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관련 記事

◎ 2001/4/12(목) 00:18 (MSIE5.0,Windows98) 211.218.204.6 1024x768
[시집], <<구절리 바람소리>> 해설  


   아주 늦게 쓰여지는 시, 늦은 시간, 그러나
     그때라야, 삶의 내장을 들락거려본 자가
          한 톨쯤 얻는 <소금>에 대하여,


                                                                    김 정 란 (시인. 상지대교수)


 이향지의 시는 저녁에, <늦은> 시간에 쓰여진다. 그 <늦음>은, 사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어서, 시인은, 그 <늦음>이, 실은 <늦음>이 아니라고 강변할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녀는 그 늦음 안에, 눈 가리고 아웅 할 수조차 없이, 적나라하게, 내팽개쳐져 있는 것이다. 오, 赤身으로! 적신의 시려움을 가려볼 ,지붕.도, 캄캄함을 모면할 <별>도 없이, 하기는, 정말로 늦은 것이다. 저녁은, 돌이킬 수 없는 캄캄함에 덜미를 잡혀버린 것이다.

시집을 펼쳐들면, 그 피할 수 없는 <늦음>에 대한 인식이 썰렁한 바람으로 가슴을 후빈다시인은 시간의 <끝>으로 떠밀려온 것이다. 그렇다, 이 시집은 그렇게 우울한 是認으로 시작된다.


  해남군 땅끝에서 말하지 그래
  생각보다 저녁이 빨리 왔다고
   
   ―「별과 지붕이 없는 곳에서」중에서


그러니, <적당히 식고 적당히 무너진 저녁이 되어 / 적당히 썩고 적당히 버려진 갯벌 앞에 섰으니>, 안녕, 하고 다정히 무너진 것들 옆에 드러누워 버리고 말 것인가? 흥, 어쩌란 말야, 내가 저녁을 불러들였나, 제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난들 어쩌냐고, 할 수 없지 않느냐고, 쫓아낸다고 갈 저녁이냐고. 그런가? 어쩔 수 없이? 하기는 부정할 재간이 없다. 이 시집의 많은 시들은 그렇게 이미 늦어버린 시간 앞에 막막히 서 있는 한 중년 여성의 흔들리는 마음 자락을 보여준다.


   오늘도 용서하세요, 드릴 시가 없어요.
   저 가을에 잎갈나무를 다 읽었거든요
     ―「잎갈나무를 읽고」중에서


<시>는 없다. 있는 것은 거기에 있는 초라한 자연, 자연일 뿐인 자연, 그것뿐이다. 이향지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쓸쓸한 풍경들은 그렇게 이미 늦어버린 시간에 대한 회한을 드러낸다. 물때가 지나간 <갯벌>, 사람들이 다 떠난 <폐광>, 그런 풍경들이 그녀의 눈길을 붙잡는다. 끝, 그 뒤에 남은 잔류물, 쓸쓸함. 벌써 시드는 것들, 다시는 소생할 가망이 없는 것들, 그 자리에 버려져, 버려진 채로 남은 시간을 때우는 것들. 시인은 그 곁에 다가가 마음으로 그것들을 쓰다듬는다. 시인이 부르는 노래는 그래서 <막장의 노래>이다.

     내 어찌 막장의 노래를 알며 부를 수 있으랴

     …아무도 없는……깜깜한……언젯적 비에 다져진……
     …나란히 가는……떠나 보낸……새로운 汽笛을 기다리는……
     …쌓여 있는……흘러내리는……앉힐 곳 없는……
     …챙기지 못한……여물지 못한……잘게 부서진……

