 동시에 준다. 나는 모순을 이고, 모순을 밟고 간다.
    - 「더그매」부분

    이제 제 날은 二寸도 안 남았습니다. 죽은 고기들이나 썰면서
    강철의 날들을 이토록 축내다니! 이제는 제 날이 저를 겨눕니다.
    二寸도 안 남은 날이 저를 겨누는 겁니다. 자책과 비애가 물 끓듯
    저를 끓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제 날을 좀더 가혹하게 칼갈이로
    갈아댑니다. 제 날은 머지않아 一寸도 안 남을 겁니다. 一寸도 안
    남은 날 끝이 제 심장을 겨눕니다. 아아,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제 날의 성공을 빕니다.
    - 「오래된 칼」부분


‘모순을 이고, 모순을 밟고’ 가는 삶이야말로 무릇 인간이 처해 있는 딜레마이자 숙명일지도 모른다. 이향지는 시쓰기의 욕망과 삶의 욕망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타자의 고통을 양식으로 삼아 나의 고통을 시로 쓰는 행위는 곧 자학적 고통을 감행함으로써 현실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계를 지향함과 동시에 그 고통 뒤에 싹트고 있는 재생의 씨앗을 기약하는 것으로 읽힌다. 고통스러운 자책과 번민의 축제는 그래서 다시 반복된다. ‘그의 고통’을 양식으로 시를 쓰는 자아의 몸은 세상의 모순과 갈등을 쉽게 무화시켜 섣부른 화해의지로 나아가기보다는, 그 화해의지를 무너뜨리는 역설적인 생명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두 번째 시「오래된 칼」에 ‘제 날이 저를 겨눕니다’, ‘一寸도 안 남은 날 끝이 제 심장을 겨눕니다’ 등의 어조 속에는 결연하고 단호한 자아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가상의 죽음을 통해 시인은 현실의 고통과 거짓된 환상을 거부한 채 시쓰기의 욕망과 삶의 욕망이 하나로 합일된 지점에서 자신의 생의 근원을 밀고 나가는 동력이 곧 시임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동시에 시인은 ‘고통’이라는 틀 위에 세상과 자신을 올려놓고 있다. 자신이 품고 있는 ‘칼’은 곧 단순한 자학의 의미를 넘어선 고통의 수락과 그것의 되돌아봄이라는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향지는 세계와의 야합이나 순응으로 무장한 거짓된 도덕주의를 철저히 거부한다. 그래서 그녀의 생명적 가치와 사랑의 방식은 고통과 번민의 대가가 클수록 왜곡된 세계를 돌파하고 진실된 소통구조를 창조하게 되는 반어적 구조로 작용한다. ‘자책과 비애가 물 끓듯’ 자신을 끓이는 세상 속에서 그녀는 시퍼렇게 날세운 ‘칼’을 무기로 끊임없이 자신을 벼리고 추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향지 시에 나타나는 고통의 의미는 일종의 통과제의적 성격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내 사랑은 길고 깊은 골절의 와중

    뼈 부러진 아내를 위해 우족을 씻고 있는 남자의 물 묻은
    손등 위

    뼈 부러진 아내를 위해 젖은 홍화씨를 볶고 있는 남자의
    구부정한 어깨 위

    뜨거운 솥 안에서 하염없이 휘둘리고 있는 나무주걱의
    자루 끝
    - 「내 사랑은」전문


이제 이향지는 여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의식의 경과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시세계로 접어드는 듯하다. 시인이 몸으로 품고 있는 사랑의 깊이는 뜨겁고 아늑하다. ‘길고 깊은 골절의 와중’에서 솟아나는 사랑의 물줄기는 세상의 상처와 갈등의 골을 메우고 인간의 시선을 서로 화해시켜 존재의 행복한 교감을 이루려는 사랑의 시학이라 할 만하다. 바로 이 사랑의 시학이야말로 이향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시적 화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의 관념은 척박한 현실과는 요원한 것이기에 아직 도래하지 않는 미지의 영역, 유토피아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시의 무게감을 만드는 데는 세계를 통찰하는 시인의 직관과 사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놓고 본다면, 이향지의 시세계는 보다 풍요로운 생명적 가치와 사랑의 시학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시에 나타나는 여성적 정체성의 탐구가 기존의 여성시에서 보이는 동어반복적인 언술 구조나 상상력의 범주를 벗어나 더 큰 지평으로 열리길 기대한다. 다만 그 시적 언어들이 유추의 매개고리가 불투명한 이미지나 어법의 중첩으로 이어지거나 너무 개념화되어서 진지한 시적 의미를 놓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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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승 문학평론가/ 199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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