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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이 달의 작품], 가뭄-환한 주검들의 육탈골립  

[현대시학/2001년 9월호/내가 읽은 이 달의 작품]-<이향지/가뭄>

환한 주검들의 육탈골립



                                                김 양 헌


조양호는 금호강 상류, 영천시 자양면에 있다. 동으로 운주산, 서쪽으로 기룡산을 거느리며 보현산 물을 받는 인공호수다. 예로부터 호수는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시의 바탕을 마련하였으니, 속초의 영랑호는 오래도록 四仙의 南行을 막았고 동정호 칠백 리는 두보의 눈물을 보태 더 넓어졌던 것. 비록 <乾坤日夜浮>(杜甫, 「登岳陽樓」)라 노래하기엔 작은 호수지만, 별빛 차르르한 조양호라면 어찌 쉽게 발길을 돌릴 수 있겠는가. 보현산 정상에 국립천문대가 들어설 정도로 하늘이 맑고 큰 인가가 없는 데다, 조양호에 해가 지고 달이 뜨면 인간의 필설로는 그 풍광을 다 노래할 수 없으니 이러한 곳이 바로 別有天地非人間이 아니고 무엇이랴.
얼음판 끝자락을 따라 천둥오리들이 유난스레 촘촘히 어깨를 기대앉은 겨울이 지나고 가뭄이 극심했던 어느 봄날, 조양호가 거의 바닥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예전의 자양천변을 따라 고샅고샅 남은 초가의 형해가 기이한 냄새를 풍겼다. 썩어내린 지붕 사이로 보리 찧던 디딜방아가 설핏 보이고, 한때 잉어가 놀았을 요강단지가 깨진 채 마당께를 뒹굴었다. 더러는 비스듬 무너지고 더러는 신기하게도 멀쩡한 흙벽이 진한 어둠을 껴안고 있어 전체적으로 섬짓한 느낌을 주었다. 찌부러진 정낭문을 열고 그 옛날의 달걀귀신이 어깨라도 툭, 칠 것 같았다. 끈끈한 진흙이 운동화를 물고 늘어졌다. 오십여 년 전 자양천 홍수에 휩쓸렸던 순이 할머니 동생이 진흙바닥에서 불쑥 손을 내밀어 발목을 움켜쥘 듯, 괴괴한 고요가 감돌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낮이 정적이 그리도 무서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져나온 일행이 마른 언덕에서 숨을 고를 때, 바로 그 소리가 들려왔다. 가늘고 음산한 쇳소리.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늦봄의 햇살만 따가웠다. 그러다 우리는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건너편의 운주산 서북쪽 발치에 은회색 뼈들이 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던 것이다. 한 마장은 족히 될만한 거리여서 처음에는 반짝이는 그 무더기가 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차를 타고 한참 올라가 맞은 편에 서서야 그것이 물에 잠겼던 사과밭이라는 것을 알았다. 잔가지까지 선명한 사과나무의 뼈들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탈색해가는 소리였다. 자세히 들으니 전혀 음산하지 않았다. 물기가 빠지며 타다다다다, 두두두두 肉脫骨立, 정신의 깊이를 더해가는 맑은 소리였다.
그 후 두어 해 동안 물이 가득 차자, 어찌된 일인지 다음부터는 아무리 가물어도 그 뼈들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온전히 아스라져 흙으로 돌아갔는지, 무게조차 없도록 골립을 거듭하다 마침내 승천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자양천변의 흙벽도 다 무너지고 진흙이 덧쌓여 사람살이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그날의 소리와 냄새, 가슴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간 정적과 은회색 뼈들은 환상이었을까? 요즘에는 이주한 자양 면사무소 앞 식당에서 잉어찜부터 뜯고, 기룡산 남쪽 정씨 가문의 선산이나 보현산 길목의 앵벌이 무덤을 찾는 게 고작이다. 저 까마득한 수면 아래 주검의 신비는 그 깊이만큼이나 아득한 옛일로 묻혀버렸다.
육탈골립의 꿈도 덩달아 사라지고 뱃살만 쑥쑥 늘어나 그 기름때가 골수까지 뻗친 한여름, 공교롭게도 호우주의보를 뚫고 〈가뭄〉이 들이닥쳤다. 〈물이 빠지자 물밑에/웅크리고 있던 시체들이 깨어났다〉는 첫 연처럼, 가슴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주검들이 단번에 되살아난다. 은회색 뼈마디들이 쌓인 먼지를 털며 투두둑 관절을 푸는 소리 요란하다. 이향지 시인이 간 곳이야 물론 조양호가 아닐 테고 경험의 편차도 만만찮아 보이지만, 가뭄에 내포된 죽음/반생명성이라는 보편적 이미지가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해준다. 호수라면 대개 철새가 날고 물이 그득 출렁이는 풍광을 상상하게 만드는데, 가뭄은 호수를 호수 아닌 것으로, 호수라는 존재의 본질을 앗아가는 부정적 현상으로 등장하게 마련이니 죽음의 이미지는 당연한 출발이다.
하지만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하면 예술이 되기 어렵다. 당연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시인은 일상적 관습을 뒤집어 놓는다. 시취 풍기며 드러나야 할 부패한 주검들이 오히려 당당하게 〈깨어난다〉. 물 속에 잠겨 보이지 않고 잊혀져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사물들이 생생 생기를 되찾는다. 〈가뭄〉은 죽음의 이미지를 털어내고 삶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가뭄〉운 단순한 가뭄이 아니다. 재생/부활의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밭이었던 언덕
    논이었던 구릉, 길이었던 냇둑
    사람이 지고 있던 구들장들이
    옆구리가 터져서 떠나지 못한 오지항아리
    나뭇가지에 걸어둔 채 잊어버린 호미날이