     나는 낱말들의 서술형 나무로 炭더미 앞에 서있다
         ―「자미원 폐광에서」중에서

  시인이 말없음표 사이사이에 펼쳐 놓은 표현들은, 시인이 자신의 내면풍경으로 인지하는 황폐함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를 잘 드러내 보여준다. 부서진 탄더미, 그것은 <언젯적>부터인지 알 수 없게, 이미 거기에, 버려진 채로 있다. 그 <버려짐>의 시간적 근원은 따라서 추적해 볼 수 없는, 이미 교정 불가능한, 그 상태로 고정된, <다져진> 어떤 것이다. 이미 <떠나 보낸> 어떤 시간, 빛을 불러낼 아무 희망도 없는 시커먼, 의미화의 정착에 실패한, 흔들리는, <앉힐 곳 없는> 삶의 양태. 시인은 그것들을 바라보며 자신을 <낱말들의 서술형 나무>로 인지한다. 즉, 시인은 자신을 실사로, 실체로, 주어로 인지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흘러온, 여기에 살아남은, 시간이 강요하는 움직임에 휘둘린, 움직임의 결과물로서의 자아…… 다만 흘러내리는 자아, 흘러내림 안에 고정되어 있을 뿐인 자아.
그렇게 시인은 <끝>으로 떠다밀려 간다. 이향지의 시에는 유난스럽게 <바다>의 풍경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우선은 이 시인의 고향이 바다여서, 시인이 즐겨 바다를 찾는 까닭일 터이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장소가 시인의 시적 토포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간에 떠밀려 떠밀려 세계의 <끝>인 <바다>에 이른 시인. 그 <바다>는 출항의 장소가 아니라, 물때가 지난 써늘하고 휑뎅그렁한 텅 빈 장소이다. 시인의 시선은 난바다가 아니라, <뻘밭>에, 닻이 내려진, 세계의 끝에 머문다. 시인은 떠나지도, 돌아가지도 않는다. 다만, 거기에 있을 뿐이다. 언제 거기에 도착했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다만, 지금, 거기에, 다 늦은 저녁에. 할 수 있는 일은, 거기에, 지금, 내가, 늦은 시간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일, 그것을 자기의 일로 동화하는 일뿐이다.

     내내 내리는 비에도
     젖는 것은 다만 껍질뿐이라고
     바람이 핏줄 속을 흘러다녀도
     앗는 것도 재는 것도 체온뿐이라고
     산 몸을 뼈처럼 에워싸는 어둑살이
     땅 끝에 선 마음을 뼈처럼 세우는 중이라고
      ―「별과 지붕이 없는 곳에서」중에서


     소래는 썰물
     소래는 滿船이다
     소래는 뻘밭에 들얹힌 거대한 어선이다
     배 안의 북새통 피해 뱃전으로 나서면
     支柱木만 남은 造林地 같은 또 한 바다가

      무엇입니까 저것은?
      버린 닻들입니다
      저쪽 뻘밭 위 저것들?
      버려진 닻들입니다
      마음이 버린 것들로 손가락이 향할 때
      그대는 누구의 무엇입니까?
         ―「버린 닻들이 있는 풍경」중에서


  그곳에서 시인은 바장인다. 그러나 그뿐일까? 시인의 시쓰기는 그렇게 무력한 회한의 산책에 불과한가? 아니, <사실은……, 사실은……,>그렇지 않다. 이향지의 늦게 쓰여지는 시들은, 사실은 그 <늦음>안에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늦은 시간에 시작되었으므로, 그녀의 시 쓰기는 오히려 정당하다. 시인은 시쓰기 이외의 아무런 보상도 기다리지 않는다. 화려한 조명도, 빛나는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다만 자기의 갈망 안에서 홀로 빛날 뿐인 불모의 행위. 그 때문에, 이 늦은 시쓰기는 절대적으로 정당하다.
  시쓰기의 욕망은 왜, 늦은 시간에 시인을 찾아온 것일까? <나의 클라리넷은 그중 나중 우는 새(「겨울 날의 몽상」)> 왜? 이제야? 알 수 없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다른 종류의 분석들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그것이 시인을 찾아왔음을 기정의 사실로 인지하고 그녀를 따라 가기로 하자. 늦게 찾아온 시의 욕망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바늘바늘 밟히는 잎갈나무숲 된비알을 걸어보셨나요?
    이내 썩어질 것들이 이다지도 사람을 호리는 금빛인지요?
    떨어진 것들이 푹신함을 지나쳐 비틀거리게 하는 지요?
    나 잎갈나뭇잎 한 잎으로 그 비탈에 내리던 날
    나 백일을 마늘과 쑥을 참으면 곱다시 이 비탈에서 썩어
    봄 잎갈나뭇잎 백 잎으로 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날의 억새밭은 오를수록 높고 쓰라린 파도의 난바다였어요.
    바람 센 산머리엔 철사다리 걸쳐진 窓 좁은 조망대가 쓰러질 듯
    지키는 이 없이 섰고, 어디서 어디로 가던 길인지,
    찢어진 비닐 조각들이 조망대 기둥에 감겨
    드센 바람에 펄럭이며 저마다 소리치고 있었어요.
    저 비닐 조각들이 저 갈기몸으로 한사코 가겠다고 가리키는 곳 어디?
    아, 듣고 말았어요. 둘레의 산들을 누더기로 만들고 있는 잎갈나무떼!
    저 봄날의 빛 더듬어 홀홀히 겨울 언덕 오르려는 어느 눈물까지!
       ―「잎갈나무를 읽고」중에서


 시인은 잎갈나무는 이미 인기가 없는, 건축현장에서 찾지 않는 시대에 밀려난 건축자재라고 설명한다. 시인은 그 시대에 뒤진 나무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나 잎갈나뭇잎 한 잎으로 그 비탈에 내리던 날>). 그러나 이제 곧 사라져 갈 그것들은 시인의 마음에 가장 강력한 호소력을 행사한다. <이내 썩어질 것들>이 발하는 <사람을 호리는 금빛>에 반해서, 시인은 부서지는 것들을 다시 성찰하기 시작한다. 그 매혹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잎갈나무의 떨어진 잎은 조망대에 휘감긴 갈기갈기 찢긴 비닐의 몸 위에 겹쳐지고, 시인은 그것들을 조락을 거부하는 눈부신 힘으로 바꾸어 읽는다. 이미 늦었지만, 한사코 다시 시작하는 것들. 그러므로 부서짐은 끝이 아니다. <下品>은 <하품>인 자신의 형편을 그대로 밀어 붙인다. 환상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당당한 시작인가. 비로소 이제 부서진 몸으로 시작하기. 그것은 그대로 좋은 것이다.
 이향지의 시들은 그렇게 이미 늦은 시간에 시작하는 모든 것들을 건져 올린다. 다음의 시 안에는 그렇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늦은 시간 안에서, 환멸을 고스란히 껴안고, 한 몸뚱이 그대로 삶을 뚫고 나가는 시인의 태도가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잊혀진 땅에 꽃피운 작은 민들레
    곁에 나를 심어보리
    복선을 깔고 엎드린 철길 옆에서
    함께 황달 들어 비를 기다리리
    자갈밭 굳은 흙이 삽날을 부러뜨리리
    불을 기다리는 석탄조각들이 내 뿌리를 밀어내리
    기차가 비명과 함께 나를 주저앉히리
    홀씨가 익기 전에 나는 아마 죽으리

    밤이면 더 스산하리
    좁고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온 바람이
    슬레이트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쓸 만한 못들을 뽑고 있으리
    흉하게 구멍 뚫려
    문고리 쪽으로 어깨가 기운 문짝들이
    저마다 높은 음으로 덜컹거리리
    개들이 개들을 불러
    개 짖는 소리 개 뛰는 소리

    모종삽을 다오
          ― 「자미원 민들레」전문

 시인은 쉽게 <희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가능한 한 사실에 가까운 미래를 담담히 기술한다. 거의 그럴 것이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폐광촌의 철길 옆에서 핀 민들레는 피기도 전에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 어두운 미래를 환상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똑 바로 바라보는 시인은 그 <직시>의 힘으로 환멸을 뚫고 나올 힘을 얻는다. 그 힘은, 여느 젊은 시인들이었다면, <선언>의 형식으로 처리하기 십상이었으리라. 그러나 젊음을 지나온 우리의 시인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선언>으로 달성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백날 책상 앞에 붙어 앉아 붓글씨로 희망이라고 써서 바라보고 있어봐라. 어두움이 물러가더냐. 그래서 그녀는, 어두움을 꼬나보는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어두움을 향해서 힘차게 그러나 담담히 말하는 것이다.