가뭄으로 되살아난 목록. 목록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언덕/구릉/냇둑〉은 이미 밭과 논이며 길이었으니, 가뭄은 사람살이의 근원부터 보여주는 셈이다. 삶터가 수몰되고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논밭의 근원이 소중하던 오랜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자본과 정보라는 현상이 지배하는 새 시대가 완성되었다. 2연은 이미 벗어날 길 없는 이런 시대를 시인이 아직까지도 속내 반기지 않음을 암시한다. 〈언덕/구릉/냇둑〉의 거시적 조망에서 〈구들장/오지항아리/호미날〉의 미시적 섬세함으로 시선을 옮기며 구체성을 강화하는 것도 시인/화자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드러내는 방법적 전략이다. 가뭄은 물 아래 묻혔던 사물들의 원래 모습을 되찾음으로써 과거를 단지 과거로 묻어버리지 않고 현실을 성찰하는 바탕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동일 구문의 반복과 구체성의 점진적 강화, 용언의 생략과 최소한의 수식어구 등으로 형성되는 단정한 리듬은 사물들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움직일 수 없는 〈언덕/구릉/냇둑/구들장/오지항아리/호미날〉이 움직이는 듯하니, 그 안에는 필경 사람들이 살고 있을 터. 〈밭이었던 언덕〉으로 지게를 진 아저씨가 넘어온다. 〈길이었던 냇둑〉아래에는 빨래하는 아낙이 보인다. 흙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는 할머니가 남새밭 옆 나뭇가지에 호미를 걸어둔 채 잠시 땀을 식히고 있다. 이런 고요한 생명력은 다음 연에서 다양한 삶의 역동적 〈소리〉들을 불러오는 근거가 되고, 여러 소리들이 뒤얽히면서 신명을 엮어내게 하는 밑바탕으로 작용한다. 가뭄으로 드러나는 것이 신명이라면 참으로 역설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시체들이 즐겁게 삶의 노래를 부르는, 환한 주검들이 도처에서 얼굴을 내밀고 소리를 지르는 이렇게도 밝은 가뭄!