        모종삽을 다오.
       ―「자미원 민들레」중에서

라고, 왜냐하면, 이제부터 <일>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일? 살아남은 자, 환멸을 거쳐, 그것을 껴안고 살아남은 자의 <일>.

    까뮈의 페스트에서도 남은 사람은 있었다
   육이오의 지뢰밭에서도 자란 사람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공룡의 시간을 넘어
   기차가 오고, 기차가 가고, 기이다란 몸으로 남았다
   때때로, 후진 기어에 합의하는, 달빛 미소로 남았다
   침묵의 침목을 건너서, 휘어지는 소리로 남았다
     ―「그리고, 우리는 남았다」전문

 그래서 시인은 땅을, 삶이라는 터전을 판다. 머릿속에서 아무리 황금을 계산해 본들 무얼 할 것이냐. 문제는 땅을 파는 것이다. 내 손으로. 그래서 잘못 짚은 맥이라면? 아무러면 어떤가, 정말로 아무러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황금도, 미래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목을 타게 하는 갈증의 생생함, 땅을 파는 나의 고초, 그 고초의 정당성 뿐이다. 시인은 그렇게 주어진 것의 터전 위에 막무가내로 버티고 선다. 그 버팀의 힘으로 그녀는 한 생을, 이미 희망의 달콤한 거짓에 넘어가기엔 이미 너무나 모든 것을 알아버린, 저무는 한 생을 팍팍하게 살아제낀다(오, 이런 표현을 용서하시라). 이런 당당함.

   버텨야 한다 못은
   버팀으로 이 몸을 건너야 한다

   매달리는 모두를 흔들림 없이 받아 걸고서
   뼈 하나로 풍화의 길에 섰을 수 있어야 한다

   희생, 굴종, 매몰, 화석의 시간에
   꽈앙! 꽈앙! 끝을 걸 수 있어야 한다

   발로는 벽을
   머리로는 허공을
   박차고 떨어질 줄도 알아야 한다

   오래 서있는 자가 언제나 낮게 누움을
   내가 보았다 말아야 한다
    ―「허리 굽은 못」전문

<허리 굽은 못>에 기탁하여 시인은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한 숨겨진 대단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겉보기에 좋은 시절 다 보낸 듯한, 낮아 보이는, 화려할 것 없어 보이는, 이미 <솔깃한 대목을 다 놓쳐버린 듯한 삶이 진득이 내면에 차근차근 쌓아두는 다락같은 자부심. <보았다 말아야 한다>며 사뭇 능청을 부리는 이 시인은 속으로 우물우물 할 일 다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오래, 빛나지 않는 얼굴로 오래 서 있는다. <말뚝에 묶인 채 / 앞만 보고 헤엄을 치다 사라진 소>. 그러니 이제 이 으뭉한 시인이 우물쭈물 <오래 견딤>의 끝에 보석 같은 結晶을 슬그머니 내민다 하여도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아무렴!

  캄캄한 地平에 깜박이는 불빛 향하여 늙고 눈 어둔 鹽夫처럼, 흐린 물 속에 모로 누운 水車의 테두리 밟는 날이면, 내 사유의 반지름 자유의 반지름 살과 죽음의 반지름. 내 水車 흙 털고 물 털고 일어서 마른 땅을 구르는 소리. 내 길어 올린 바다가 눈부신 꽃소금으로 익어 물의 목구멍 불의 목구멍에 솔솔 뿌려지는 모습.       ―「말뚝」중에서


이향지의 시에 여러 차례 나타나는 <나무새>는 바로 그렇게 쉬운 희망의 환상을 거부한 채, 내 힘으로, 내 몸뚱이 하나의 현존으로 삶을 뚫어내는 시인의 시적 태도를 표현하는 이미지이다.

      나는 기다림의 덩굴로 조롱을 짜지 않기로 했다
      내 손톱은 내 옹이에 가장 알맞은 조각도였다
      내 조각도는 내 피의 직감을 따라
      내 새의 날개에서 돌의 무늬를 지운다

      나무새를 날린다
      날개보다 다리가 더 튼튼한 횟빛 나무새
      적도를 넘어온 붉은 눈이 유리구슬에 불과할지라도
      서늘한 땅을 찾아가는 기러기의 대열에서
      내 새를 보고 싶다
        ―「나무새」중에서

내 손톱으로 이미 굳어 딱딱해진 <흙의 속성>을 해체시켜 버리리라. 그렇게 해서 내 삶 속의 숨겨진 날개를 해방시키리라. 그렇게 해서 <내 안의 바다 지국총지국총 길어 올리리라>. 그 내면의 바다의 가장 응축된 형태가 이향지의 시에서는 <소금>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녀의 시의 모든 결론은 <소금>을 향하여 모여든다. <소금>은 그녀의 시안에서 모든 긍정적인 의미를 뭉뚱그려 가지고 있는 최상의 이미지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이미지의 진정한 의미는 다음의 구절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바다로 곧장 떨어지는 빗방울은
        소금이 되지 못한다

        고기의 내장을 들락거리지 않은 물은
        거름이 되지 못한다
          ―「소금의 행로」중에서

즉, 삶의 신산함을 알지 못하는 자는 삶의 소금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소금>은 고통을 통과한 자만이 얻는 보물인 터. 오만하지 말 일이다. 그러니 이제 혓바닥 위에 소금을 살랑살랑 굴려 먹고 잇는 이 시인은, 예전의 맹하던 <똥님이> <시간이 약 먹이고, 약이라며 먹이고, 모르고 갔(던)>(「똥님이의 풀지게」) 그 시절의 똥님이가 아니다. 그때 똥님이가 세월이라는 <풀지게> 위에 엉거주춤 올라타고 있는 형국이었다면, 지금 똥님이는 제가 세월이라는 <풀지게를 (지고 있는)> 것이다. 아하, 그렇다면 아무리 적은 삶이면 어떤고. 내가 그것의 멱살을 딱 거머쥐고 있는 판에.
그래서 <보라>. 시인은 며느리 밥풀꽃, <보여도 보이지 않는>, 이 겸손하고 작은 꽃, <스스로 크기와 색깔을 줄여온> <긍지만 높은 작은 꽃의 밀실>에다 눈을 딱 붙이고 있는 것이다. 거기, 꿀이, 소금이, 보이는 자의 눈에만 보이는 비밀이 숨어 있다. <보라>. 보고 싶다면 말씀이지만.

시 「wren! wren! 또는 굴뚝새! 굴뚝새!」는 시인의 시적 여정을 W로 시작되는 열세 단계의 낱말놀이 과정으로 표현한다. 도무지 시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신선한 이미지들의 충돌을 눈여겨 보라.

(나는 물었어야 했다)   wrap wrinkles?  주름을 감출까요?
(나는 물었어야 했다)   wedding is a wall? 결혼은 벽인가요?
(나는 물었어야 했다)   wrest wings? 날개가 꺾어졌나?
(나는 물었어야 했다)   wry-way?  비틀거리는 길?
(나는 물었어야 했다)   women is wood?  여자는 나무인가?
(나는 물었어야 했다)   world is winter?  세계는 겨울인가?
(나는 물었어야 했다)   woe or wold?  비애 혹은 황무지?
(나는 물었어야 했다)   water wheel or watch? 물레방아 혹은 시계?
(나는 물었어야 했다)   word is window?  단어가 창일까?
(나는 물었어야 했다)   wriggle waist?  허리를 흔들까요?
      (내 아기들에게)   wee-wee! wonga-wonga! 쉬이쉬이! 응가응가!  
      (내 나날들에게)   warm war! waste water!  미지근한 전쟁! 폐수!
   (대답했어야 했다)   write and walk!  쓸 것 그리고 걸을 것!

wren! wren! 14인치의 밤하늘을 혼자 떠도는 wren! wren!
내 낱말들의 연기로 쿨럭거리며 내 쏘는 화살 비켜가며 깝죽거리며
날, 날, 날, 부르네. 굴뚝새! 굴뚝새! 날!날!날!