    어떻게 떠나요? 안 가면 어쩔거여?
    더 내놔요! 됐네 이 사람! 싸우는 소리들이
    움메 멍멍 꼬끼요 꿀꿀
    경운기 떠나는 소리들이
    양수기 빌리러 가는 노인처럼 기우뚱한 전봇대들이

2연에서의 시각적 장면이 청각적 상상으로 바뀌면서 삶의 모습은 더욱 생생해진다. 간명한 표현의 몇 개 장면이 청각적 이미지로 힘을 얻는다. 역동성이 강화되며 움직이는 사물들이 주체로 등장하고, 사람 싸우는, 동물 우는, 〈경운기 떠나는〉, 양수기 돌아가는 소리들이 수몰과 이주라는 왁자그레한 삶의 한 때를 되살려낸다. 부정적 상황까지 활기찬 분위기로 엮어내어 존재의 생명력을 확인해주고 삶의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그래서, 2연의 정적인 장면이 3연의 동적인 상황으로 바뀌자, 1연의 〈깨어났다〉는 표현도 4연에서는 〈헤치고 나와〉라는 훨씬 더 적극성을 띤 동사로 변모한다. 〈시체들〉은 더 이상 죽음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지 않는다. 수몰지역에 가뭄의 빛이 강하게 내리쪼이자, 〈창백한 몰골로 무덤을〉이루고 있던 주검들이 환하게 삶의 노래를 부르며 물 밖으로 걸어나온다. 현실적으로야 괴괴한 고요가 척박했던 예전의 삶터를 메우고 있었겠지만, 시인은 거기서 존재의 역동성, 삶의 온기를 찾아낸 것이다.
과거의 삶은 3연 마지막 행에서 현실과 만난다. 초월의 꼿꼿한 꿈을 삶의 현장으로 되돌려버린 듯한 〈기우뚱한 전봇대〉라는 귀여운 과거는, 과거의 장면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가뭄을 표상하는 〈양수기 빌리러 가는 노인〉의 현재성과 겹쳐짐으로써, 〈물 좀 주세요!〉라는 외침이 이 모든 것을 다시 물로 가둬 달라는 의미가 아님을 강하게 암시한다. 가뭄/물의 이미지는 다시 역전한다. 여기서의 물은 앞머리처럼 수몰/죽음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풍기는 게 아니라, 전통적으로 지녀온 생명/부활의 이미지로 소리친다. 대신 가뭄은 부정적 이미지로 돌아온다. 애초에 안타까운 과거의 어둠을 백일하에 드러냈던 긍적적인 가뭄은 이제 현재의 척박한 삶을 표상하는 〈무덤〉과 동의어다. 그러므로 물이 필요한 곳은 바로 지금 우리들의 삶이다. 통사구조상 2연과 3연에 등장하는 온갖 존재들이 물을 달라고 외치지만, 시상의 흐름으로 볼 때 정작 물이란 바로 2연과 3연에 나오는 존재들의 상태와 행위를 가리킨다. 생명을 위한 삶의 현장과 생동감 넘치는 일상이 물이 품고 있는 상징성이다. 현실이란 가뭄은 이 과거의 물을 통하여 비로소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창백한 몰골〉이 암시하듯 꿈의 실현은 늘 현실에 가로막힌다. 사라져가는 따뜻함을 하염없는 그리움으로 바라보지만 어쩌겠는가. 〈물 좀 주세요!〉 안타까이 가뭄을 호소하나, 이번 폭우로 다시 모든 게 물에 잠기면 등천하는 욕망을 주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르르한 별빛이 조양호 깊은 곳 주검들의 은회색 뼈까지 비추는 밤, 「가뭄」을 거듭 읽으며 육탈골립하는 사과나무의 꿈을 되새겨본다. <<현대시학> 2001년 9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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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헌·1957년 경북영천 출생. 1995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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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가뭄> 전문

    가뭄




                   이 향 지



    물이 빠지자 물밑에
    웅크렸던 시체들이 깨어났다


    밭이었던 언덕
    논이었던 구릉, 길이었던 냇둑
    사람이 지고있던 구들장들이
    옆구리가 터져서 떠나지 못한 오지항아리
    나뭇가지에 걸어둔 채 잊어버린 호미날이  


    어떻게 떠나요? 안 가면 어쩔거여?
    더 내놔요! 됐네 이 사람! 싸우는 소리들이
    움메 멍멍 꼬끼요 꿀꿀  
    경운기 떠나는 소리들이
    양수기 빌리러 가는 노인처럼 기우뚱한 전봇대들이


    창백한 몰골로 무덤을 헤치고 나와
    물 좀 주세요!


    물 좀 주세요!

*<현대시> 2001년 8월호.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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