―「wren! wren! 또는 굴뚝새! 굴뚝새!」중에서
 
*위 인용시 중에서 고딕부분 은 해설자의 해설임.  
   
<아래아 한글 기동 배치 명령어 WW에 관한 열세 단계의 낱말놀이라는 부제가 달려있지만, 그 W는 Women의 W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W로 시작되는 모든 단어들은 시인의 여성으로서의 묶여있음(결혼, 벽, 여성, 나무)을, 나이의 굴레(주름, 물레방아, 시계)를, 무의미한 일상(비틀거리는 길, 비애, 황무지, 미지근한 전쟁, 폐수)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을(허리를 흔든다, 단어, 창) 암시하기 위해서 기묘하게 배치되어 있다. <아기>에게 하는 의성어 <쉬이>와 <응가>를 통해서 시인을 자신을 묶고 있는 미지근한 일상을 너무나 기분 좋게 배설해버린다. 그리고 결론 : 쓸 것. <쓴다는> 행위를 통해서 시인은 열 세 단계의 계단(무의식적으로 시인은 13이라는 숫자의 탈남성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을 뛰어넘어 <굴뚝새>로 상징되는 탈출을 감행한다. <굴뚝새>라는 단어 뒤에 찍힌 감탄부호는 시인의 심리적 절박성을 너무나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아마도 컴퓨터 화면의 커서일 듯 한 이 깜박이는 새는 <단어라는 창>을 통해서 일상에 매몰되어, 흔적조차 없어졌을 한 주부의 자아를 끄집어낸다. 그것은 그녀의 <날, 날, 날,>부른다. 그 소환에 시인이 급박한 심리적 절박감으로 대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시인이 <날>이라는 말 뒤에다 감탄부호를 붙이고, 그것도 띄어쓰기조차 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다닥다닥 붙여쓰고 있다는 웅변으로 증명된다. 그 급박한 <날!날!날!>은 다시 굴뚝새의 <날아오름>의 역동성으로 이어진다. 날아오르라, 자유로워진 나여!
사실상 이 시집은 장시 「그 바다」로 대단원을 이룬다. 아마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시인의 내면에서 발효했을 이 환상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전혀 장황한 시가 아니다. 연금술이나 신비주의 독트린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긴 시에 나타나있는 환상을 조금도 낯설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 시는 자아의 탐구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축으로 회전하는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잇는데, 시인이 그 주제를 대면하는 태도의 진지성으로 말미암아 일정한 상상적 통일성과 정연한 동사적 도식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해설에서 따로 다루기에 이 시는 너무나 길고, 그리고 시집의 전체 구조 안에서도 너무나 독립적인, 너무나 뜬금없어 보이는 특색을 가지고 잇다. 시인의 다음 행보를 지켜보며 훗날로 그 분석을 미룰까 한다.

약간의 불만을 덧붙인다면, 나는 이향지의 시들이 가끔 너무 모호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들과 시들을 건너갈 때에도 이따금 독자의 발목을 잡아채고, 어떤 때는 시 한 편 안에서마저 흔들리게 만든다. 뭘까? 이 모호함의 정체는? 그것은 타고난 열정과 진지함으로 이 시인이 어느 젊은 시인 못지 않은 젊음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따금 구투의 수사학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말하려고 하는 바의 새로움을 언어가 미처 따라잡지 못한다는 느낌, 그리고 필연성이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시적 효율성을 죽여버리는 쓸데없어 보이는 모호한 묘사가 너무 많다는 느낌. 그러나 어쨌든, 그녀의 진지한 시적 열정은 어느 젊은 시인 못지 않다. 문학적 세대란(우리나라에서 왕왕 그렇게 잘 못 여겨지듯이) 생년월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향지를 통해서 다시 한번 더 확인하게 된다. 단지 젊은 나이 때문에 <젊은> 그녀의 동료들보다도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더 젊은 시인이다.
          (1995년 세계사 刊)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